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초기 (1592년)와 한국전쟁 (1951년)에 각각 벌어진 전투.
1 임진왜란 초기에 벌어진 전투
임진강 전투 | ||
날짜 | ||
1592년 음력 5월 18일 | ||
장소 | ||
조선 임진강 | ||
교전국1 | 교전국2 | |
교전국 | 조선 왕국 | 쇼쿠호 일본 |
지휘관 | 김명원 한응인 이일 이양원 유극량† 신할†[1] | 가토 기요마사 킷카와 히로이에[2] |
병력 | 1만 3천 명 | 2만 2천 8백 명 |
피해 규모 | 불명 | 불명 |
결과 | ||
임진강 방어선의 붕괴. |
신립이 탄금대 전투에서 허무하게 패배하면서 한양이 풍전등화가 되자 조선 조정은 파천하게 된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1만 수천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임진강에 방어선을 펼치게 된다.
한편 일본군은 한성 점령 후 일단 정지하면서 이후 전략을 논의했다. 그 결과 우키타 히데이에는 그대로 서울에 머무르면서 전군을 총지휘하고, 1군 사령관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양으로 가기로 하였다. 3군 사령관 구로다 나가마사는 황해도로 가서 1군을 후원하고, 2군 사령관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 방면으로 가기로 하였다. 그리고 4군 사령관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는 강원도로 가서 2군을 후원하기로 하였다.
이후 선발대로 북상하던 가토 기요마사는 5월 10일 경. 임진강에 주둔한 조선군을 보고 진격을 멈추게 된다. 가토 측 강변에는 조선군이 사전에 정리를 해버렸기에 강을 건널 수 있는 배가 없었고 뗏목을 만들기에도 상황이 여의치 않은데다 강물이 불어 물살도 급했기 때문에 시간을 끌면서 서로 대치하게된다.[3]
그런데 이 모습을 보고받은 조선 조정은 왜군들이 공세종말점을 넘어 머뭇거리는 것으로 착각했다(…). 그래서 선조에게 반격의 때가 왔노라고 건의를 했고, 선조는 임진강 전선 지휘관들에게 '왜 속히 진격하지 않는가?' 라고 책망조의 어명을 잇달아 내려보냈다. 그리고 이 시기에 한응인이 명나라에서 돌아왔고, 이원익이 뽑아 보낸 강변[4] 군사들도 막 도착하고 있었다. 이에 비변사에서 '아니 김명원 쟤는 왜 한성을 잃었는데 공격 안하고 가만히 있죠? 장수들도 말을 안 듣네요. 한응인에게 독자지휘권 맡겨서 공격 보냅시다!'[5]하는 건의를 선조가 받아들이고 한응인에게 일찍이 없었던 제도체찰사(諸道體察使)라는 직위까지 만들어주면서 조선 육군의 마지막 병력이자 정예병력인 강변 군사들의 지휘를 맡겼다. 이로 인해 지휘권이 둘로 쪼개져 버렸다.[6] 비변사에서 한응인을 밀었던 이유는 그가 무슨 뛰어난 장수여서가 아니라 단지 김명원보다 젊으니 더 적극적으로 공격할 것이라 여겨서다. 애당초 한응인은 무신이 아니라 문신이다. [7]
이리하야 어명의 영향으로 조선군이 돌격준비를 하는 와중 전황변화가 일어났다. 일본군이 진을 치우고 철수하기 시작했다.[8] 그 전까지 퇴각할 기미도 없었고 일본군 진영에 어떤 이상한 일도 일어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거짓 후퇴가 아닌가 의심되는 상황이었고 도원수 김명원도 그렇게 생각했으나... 이미 어명 때문에 돌격작전에 시동이 걸린 마당에 전황변화까지 일어나니 각 부대 간에는 돌격 작전에 서로 경쟁까지 하는 지경이 되었다. 김명원은 이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9]
이 와중에 한응인은 자신이 거느린 강변군사들에게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 와중에 한응인의 병크가 터졌다. 강변군 수뇌진은 출전연기를 요청했는데, 이들의 목을 벤 것.[10][11] 그리고 유극량 등의 반대[12]에도 불구하고 신할 등은 임진강을 건너 일본군을 추격할 것을 명령한다. 그 결과, 신할, 유극량이 이끄는 조선군이 강을 건너가 남아있던 것으로 보이는 소수의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이내 산 뒤에 숨어있던 가토군이 튀어나오면서 조선군을 공격, 전멸시켜 버린다. 신할, 유극량은 전사한다. 강 너머에서 이 광경을 본 조선군은 사기가 떨어졌고, 박충간[13]의 도주를 시작으로 군 전체가 붕괴하였다.[14] 그리고 가토는 조선군이 타고 온 배로 강을 건너오기 시작했고 결국 김명원과 한응인도 도망치면서 허무하게 패배하고 만다.
