퀘벡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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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의 주

(Province)
동부
중부
온타리오 (ON) · 퀘벡 (QC)
대서양
뉴브런즈윅 (NB) · 노바스코샤 (NS)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PE) · 뉴펀들랜드 래브라도 (NL)
서부
대평원
앨버타 (AB) · 서스캐처원 (SK) · 매니토바 (MB)
태평양
브리티시 컬럼비아 (BC)
준주
(Territory)
북부
유콘 (YT) · 노스웨스트 (NT) · 누나부트 (NU)


Québec[1]

몬트리올 노트르담 성당에 나부끼는 몬트리올 시기(市旗), 캐나다 연방의 단풍기, 그리고 퀘벡의 백합기. 지금은 연방의 상징인 단풍 문양은 과거에는 퀘벡 및 프랑스어캐나다의 상징이었으나 그러한 기의는 완전히 역전되어 대신 백합의 문양이 퀘벡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관공서, 상점, 주택, 자동차 등 퀘벡 도처에서 단풍기와 백합기가 쌍으로 휘날리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광경. 마치 퀘벡인의 복잡한 정체성 문제를 그대로 드러내는 듯하다.
주기125px-Flag_of_Quebec.svg.png
주도퀘벡 시
면적1,542,056km²
인구7,903,001명(2011)
공용어프랑스어
1인당 GDPC$37,278(2009)

1 개요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캐나다 동부에 있는 . 캐나다에서 제일 넓은[2] 이며, 캐나다에서 두번째로 인구가 많은 주이다. 생 로랑스 강 하류에 대부분의 인구가 밀집해 있으며 북쪽으로 올라가면 차로도 없고 이로쿼이들이나 크리 족들이 조금 살고 있고, 최북단 지역엔 이누이트가 거주한다. 사실 이렇게 원주민 사는 동네가 퀘벡 면적의 대부분을 차지하긴 한다.

표어는 "Je me souviens(나는 기억하노라)."

주요 도시로는 주도인 퀘벡 시과 상업의 중심지인 몬트리올이 있다. 캐나다의 다른 주들과 마찬가지로 상업과 행정의 중심지가 나뉘어져 있다. 주도인 퀘벡 시는 구도시와 신도시로 나뉘어져 있는데 구도시는 옛날 그대로 보존이 잘 되어 있어 관광지로 명성이 높다. 생로랑스 강가에 세워진데다가 옛날의 요새, 성, 건물들이 완벽히 보존되어 있어 아주 낭만적이다. 참고로 퀘벡 시는 유럽인들이 북아메리카 대륙에 세운 유일한 성곽도시이다. 몬트리올은 예전에는 캐나다 제일의 상업도시였으나 분리운동의 위기 때문인지 자본들이 토론토로 빠지면서 요즘은 많이 위축되었다.

2 언어

프랑스어가 유일한 공용어이다. 몬트리올 같은 도시에서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많아 큰 불편은 없지만 도시 외곽으로 나가면 모든 간판은 프랑스어로만 되어 있고 영어 한 마디도 못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당장 도로에서 북쪽이 어디인지도 모르게 된다.[3]

퀘벡처럼 언어민족의 구분점으로서 확연하게 작용하고 있는 곳도 드물 것이다. 흔히 퀘벡 출신 사람을 프랑스계 캐나다인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그것은 혈통적 구분이라기보다는 언어적 구분, 즉 프랑스어권 캐나다인이라고 받아들이면 된다. 퀘벡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다 프랑스계 조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고 여느 이민사회가 그렇듯이 아일랜드계, 이탈리아계도 섞여있기 때문에, 혈통보다는 프랑스어가 모어인지가 퀘벡인을 결정짓는다. 즉 퀘벡인은 퀘벡에 살며 프랑스어를 쓰는 사람이다. 퀘벡에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당신은 어디 사람입니까?'하고 물어본다면 프랑스어 화자의 백 명 중 99명은 스스로를 캐나다인이 아닌 Québécois(e)라고 답할 것이다. 반면에 영어 화자에게 묻는다면 거의 모두 캐나다인이라고 답할 것이다. 성(姓)이 딱 봐도 프랑스계인 사람이라도 다른 주에서 영어를 쓰며 살고 있는 경우에도 스스로를 캐나다인이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유의할 점은 프랑스계 캐나다인이 퀘벡에만 살고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주에도 소수나마 살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영어/프랑스어 양쪽이 공용인 뉴브런즈윅 주에 살고있는 아카디앵(Acadien)들이 있으며, 이들은 스스로를 퀘벡인들과 완전히 남남이라고 인식한다. 온타리오에도 스스로를 프랑코옹타리앵(Franco-Ontarien)이라 칭하는 소수의 프랑스계가 있으며, 한국에도 《내 생애의 아이들》 등의 작품이 번역된 퀘벡 소설의 대모 가브리엘 루아(Gabrielle Roy)도 매니토바 주 위니페그의 프랑스어권 동네 생보니파스(Saint-Boniface) 출신이다. 아카디엥들과 프랑코옹타리엥들은 각각의 프랑스어 억양이 또 퀘벡불어와는 다르다.

