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한 연구』는 한국 문학이 박상륭을 잃지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과 즐거움을 맨 먼저 전해주었다. 나는 그의 소설을 거의 일주일에 걸쳐서 정독을 했다. 그리고 완전히 감동했다. 그것이야말로, 내 좁은 안목으로는 70년대 초반에 씌어진 가장 뛰어난 소설이었을 뿐 아니라, 『무정』 이후에 씌어진 가장 좋은 소설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김현(문학평론가, 1942~1990)
1 개요
소설가 박상륭이 1975년 발표한 장편소설. 한국 관념소설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걸작이다.
2 구조
해골을 들고 걸사를 자처하며 살인을 포함한 막무가내의 구도 수행을 행하는 사내가 있다. 아마도 우선은 이 사내가 선불교의 육조대사 혜능일 것이라 추측하는 것이 순서겠다. 오조 홍인을 죽이고 육조가 된 중국 선승이 바로 혜능이었단 사실은 이런 추측에 신빙성을 더한다. 그런데 그의 나이 서른 셋, 그리고 불모의 광야에서 40일을 견뎌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이 사내는 혜능이면서 예수가 된다. 광야에서 40일을 온갖 유혹과 협박을 물리치며 견딘 이는 바로 예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원하지도 않은 채로, 마치 무슨 운명의 덫에라도 걸린 것처럼 자신의 스승이자 아버지를 죽이기도 한다. 이쯤 되면 혜능과 예수의 얼굴 위로 오이디푸스의 얼굴이 겹친다. 그가 바다와 수도부로 상징되는 모성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이유도 짐작이 간다. 이뿐인가? 그의 살인을 불사하는 막무가내의 도 닦기, 그것은 아무래도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연상하게 하고, 한편으로 그가 여러 가지 형상과 행위를 통해 음과 양의 조화에 대해 말하고 실제로 그 둘의 조화를 성행위로서 실천해 보일 때, 그는 주역의 신봉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 소설에서 거듭되는 젊은 촌장에 의한 늙은 촌장 살해의 모티프는 프레이저가 황금가지에 모아놓은 그 많은 '숲의 왕' 이야기, 곧 부왕 살해 서사를 연상케 한다. 박상륭 소설이 품고 있는 사유의 넓이가 이와 같다. 『죽음의 한 연구』 속에는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는 신화와 종교, 철학적 사유가 서사의 옷을 입고 소설 작품을 통해 설파된다. 사유의 주제는 '죽음'이다. 죽음이라는 주제가 '나'라는 이 위대하고도 복합적인 인물을 통해 여러 방식으로 사유되고 해부되면서,종래에는 그 완성을 본다.-김형중(문학평론가)
이게 무슨 소리야
소설을 읽어보기 전에 먼저 구성을 이해하는 게 도움이 될 수밖에 없는 게, 위에서의 무지막지한 고전들에서의 차용이 소설 자체의 토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주인공이 생활하는 장소인 유리(羑里)의 이름부터가 주나라 문왕이 유배된 곳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 외에 언급된 것들을 따지자면
- 주인공이 유리의 오조(五祖) 촌장을 죽이고 스스로 육조(六祖) 촌장이 되는 과정은 각각 중국 불교 선종의 오조와 육조 대사인 홍인(601~674)과 혜능(638~713)을 상징한다. (이 선종의 창시자가 달마대사다) 작품의 속편격인 『칠조어론』에서의 '칠조'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작품 안에서의 등장인물인 촛불중을 칠조로 설정하기도 한다.
- 주인공이 유리에 처음 들어와서 죽을 때까지의 기간인 40일은 예수가 황야에서 40일 동안 유혹을 견뎌내는 사순절에서 따온 것이다. 주인공의 나이가 33살이라는 점도 예수의 33살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 주인공의 마른 늪에서 고기를 낚는다는 이미지는 아서왕의 전설에서 등장하는 성배 찾기나 어부왕 전설에서 보여지는 것인데, 어부왕의 성불구로 인해 황폐해진 땅처럼 '마른 늪'에서 고기를 낚아내는 재생의 과정을 주인공이 실현하려고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 작품 곳곳에서 성교의 과정이 굉장히 중요하게 묘사되는데, 이는 음/양의 합일이 성교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예가 된다.
-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작품의 세계관이 심리학자인 카를 융의 세계관과 다소 비슷하다. 실제로 작가가 캐나다에서 개작을 하는 동안에 융의 철학을 배우게 됐고 그것을 소설에도 옮겼다고 한다.
3 문체
공문(空門)의 안뜰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깥뜰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수도도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살이의 정도에 들어선 것도 아니어서, 중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중(俗衆)도 아니어서, 그냥 걸사(乞士)라거나 돌팔이중이라고 해야 할 것들 중의 어떤 것들은, 그 영봉을 구름에 머리 감기는 동녘 운산으로나, 사철 눈에 덮여 천년 동정스런 북녘 눈뫼로나, 미친 년 오줌 누듯 여덟 달간이나 비가 내리지만 겨울 또한 혹독한 법 없는 서녘 비골로도 찾아가지만, 별로 찌는 듯한 더위는 아니라도 갈증이 계속되며 그늘도 또한 없고 해가 떠 있어도 그렇게 눈부신 법 없는데다, 우계에는 안개비나 조금 오다 그친다는 남녘 유리(羑里)로도 모인다.
소설의 첫 문장. 이런 문장들이 소설이 끝날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
딱 보면 알겠지만 문장들이 작가가 보통 신경을 써서 쓴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소설가로 데뷔하기 전 습작만 400여 편이었다고 할 정도로 연습을 많이 한 작가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운율, 단어 사용, 독창성 등에 있어서 거의 완벽에 가깝다. 읽기 어려워서 그렇지
그러며, 내가 저 소리에 의해 병들고, 그 소리의 번열에 주리틀려지며, 소리의 오한에 뼈가 얼고 있는 중에 저 새하얗게 나는 천의 비둘기들은 삼월도 도화촌에 에인 바람 람드린 날 날라라리 리루 루러 러르르흐 흩어지는 는 는 는느 느등 등드 드등 등드 드도 도동 동 동도 도화 이파리 붉은 도화 이파리, 이파리로 흩날려 하늘을 덮고, 덮어 날을 가리고, 가려 날도 저문데, 저문 해 삼동 눈도 많은 강마을, 강마을 밤중에 물에 빠져 죽은 사내, 사내 떠 흐르는 강흐름, 흐름을 따라 중모리의 소용돌이, 자진모리의 회오리 휘몰아치는 휘모리, 휘몰려 스러진 사내, 사내 허기 남긴 한 알맹이의 흰소금, 흰소금 녹아져서, 서러이 봄꽃 질 때쯤이나 돼설랑가, 돼설랑가 모르지, ……계면(界面)하고 있음의 비통함, 계면하고 있음의 고통스러움, 계면하고 있음의 덧없음이, 그리하여 덧없음으로 끝나고, 한바탕 뒤집혔던 저승이 다시 소롯이 닫겨버렸다.-주인공이 가야금 소리를 듣는 부분.
뭐, 뭐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