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운(북한이탈주민)

1 개요

현재는 대한민국에 정착해 살고 있는 북한이탈주민. 1996년 탈북하였고, 최초로 탈북 과정이 방송사를 통해 전 과정 취재된 것으로 화제를 모았다.

2 탈북 동기와 과정

이용운씨는 6.25 전쟁 당시 가족들과 헤어져 혼자 북한에 남게 되었고, 월남한 가족들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정착하게 된다. 미국의 가족들은 이용운씨의 행방을 수십 년간 수소문하였고, 결국 이용운씨가 북한에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족들은 가족방문[1]을 통하여 이용운씨를 만나려 하였으나 모종의 사유로 인하여 예정된 상봉이 직전에 취소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에도 미국의 가족들은 지속적으로 달러를 보내 주었고, 이 달러로 이용운씨의 가족들은 북한 내에서는 상대적으로 어려움 없이 생활을 꾸려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북한 정부에서 보내준 달러를 상당 부분 떼먹는(...) 데다가 고난의 행군 이후 북한 가족들의 삶은 점점 더 어려워져 갔다.

그런데 소설가인 이용운씨의 조카인 이혜리씨가 이용운씨의 어머니인 자신의 할머니에게 이용운씨와 관련된 이야기를 듣게 되고, 이 내용을 바탕으로 자전적 소설 <할머니가 있는 풍경>을 집필하여 출판하게 되었다. 이혜리씨는 이 소설을 UN의 북한 대표부에게 보내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할머니와 큰아버지를 만나게 해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오히려 북한 정부는 이용운씨를 더 탄압하였다.[2]

큰아들을 만나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던 할머니를 위하여 이혜리씨와 그녀의 아버지는 중국으로 향한다. 이용운씨와 가족들이 거주하던 혜산시가 중국 바로 옆에 있고, 압록강의 폭이 좁다는 점을 확인한 그들은 아버지의 친구가 근무하던 SBS에 '조선족 브로커를 소개시켜 주는 대신 탈북 전 과정을 밀착 취재하는' 조건으로 거래를 제안하고, SBS는 이를 받아들인다.

이용운씨의 가족들은 처음에 탈북을 망설였으나 이혜리씨의 단행본 안에 이용운씨가 젊은 시절 김일성 반대 시위를 한 사실이 쓰여 있는데다 사진까지 찍혀 있는 것을 보고 북한 정부의 탄압을 피해 탈북을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온 가족이 처음부터 의견이 일치한 것은 아니었는데, 탈북에 적극적이었던 이용운씨와 장녀, 장남과는 달리 이용운씨의 부인과 차남은 탈북을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일가족 중 이용운씨 포함 4명만이 먼저 탈북하였으나 이후 가족들의 지속적인 설득으로 모든 가족들이 탈북하여 무사히 한국에 입국하였다.

SBS는 이 탈북 과정을 최초로 밀착 취재하였으며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이용운씨는 무사히 남한으로 입국하여 덕수궁에서 기자회견을 가지고 47년만에 어머니와 재회하였다. 이 다큐멘터리 방영 이후 북한 국경 경비대가 물갈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경비대가 뇌물을 받아먹는 장면이 너무 생생하게 찍혔기 때문이란다. 지금도 그런데 뭐 역시 막장 of 막장이다

3 탈북 이후와 그 영향

BBC 등 외국 언론까지 주목했을 정도로 엄청난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으나 그렇다고 이용운씨 가족들이 돈방석에 앉았다거나 원활히 적응했던 것은 아니다. 정부가 제공한 임대 아파트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가족들은 이용운씨는 경비원으로, 장녀 이애란씨는 호텔 청소부로 처음 남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으며 모든 가족들이 적응에 상당 부문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차남 이문철씨의 경우는 탈북 이후 3년간 체제에 대한 혼란으로 방황하였다고 다큐멘터리에서 고백한 바 있다.

그러나 지속적인 노력 끝에 10여년 후에는 그래도 남한 사회에 각각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애란 씨는 보험업에 뛰어들어 연봉 1억을 받는 '보험왕'이 되었으며, 자신의 전공을 살려 이화여대 식품영양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탈북자 1호 박사'가 되었다. 이러한 인생역전이 신문 특집 기사로 소개되었을 정도이다. 아들들 역시 정규직으로 취직하였으며, 북한에서 고등중학교 수학 교사였던 큰며느리 천정숙씨는 북한의 교원 자격증이 인정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지만 대안학교에 교사로 취직하였다. 이문철씨와 차녀 이미란씨는 한국에서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

이들이 탈북 루트로 사용하였던 중국-제3국-남한 루트는 이후 다른 탈북자들의 탈출 루트로 널리 사용되었다. 이전까지는 DMZ를 넘어오거나 배를 타고 넘어오거나 아니면 전투기(..)를 몰고 넘어오는, 일반 주민들은 실행하기 힘든 탈북 루트만이 이용되었었다. 이들의 탈북 루트는 대사관 진입과 함께 유이한 탈북 루트가 되었고, 현재 중국 정부 때문에 대사관 진입이 어려워진 상황에서는 유일한 탈북 루트가 되었다. 어찌 보면 탈북의 선구자인 셈.

또한 이들은 남한 사회에 잘 적응한 탈북자라는 점에서도 그 의의가 있다. 물론 미국의 가족들이 있었으니 다른 탈북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응이 용이했던 것은 분명 맞다. 하지만 도움에도 불구하고 적응하지 못하는 탈북자들도 많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탈북자에게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음은 분명하다.

언론에서 유명세를 탄 다른 탈북자들과 달리 북에 남은 주변 가족들의 피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러나 후에 이애란 박사[3]는 탈북자 북송 반대 시위 중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외삼촌이 70의 고령에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고 언급했다.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본 듯 하다(...)
  1. 1990년도 고난의 행군이 본격화되기 전까지, 한국 국민이 아닌 미국 시민권자의 경우에는 북한 정부에서 상당 금액의 달러를 받고 비공식적으로 가족방문을 통해 이산가족 상봉을 주선하는 경우가 있었다.
  2. 이용운씨는 원래 평양에서 거주하다가 양강도 혜산시로 추방되었다. 북한은 1967~1970년에 주민들의 신분조사를 하였는데 이용운씨의 경우 부모가 월남가족 + 지주계급 + 교회신자 였기에 적대계급으로 분류되어 추방당하였다. 참고로 북한은 이용운씨의 장녀 이애란씨를 11번째 탈북자 협박대상자로 지목하면서 평양등에 수만평의 땅을 보유한 집안이라고 하였다.
  3. 박사학위를 받았기 때문에 언론에서 이렇게 칭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