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1 언론 매체의 기자

記者. Reporter.

사회 각지에서 일어나는 일을 각종 언론 매체를 통해 세상에 알리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

자세한 내용은 기자(직업) 참조.

2 이집트의 지명

الجيزة‎ (Giza)
표준 아랍어 발음으로는 지자이지만 이집트 방언으로는 기자이다. 이집트 나일 강 중류에 위치한 도시로 수도 카이로와 나일강을 사이로 두고 강의 서쪽은 기자, 강의 동쪽은 카이로로 나뉘어있다. 즉 카이로 도시권에는 포함되지만 행정적으로는 엄연히 독립되어 있다. 쿠푸의 대 피라미드를 포함한 3대 피라미드, 대 스핑크스가 있는 지역으로 이집트 관광의 성지이다.

이집트에서는 일반적으로 기자를 카이로에 포함해서 생각하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카이로 항목에 서술되어있다.

3 인물

기자조선의 역대 국왕
단군왕검1대(?) 기자부왕
왕호미상 / 기자왕(箕子王)
기(箕)
자(子)
생몰년도? ~ ?
재위년도? ~ ?
제 1대 기자조선의 국왕
이전 국왕단군(단군조선?)
다음 국왕40대손 부왕 기부

기자(箕子, ? ~ ?)

상나라의 왕족. 주왕의 삼촌 또는 서형(庶兄)이었던 걸로 전해진다. 본명은 서여(胥餘) 또는 수유(須臾)이며, 상나라의 왕성이 자(子)였으므로 풀네임은 아마 자서여(子胥餘) 또는 자수유(子須臾)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자는 본명이 아니라 작위명이다. 상나라 영토의 북쪽 끝으로 토방(土方), 귀방(鬼方) 등으로 불릴 정도로 북방 이민족의 세력이 강성하던 곳인 '기(箕)땅에 봉해진 자작(子爵)'이라는 의미를 갖고있다.[1]

한국인에게는 기자조선설로 유명한 사람. 관련 논쟁으로 인해 실재 그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춘추전국시대 문헌인 『상서』 · 『주역』 ·『논어』 등에 공통적으로 현인(賢人)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실재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언어학적 학설에 따르면 고대 한국어로 왕이라는 뜻의 '길지(吉支)'라는 말이 후대에 내려오면서 중국의 기자와 혼동되어 기자가 조선왕이 되었다는 식으로 오해된, 일종의 민간어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조선 선조대에 발간된 광주판 《천자문》에서 王자에 대해 '긔ㅈㆍ. 왕'이라는 훈과 음을 달고 있는 것이 그 증거. 해당 내용은 어라하 문서 참조 바람.

3.1 중국에서의 행적

춘추전국시대 문헌에 나타나는 기자의 주요 행적은 대략 다음과 같다.

기자는 상 말기 주왕이 사치를 부리는 것을 보고 주왕에게 간언했으나 주왕은 기자를 옥에 가두었고[2], 역성혁명으로 주나라가 세워지면서 주무왕이 기자를 풀어주었다.[3]. 이 시점 이후 기자는 전설적인 통치의 방법인 홍범 9주를 무왕에게 전해주었다고[4] 하는데, 이는 이전부터 전해지던 현인(賢人)으로서 기자의 모습을 투영한 후대의 술작이라는 설도 있다.

그 외에 입조했다는 설이 『죽서기년주무왕편에 짤막하게 보이며,[5] 이후에도 주무왕이 그를 박해하자 기자가 미친 척을 했다든가 기자가 상서로운 일을 예측했다거나 하는 몇 가지 설이 더 있으나 기자가 현인임을 강조하기 위한 구절로서 크게 중요하지 않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3.2 고조선의 왕이 되었나? : 기자동래설, 기자피봉설