이 전투는 지휘 계통의 문제로 조직력이 엉망인 조선군의 문제점과 정보분석이 엉망이었던 조선 조정의 판단 미스가 겹쳐 일어난 패배였다. 조선 조정도 이런 점 때문에 김명원 등을 처벌할 명분을 잃어 결국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 못했다.[15] 그리고 임진강 방어선까지 내주며 방어 능력을 상실한 조선 조정은 계속 북으로 도망쳐 의주까지 몰리게 된다.
2 한국전쟁 중기에 벌어진 전투
그로스터 고지 혹은 설마리 전투로도 불리우며, 한국전쟁이 한창인 경기도 북부 임진강에서 감악산을 배경으로 영국군 그로스티셔 대대와 중공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 처음엔 영국군 측이 선전했으나 계속된 인해전술로 소모전 양상으로 치닫다 결국 대대 자체가 전투 수행이 불가능한 전멸 상태에 빠졌고 그나마 살아남은 생존자들도 포로로 잡힌 결말로 끝났다.
2.1 전개
해당 내용은 당시 그로스티셔 1 대대장의 부관이었던 파라 호커리의 자서전[16]을 토대로 했기에 공식 문서와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중공군의 남하가 한창인 1951년 영국군은 양 옆에 벨기에, 푸에르토리코, 터키, 한국군들을 끼고 임진강 남쪽 산악지대에 참호와 각종 화기들을 배치해 놓고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4월 어느날 밤 한 무리[17]의 중공군들의 도하를 시작으로 캐슬(148) 고지를 중심으로 총격전과 수류탄, 백병전이 6시간 동안 난무했고[18] 결국 뺐긴다. 그럼에도 해당 고지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영국군은 결사대를 조직해 고지를 오르며 기관총 진지 파괴 등의 공작을 펼쳤으나 완전 탈환까지는 실패했다.
그 후 감악산을 배경으로 소모전과 후퇴가 연일 반복되다 대대장까지 소총수 역할을 해야 할 정도로 전멸 직전까지 내몰렸고 급기야 여단장과의 통화에서조차 "우리가 어떤 처지에 놓여있는진 알겠습니다. 제가 확실히 말씀 드릴 수 있는 건 제 부대는 더 이상 효율적인 작전 수행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현 위치를 고수해야 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를 노골적으로 말할 정도의 상황에서 전폭기들과 포격을 벗삼은[19] 최후의 저항을 하다 결국 항복해 정전 때까지 포로 생활을 하게 된다.[20]- ↑ 탄금대에서 패사한 신립의 동생
- ↑ 킷카와 가문의 문서나, 모리 가문의 문서에 따르면 가토가 아닌 킷카와 히로이에가 이 전투를 이끌었다고 한다.
- ↑ 일본군이 유래가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군했기 때문이다. 빠르게 진군하다보니 중장비같은건 보유할 수 없었고, 중장비가 없는마당에 자체보유한 선박같은게 있을리가 없었고, 뗏목을 만들어도 수만명이나 되는 병력을 실어나르는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후 평양성 전투가 벌어질때도 대동강때문에 발이 묶였고, 공성병기고 뭐고 아무것도 없어서 뜬끔없이 강화협상을 요청했을 정도였다.
- ↑ 압록강의 강계, 초산, 벽동, 창성 지역을 말한다.
- ↑ 비변사가 아뢰기를,“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은 요즘 처사가 매우 사람들의 마음에 흡족하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 경성이 함락된 지 이미 오래인데 진격할 마음은 없고 오로지 물러앉아 나루터를 지키는 일을 상책으로 삼고 있으므로 사기(事機)를 잃은 것이 몇 번인지 모를 정도입니다. 또 부원수 신각(申恪)이 제마음대로 도피했는데도 이를 제어하지 못했으니 그 나머지 일을 가히 알수 있습니다. 수어사(守禦使) 신길(申硈)은 조정이 이미 사태를 보아서 바로 진격하라고 명했음에고 불구하고 군병을 빼앗아 계속 묶어두고 영세한 적을 습격하지 않음으로써 적세를 날마다 치성하게 만드니 회복할 날이 없습니다. 신들은 우려를 이기지 못하여 늘 체직시키려고 했지만 적과 대치하고 있는 이 마당에 장수를 바꾸기가 쉽지가 않아서 그대로 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한응인(韓應寅)이 이미 대군을 모두 거느리고 갔으니 사태에 대응하여 진격하는 일을 한응인이 임의대로 처리하게 하고, 임진(臨津)·두기(豆只)·낙하 등처의 강 연안 위아래를 지키는 일은 김명원이 맡아서 방어하게 하되, 사태의 진전을 봐서 이러한 명령에 집착되지 말고 시기를 정하여 진격, 적을 섬멸할 것을 두 곳의 대장(大將)에게 하유하소서.”하니, 상이 따랐다. - 선조실록 25년 5월 6일.
