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문서 : 이블린(리그 오브 레전드)
1 기본 배경
날렵하면서도 치명적인 이블린은 룬테라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암살자이며, 몸값도 엄청나다. 마음 먹은대로 그림자 속에 숨는 재주를 지닌 그녀는 참을성 있게 먹잇감을 추적하며 단번에 해치울 기회를 노린다. 이블린은 온전한 인간이라 보기 어렵고 어떤 피를 타고 났는지도 알 수 없다. 단 하나 분명한 것은 그림자 군도 출신이라는 점이지만, 그나마 고통으로 가득찬 이 땅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베일에 싸여 있다. |
2 그림자의 손짓
어딘가 모르게 음침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방 안. 나무 탁자 위로 흐르는 옻칠 특유의 검은색 윤기마저 스산한 기운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 방 한가운데 둔중한 팔꿈치를 탁자에 기댄 채 앉아있었던 이는 타케다였다. 으드득으드득 그가 손가락 관절을 움직일 때마다 짙은 색 가죽 장갑 너머로 오싹한 소리가 밀려왔다. 한때는 근육질 체구를 자랑했던 그였지만 조금씩 살이 붙기 시작하면서 예전의 단단했던 모습은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거대한 몸집만큼은 그대로 남아있어 여전히 존재만으로도 위협적인 인물이었다. 인간미라고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삭막한 눈빛. 그 위로 보이는 검은색 렌즈는 자신의 속내를 감추기 위한 보호벽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했다. 육중한 체구의 두 호위병이 타케다의 양옆을 지키고 서 있었다. 이들은 광기의 천재 화학자 신지드가 발명한 화학 무기로 몸 전체가 하나의 무기였다.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최고의 호위병인 셈이었다. 지하세계의 악명 높은 통치자, 사이토 타케다. 비천한 신분 출신의 그가 자운 최고의 화학무기 거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폭력성과 거칠 것 없는 야망 덕분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는 또 한 명의 라이벌이 자신의 눈앞에서 몰락하는 모습을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있었다. “오르토스, 들여보내.” 자욱한 담배 연기 속으로 그가 말했다. 덜커덕덜커덕 분명 쇠사슬끼리 부딪치는 소리였다. 그러나 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두꺼운 철문이 열렸다. 그러자 또 다른 두 명의 호위병이 문밖을 지키고 있었다. 쇠사슬에 철문, 그것도 모자라 안팎으로 네 명의 호위병이라니! 그러나 이를 두고 그 누구도 과한 처사라 나무랄 수는 없었다. 타케다의 몸에 난 수많은 상처 자국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었다. 타케다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오르토스는 문 밖으로 나가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 한 명을 출입구 쪽으로 안내했다. 그녀의 모습은 그림자에 가려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스치듯 마주한 단 한 번의 시선만으로 타케다는 그녀가 결코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푸른빛이 감도는 피부에 촛대에 비친 두 눈에서는 맹수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외모에서 풍겨오는 섬뜩함에 불안이 엄습해왔다. 좀처럼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자운에서 나를 대적할 자는 아무도 없다!’ “이블린 양입니다.” 오르토스가 그녀를 소개했다. 타케다는 장갑을 낀 채 손을 흔들었다. 인사의 표시였다. 오르토스는 뒤로 물러나 문밖으로 나갔다. 알 수 없는 표정의 이블린은 타케다 쪽으로 느긋하게 걸어왔다. 또각 또각. 그녀의 부츠 굽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이블린은 타케다의 책상 반대편에 멈추어 섰다. 그러고는 자신의 양손을 허리에 올려놓았다. 방 안 가장자리로 그림자가 걷히자 타케다는 이블린의 모습을 보다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빨간색 가죽 재킷을 걸친 몸매는 날씬하게 죽 뻗어있었고, 노란색 눈동자의 두 눈은 동그랗고 길게 찢어진 아몬드 모양이었다. 고양이를 연상케 하는 눈매였다. 진홍색 붉은 머리칼이 얼굴을 뒤덮고 있었고, 한 번씩 지어 보이는 씁쓸한 미소 너머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도드라져 보였다. “난 별명이 꽤 많은데. 굳이 이블린 양이라고 한 이유는? 뭐, 새롭긴 하군.” 타케다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앉아있었다. 아닌 척 했지만, 짐짓 그녀를 의식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여기서는 대부분 학살자로 부르긴 하지.” 이블린은 그제야 제대로 된 호칭을 썼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맞아. 최소한 사실이긴 하니까.” “나는 뭐, 결혼 같은 거 안 했지만... 바론 아르테가 홀트, 이 자는 결혼을 했고 부인도 있어. 거기에 수도 없이 정부까지 뒀더군. 이들 모두를 말끔하게 해결해줬으면 해.” 타케다가 말했다. “어머머 세상에. 대체 얼마나 멋진 사내이길래. 나도 한번 만나보고 싶은걸? 그자가 떠나면 통곡할 여인네가 한둘이 아니겠는데!” 이블린은 과장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 정식으로 주문하기 전에 몇 가지 확실히 해 둘 게 있어. 우선, 이블린 당신이 이 일에 꼭 맞는 사람이라는 것을 내가 어떻게 믿지?” 타케다가 물었다. “내가 직접 증명해 보여야 한다 이 말이야? 무슨 뒷골목 깡패도 아니고, 나 원 참. 내가 자운 바닥에서 굴러먹은 세월이 얼만데. 지금 나보고 오디션이라도 보라는 거야 뭐야!” 이블린의 목소리에는 한껏 짜증이 베어 있었다. “진정해. 진정해. 물론 이블린 당신의 전적은 익히 잘 알고 있지. 작년에 데마시아 기사단 단장을 처리한 것도 아마 너였지?” “맞아.” 