한중 사학계에서 논란이 되는 구절은 기자동래설과 기자피봉설이다. 『상서대전』에서는 기자가 풀려난 이후 주가 세워지는 것을 보고서는 조선으로 몸을 피했으나(기자동래설), 무왕이 이를 듣고 기자를 조선에 봉하여(기자피봉설) 기자가 내조하여 홍범을 전했다고 한다. 반면 『사기』 송미자세가에서는 기자가 주 무왕에게 홍범을 가르친 이후 기자는 동쪽으로 떠났고(기자동래설), 주 무왕은 이에 기자를 조선에 봉했으나(기자피봉설) 기자는 주에 입조하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 한국 사학계에서는 문헌 사료로 볼 때 기자동래에 관한 기록이 기자 당대보다 800년 이상 이후의 시점에서야 등장하며 그 또한 중국이 조선을 인식하고 복속시키려 한 진 대 · 전한 대임을 들어 후대의 사료 윤색으로 보고 이를 부정하고 있다. 다만 제한적으로 중국계 유이민의 흔적으로서 기자 관련 기록이 부각되었다든가, 『위략』에서 조선이 주를 받들기 위해 연에 맞서 왕을 칭하고 연을 침공하려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이 기자의 후예를 자칭해 정통성을 얻으려 했다는 주장 등은 제한적으로 나온 바 있다. 반면 중국 사학계에서는 '기자명이(箕子明夷)'를 '기자가 이(夷)를 교화했다(明)'는 식으로 『주역』 명이편을 해석하여 이를 중국의 조선 방향 통치로 주장하는 의견도 일각에서 제시된 바 있으나 앞서 언급했듯 이는 괘의 이름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이 구절을 한국 사학계가 신뢰하지 않는 이유는 주 대에 중국계 청동기가 도착한 한계는 하북 ~ 요서 지방에 불과하기 때문. 랴오닝성 카줘현(객좌현)에서 기(㠱) 명문 그릇이 발굴되어 기자가 요동 진출했다는 주장에 힘을 실는거 아니냐는 말도 나왔지만, 이 그릇 또한 하나의 발굴지에서 다양한 명문의 그릇들이 동시에 발굴되었다는 점[6], 기(㠱) 명문 그릇이 다른 곳에서도 출토되었다는 점 등으로 인해 기자로 추정되는 '기(㠱)'의 활동 지역인지는 불분명하다.

이렇듯 현대 사학계에서는 기자조선설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나,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전근대 왕조와 사학계에서는 기자조선설을 뚜렷히 인식하고 이를 사실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위략』에서 조선이 기자의 후예였다는 설은 그 사실성이 의심되나, 구당서에 고구려가 기자신(箕子神)을 섬긴다는 기록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기자에 대한 숭배는 고대부터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단, 구당서에 자세한 기록이 없어서 이 기자신에 대한 숭배가 어떠한 차원에서 이뤄졌는지는 자세히 알기 어렵다는 난점이 있다. 다소 특이한 점으로는, 구당서의 기록에서는 고구려의 기자신앙을 중국사서에서는 음사로 분류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음사란 이민족의 토착신앙을 중국 입장에서 보고 자기네와 다르다고 다소 폄하하는 용어이다.

3.3 고조선 이후 행적

이후 기자에 대한 기록은 중국의 책봉 기록과 최치원의 양위표 등에 나타나며, 평양을 수복한 고려 대에 들어 숙종 때인 1102년 평양에 기자사당이 세워진 것을 기점으로 하여 그 이후와 조선시대에 크게 숭배받았다. 이 때 평양에 조성된 것이 기자묘 · 기자정(井, 우물) · 기자정전(井田) 등의 유적인데, 단군릉이라고 전해지는 무덤도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것으로 기자의 사실성을 증명할 수는 없다. 오히려 중국 측에서는 양(梁)나라 몽현(蒙縣) 지방에 기자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한다. 한반도 북부지역의 단군신화 중에 이를 뒷받침할 만한 전설이 내려오는데 환웅이 거시기가 거대해서 짝이 없자(...) 곰이 자청해 관계를 가져 단군을 낳고, 그 다음으로 여우와의 관계에서 기자를 낳았다는 전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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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기자릉(箕子陵). 평양 기림리에 있는 기자의 가묘. 중국 은(殷)나라의 기자가 조선으로 건너와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이른바 기자동래설에 따라 후대에 만들어진 무덤이다.

그러나 기자조선설은 기자조선 - 삼한(준왕) - 신라 - 고려 - 조선으로 이어지는 중화사상적 정통론으로 수용되어, 소중화 사상적인 입장에서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크게 숭앙받았다. 일제강점기에 기자에 관한 설이 만선사관에 입각한 식민사관으로 악용되었음을 생각하면 아이러니.

맥수지탄의 유래가 이 사람이기도하다.
  1. 이와 달리 공자,맹자에 붙은 자는 선생님이라는 뜻의 부자(夫子)의 약자로 작위가 아니다.
  2. 『논어』 미자편, 『죽서기년』 신제편, 『순자』의병 · 정론편
  3. 『상서』 주서 무성편, 『순자』대략편
  4. 『상서』 주서 홍범편.
  5. 『주역』 명이편에 기자명이(箕子明夷)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기자가 때에 맞춰 몸을 피한 것이 『주역』 명이괘와 같다는 뜻이지 문장으로 해석할 것은 아니다.
  6. 즉 한 집안에서 제사를 지낸 흔적이라고 보기보다도 모종의 이유로 여러 지방의 청동기들이 한 곳에 모이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