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차(당나라)

한의 역대 황제
건국초대 한원천황 주차멸망
당 제국 태위
전임 곽자의주차
781년~784년
후임 이회광

朱泚
(742 ~ 784)

당나라 중기의 태위이자 반란군이다.

유주, 창평사람으로 동생 주도(朱滔)와 함께 유주노룡절도사 이회선 휘하 부장이었다. 772년, 주도는 노룡절도사가 되어 입조하여 당에 신임을 얻었으나 당덕종이 번진의 세습을 근절하고자 강경한 정책을 내놓았는데 하나는 재정운용을 막는 양세법과 절도사 세습을 막는 것이었다. 성덕절도사 이보신이 죽으니 그의 아들 이유악이 유후로 승진하는게 관례상 맞으나 조정에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필경 782년, 주도는 분노하여 위박(魏博), 성덕(成德)과 동맹을 맺어 당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주차는 풍익농우절도사에서 파직되었고, 체포되어 장안으로 압송하였다. 그런데 경원병란(涇原兵亂)이 일어나 당덕종이 봉천으로 피하자 주차를 황제로 추대하고 국호를 진(秦), 연호를 응천(應天)이라 하였다. 이 해에 국호를 한(漢)으로, 연호를 천황(天皇)으로 개칭하였다. 이때 아들인 주도도 주차의 세력에 합세하였다.

주차의 군대가 봉천을 공격하자 명장 혼감이 이를 막고 원군을 기다렸다. 곧이어 영무절도사 두희전, 대휴안, 시상춘 등이 응원왔으며 삭방절도사 이회광이 위현에서부터 달려와 예천에서 적을 포위하니 달아났다. 784년, 주차의 반란을 두고만 볼 수 없었던 조정은 급히 어사대부 우기(于頎)를 경주로 보내 토번을 위무하고 군수지원을 알아보도록 하였다. 당시 토번은 패권국이었기 때문에 당의 지원을 허락하였고 이에 토번은 사신을 보내어 반란을 평정할 것을 당과 논의하였다. 당 조정은 어사중승 심방을 입번계회 및 안서와 북정 선위사에 임명하였다. 4월에는 혼감이 토번의 논망라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주차의 장수들을 무공의 무청천에서 대파하고 만여 급을 참수하였다. 이성(李晟) 또한 군대를 이끌고 경사를 수복하자 팽원으로 달아난 주차는 부장에 살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