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카르티에

Jacques Cartier
1491년 12월 31일 ~ 1557년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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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탐험가퀘벡을 '발견'하고 무역소를 세우는데 공언하였고 북아메리카에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장하여 새로운 프랑스의 아버지라 불렸다.

1491년 생 말로(Saint-Malo)에서 태어나 살았으며 1534년 5월 10일에 프랑수아 1세의 명을 받고 2척의 배로 60명의 선원을 태우고 항해를 시작하였으며 10월 10일에 뉴펀들랜드의 일부를 탐험하였다.

또한 벨하일해협을 항해하여 마그달렌, 프린스에드워드 섬을 발견하고 세인트로렌스 강을 발견하였으며 세인트로렌스 만의 원주민인 미크맥족과 조우했을 때 그들과 거래가 이루어졌다.

그들의 땅을 캐나다라 명명하고 프랑스의 땅이라 선언하였는데 미크맥족과 또다시 조우했을 때 그들이 카누로 자신들을 포위하자 이들이 평화의 표시를 나타냈음에도 부하를 시켜 그들에게 경고 사격을 하여 물러나게 하였다.

7월 24일에 베이 데 가스페에서 세인트로렌스의 이로쿼이족과 조우하여 그들의 마을을 프랑스 땅이라 선언하였으며 거래를 하기 위해 스타다코나의 이로쿼이족의 추장인 도나코나의 두 아들을 납치하여 9월에 프랑스로 돌아갔다.

1535년 5월 19일에 3척의 배로 110명의 선원과 도나코나의 두 아들을 데리고 항해를 시작하여 세인트로렌스 강에 상륙하여 이로쿼이족과 거래를 하였으며 상류를 따라 항해를 계속하여 1535년 10월 2일에 호셰라가(지금의 몬트리올)에 도착하여 이로쿼이족과 조우하였다.

10월 11일에 스타다코나로 돌아갔으며 겨울 동안 그들과 생활하였을 때 많은 선원들이 괴혈병에 걸려 죽었는데 도나코나의 아들인 도마가야가 아네다라는 나무의 껍질로 추출물을 만들어내는 법을 알려주어 이를 마시는 것으로 괴혈병을 치료하였으며 살아남은 85명의 선원을 이끌고 1536년 5월에 프랑스로 출발하여 7월 15일에 생 말로에 도착하였다.

1540년 10월 17일에 프랑수아 1세의 명을 받아 이들을 식민지로 삼기 위해 캐나다로 갔는데 이 때는 장 프랑수아 데 라 로크 데 로베르발이라는 사람이 탐험대를 이끌며 참가했다고 한다.

1541년 5월 23일에 먼저 항해하라는 로베르발의 명에 따라 5척의 배를 이끌고 황금이 많이 있다고 전해지는 사기네이 왕국을 찾고 세인트로렌스 강 어귀에 정착지를 건설하려고 했다.

그러나 8월 23일에 스타다코나의 이로쿼이족을 만났지만 그 곳에 정착지를 건설하지 않았으며 샤를부르(지금의 퀘벡의 캡 루즈)에 정착하여 그 곳에 요새를 세워 샤를부르라 명명했다.

그 곳에서 다이아몬드와 금을 파내어 9월 2일에 배 2척을 프랑스에 보냈으며 9월 7일에 사기네이 왕국을 찾기 위해 정찰을 떠나며 호셰라가에 도착했을 때 좋지 않은 날씨와 파도로 샤를부르로 돌아간다.

하지만 거래를 하던 이로쿼이족이 거래를 거부하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며 정착지가 그들의 공격을 받자 정착지를 지키거나 사기네이 왕국을 찾아낼 탐험대가 부족하다고 여기면서 또한 금, 다이아몬드를 싣고 있다고 확신하며 1542년 6월에 돌아가 10월에 프랑스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가 가져온 금, 다이아몬드는 석영, 황철광이었으며 이후 은퇴하여 생 말로에서 포르투갈어를 통역하다가 1557년 9월 1일에 전염병으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대항해시대3에서 라이벌중 하나로 등장. 한글판에선 "잭 칼티에"라고 나온다. 1534년 버팔로, 1535년 인디언, 무스를 발견하는데, 버펄로, 인디언, 무스의 발견난이도는 낮은 편이고, 그렇다고 시기적으로 제한이 걸리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존재감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