- ↑ 결국 이 명령 때문에 후술할 한응인이 강변 수뇌진의 목을 벨때도, 자신 휘하의 신할과 권징이 돌격을 하는데도 김명원이 조치를 취할 수가 없었다.
- ↑ 여담으로 한응인은 왜란 도중에 모친상을 당하자 그대로 사직하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한다. 이와중에 농사를 지었는데 모와 잡초를 구별못해 모를 모조리 뽑아버리고 잡초를 키웠다는 야사가 전해내려온다. 이런 야사를 보건데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한응인이 무능하다고 생각하는 지 알 수 있다
- ↑ 하루는 왜적이 강 언덕에 지은 여막을 불태우고 장막을 헐어치우고 군기를 거두어 싣고 물러나 도망가는 모양을 보이며 우리 군사들을 유인하는 것이었다. 신할은 평소 행동이 가볍고 날카로우나 꾀가 없어서 왜적이 정말로 도망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강을 건너 뒤쫓아 가서 짓밟아버리려 하였다. 경기감사 권징도 신할과 합세하였기 때문에 김명원은 이를 금할 수가 없었다. - 징비록
- ↑ 위에서 보듯 애초에 지휘권이 둘로 갈린 것 자체가 빨리 공격하라는 이유에서였다.
윗대가리들은 도움이 되지 않어. - ↑ 이날 한응인도 또한 임진강에 이르러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왜적을 추격하려고 했다. 한응인이 거느린 군사들은 강변의 장군들로서 북쪽 오랑캐와 가까이 있어 싸우고 진 치는 형세를 자세히 알고 있었으므로 한응인에게 말하기를, "군사들이 먼 곳에서 오느라고 피로한데다가 아직껏 밥도 먹지 못하였고, 기계도 정비하지 않았으며, 뒤따라오는 군사들 또한 다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또 왜적이 물러가는 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사오니 원컨대 조금 쉬었다가 내일 적군의 형세를 보아서 나아가 싸우도록 하십시다"고 건의하였다. 한응인은 군사들이 머뭇거린다고 하여 몇 사람을 베어 죽였다. - 징비록
- ↑ 강변에서 임진강까지는 먼 거리다. 게다가 당시는 농사철이라 논밭에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므로 좁은길을 따라서 왔으며, 청천강 같은 큰 강이나 실개천을 만나서는 소단위 병력으로 건넜을 것이다. 이 와중에 뒤처진 부대가 있었을 것이며, 이쯤되면 병력들이 크게 지쳐있으며 밥도 못먹었고, 아직 도착하지 않은 부대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병사들이 모두 도착해서 피로를 씻고 지형과 나름대로의 전투 편제를 갖춰야하기 때문에 이런 건의를 한것이다. 즉 정당한 건의다. 하지만 한응인은 참수로 대답했다(...)
- ↑ 별장 유극량은 나이도 많고 군사에도 익숙하였으므로 결코 가볍게 진격해서는 안된다고 극력 말하자 신할이 그를 베려고 하였다. 그러자 유극량은 말하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군사가 되어 싸움에 따라다녔으니 어찌 죽음을 피할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렇게 말씀드리는 까닭은 나라 일을 그르칠까 염려해서입니다."라고 말하고 화를 내며 나와서는 자기에게 소속된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강을 건너갔다. - 징비록
- ↑ 애초에 이 사람은 정여립 사건때 공신이 되고 선조의 총애를 받아 벼락출세를 한 사람이다. 임진강 당시 도망병을 잡는 검찰사였는데, 본인이 먼저 도망간 것(...)
- ↑ 김명원과 한응인은 강 북쪽에 있으면서 이것을 바라보고 그만 기운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때 상산군 박충간이 마침 군중에 있다가 말을 타고 먼저 달아났는데, 여러 사람이 바라보고는 그가 김명원인줄 알고 모두 다 부르짖기를 "도원수가 달아난다!"고 하니 강여울을 지키던 군사들은 그 소리에 응하여 다 흩어졌다. - 징비록
- ↑ 애초에 공격하라고 독촉했던게 선조 자신이다(...) 한응인이 병크를 저질렀고, 조선 조정도 이를 지적했으나, 한응인은 선조의 어명에 충실했을 따름이라 그대로 묻혀버렸다.
- ↑ 해외에선 The Edge of Sword, 국내에선 '한국인만 몰랐던 파란 아리랑'으로 발간됐는데 전자의 경우 이후 연이은 포로 생활까지 감안하면 위화감이 상당하다.
- ↑ 작중에선 소대급 (30명)이상이라 적혀있다.
- ↑ 이 때 묘사를 보면 고지 위의 소대 하나를 상대로 100~150명이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 ↑ 공세를 완전히 꺾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 ↑ 여담으로 포로로 잡혀 중공군들에게 끌려가던 와중 이미 미군 두명을 총살한 북한군들이 이들도 죽이려 했는데 중공군 장교(로 추정되는 사람)이 열번해 죽음은 모면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