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개요
?∼1656. 조선 중기의 도공. 일본명 가네가에 산페이(金江三兵衛). 일본 아리타(有田)·이마리(伊萬里) 도자기의 모태를 만든 장인.
2 생애
2.1 순왜활동과 도일
임진왜란 때 조선인 포로로 일본에 끌려온다. 금강가문서에 의하면 그가 정유재란 당시 길을 잃고 방황하는 히젠 국(肥前国) 사가 번(佐賀藩)의 번주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1536~1618)의 군대에 길을 안내한 공로로 일본에 건너오게 되었다고 하며, 이삼평 비문에서도 '공(이삼평)은 우리 군에 매우 적극적으로 협력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물론 후대에 그를 칭송하는 일본인 입장에서 쓴 기록이라 100퍼센트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일정 부분 순왜활동을 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2.2 고령토 발견과 아리타 자기 생산
일본에 이삼평을 데리고 간 나베시마는 그를 그의 가신인 타쿠(多口)의 영주 타쿠 야스노리에게 맡긴다. 이삼평은 처음에 무사의 역할을 받아 야스노리의 이야기 상대역을 맡는 등 소홀치 않은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곧 도공 18명과 함께 아리타(有田)로 옮겨지게 되는데, 아마도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고, 원래 도공의 신분인지라 일본 무사의 신분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리타에 거주지를 옮긴 그는 나베시마의 영지를 전전하며 도자기의 원료인 양질의 고령토를 찾아헤맨다. 기존의 흙을 이용해 도자기를 빚어 꽤 만족할 만한 그릇을 얻었으나, 이삼평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양질의 고령토를 찾겠다고 청하여 야스노리는 이를 허락하고 마음대로 실험을 하도록 했다.
몇 년을 찾아다닌 끝에 아리타 조하쿠천(上白川)의 아스미산(泉山)에서 순백색의 자기를 구워내는 백토를 발견하였고, 1605년경 이곳에 ‘덴구다니요(天狗谷窯)’를 열었는데 이것이 일본자기의 시초가 된다.
이삼평이 백자광산을 발견하고 자기를 구워내자 도공들은 이곳에 모여들기 시작하여 아리타는 명실공히 일본에서도 유명한 도자기 마을이 되었다. 나베시마 역시 이를 크게 치하하였으며, 타쿠 야스노리도 자신의 하녀를 결혼시켜 부부의 연을 맺어주었다. 그 이후 이삼평은 '가네가에'(金江)로 창씨개명하여 일본인으로 아리타에 정착하여 산다.
이후 나베시마번의 적극적인 후원이 더해지면서 아리타 지역은 일본의 대표적인 도자기 생산지가 되었다. 나베시마번에서 생산되는 자기는 청화백자와 오채자기가 주를 이루었고, 크기가 규격화ㆍ표준화되고 색상이 다채롭고 호화로운 편이며, 공예품적인 디자인 특성을 지녔다. 대량 생산과 판매를 위한 산업 생산품으로서의 성격이 컸던 것이다. 조선 자기장들의 앞선 기술을 바탕으로 명나라 도자 양식을 수용하고 거기에 일본의 전통 회화나 공예의 색상과 문양 등을 적용시킴으로써 하나의 새로운 브랜드를 창출했다고 볼 수 있다.
2.3 아리타 자기의 세계 수출과 명성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1650년 1백45개의 일본 자기를 구입했다. 일본 최초의 자기 수출이었다. 이후 1659년에는 5만6천7백 개의 아리타 자기를 주문했다. 유럽에 대량 수출된 아리타 자기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일본 자기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아리타 자기는 18세기 유럽에 불어닥친 동양 취미 붐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1]아리타 자기를 이마리(伊萬里) 자기라고도 하는데, 아리타에서 가까운 이마리 항구로 옮겨 출하했기 때문이다. 첫 수출 뒤 70년 동안 약 700만개의 아리타 자기가 세계 각지로 팔려나갔고, 지금도 유럽의 많은 궁전에는 당시 사들인 아리타 자기가 소장되어 있다. 아리타에서는 현재까지도 수천톤의 흙을 퍼내어 도자기를 생산하고 있으며 명품 도자기를 만들어내는 세계적 도자기 도시로 자리매김했다.
2.4 만년
이삼평은 이 공로로 자손대대로 번으로부터 급여를 받았으며, 이시바(石場)의 쇼야(庄屋; 지역의 관리자)가 되었다. 또 백자광산의 채굴권도 부여받았고, 그의 밑에는 150여명의 조선도공이 딸려 있었다. 대규모 도공을 관리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생활의 터전을 마련한 이삼평은 1653년 가미시라와의 저택에서 향년 75세의 일기로 생애를 마친다.
3 신이 되다
1656년 아리타 주민들은 니리무라(二里村)의 오자토(大里)에 있는 하치만궁의 신체를 받아서 오타루(大樽) 언덕에 아리타산소뵤하치만궁(有田山宗廟八幡宮)을 건립할 때 이삼평과 나오시게를 합사하여 모셨다. 이 신사는 1828년 대화재로 인해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메이지기에 접어들어 도산신사(陶山神社)로 이름을 고치고 현재의 위치로 옮긴다.
1917년에는 아리타 시내가 보이는 렌게이시산(蓮花石山) 정상에 '도조 이참평비'를 세운다. 조선인의 기념을 일본 신을 모신 신사 위에 세운다는 것에 대해 반발이 있었으나, 구 나베시마의 후예들이 송덕회를 조직하고, 명예총재로 거물급 정치인 오쿠마 시게노부를 추대하자 일사천리로 건립이 진행되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아리타주민들은 이참평이 백토를 발견한 곳에 이삼평발견지자광지(李參平發見之磁鑛地)라는 대형 기념비를 세웠고, 또 이시바 신사(石場神社)의 경내에 이삼평상을 만들어 모셨다. 그리고 이삼평의 무덤을 찾다가 찾지 못해 히에코바(裨古場)의 보은사 묘지에다 그의 가묘를 세우기도 했다.[2] 이처럼 이삼평은 죽어서 몇백년이 지나도록 아리타 지역의 수호신으로 받들어 모셔지고 있는 것이다.
4 기타
4.1 그의 이름에 대해서
그가 조선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의 성씨가 이(李)씨였다는 것만 '다구가문서'에 남아있으며, 그의 이름도 확실히 기록에 남아있는 것이 없다. 그의 조선 이름이라고 알려진 '이삼평'(李參平)은 일본 이름 '산베이'를 한국식 한자발음으로 복원하여 추정한 것이다. 메이지 시기의 연구자들에 의해 사용되기 시작한 표현으로, 1917년에 도조 이삼평비(陶祖 李參平碑)가 세워지면서 그의 이름이 어느덧 이삼평 또는 이참평으로 통용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