이블린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필트오버에서 코자리 결사단 후계자를 죽인 것도?” 순간 이블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니, 그건 내가 한 거 아니야. 그레이 레이디의 작품이었지.” “아. 재미있군. 역시 소문 따위는 믿을 게 못 된다니까. 이래서 난, 내 두 눈으로 직접 본 것만 믿는단 말이지.” 타케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실망했다면 참으로 미안하게 됐는데, 타케다?” 이블린이 조롱하듯 말을 건넸다. 푸른 살갗의 암살자 이블린은 한 발 뒤로 물러서더니 이내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일순간 얼어붙은 타케다의 호위병들은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타케다 역시 조심스레 좌우를 살피며 그녀의 모습을 포착해내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어둠이 삼켜버린 듯, 그녀는 홀연히 사라지고 없었다. “나쁘지 않은데.” 타케다가 말했다. 그 역시 이블린의 막강한 힘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때로 그러한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지만 이블린의 경우는 달랐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것을 확인한 타케다는 매우 흡족해 했다. 타케다의 등 뒤로 기다란 손톱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타케다를 위협했다. 그림자 속으로사라졌던 이블린이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다. 그녀가 타케다의 머리통을 붙잡고 치켜세우자 굵은 목이 드러났다. 그녀는 흡사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처럼 보였다. 이블린의 송곳니가 타케다의 목덜미를 향하고 있었다. 순간 타케다의 호위병들이 이블린을 막아서기 위해 뛰어들었다. 하지만 타케다는 손을 들어 그들을 저지했다. 그저 겁을 주기 위한 제스처임을 타케다는 알고 있었다. “자, 어때? 이래도 뭔가 더 보여주길 원해?” 날카로운 송곳니 사이로 거친 숨을 몰아 쉬며 그녀가 물었다. 그녀의 차가운 입김이 그의 목을 조이는 듯했다. 타케다는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전혀.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어. 전적으로 믿어, 이블린. 자, 이제 그럼 내 제안에 대해 구체적으로 얘기해 볼까?” “좋아. 그만한 대가도 충분히 준비됐으리라 믿어. “그런데 나를 여기서 시간 낭비하게 한 건 큰 실수야.” 타케다는 끌어 오르는 감정을 겨우 억누르며 말했다. “그래, 미안해. 내 실수야.” 이블린을 그를 놓아주며 떠밀었다. 그러고는 탁자 가장자리에 앉았다. 마치 고양이처럼 온몸을 축 늘어뜨린 채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비용 문제는 얘기 안 한 것 같은데?” 이블린이 물었다. “얼마가 됐든, 원하는 대로 지불하지.” 타케다가 대답했다. “타케다, 난 돈 따위에 관심 없어.” 조금은 격앙된 목소리로 이블린이 답했다. 그러자 타케다는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럼 네가 원하는 게 뭔데?” “글쎄, 뭐가 됐든 네가 생각하는 훨씬 이상일 것 같은데. 아, 근데 똑똑한 타케다는 지금쯤 알아차렸을 것 같기도 하고.” “이런 식은 곤란해!” 타케다가 노발대발하며 소리쳤다. “여긴 내 구역이야. 그 누구도 내게 요구 따위 할 수 없다고!” “타케다, 네가 본 건 내 능력의 극히 일부에 불과해. 그 정도 요구할 권리는 내게도 충분히 있다고. 알겠니?” 등을 뒤로 젖힌 채 알 수 없는 냉소를 지어 보이며 이블린이 대답했다. 타케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뭔가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자 이블린은 쉿, 하고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저지했다. “어떤 말도 그렇게 성급하게 해서는 안 되지, 타케다. 입 벙긋 하기도 전에 너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될걸?” 완전히 얼어붙은 표정으로 타케다가 그녀를 응시했다. 얼마 간의 정적이 흐른 후 이블린이 대답했다. “아주 현명한 선택이야.” 이렇게 말하고는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네가 부탁한 아르테가 홀트는 동이 트기 전에 처리해주지. 곧 다시 만나 첫 번째 대가에 대해 얘기해보도록 하자.” “첫 번째 대가?” 타케다가 놀란 듯 물었다. “맞아. 내가 원하는 수많은 대가 중에 가장 첫 번째. 못 알아 들어?” 걸음을 잠시 멈추고 그녀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어둠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공격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명심해. 그런 의미에서 자운은 최적의 장소지.” 그녀는 눈썹을 치켜뜨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문 쪽으로 걸어갔다. 타케다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다는 듯 소리를 내질렀다. 문이 열리자 그녀는 타케다에게 윙크를 날렸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또다시 어둠 속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네가 내 화를 돋우지만 않는다면 이 관계는 우리 둘 모두에게 이득이 될 거야.” 타케다는 말없이 홀로 앉아 있었다. 얼마 뒤 그의 오른팔 오르토스가 방 안을 빼꼼히 들여다보았다. “뭐 필요한 거 없으십니까?” 오르토스가 물었다. “없어.” 타케다가 이를 꽉 문 채 대답했다. 그러고는 책상 위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지금부터 나한테 말 거는 사람은 누구든지 가만 안 둔다! 나 그냥 내버려둬. 말 걸지 말라고! 그리고 난로에 불 좀 더 때. 이 많은 그림자들 좀 없애버리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