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항목: 리그의 심판
후보: 제라스
날짜: 10월 4일, CLE 21년
관찰
깨진 석관의 내면에 있는 인간 비스무리한 형체를 제외하면, 제라스라 불리는 존재가 한때 인간이었다는 것을 증명할 것은 전무하다시피하다. 그의 존재는 차갑고 무감각하며, 얼굴이라고 볼 수 있는 강철의 가면으로부터는 아무 것도 읽어낼 수 없다.
그는 자신 주변을 돌아보지 않은 채 전진한다. 제라스는 회고의 방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관문 앞에 섰고, 그가 팔을 한 번 움직이자 문이 열렸다.
회고
제라스의 등 뒤로 문이 닫히자 모래폭풍이 그의 시야를 가렸다. 난폭하고 따가운 돌풍이 그를 둘러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라스는 그 돌풍이 자신의 형체를 갉아먹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미 깨져 있던 그의 석관은 모래로 변해 사라졌고, 더 중요하게도 제라스는 자신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감옥이 모래폭풍 속으로 사라지면서, 그의 형체를 구성하던 마법력 역시 사라졌고 뼈와 살이 그것을 대체했다.
시간의 모래가 역류해, 그는 다시 인간이 된 것이었다.
모래폭풍은 점차 형태를 갖춰갔다. 사암으로 만든 벽과 천장까지 닿는 석상 모두 익숙한 광경이었다. 석상들은 가슴에 지팡이를 품고 있었고, 금으로 덮인 그들의 눈은 영원히 그들 밑에 있는 자들을 지켜봤다. 이곳은 바로 슈리마의 마법사들이 수련하는 곳, 송골매의 신전이었다.
제라스의 어렸을 적 동료들은 조상들이 지켜보는 아래에서 서로 대련하고 있었다. 그들은 불과 얼음, 그리고 다른 형태의 마법을 칼날의 형태로 바꿔 무기처럼 다뤘다. 이것이 바로 그들, 마법사들의 임무였다: 마법을 통달한 자들이 슈리마의 적들을 짓밟는 데 앞장서는 것.
제라스는 신전의 벽에 붙은 채 동료들의 마법을 지켜봤다. 순수한 마법만큼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없었다. 마법의 희미한 빛이 그를 부르는 듯 싶었으며, 제라스는 그 마법의 근원에는 수많은 비밀이 존재함을 직감하고 있었다.
"제라스, 왜 다른 애들과 함께 수련하지 않아?"
그 목소리가 제라스의 집중을 깨뜨렸다. 그의 옆에는 동료 마법사 중 하나인 타비아가 서 있었다. 그녀의 웃음을 보자 제라스는 순간 말을 더듬었다.
"아……. 음……. 관점의 차이라고나 할까."
"넌 슈리마의 마법사야," 타비아가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우린 같은 길을 걷고 있어. 무슨 차이가 있는 거야?"
"그들이 마법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관점," 제라스는 다시 시선을 다른 수련생들에게 돌리며 대답했다.
"그들은 그것을 무기로 다루지만, 마법을 이해하지 못해. 마법을 제어하기 위해 힘을 쓸수록, 자신과 마법 간의 연결은 약해질 수 밖에 없어."
"마법은 혼돈 그 자체야. 너도 잘 알잖아. 마법사의 힘 없이는 단지 그것을 무엇을 파괴하느냐 파괴하지 않느냐만을 조종할 수 있을뿐이야."
"그렇지. 하지만 순수한 힘을 원한다면……."
제라스는 손을 펼쳤다. 그의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에서는 남색의 불꽃이 생겨났다. 그는 그 불꽃을 원하는 대로 변형할 수 있었지만, 제라스는 단지 그것이 불타게 놔두었다.
불꽃은 스스로 커져갔다. 머지 않아 그 불꽃은 그의 손 안에서 불타고 있었고, 그 순수한 힘은 제라스의 심장에 흐르는 듯 싶었다.
"단지 그릇이 필요할 뿐이지."
제라스는 불꽃에서 시선을 뗐고, 타비아가 자신의 마법이 아닌 자신을 여전히 쳐다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다시 웃었고, 그녀의 미모는 잠시나마 제라스의 주의를 마법에서 분산시켰다. 그들 사이에 있던 불꽃은 더 강하게 타올랐고…….
……다음 순간, 그의 주변이 흐트러졌다.
신전은 어두워졌고 타비아의 얼굴은 그의 시선에서 사라졌다. 순간적으로 제라스는 소환사들의 술수와 전쟁 기관을 기억해냈지만, 그를 엄습하는 고통은 또다른 기억을 끄집어냈다.
순수하고 무한한 힘이 그의 육체 내부로부터 그를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제라스는 자신의 중심부에서 불타는 고통을 느꼈다. 너무나도 뜨거운 그 불길은 그의 육체를 벗어나, 그를 파멸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마법은 그릇이 필요한 법이지만, 나약한 인간의 육체로는 한계가 있었다.
제라스는 고통에 얼굴을 찡그렸다.
"이 유한한 육체 따위로는 나를 구속할 수 없다."