영어권 캐나다인이 영국인이 아니듯 퀘벡인들 역시 프랑스어를 쓴다고 해서 프랑스인이 아니다. 오히려 아주 오래 전부터 프랑스 본토로부터 방치된 이후[4] 이들은 스스로를 프랑스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Canadien(ne)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5] 이들에게 프랑스는 그냥 같은 말을 쓰는 나라 정도(물론 그 한가지만으로도 받는 문화적 영향이 상당하기는 하다). 한국에서는 퀘벡을 보고 흔히 작은 프랑스정작 퀘벡이 프랑스보다 더 크다, 북미의 프랑스 같은 표현을 쓰는데 프랑스와의 유대감은 크지 않다.

대영제국의 일원으로 1917년 제1차 세계대전 참전에 관심이 없는 퀘벡인들에게 최후의 수단으로 보수당 정부는 프랑스를 도웁시다.라는 캠페인까지 벌였는데 반응은,

우리가 왜 남인 프랑스를 도와야 하나요?

완전 역효과. 항쟁까지 벌어졌다. 보수당 정부는 강제징병까지 실행했으나 전쟁이 1년 뒤에 끝나자 흐지부지 마무리가 되어 더 큰 사건으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이 사건 이후 향후 70년간 연방투표[6] 에서는 1958년을 제외하면 모두 자유당이 승리하게 된다. 다만 주 내에서는 보수당 출신의 모리스 뒤플레시가 새로운 보수정당인 국가연합당을 창당, 연방 보수당과의 관계를 단절 후 정권을 오랫동안 유지해 퀘벡의 암흑기(Grande Noirceur)를 이끌게 된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사정이 좀 달라졌다. 이때는 갑툭튀 인간말종을 무찌르기 위해 퀘벡인들이 상당히 협조적으로 나왔던 것.

2.1 퀘벡 프랑스어

퀘벡 프랑스어 항목 참조

3 역사

3.1 프랑스인 이주 이전

원래는 타 지역이 그렇듯이 소수의 원주민들이 살던곳으로 1534년 프랑스의 탐험가 자크 카르티에가 이 지역을 발견하여 이 일대를 프랑스 왕령으로 선언하였다. 1604년 사뮈엘 드 샹플랭(Samuel de Champlain)이 펀디 만 일대를 탐험하고 원주민과 모피를 교환하였으며 이를 통해 겨울나는 법을 배운 샹플랭 일행은 그 일대에 일시적으로 정착을 하였다. 하지만 남쪽의 영국인들의 북상에 위협을 느낀 샹플랭은 원주민들의 도움으로 세인트로렌스강을 거슬러 올라가 1608년 모피 교역소를 새웠는데 이 교역소가 퀘벡 시의 시초가 된다.

3.2 누벨 프랑스

이후 이 일대는 식민지화 진행되어서 리슐리외에 의하여 일백조합인상사(Compagnie des Cent-Associés)가 설립되어 식민지 교역을 독점하였고 지속적으로 원주민과의 모피교역을 확장해 나갔다. 몬트리올도이런 확장을 통해서 1642년 건설된 도시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적은 인구로 인하여 식민지 운영이 쉽지 않았고, 의도적으로 본국에서는 '왕의 여자들'이라는 여자들을 보내기도 하였다.[7]

1660년 당시, 프랑스 정착민들의 인구는 겨우 2500명이었다. 17세기에서 18세기 중반까지 프랑스 정착민들이 상당수 왔지만, 죽거나 프랑스로 되돌아가는 수도 많았다. 오늘날 캐나다와 미국에 거주하는 프랑스계 1천만 명은 초기 정착민 2,600명의 후손들이라고 하며, 이들은 유전적 다양성이 적어 관련 의학 연구에 유용하다고 한다.

하지만 1714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 맺어진 위트레흐트 조약에서 아카디아지역이 영국에 할양되었다. 1756년 일어난 프랑스-인디언 전쟁은 퀘벡 역사에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오하이오 지역에서 영국군과 충돌한 프랑스군은 몽칼름 후작의 지휘하에 주요 전투에서 승리를 하며 영국군을 봉쇄했는데 1758년에 이르러 영국의 피트는 이러한 상황을 더이상 좌시하지 않고 제임스 울프 장군과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역공을 개시한다. 이러한 역공으로 인해 프랑스군은 퀘벡 시 일대까지 물러났다. 1759년 9월 퀘벡 근교의 아브라함 평원에서 양측 군대가 회전을 벌였는데, 이 전투에서 몽칼름 후작과 울프 장군 모두 전사를 하는 격전끝에 영국군이 승리하였고 완전히 포위를 당한 퀘벡시는 결국 영국군에게 항복한다.

그렇지만 아직 몬트리올의 프랑스 군과 총독은 항복을 하지않았고, 이들은 본국에서의 지원을 기달리며 퀘벡을 탈환하려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퇴각했다. 하지만 이미 이 시점에서 본국에서의 수송선은 영국 해군과의 해전에서 패퇴한 시점이였으며 결국 1759년 영국군에게 항복할수 밖게 없게된다. 그리고 7년 전쟁의 종결과 함께 맺어진 파리 조약에 따라서 퀘벡은 영국에게 할양되었다.

