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함 사건

1 소개

1926년 3월 국민당의 권력구도를 통째로 바꿔버린 정변. 3.20 사건, 3.20 정변이라고도 부른다. 누가 시작한 일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적으로 최고 수혜자였던 장제스가 유력시된다.

2 배경

장제스는 랴오중카이 암살사건 수사, 2차례의 동정, 군벌 숙청 등을 통해서 승승장구했고 높은 명망을 쌓아 국민당의 거물로 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장제스의 성공은 동시에 그를 시기하는 많은 정적들을 양산했고 국민당 우파들은 그를 왕징웨이와 소련의 똘마니로 보고 증오했으며 왕징웨이를 비롯한 국민당 좌파는 장징강을 비롯한 우파와 완전히 연을 끊지 않은 그의 성분을 의심했다. 장제스의 비서가 된 천리푸는 장제스가 조울증과 분노 조절 장애에 시달린다고 평가했을 정도였다. 장제스는 왕징웨이가 자신을 몰아내려 한다고 의심했고 장제스와 왕징웨이의 관계는 연일 악화되었다. 게다가 새로운 소련 고문인 쿠이비셰프가 왕징웨이를 지지함에 따라 장제스는 소련의 지지를 잃어버릴 것도 두려워했다. 장제스는 이러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소련행을 계획했으나 천리푸가 모스크바로 간 사이에 총사령관 자리가 누구의 것이 되겠냐고 물으면서 장제스는 소련행을 포기했다.

국민당의 모든 군대 내의 총 당대표로 임명된 왕징웨이는 정치위원의 권력을 강화하겠단 지침을 발표했는데 장제스는 이것이 자신의 영향력을 제거하려는 음모로 보고 더욱 불안해했다. 설상가상으로 보로딘과 블류헤르가 소련 대표들과 만나 중국의 미래에 대해 회견을 열기 위해 자리를 비우자 왕징웨이와 자신의 사이의 중재자인 보로딘을 잃어버린 장제스는 반쯤 미치고 말았고 소련이 자신을 버리고 펑위샹과 합작할 것이라는 망상에 시달렸다. 거기에 좌우파를 망라한 정적들의 비난과 암살시도에 장제스는 조만간 자신을 향한 칼날이 내려올 것이라 확신하게 되었으며 맞기 전에 친다는 발상을 하게 되었다. 장제스는 황푸군관학교에서 충성심이 의심스러운 장교들과 공산당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기 시작했다.

3 발단

1926년 3월 18일 왕징웨이의 아내 천비쥔이 장제스의 집에 두시간 동안 다섯 차례나 전화하여 장제스의 일정에 대해 물은 일이 발생했다. 천비쥔은 매우 부유한 상속녀로 도도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고 그런 천비쥔의 연이은 전화에 장제스의 아내인 천제루와 장제스는 모두 의아하게 여겼다. 그리고 장제스의 명령도 없이 중산함이 황푸 섬으로 향하고 있단 보고가 들어왔다. 중산함 함장 리즈룽은 장제스의 명령을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장제스는 그런 명령을 공식적으론 내린 적은 없었다. 3월 18일에서 3월 19일로 넘어가는 자정, 공산당원 후궁몐이 찾아와 장제스와 긴급한 대화를 나누었다. 아침이 되자 다시 정체불명의 전화가 장제스의 행방을 추궁했고 장제스는 급히 집을 뛰쳐나갔다. 장제스가 돌아온 뒤 리즈룽이 전화를 걸어 중산함을 광저우로 회항하게 했는지를 물었지만 장제스는 그런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리즈룽은 돌아갔지만 군함의 증기를 끊지도 않고 무기도 전투대형으로 배치해 놓았다.

3월 20일 장제스는 시멘트 공장에 기지를 차렸고 자신의 친위부대를 동원해서 기차역과 중앙은행을 포위했다. 장제스의 부하들에 의해 중산함이 점거되었고 함장 리즈룽도 체포되었다. 파공위원회 총본부가 급습당해 1천명의 규찰대의 무장이 해제되었으며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공산당원들도 모두 체포되었다. 소련 고문단 역시 보호 구금이란 명목 하에 체포되었다. 쿠이비셰프는 급히 장제스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수취인 부재라는 이유로 돌아왔다. 이른바 3.20 사건, 3.20 정변이었다. 장제스는 당뇨병으로 와병한 왕징웨이를 찾아가 이것이 공산당에 대한 행동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3월 23일 그는 왕징웨이가 국민당에 충성하지 않고 공산당에 충성했다고 그를 비난했다. 중앙집행위원회는 국민당의 좌파 동지들은 잠시 물러나야 한다는 장제스의 제안에 동의했다.

순식간에 온 국민당에 자신의 힘을 보여준 장제스는 정변을 신속히 마무리했다. 파업 노동자들을 포위한 군대를 철수시킨 다음에 노동자들에게 사과의 뜻을 전했으며 리즈룽 등을 석방했고 리즈룽을 체포한 군관을 대신 체포했다. 장제스는 중국 공산당이 소련의 개가 되어 민족을 배신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반대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장제스는 러시아인들의 구금을 풀었지만 쿠이비셰프 등에게 중국을 떠날 것을 종용했다. 국민당 정치위원회는 국공합작은 계속 되어야하지만 ‘의견이 맞지 않는 소련 동지’들에게 중국을 떠나라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3월 24일 쿠이비세프 등 세명의 고문이 추방되었고 3주 후에 12명이 더 쫓겨났다.

