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프 퓰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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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퓰리처(Joseph Pulitzer, 1847년 4월 10일 ~ 1911년 10월 29일)

한때 미국 저널리즘계에서 어마어마했던 아저씨. 그리고 퓰리처상의 창시자.

1 개요

미국 저널리즘의 풍운아. 헝가리계 미국인으로, 원래 이름은 조지프 폴리처이다. 이름이 왜 바뀌었는지는 아래 문단 참조.

2 생애

2.1 젊은 시절

1864년 청운의 뜻을 품고 미국으로 이주했지만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찼다. 그를 태운 배가 미국으로 입항하기 하루 전, 선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몰래 엿듣고 자신이 취업사기를 당했다[1]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것. 그는 그 길로 대서양에 뛰어들어 항구까지 3시간동안 헤엄을 치며 도망쳤다. 이 때 다리에 쥐가 나서 빠져죽을 뻔했는데 우연히 항구에 떠다니던 나무토막을 붙잡고 살아남았다고 한다.생존왕 퓰리처

폴리처는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이라 군대(북군)에 입대하여 자신의 신원을 증명하고 호구지책도 마련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 때 그의 입대원을 처리하던 인사계 상사가 그만 이름을 너무 휘갈겨써서 이름이 졸지에 '조지프 파울레체스'가 되고 말았던 것.(...) 이후 이름을 약간 짧게 줄이고 미국식으로 읽어 현재 우리가 아는 '조지프 퓰리처'라는 표기가 되었다.

2.2 중년기 : 내 이름은 퓰리처, 신문왕이 될 사나이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인 1868년, 세인트루이스에 정착하여 독일계 신문인 베스틀리체 포스트의 기자로 들어가 고생을 죽도록 한다. 그러나 곧 기자로서의 능력과 두각을 나타내어 이듬해에는 미주리 주 의원으로 당선, 1873년에는 아예 자신이 몸담았던 베스틀리체 포스트의 경영자가 되었다.

1878년 퓰리처는 파산 직전의 '세인트루이스 디스패치'를 인수하고 이를 '이브닝 포스트'랑 합병, '세인트루이스 포스트 디스패치'가 되었다. 퓰리처는 기자로서 다져진 능력을 바탕으로 하여 언론사 경영자의 수완을 십분 발휘했고, 이내 세인트루이스 포스트 디스패치는 지역에서 제일 잘 나가는 신문이 되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1883년, 역시나 파산 직전이던 '뉴욕 월드' 지를 인수한다. 퓰리처는 '재미없는 신문은 죄악이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갖고 센세이셔널한 보도와 공격적 마케팅을 통해 몇 년 사이에 뉴욕 월드를 전미 발행부수 1위의 신문으로 만들어버린다.

당시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자유의 여신상이 프랑스에서 제조되었지만 미국까지 운반하고 재조립할 비용이 없어 세월아 네월아 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이를 미국에 옮겨 와 뉴욕항에 세운 것도 바로 '뉴욕 월드'지의 모금 캠페인 덕분이었다. 당시 퓰리처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대목. 이 형님이 한때는 어마어마했거든

2.3 장년기 : 옐로우 저널리즘에서 패배하다

'뉴욕 월드'는 미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신문이 되었지만 몇 년 후 강력한 도전자의 개싸움 추격을 받게 된다.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경영하는 '모닝 저널'이 싸움을 걸어온 것이다. 허스트는 꽤나 비열한 방법을 썼는데 사실 뉴욕 월드도 선정적이기로는 사돈남말할 것 없었다 바로 재벌이었던 허스트 자신의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신문값 인하 경쟁을 주도해서 한때 1부당 1센트까지 내려버렸고, 동시에 뉴욕 월드에 근무하는 민완 기자들을 무차별적으로 빼가기 시작했다. 현질에는 장사 없습니다 고갱님

특히 '뉴욕 월드'에 연재되던 인기만화 "호갠스 알레이"의 만화가가 '모닝 저널'로 이직하게 된 사건은 두 신문의 진흙탕 싸움에서 결정적 순간으로 꼽힌다. "호갠스 알레이"의 연재가 중단되고 '뉴욕 월드'의 판매부수가 급감하자 할 수 없이 다른 만화가를 구해 와서 신작을 연재했는데 그 이름이 바로 "황색 소년"이었던 것. "옐로우 저널리즘"(황색 저널리즘)이라는 표현의 원조는 바로 이 신문 만화 이름에서 유래했다.

이러한 황색언론 경쟁을 비판해오던 잡지 더 네이션 The Nation의 편집인이었던 에드윈 고드킨Edwin L. Godkin, 1831~1902은 미국-스페인 전쟁이 일어나기 두 달전 1898년 2월 24일자에 다음과 같이 썼다.

미국 언론의 역사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것 가운데 지난 주에 이 두 신문이 한 행동만큼 수치스러운 것은 없다. 사실을 전반적으로 왜곡시키고, 사람들을 흥분시킬 목적으로 이야기를 고의적으로 지어내고, 심지어 이런 지어낸 이야기가 무색할 정도로 엉터리 없는 제목을 달고, 이 모든 것이 결합되어 발행 부수가 가장 많은 이들 신문의 이슈가 사회 전체로 전파되고 있다. 단순히 더 많은 신문을 팔기 위해 인간이 이런 잘못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말할 수 없이 부끄럽다.

―강준만, <황색 저널리즘’은 어떻게 탄생했나? _ 퓰리처와 허스트의 신문 전쟁>에서

2.4 말년기 : 신문왕의 몰락과 퓰리처상의 제정

허스트의 물량공세로 인해 순식간에 1인자에서 콩라인으로 내려온 퓰리처는 심적 부담과 스트레스 등으로 홧병이 나서 1890년경부터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특히 시력저하가 심각해 말년에는 끝내 시력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1903년경부터는 일선에서 은퇴하다시피 하여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정양이나 하는 신세가 되었다.

평생을 미국 저널리즘계의 풍운아로 살아온 퓰리처였지만 말년에는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고 대오각성이라도 한 것인지, 1911년 타계하기 전까지 언론계와 관련하여 여러 활동을 펼쳤다. 컬럼비아 대학의 신문학과는 그의 후원으로 설립되었고, 사망 후에는 그의 유산을 바탕으로 50만 달러의 기금을 조성하여 그 해의 특종 보도를 한 미국 언론인에게 주는 상을 제정했다. 이것이 바로 퓰리처상. 퓰리처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추가바람

  1. 이민 모집 광고를 보고 응모했으나 실은 격오지로 가는 준 노예취급 일당노동자 모임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