말하자면 신세계를 정복하려고 왔다가 자신들이 정복당한 상황. '정복당한 정복자'로서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3.3 영국령 캐나다

하지만, 전쟁의 와중에 충성심에 의문을 품고 강제로 축출시킨 아카디아의 프랑스 인들을 제외하면 파리 조약 이후 퀘벡지역 프랑스인들은 그럭저럭 영국으로 부터 자신들의 권리를 인정받고 여전히 그들의 언어와 종교 그리고 민법을 고수하는게 가능했다. 하지만 미국 독립과 함께 영국인 왕당파 5만명이 캐나다에 이주를 하면서 영국은 상 캐나다(Upper Canada)와 하 캐나다(Lower Canada)로 지역을 분할 하였는데 이중 하 캐나다가 바로 지금의 퀘벡주이다. 이런 상태는 19세기까지 이어졌으며 이 당시 양 캐나다에서 지속적으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자 1841년 통합령을 통해 양 캐나다를 하나로 합친다. 이어 1867년 공표된 영국령 북아메리카 법안에 따라서 캐나다 연방이 출범한다.

3.4 캐나다 연방

영국령 캐나다 연방은 출범직후 4개의 주로 구성되어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퀘벡주였다. 캐나다 연방은 이후 웨스트민스터 헌장에 따라서 주권을 가지고 독립을 하게된다. 이 당시 퀘벡은 상당부분의 경제권이 영국계들에게 있었으며, 특히 미국의 산업적 발전과 연계하여 몬트리올이 급격히 발전하면서 많은 영국계가 몬트리올에 거주하게되었다. 한편 프랑스계들은 많은 수가 농촌에서 농업에 종사하며 카톨릭 교회의 강력한 규범 아래에서 생활을 하였다. 일부 프랑스계들은 도시로 이주하여 공장 노동자가 되었다. 그 결과 퀘벡의 주요 자본은 영국계가 장악하고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프랑스계들은 하층민으로 머물게 되었다.

3.5 조용한 혁명

1960년, 2차 대전 이후 처음으로 집권한 퀘벡 자유당은 주 정부 주도의 강력한 경제 개발을 실시하며 퀘벡의 경제 주도권을 영국계로부터 빼앗기 시작한다. 그 중 대표적인 예가 영국계들이 소유하고있던 수력 발전회사인 위드로-퀘벡(Hydro-Québec)의 국유화였다. 한편으로는 사회적으로 카톨릭 교회가 담당하고 있던 교육, 의료부문을 정부가 통제하기 시작하였으며, 프랑스어의 사용이나 프랑스계 문화보존에 대한 법률이 지속적으로 통과되었다. 사회 복지와 노조에 대한 지원도 확대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조용한 혁명으로 불리우며 퀘벡의 프랑스계들은 프랑스계 캐나다인이 아닌 퀘벡인으로 인식을 하는 계기가 되었고 현재의 퀘벡이 완성되게 되었다.

4 분리주의

"1837년의 애국자" 퀘벡 화가 앙리 쥘리앵, 1887년作. 이 그림은 훗날 퀘벡의 주권운동의 상징으로 쓰이게 된다.

퀘벡인들에게 사상 최대이자 현재진행형인 떡밥.

4.1 자유 퀘벡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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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몬트리올 국제박람회. 시청 광장 앞에 모인 군중에게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 골은 발코니에 나서서 연설을 시작한다. 세인트로렌스 강을 내려오면서 맞이한 수많은 환호하는 군중을 보면서 독일에게서 해방된 파리에 당당히 재입성했을 때를 상기했노라고. 짧은 연설은 이런 말로 맺었다. 위의 영상 5분 55초부터 보면 된다.

몬트리올 만세!(Vive Montréal!) 퀘벡 만세!(Vive le Québec !) (환호)

자유... 퀘벡 만세!(Vive le Québec... libre !) (기나긴 환호)
프랑스계 캐나다 만세! 그리고 프랑스 만세!(Vive le Canada français ! Et vive la France!) (환호)

군중은 열광했고, 프랑스-캐나다의 외교관계는 사상 최악으로 급냉했으며, 퀘벡의 문제를 전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자유 퀘벡 만세는 퀘벡 독립운동의 대표적인 구호가 되었다.

드골 자신도 이 발언이 아수라장을 불러올 것이라는 것을 예상했지만, '이것이 프랑스의 배반을 회개할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리고 당시 캐나다의 수상이었던 피어슨에게 어그로를...

4.2 두 번의 국민투표

20세기 들어서도 퀘벡의 민족주의 열기는 꺼질 줄 모르고 결국 두 차례, 연방에서의 퀘벡 독립을 결정할 퀘벡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총투표가 실시되었다.

1980년 5월 20일, 퀘벡의 입법권, 징세권, 외교권 등 국가로서의 주권 획득을 골자로 하는 분리 독립에 대한 투표가 실시되었고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반대 : 2187991 (59.56%)
찬성 : 1485851 (40.44%)

같은 날 저녁, 퀘벡당의 창시자이자 당시 퀘벡 정부의 총리였던 르네 레베크(René Lévesque)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긴다.