장제스는 왕징웨이와 함께 관례적으로 ‘권한에 벗어난 일’을 한 것이 대해 자아비판을 했지만 이 모든 것을 왕징웨이의 탓으로 돌렸고 처벌을 달게 받겠다는 말로 일관했다. 왕징웨이는 병세를 이유로 사직하여 광저우를 떠났다. 장제스는 쑹쯔원을 시켜 왕징웨이에게 돌아와 달라고 연기를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4월 1일 왕징웨이는 프랑스행이 결정되었고 장제스에게 자신의 관인을 내주었다. 모스크바로 갔던 후한민도 돌아왔다. 일부 우익 인사들은 그가 국민당의 새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렇게 놔둘 장제스가 아니었다. 장제스는 후한민을 압박하여 홍콩으로 내쫓았다. 공교롭게도 왕징웨이와 같은 배를 타고 말이다. 5월 1일에 장제스는 군대를 풀어 노동조합의 시위를 저지했다. 동시에 그는 혁명에 대한 찬양 연설과 더불어 영국 파업 광부들과 연대를 선포하는 이중적이고 교활한 면모를 보였다.

4 반응 및 분석

이 사건으로 국민당 우파들도 놀랐지만 장제스의 성분에 대해 보증하고 있던 보로딘과 장제스를 영입해야 한다던 좌파 인사들은 더 놀랐다. 장제스는 중산함 사건이 공산당이 자신을 납치하려는 쿠데타를 획책했고 이에 자신이 대응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왕비쥔이 자꾸 자신에게 전화를 건 것이 그 증거라고 했다. 하지만 국민당 좌파에선 장제스가 자신이 빠진 정치적 난관을 타개하기 위한 기습 작전으로 보았다. 장제스 평전의 저자인 조너선 펜비는 장제스가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벌인 짓으로 보았다. 자림서보는 흥미로운 견해를 제시했는데 장제스는 국민당 좌파에게 자신이 그들의 편이란 믿음을 심어준 다음에 자신이 국민당 우파들을 제거해주겠다고 병력을 동원한 다음에 거꾸로 좌파를 들이친 것으로 보았다. 장제스의 집에 전날 밤까지 긴장한 공산당원들이 들락인 것이 그 정황증거로 제시되었다.

보로딘은 중산함 사건 때문에 경악했다. 그는 불과 며칠 전에 소련 대표단에 장제스를 신뢰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고 줄곧 장제스와 소련의 우호 관계는 추호도 의심할 처지가 없다고 강조한 사람이었다. 장제스가 당장 소련과의 관계를 단절하진 않았고 소련은 장제스에게 소총 1만 4천 정, 탄약 1100만발, 비행기 9대를 원조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보로딘을 체포할 것을 명령했다. 보로딘은 공산당원의 지위를 격하하는 장제스의 요구를 수용해야 했고 공산당원들이 쫓겨난 관리직을 우익들이 채웠다. 그리고 공산당의 모든 명령은 국민당을 대표하는 위원회의 비준을 거쳐야 했다.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고문들을 추방하고 특별고문인 보로딘을 체포하며 공산당을 핍박하는 장제스의 행보에도 소련은 국민당과의 관계를 유지했다.

5 결과

1926년 5월 15일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당무정리안이 발표되었다. 경찰 지휘관인 우톄청은 우익이었지만 장제스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횡령죄에 걸려 감금되었다. 또 다른 우익 지도자인 우차오수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상하이에 있는 아버지의 묘에 성묘를 떠남으로 장제스에게 자신이 장제스를 거스를 의도가 없음을 보였다. 그리고 좌익에 대한 배제가 시작되었다. 많은 공산당원들이 배척당했고 소련 고문들은 관료와 접촉하는 것에 제한을 받았다. 장제스는 공산당원들을 범죄자로 비난했다. 쑨원주의연구회와 그에 맞서던 좌익 조직들은 모두 해산당했고 장제스의 통제 하에 있는 황푸동학회가 그들의 자리를 차지했다. 황푸군관학교는 노골적으로 공산당과 소련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허잉친이 노동자와 농민 조직들을 통제하기 위해 손을 쓰기 시작했고 장제스는 상하이와 저장성의 우익 인사들을 소집하기 시작했다. 공산당원들은 알프스 에비앙 온천에서 휴양 주인 왕징웨이에게 돌아올 것을 청했지만 왕징웨이는 응하지 않았다. 외교부장에 트리니다드 태생의 중국계 영국인인 천여우런이 임명되었다.

결국 군대의 힘을 업은 장제스가 국민당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장제스는 장징장을 상무위원회 주석 대리로 선출시켜 당을 장악했고 스스로 상무위원회 주석 겸 조직국의 수뇌가 되어 임면권을 장악했다. 삼민주의가 지도이념으로 재확인되었다.

6 참고문헌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저, 민음사(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