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무후무

前無後無. 이제까지 없었으며 그 뒤에도 없다. 후에 없으면 전현무
空前絶後(일본식 한자어).

목차

어원

전무후무 제갈무후(前無後無 諸葛武侯)에서 유래된 말이다.

전설에 따르면 중국 명나라 시절 주원장의 개국을 도운 공신 유기(劉基)는 평소 "옛적 제갈량은 삼국 중에 가장 작은 촉땅 만을 움켜쥔 채로 천하를 평정하지 못하였으나 오늘날의 나는 천자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였으니 내가 제갈량보다 낫다." 라는 말을 하며 자주 제갈량을 폄하하였다. 이후 유기가 벼슬을 내려놓고 중국을 유람하던 도중 옛 촉한 지역인 성도 주변으로 가게 되었는데 날이 어두워 어느 절에 묵게 되었다. 이윽고 새벽이 되었는데 스님들을 제외하고 그 어떤 생물도 살 수(?)없는 절간에 왠 수탉 울음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는 민가와는 거리가 먼 고적한 산중의 절이었다.

그리하여 이에 궁금증을 품은 유기가 주지스님에게 "왠 절간에 닭울음 소리입니까?" 라고 묻자 주지스님이 대답하기를 "옛적 제갈무후께서 우리 절에 하루 묵으시면서 이를 기념하여 흙으로 닭을 한마리 빚어주셨는데 새벽녘이 되면 신기하게 울음소리를 내어 아침을 알려줍니다."라 대답하였다. 이에 평소 제갈량을 무시하던 유기가 "그러면 나도 한마리 빚어주겠소."라고 말하고 흙으로 닭을 빚자 유기가 빚은 닭은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 주변을 시끄럽게 했다.

이에 졸라 빡쳐 화가 난 유기가 제갈량이 빚은 닭을 던져서 깨자 닭안에서 "모년 모월 모일에 유기가 나의 닭을 깰것이다."(某年某月某日 劉基破土鷄)라고 적힌 종이가 나왔다. 이에 유기는 짐짓 놀랐으나 애써 태연한척 절을 나와 성도로 향했다. 이로써 유기는 제갈량에 대한 평가를 조금 달리했으나 역시 제갈량을 자신의 아래라 생각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깨진 흙닭은 어쩌고?

이후 성도에 도착한 유기가 제갈량을 모신 사당인 무후사(武侯祠)를 지나게 되었는데 무후사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말을 타고 있는 자는 말에서 내려 고삐를 잡고 가고 걸어 지나가는 자들도 두손을 공손히 하여 지나가는 것을 보게되었다. 유심히 보자 하마비(下馬碑)가 서있었다. 그러나 유기는 자신이 제갈량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말에서 내리지 않고 그냥 지나갔는데 하마비 앞에 다다르자 말의 발이 움직이지 않는 것 아닌가?

그래서 유기는 말에서 내릴 수 밖에 없었고 어떻게 해도 말이 발을 움직이지 못하자 땅을 파보니 다음과 같은 글귀의 쪽지가 나왔다. "때를 만나면 하늘도 도와주어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지만 운을 만나지 못하면 아무리 영웅의 계책이라도 들어맞지 않는 법이라오." 될놈될 안될안 이니 깝 ㄴㄴ요

그리하여 유기는 자신의 생각을 뉘우치고 제갈량에게 사죄하고자 제갈량의 무덤으로 찾아갔으나 풍수지리적으로 아무리 보나 그다지 터가 좋지 않은 무덤이었다. 이에 유기가 "제갈 선생님께서는 다른 것은 모두 잘하셨으나 풍수는 잘 보지 못하셨구나." 라고 생각하고 무덤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였다. 절을 하고 일어나려는데 이번엔 유기 자신의 무릎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 아닌가? 이에 놀란 유기가 좌우를 시켜 자신 무릎아래의 땅을 파게 시키자 이번에도 어김없이 다음과 같은 글귀의 쪽지가 나왔다. "충신(忠臣)은 죽어서도 주군(主君)의 곁을 떠나지 않는 법이라오." [1]

이에 유기는 긴 탄식과 함께 처음에는 흙닭에서, 다음은 자기가 탄 말에서, 이번에는 자신의 무릎이 움직이질 않더니 쪽지가 나오는데 다음은 어디서 쪽지가 나올지 사뭇 겁을 먹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앞으로도 뒤로도 제갈무후 같으신 분은 없을 것이다." (前無後無 諸葛武侯)

이 위의 내용은 비록 전설이나 중국인들과 중국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은 다른 동아시아 사람들이 어떻게 제갈량을 인식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전무후무 제갈무후에서 떼어낸 '전무후무' 라는 말은 일상생활에서 여전히 많이 쓰이고 있다.

여성시대에서는 전후무후로 불린다 카더라.
  1. 참고로 유비의 사당인 한소열묘(漢昭烈廟)는 제갈량의 무덤 바로 옆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