Si je vous ai bien compris, vous êtes en train de nous dire à la prochaine fois!

'제가 여러분 말씀을 제대로 이해한 거라면, 여러분은 지금 저희에게 '다음에 또 봅시다!'라고 말하고 계시는 것이군요.

그리고 이 예언(?)은 실현되어, 1995년 다시 한번 투표가 실행되었다. 프랑스영국은 이 일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또, 당시 캐나다의 총리이던 장 크레티앵은 퀘벡 주 몬트리올 지역구 출신이기 때문에, 퀘벡이 독립하게 되더라도 크레티앵이 캐나다의 총리로 남게 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도 오가갔다. 약 67%가 독립을 반대하리라는 초기 설문 결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약 1% 근소한 차이로 무산되었다.

반대: 2362648 (50.58%)
찬성: 2308360 (49.42%)

두 번째 투표에서 더 높은 찬성률이 나왔다는 것이 주의할 만하다. 실제로 첫번째 투표에서는 분리를 지지하는 퀘벡인들도 분리 독립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는 분석이 많다. 그리고 1982년의 새로운 헌법 제정 당시 퀘벡의 목소리가 전혀 반영이 안 되었다는 분노감, 이후 개헌을 위한 미치 호수 협정(1987)이나 샬럿타운 협정(1992)이 둘 다 무산되었다는 점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1982년 당시 자유당에 대한 퀘벡인들의 분노는 대단해서 1980년 연방선거 당시 75석 중 1석만을 차지하고 있던 보수당이 1984년 선거에서는 무려 58석, 1988년 선거에서는 63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퀘벡에서 보수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한 것은 보수당의 1917년 강제징용 사건 이후 처음. 물론 보수당도 개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자 1993년 선거에서는 다시 1석으로 대패(...)하게 되고, 퀘벡당이 54석을 차지하게 되어 일개 한 주의 정당이, 캐나다 연방 전체 내 야당으로 등극하게 된 분위기 아래서 두번째 분리 독립 투표가 행해졌던 것이다.

지금도 대표적인 주권파 일간지인 르 드부아르(Le Devoir)는 퀘벡 주경일마다 독립이나 세번째 투표에 대한 떡밥을 던지고 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서 선진국 사회의 민족주의 열기는 많이 수그러들었고, 퀘벡인이 받는 차별도 과거에 비해서 많이 줄어들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세번째 투표가 실시될 확률은 적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2014년 퀘벡 주의회 선거에서 민족주의 성격이 강한 당인 파티 케베쿠아(Parti Quebecois)가 독립 떡밥을 던졌지만 결국 의석을 24석이나 더 잃고, 반독립주의적인 자유당이 압도적으로 이겨버렸다.

독립은 무산되었지만, 지금도 대부분의 퀘벡인들은 그다지 '캐나다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경제, 정치의 실리적인 이유로 다른 영어권 주와 연방 내에 동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다른 캐나다인들도 퀘벡이 비록 같은 지붕 아래 살고 있지만 거의 '다른 사회' 취급을 하고 있다.

4.3 퀘벡의 분리?

퀘벡 북부에 살고 있는 수만 명 규모의 원주민들은 퀘벡이 독립한다면 자신들은 그 독립된 퀘벡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주장한다. 퀘벡의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대부분의 영토가 북부의 소수의 원주민들만이 살고 있는 거대한 땅이며 만약 독립 시 원주민들의 분가를 인정한다면 퀘벡의 실제 영토는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는 주장이 있다. 퀘벡의 인구에서 원주민 비중은 공기에 가깝지만 원주민 비중이 70% 정도인 노르 뒤 퀘벡(Nord-du-Québec) 지역[8]만 빼도 퀘벡의 영토는 절반 이하로 줄어들어 버린다.

또 하나의 떡밥은 바로 '퀘벡의 분리'. 몬트리올과 퀘벡-온타리오 국경지대에는 어느 정도의 영어권 인구가 살고 있으며 몇몇 이들은 '퀘벡이 캐나다와 투표를 통해 분리가 가능하다면 퀘벡 그 자체도 투표를 통해 분리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영어권이 많은 일부 몬트리올 지역이나 퀘벡의 마을은 원한다면 캐나다에 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퀘벡은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국제법을 근거로 반박한다. 반대로 영어권 주민들은 노르 뒤 퀘벡(Nord-du-Québec)과 코트노르(Côte-Nord) 북서부 지역은 1898년부터 1912년 사이에 순차적으로 퀘벡에 편입된 지역들로, 오리지널 퀘벡 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 지역의 주민들이 캐나다에 남는 것을 원하지도 않는데, 독립된 퀘벡이 갖고가는 것은 국제법적으로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특히 뉴펀들랜드 래브라도로 가는 짧은 경로를 만들기 위해 이러한 주장들을 하는 사람이 많다. 지금은 이들 지역이 인구가 희박해서 캐나다에 잔류해야 한다고 주장되는 북부 지역만을 거쳐서 나머지 캐나다에서 뉴펀들랜드 래브라도로 가기 매우 힘들지만, 남부 퀘벡만 독립하면 캐나다 정부에서 정책적으로 나머지 캐나다에서 뉴펀들랜드 래브라도로 가는 고속도로를 만들 가능성이 매우 높다.