그는 손을 내밀었고, 그의 손끝에서는 마법의 불꽃이 튀어나와 허공에 룬 문양을 만들었다.
눈부시도록 불타는 백색 마법은 머지 않아 그를 감싸는 돌풍으로 변했다. 그 위력으로 인해 동상 하나가 부서졌고, 그것이 조각나자 신전의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라스는 자신의 모든 힘과 의지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문은 그의 제어를 벗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혼돈 속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라스! 그만둬!"
타비아.
제라스는 몸을 돌려 그녀를 응시했다. 타비아는 한 조상의 동상 앞에 서있었다. 그녀의 검은 머리는 창백하면서도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과 대조를 이루었다.
"이래서는 안 돼." 그녀가 불타는 눈빛으로 말했다. "이 주문은 너를 집어삼키고 말거야. 벌써 넌 죽어가고 있고, 넌 그것이 너를 죽이도록 방조하고 있어!"
제라스는 쉰 목소리로 애원하듯 말했다.
"타비아, 제발, 넌 이해하지 못해……."
제라스의 마법은 소용돌이치며 폭풍처럼 그들 위에서 고동쳤다. 제라스는 이미 그것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음을 인지했다.
타비아 역시 애원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넌 이런 걸 필요로 하지 않아. 지금이라도 멈추면 너를 치유할 수 있어. 다시 살 수 있어. 내가 널 도와줄게."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돌아와."
제라스의 의지가 약해졌다. 어쩌면 그녀가 옳았는지도 모른다. 순간적으로 제라스는 마법사들과 마법,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입힌 고통으로부터 떨어진, 자신의 집에서 쉬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것이 그를 내면으로부터 갉아먹었던 것을 생각하면, 어쩌면…….
타비아는 뭔가를 다시 말하려고 했지만, 제라스는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었다. 그녀 뒤에 있던 동상이 흔들리더니 무너지기 시작했다.
"타비아! 안돼!"
타비아는 비명을 질렀고, 나머지 동상들과 신전의 벽이 제라스의 주문을 이기지 못한 채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그의 주문을 조종할 수 없었다. 혼란의 중앙에서 제라스는 얼굴을 손에 파묻으며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순간이나마 마법으로부터의 탈출을 생각해 봤던 제라스에게는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주문을 멈추기에는 이미 늦어있었다. 이제 그 주문은 그를 집어삼킬 것이 자명했고, 그는 공포에 몸을 떨었다. 그의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의식을 마무리짓는다면 모르는 일이었다.
제라스는 잠시 망설였다. 그의 일부는 죽음을 반겼지만, 더 큰 자신의 일부는 자신이 왜 그만큼 마법을 연구했는지를 기억했다. 다른 마법사들을 제한하는 나약한 육체의 구속을 벗어나, 더 위대한 뭔가가 되기 위해 그만큼 연구해온 것이 아니었던가?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이것뿐이었다. 그의 육체를 파고드는 나약함을 뿌리치며 제라스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나는 영원한 존재가 되리라……. 아니면 죽을 것이니라.'
그는 팔을 머리 위로 뻗었고, 그의 머리 위에 있던 마법 덩어리는 다시 어느 정도 일정한 형태를 되찾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덩어리는 꾸준히 팽창하여 나머지 동상들과 신전의 벽을 허물었다. 자신 주변에 무너지는 신전으로부터 시선을 돌린 채, 제라스는 자신의 모든 힘을 동원해 그 주문을 자신 안으로 끌어들였다.
한 순간, 그 마법의 혼돈 속에서 그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창백하고 야윈, 나이에 비해 너무나도 늙어 보이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주문력이 그를 덮쳤고, 제라스의 눈은 공포로 가득차 있었다.
다음 순간, 혼돈이 가라앉았고 제라스는 회고실에 돌아와 있었다. 얼굴을 가린 소환사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 방대한 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당신은 죄수나 다름없군."
"사소한 애로사항일 뿐이다." 제라스의 대답은 방 전체 내부에 울려퍼졌다.
"하지만 그 주문을 제어했을 때 생각했던 미래는 아니었겠군. 제라스, 그 결정을 후회하는가?"
"후회하지 않는다."
소환사는 두건 내에서 제라스를 노려봤다.
"자신, 자신의 종족, 자신이 사랑하던 여인……. 그 모든 것을 힘을 위해 희생했지만, 이제 그 힘에 닿을 수도 없는 처지군."
"앞서 말했지만, 사소한 애로사항일 뿐이다. 난 자유를 되찾을 것이다."
"왜 리그에 합류하고 싶어하는가, 제라스?"
이 질문에 제라스는 잠시 멈췄다.
"이 감옥은 슈리마의 마법사들이 내가 추구하던 것이 뭐였는지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다시는 그 누구도 나의 목적을 오해하지 않을 것이다. 이 리그에서의 활동은 그것에 대한 일종의 선의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소환사는 그를 잠시 응시한 뒤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을 대로. 속마음이 드러나니 기분이 어떤가?"
제라스는 몸을 돌렸다.
"난 더 이상 당신이 본 순진한 견습생이 아니다. 내 과거는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