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592년 임진왜란, 일본군은 대대적으로 조선을 침공하여 순식간에 한양을 점거하고 임진강 전투에서 승리하여 그 여세를 몰아 평양을 함락하였다. 이에 선조는 가산을 거쳐 정주로, 정주를 거쳐 의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국가적인 큰 위기인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명의 1차 구원병마저 평양을 공격하다가 패주했다.
이렇듯 총체적 난국에 직면해 있던 조선 회생은 다름 아닌 전라도에서 싹트고 있었다. 그 당시 이순신이 거제 앞바다에서 원균, 이억기 등과 함께 거제 앞바다와 견내량 앞바다에서 왜군을 크게 쳐부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바다만이 아니었다. 일본군은 경상우도를 통과하여 전라도의 중심지였던 전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응하여 정담과 해남 현감 변웅정, 나주 판관 이복남 등이 옹령에 주둔하면서 전주성 전투가 시작되었다.
2 경과
정담과 변웅정은 옹령에 주둔한 후, 목책을 세워 산길을 막고 군사들을 격려하여 수 없이 싸웠다. 이들이 활로 일본군의 정예병을 많이 쏘아 죽이자 일본군은 일단 후퇴했다. 그러나 하필이면 일본군이 공세를 재개한 시점이 조선군의 화살이 다 떨어졌을 때라는 점이었다. 결국 이들은 용감히 싸우다가 모두 전사하였다.
그 다음 날, 일본군은 전주에 당도했다. 이에 전주 관원들은 도망치려 했으나 이정란이 전주성에 들어와서 스스로 수성장이 되어 관원들과 백성들을 단속하여 방어에 나섰는데, 일본군은 옹령 전투에서 수 많은 정예병력을 잃은 터라 사기가 떨어져있던 상태였던지라 공세를 지속하기엔 어려움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정예병력도 많이 잃었으니..
게다가 전라감사 이광이 의병(가짜 병사)를 만들어 배치하고 낮에는 군기를 수없이 꽃고, 밤에는 온 산에 횃불을 만들어 군세를 위장했다. 일본군은 이리저리 정찰을 했으나 결국 후퇴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