4.4 퀘벡 없는 캐나다?

연방에 퀘벡 독립이 야기하는 문제는 위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퀘벡 독립과 함께 캐나다의 일부 영토가 월경지화된다는 점이다. 이게 무엇이냐 하면 퀘벡과 인접한 대서양 연안의 캐나다의 주(뉴브런즈윅,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노바스코샤, 뉴펀들랜드래브라도 주)들이 캐나다 본토와 멀리 떨어진 고립 영토가 된다는 것이다. 마치 미국의 알래스카 주,[9], 제1차 세계대전 전후 프로이센 북동부 해안선 절반이 폴란드의 땅이 되어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 독일 본토와 동프로이센이 폴란드의 해안 영토에 막혀 단절되어 있었던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정권 초기의 독일, 1947년 종교만 같은 이슬람교지 서로 지역적 배경이 다른 동서 영토가 인도에게 가로막힌 상태에서 인도로부터 분리 독립한 파키스탄,[10]1991년 소련 해체후 러시아 본토와 고립 영토 칼리닌그라드로 나뉘어져버린 러시아처럼 말이다. 게다가 대서양 주들도 퀘벡과는 별도로 소수지만 연방에서의 분리를 주장하는 세력이 있어왔다.


때문에 지금 퀘벡의 영토가 캐나다에서 떨어져나가 온타리오에서 고립된다면 연방 내에 잔류할 확률은 매우 낮다.

윗문단의 내용을 볼 때, 일단 래브라도로 가는 육로형 국토는 생길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뉴브런즈윅으로 가는 육로형 국토를 만들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이다. 세인트로렌스 강 이남 지역도 미국 국경 바로 인근을 제외하면 프랑스어 화자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미국 국경 지자체에서도 프랑스어 화자가 우세해진 상태이다.

퀘벡 분리론자들은 퀘벡의 일부 지역이 퀘벡에서 분리되면 뉴브런즈윅까지 갈 수 있는 일종의 육로형 국토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렇게 되면 퀘벡에서 미국을 바로 갈 수 없어 퀘벡인들의 많은 반발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가능성이 높지 않다. 퀘벡인들 입장에서는 원래 퀘벡땅이 아니었고 독립 반대여론이 우세한 북부지역을 원주민이 많다는 이유로 캐나다에 놔두고 나가라는 것도, 앞으로 북극항로를 통해 아시아와 교역하기 힘들어지는 등의 이유로 반발할 텐데, 불어권 주민들이 많은 남동부까지 놔두고 가라고 하면 반발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뉴브런즈윅,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노바스코샤가 캐나다의 월경지가 될 것이다. '캐나다 땅만 밟아서 여행하겠다' 이런 생각을 한다면 래브라도까지 페리를 타고 다시 캐나다 정부에서 건설할 고속도로를 거쳐서 삥 돌아서 가야 한다.(...) 결국 이들 지역은 미국 북동부와 더 밀접해질 가능성이 높고, 미국 합병 운동이 일 가능성이 높다. 혹은 이들 3개 주가 미국과 캐나다에서 독립된 연방국으로 분리독립할 가능성도 있다. 미국으로 합병할 경우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주는 인구가 과소하여, 인구가 14만밖에 안되는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지역에 상원의석 2석과 하원의석 1석을 주기 싫어할 미합중국에서는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뉴브런즈윅이나 노바스코샤 중 하나에 통합할 것을 연방 가입조건으로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분리독립안도 유력한 방안중의 하나이다.

서부 주에서도(특히 앨버타) 서부 캐나다를 따로 결성하자거나 미연방에 가입하자거나 하는 분리운동이 소수이지만 존재한다. 캐나다는 꽤나 약한 국가적 일체감을 지닌 국가인 것이다.결국 캐나다는 수도 오타와 일대만 지배하는 북미판 신라로 전락하고

4.5 이중언어 국가 안의 퀘벡

1969년 7월 7일, 공용어에 대한 법이 도입되어 불어가 모든 연방정부의 영역에서 영어와 동등한 위치를 획득하게 되었다. 이 일은 캐나다를 이중언어 국가로서 정체성을 정립하는 것을 가속화한다.

또한 퀘벡의 분리독립 열기를 사그러트리기 위해 연방정부는 퀘벡의 분리독립을 막기 위해 갖가지 정치적 편의를 제공하였다 (인구수에 비해 많은 국회 의석, 문화/언어적 인정, 국영 가톨릭학교 제도 등).

총리는 당연히 두 언어를 할 줄 알아야 하고, 실제로 기자가 영어로 질문하면 영어로, 프랑스어로 질문하면 프랑스어로 답하는 영문영답 불문불답의 진풍경을 볼 수가 있다. 공식 대담을 할 때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번갈아가면서 진행하기도 한다.

