소적렬

蕭敵烈

생몰년도 미상

요나라의 장수. 자는 열로곤(涅魯袞).

소달렬의 4대손으로 식견, 도량이 원대하고 향리에서 추증되었으며, 처음에는 우군창사를 지냈고 요성종이 그가 현명하다는 소식을 듣고 불러들여 국구상온에 임명했다.

1009년에 고려에서 강조의 정변이 일어나면서 1010년에 다른 신하들이 그 죄를 묻기 위해 고려를 공격해야 한다고 하자 사신을 보내 죄를 물어 인정하지 않는다면 군사를 보내라고 진언했지만 요성종은 듣지 않고 그대로 고려를 공격했다.

1011년에 동지좌이리필사, 우이리필이 되었고 1012년에 병사를 거느려 서쪽 변방을 순찰했다가 이리근 부의 박리, 실실 등이 달아나자 이들을 추격해서 생포해 생업에 종사하게 했으며, 국구상온으로 옮겼다가 1014년에 야율세량과 함께 고려를 공격했고 1015년에 동정사문하평장사, 상경유수에 임명되었다.

성격이 관대하면서 행정에 통달했고 조정에서 왕좌지재로 평가될 만 했으며, 한인 왕계충이 소적렬을 추밀사로 추천했지만 당여라고 의심받아 임용되지 않았다. 중경유수를 지내다가 사망했다.

창작물에서

고려와의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으로 주로 한덕양의 의논 상대로 나오고 고려에서 송나라와 거란이 대치하는 상황을 이용해 황제국을 선포하려고 하는데, 소적렬은 고려에 사신으로 가서 이를 용납할 수 없다면서 선포를 거두라고 했다가 오히려 위협받는다.

소태후가 병환 중인 상태일 때 요성종이 어머니인 태후가 살아있을 때는 공격하지 않고 고려와의 전쟁을 준비하겠다고 말하는데, 소적렬은 소태후가 병환 중이라 요성종의 뜻을 꺾지 못할 것으로 여겨 한덕양을 찾아가 전쟁을 막지는 못한다면서 전쟁을 이길 방도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검을 무기로 사용하고 고려로 종군하면서 흥화진을 공격했지만 함락하지 못하자 통주로 남하하면서 야율무기와 함께 별동대가 돼서 귀주로 나아갔다가 통주로 남하하는 본 부대와 합류하기로 하는데, 귀주로 가는 길에 매복하고 있다가 귀주로 구원을 가는 지채문의 군사, 탁사정이 이끄는 군사를 공격해 고려군을 패배시켰다.

통주에서 강조가 이끄는 고려군과 한참동안 싸워 이겼지만 양규가 후방에서 공격해 거란의 보급을 차단하는 등 거란군이 퇴각해 돌아갈 상황이 되었으며, 거란군이 퇴각하던 와중에 양규가 이끄는 군사의 습격을 받자 맞서 싸우면서 김숙흥과 일기토를 벌이다가 김숙흥에게 죽는다.덤으로 싸우기 전에 침뱉고 덤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