5 문화

5.1 종교

언어 외에 퀘벡을 특징짓는 요소는 가톨릭이다. 종교적 다양성과 세속화가 가속화되는 현재로서야 지금은 그 특징이 많이 약해졌지만 퀘벡은 서구 사회 중에서도 상당히 늦게 근대화가 이루어져서 20세기 중반까지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이 삶의 전반에 강한 지배력을 행사하던 곳이었고, 개신교 세력이 지배적이었던 미국과 영국령 캐나다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가톨릭이라는 점은 퀘벡의 정체성 중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되었다.

실제로 퀘벡의 지도를 놓고보면 생(Saint)이나 생트(Sainte)로 시작하는 지명이나 거리 이름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성인(聖人)의 이름에 의탁함으로서 거친 퀘벡을 개척해나가려고 한 과거 이주민들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실제로 퀘벡의 최대 공휴일은 퀘벡의 수호성인 세례자 요한의 축일인 6월 24일이다. 비록 1960년대 '고요한 혁명'이라고 불리는 퀘벡의 현대화 과정에서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 감소와 세속화가 진행되면서 이 날의 공식명칭은 민족의 축제(La Fête Nationale)로 바뀌었지만 아직도 세례자 요한 축일이라고 널리 불리고 있다. 캐나다 국경일에도 쉬긴 하는데 이들에게는 그냥 쉬는 날일 뿐, 이 날에 이사 등을 한다(...).

2010년 10월 17일, 앙드레 베세트(André Bessette) 수도사가 캐나다 최초의 성인, '몬트리올의 성 안드레아'로 시성되었다. 축일은 1월 6일.

5.2 식문화

딱히 퀘벡의 독자적인 식문화라 부를 만한 문화는 그다지 없다고 봐도 좋다. 프랑스 식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바게트포도주, 치즈 등이 더 많이 소비되고,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기름지거나 단 음식, 육류가 많은 것이 특징. 그 외에 단풍당밀(Sirop d'érable)의 최다 생산지.

가장 유명한 음식이라면 왼쪽의 푸틴(Poutine). 영어발음으로는 러시아그 분과 발음이 비슷하다. 사실 러시아의 그분의 발음은 '푸친'에 가깝지만, 퀘벡 불어에서는 ti 발음이 구개음화되어 '치'발음이 나기 때문에 실제 발음도 '푸친'이다! 그리고 프랑스어로는 블라디미르 푸틴도 Vladimir Poutine이라고 쓴다!![11] 이건 운명이야
1950년대 퀘벡의 농촌에서 유래된 음식으로, 요리라고 하기엔 좀 뭐한 것이 단순히 감자튀김체다 치즈와 그레이비 소스를 끼얹은 음식. 맥도날드에서도 맥푸틴(푸틴)을 팔 정도로 인기가 있다. 맛은 그레이비의 질에 따라서 천차만별. 물론 칼로리 측면에서 보자면 감자튀김과 치즈 양쪽 다 고칼로리로 악명높은데다가 소스까지 끼얹었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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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빵 사이에 훈제한 고기만 잔뜩 끼운 몬트리올 스타일 스모크드 미트 샌드위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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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에 주로 먹는 투르티에르라는 고기 파이가 있다. 그냥 말그대로 고기 파이. 속에 뭘 넣느냐는 가정에 따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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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저트로 유명한 것은 설탕 파이. 이것도 마찬가지로 설탕 시럽을 아주 많이 넣은 파이. 아니 그냥 시럽에 파이를 조금 씌웠다고 표현하면 좋을까. 그냥 설탕맛밖에 안난다.

...이렇게 뭔가 투박하고 열량높고 농촌적인 요리가 많다. 프랑스 요리보다는 오히려 미국 요리를 닮았다고도 볼 수 있을 듯.

특이하게 거위보다는 오리 푸아그라를 사용한다.

5.3 이민

신대륙답게 이민 유입 인구가 많다. 덕분에 낮은 출산율에도 불구하고 인구는 아주 서서히 증가하는 중. 2011년에는 8백만에 달한다고 한다. 주로 이민을 받는 나라는 프랑스어가 널리 쓰이는 나라인 모로코, 알제리, 그리고 프랑스. 왠지 프랑스인들에게는 '프랑스(특히 파리)보다 덜 시끄럽고 더 느긋히 살수 있으면서도, 월급은 두 배나 높은 곳'으로 이해되고 있는 듯 하다. 특히 유학도 많이 오는데 몬트리올 대학교의 경우 특히 상경, 이공계의 경우 전체 학생의 30% 가량이 프랑스 국적 학생들로 채워져서 교육 당국에서도 골머리를 썩고 있다. 협정에 따라 세금 한 푼도 안 낸 프랑스 국적의 학생들도 퀘벡 주민들과 같은 학비를 납부하기 때문. 프랑스 전국에서 500명만 입학 가능한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낙방한 학생들의 경우 다른 그랑제콜이나 일반대학으로 진학하기 보다는 몬트리올 대학으로 진학을 노리는 경우가 많다. 공동 학위 과정이 있기도 하고, 영어가 주류인 북미에서 유학했다는 자체가 학벌을 중요시하는 프랑스 내에서는 큰 메리트이기 때문.

다만 이민 유입은 주로 몬트리올 지역에 집중되어 있고 퀘벡 주 전체를 놓고 보자면 다른 캐나다 주에 비해 이민인구 비율은 꽤나 낮은 편이다. 특히 지방으로 들어가면 신대륙답지않게 거의다 프랑스계 캐나다인인 상당히 동질적인 인구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흔히 퀘벡 사람들은 몬트리올이 '국제적인 도시'라는 인상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몬트리올이 북미 대륙의 다른 대도시에 비해 더 국제적이거나 다채로워서 그렇다기보다는 퀘벡 주의 다른 도시보다 상대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퀘벡 본토인들에게 그렇게 느껴지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캐나다가 다 그렇듯 한국인 이민도 꽤 있으나 언어 문제로 밴쿠버토론토에 비하면 상당히 낮은 수준. 그리고 얼마 안 되는 한국인들도 프랑스어를 안 배우고 영어만 쓰면서 사니 망했어요[12]. 어떤 한국인 이민자는 중국인과 한국인을 구별할 수 있는 요소 중 하나가 프랑스어 구사 여부라고 한다. 몬트리올에 이민온 예전 중국인 이민 세대는 영어를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현지에서 도움이 되는 프랑스어를 배웠기 때문. 하지만 2012년 들어 퀘벡정부도 이민법 강화로 불어가 중요해졌기 때문에 신규 이민자들은 불어를 아주 잘하지는 못하더라도 예전 세대들 보다는 좀 더 잘하는 수준이 되었다. 불어만 잘하면 이민이 오히려 쉽게 되어서 프랑스쪽에서 건너온 한국인도 늘고있는 추세.

5.4 스포츠

캐나다의 묻지마 아이스하키 사랑은 기본인지라, 주의 최고 인기팀은 단연 몬트리올 커네이디언스다. 현지 사람들은 대부분 별명인 햅스(Les Habitants을 줄인말)로 부른다. 또한 주도 퀘벡 시에 한때 퀘벡 노르딕스라는 NHL팀이 있었지만 여러 이유로 퀘벡 시를 떠나 콜로라도 애벌랜치가 되었다[13] . 또한, 아이스하키에 있어서는 유독 뛰어난 골텐더를 많이 배출하는 주가 퀘벡 주이다. NHL 역사상 최고의 골리로 평가받는 햅스 레전드 파트리크 루아(Patrick Roy), 뉴저지 데블스의 NHL 통산 최다승,최다경기,최다완봉 기록 보유자 마르탱 브로되르(Martin Brodeur)등 퀘벡 출신 골리들의 NHL에서의 활약상은 다른 주나 다른 국가를 압도한다. 이는 파트리크 루아를 통해 완성된 이른바 퀘벡 버터플라이라는 하나의 골텐더 수비 방식으로 전승될 정도.

몬트리올의 경우는 퀘벡 주 최대 도시고 빅 마켓이라 MLB 몬트리올 엑스포스가 존재했다. 하지만 2004년 재정문제로 팀이 매각되어 미국으로 팔려가 워싱턴 내셔널스가 되었다. 엑스포스가 떠난 이후 햅스 외의 미국 4대 스포츠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외에는 MLS의 몬트리올 임팩트, CFL의 몬트리올 알루에츠가 있다.

또한 1976 몬트리올 올림픽을 개최하기도 했으나, 올림픽 개최 후유증을 크게 겪기도 했다.

5.5 유명인

퀘벡이라는 곳이 그다지 존재감이 없는 곳이기도 하고 사실 캐나다에서 프랑스어를 쓰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도 많기에 퀘벡인이 외지에서 유명해지면 그냥 '캐나다인' 아니면 '프랑스계 캐나다인'으로 소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퀘벡 하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유명인은 그다지 많지 않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유명한 퀘벡인을 몇 명 뽑아보자면

5.5.1 음악가

아케이드 파이어의 멤버. 아이티계 이민자 가정 출신이다.
퀘벡이 낳은 몇 안되는 세계적인 스타. 영화 타이타닉의 주제가로 유명하다. 물론 퀘벡 및 프랑스어권 밖에서는 영어로 노래를 부른다. 그래서인지 퀘벡인인지도 아는 사람도 드물며 '디온'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프랑스에서는 인기가 많은 캐나다 가수이며 북미에서의 활동 못지 않게 프랑스에서도 활동을 많이 하는 가수이다. 프랑스 방송에서 이야기 하는걸 보면 셀린 디옹이 말하는 퀘벡 불어가 프랑스인들과는 상당히 다르다. 그래서 종종 프랑스 코미디언들에게 풍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뉴에이지 작곡가. 첫날처럼(Comme au premier jour)로 유명하다. 이쪽은 왠지 프랑스인으로 알려져 있다.(...)
마찬가지로 뉴에이지 음악가. 레바논 이민2세.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수퍼 비르투오소로 테크닉에 있어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피아니스트이며 괴작Circus Galop의 작곡가(...)이기도 하다.

5.5.2 스포츠 선수

종합격투기 선수.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이쪽은 트리가 맞다. 그나마 길레르모 패트리라고 적지 않은게 다행
스타크래프트2 프로게이머.
야구선수(마무리 투수). 2003년 내셔널리그 사이영상.
토론토 블루제이스 포수. 토론토의 이스트뉴욕에서 태어났으나 청소년기를 몬트리올에서 보냈다.
쇼트트랙 선수. 1990년대 초부터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올림픽까지 활동했다. 최초로 세계선수권 종합부분 4회 우승[14]을 기록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마크 개그넌'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다수.
몬트리올 출신의 여자 피겨 스케이팅 선수. 여자 싱글 부문 선수로, 2009년 세계 선수권 은메달, 2008, 2009 4대륙 선수권 은메달을 획득했으며, 2005년 ~ 2010년 캐나다 선수권에서 6회 연속 우승하였다. 자국에서 열린 2010년 동계 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경기 직전에 모친상을 당했으나, 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여자 싱글에서 총 합계 점수로 202.64를 기록하여 김연아·아사다 마오에 이어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퀘백 출신이라서 그런지 캐나다에선 대부분 프랑스어권 방송에 출연하는 편이며, 프랑스에서도 인지도가 꽤 높은 피겨 선수이다.
WWE 프로레슬러
NXT 프로레슬러
WWE에서 활동했던 여자 프로레슬러. 진행자들의 질문에 프랑스어로 답하거나, 프랑스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마이크웍을 하는 등 퀘백 출신임을 강조하곤 했다.

5.5.3 영화계 인물

프랑스 문화권이 지배하고 있는 퀘벡이다 보니 영어권계 캐나다 영화계와 다른 퀘벡 영화라는게 있다. 물론 캐나다 특성상 영어권 캐나다 영화계하고도 교류가 있는 편.

그을린 사랑과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로 유명해진 감독.
퀘벡 출신 배우 겸 감독. 호러 팬들에게는 프랑스 호러 영화인 《마터스》에 나온 걸로 유명하다.

5.5.4 기타

  • 도미니크 노엘
대한민국 방송인으로 미녀들의 수다에서 캐나다 대표로 출연했던 도미니크는 몬트리올 출신으로, 현재는 연세대 유학을 마치고 캐나다에서 배우로 활동 중이다.

6 그 외

Phonetic Alphabet에서 Q에 해당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1. 실제 프랑스어 발음은 '케베크(/ke.bɛk/)가 맞다. '퀘벡'은 북미 원주민 언어인 알곤킨어로 '좁은 물길'을 의미하는 kepék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2. 준주까지 포함하면 누나부트가 가장 넓다.
  3. Ouest - 서쪽, Nord - 북쪽, Est - 동쪽, Sud - 남쪽
  4. 7년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퀘벡과 카리브 해 식민지중 하나를 포기해야 했는데 아이티라는 꿀이랑 비교해서 돈도 안되고 골치아픈 퀘벡을 버린다. 그렇기에 샤를 드 골이 속죄한답시고 자유 퀘벡 만세를 외친 것.
  5. 캐나다 통계에 따르면 28.9%의 퀘벡인이 스스로를 프랑스계라고 답했으나 스스로를 캐나다인이라고 답한 퀘벡인은 60.1%이었다. 자세한 건 캐나다 항목 참조.
  6. 캐나다는 연방국가로 연방 선거와 주 내 선거가 따로 행해진다.
  7. 이 '왕의 여자들'을 소재로 한 소설이 있다.
  8. 인구 42,579명에 면적 747,161km².
  9. 이쪽은 러시아령이었던것을 러시아가 재정난,정치적인 이유등으로 미국에게 소유권 팔아넘겼다.
  10. 그러나 독립 뒤에도 서로 다른 동서간 지역 갈등과 서쪽 중심으로 돌아가는 파키스탄 중앙 정부의 행태에 반발하던 동쪽 영역이 1971년 방글라데시로 독립해버렸다.
  11. 러시아어로는 블라디미르 푸틴도 음식 푸틴도 Путин이라고 쓰지만 강세 위치가 다르다. 음식 푸틴은 강세가 뒤에 오고 블라디미르 푸틴 할 때 푸틴은 강세가 앞에 온다.
  12. 그도 그럴 것이 몬트리올에서는 프랑스어 안 쓰고 영어만 써도 사는데 크게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몬트리올에서 살면서 프랑스어를 못한다면 무시당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영어를 못하고 프랑스어만 쓰는 사람들은 많아도 프랑스어를 못하고 영어만 쓰는 몬트리올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13. 그 중의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프랑스어권 지역이라 선수수급과 관중동원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였다는 카더라가 있다. 그러나 상당수 선수들이 비프랑스어권 선수들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라 합당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 매츠 선딘, 조 사킥, 그리고 피터 포스버그 등은 한때 퀘벡 노르딕스에서 스타 플레이어들로 명성을 쌓았던 비프랑스어권 선수들이다.
  14. 이 기록은 안현수가 2007년에 5년 연속 우승하면서 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