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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국의 주요 지도자들 | |||||||||
미국 | 영국 |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해리 S. 트루먼 | 조지 6세 | 네빌 체임벌린 | 윈스턴 처칠 | 클레멘트 애틀리 | ||||
중화민국 | 소련 | (자유) 프랑스 | |||||||
린썬 | 장제스 | 미하일 칼리닌 | 이오시프 스탈린 | 샤를 드 골 |
중화민국 역대 주석 | |||||||
초대 | → | 2대 | → | 3대 | |||
단얀카이 | → | 장제스 | → | 린썬 | |||
3대 | → | 4대 | → | (중화민국 총통 선출) | |||
린썬 | → | 장제스 | → |
역대 중화민국 총통 | |||||||
중화민국 총통 선출 | ← | 1,2,3,4,5대 | → | 대행 | |||
← | 장제스 | → | 옌자간 | ||||
사진 | |
이름 | 장중정 (蔣中正) / Jiǎng Zhōngzhèng) |
출생지 | 청나라 저장 성 닝보[1] |
사망지 | 중화민국 타이베이 스린 구, 스린 관저 |
학력 | 바오딩전군육군속성학당 제1기 졸업 |
출신정당 | 중국동맹회 중화혁명당 중국국민당 |
종교 | 불교 → 감리교[2] |
국적 | 청나라 중화민국 |
배우자 | 마오푸메이(毛福梅, 1번째 부인, 기간: 1901년~1921년), 야오예청(姚冶誠, 첩, 기간: 1913년~1921년), 천제루(陳潔如, 2번째 부인, 기간: 1921년~1927년), 쑹메이링(宋美齡, 기간: 1927년~1975년)) |
자녀 | 슬하 2남 2녀 장남 장징궈(蔣經國), 장녀 장젠화(蔣建華) 차남 장웨이궈(蔣緯國)[3] |
생몰년도 | 1887년 10월 31일 ~ 1975년 4월 5일 (향년 87세) |
안장지점 | 중화민국 타오위안현 따시 구 츠후 |
서명 | |
경력 | 1911년 신해혁명 참여, 1914년 토원봉기 참여, 1919년 중국 국민당 입당, 1924년 황푸군관학교 교장으로 취임 , 1925년 국민혁명 시작 ,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 참여, 1928년 국민혁명 완수 선포, 국민정부 수립 1935년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취임. 1937년 중일전쟁 발발, 1941년 태평양 전쟁 참여, 1945년 중일전쟁 승전 선포, 1946년 국공내전 발발, 1947년 2.28 사건 발생, 1948년 중화민국 초대 총통에 취임, 1949년 국공내전의 패배로 타이완으로 이동.. |
저작 | 서안반월기(西安半月記), 중국의 운명, 중국에서의 소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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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한민국장(重章) 수여자 | |||
강우규 | 김구 | 김규식 | 김좌진 |
김창숙 | 민영환 | 서재필 | 손병희 |
신익희 | 쑨원 | 쑹메이링 | 안중근 |
안창호 | 여운형 | 오동진 | 윤봉길 |
이강년 | 이승만 | 이승훈 | 이시영 |
이준 | 임병직 | 장제스 | 조만식 |
조병세 | 조소앙 | 천궈푸 | 천치메이 |
최익현 | 한용운 | 허위 | 박정희 |
1937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Time Man&Wife of the Year 1937 | ||||
300px | ||||
월리스 심프슨 1936 | → | 장제스, 쑹메이링 1937 | → | 아돌프 히틀러 1938 |
본명 : 蔣中正(장중정), 자 : 蔣介石(장개석) / Chiang Kai-shek
"나는 중국이다. 중국은 나 없이 아무것도 이뤄낼 수 없다."
- 신생활운동의 실패를 비판한 외국 고문인 윌리엄 헨리 도널드에게.[4]
"중화민국의 존재는 국제연합이 아니라 중화민국 스스로가 결정한다."
- 1971년, 국제연합 자진탈퇴 직후
이 나라가 진정 민중이 주체가 되고 궁극적으로는 각자가 자신의 능력을 다 바쳐 주권이 민중한테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민주로써 민권주의를 실천해야 한다
- 중정기념당 장제스 동상에 새겨진 문구
파일:Attachment/NT200.gif |
200 신 대만 달러 지폐에 나온 장제스. 밑의 건물은 타이베이 총통부다. |
목차
1 개요
중국의 군인, 혁명가, 정치인
그에게는 현대 중국(또는 대만)의 국부(國父)이자 개척자,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중국을 구한 항일영웅에서부터 무능하고 부패한 지도자, 무고한 시민들을 죽인 학살자라는 다양한 평가가 공존하는데 이것은 그가 살았던 시대가 그만큼 복잡했음을 반증한다.
총 재임 25년 282일. 중간의 1년 38일을 더하면 1948년 5월 20일부터 1975년 4월 5일로 26년 320일. 난징정부 수뇌로 치면 1928년부터 47년간 중화민국의 지도자로 있었다. 다만 장제스는 한번도 마오쩌둥이 가졌던 것 정도의 권력을 대륙 전체에 행사한 적도, 가진 적도 없다. 그의 정권은 어디까지나 수많은 군벌들의 연합체였고 북벌과 반장전쟁으로 겨우 기세를 꺾어놨을 뿐 그들의 반항기는 여전했다. 그는 대만 섬으로 건너간 후에야 (비로소) 철권통치를 행할 수 있었다.
그의 이름 표기는 다양한데,
- 장제스의 본명은 '장즈칭(蔣志淸)'이다. 그의 두번째 이름이 1913년경 바꾼 중정(中正)이다. 제스(介石)는 본래 1912년경부터 사용한 필명이었으나 이후 자(字)로 사용했다.
- 이 문서 표제로도 올라와 있는 '장제스'는 '장개석(蔣介石)'의 표준중국어 발음을 국립국어원의 중국어 표기법에 따라 옮겨 적은 것으로, 한어병음의 표기를 따르면 'Jiǎng Jièshí'가 된다. 병음을 보면 알겠지만, 스는 권설음이라 한국어 '스'와 다른 발음이다. 만약 온갖 표기 원칙을 무시하고 실제 발음에 가장 가깝게 표기를 하면 지앙지에스 정도일 듯.
- 영어권에서는 그의 이름을 주로 'Chiang Kai-shek'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 표기는 광동어 발음 '쬥가이쎅(표기법 기준) / Zoeng2 Gaai3-sek6 (홍콩언어학학회(LSHK) 표기법 기준)'의 변형이다. 성씨 '蔣'은 표준중국어 발음 기준 웨이드식 표기법인 'Chiang'이고, 나머지는 광동어 발음 표기의 변형. 초기에 중국 국민당의 본진은 광동성에 있었고, 장제스가 두각을 나타낸 때가 광동 국민정부 시절이었기에 광동어식 발음으로 서구에 알려졌다. 영어 위키백과 해당 항목명도 'Chiang Kai-shek'. 아마 저장 성 출신인 그도 스스로 이 이름이 더 익숙했을 것이다. 드물게 표준중국어 발음을 웨이드식으로 옮긴 Chiang Chieh-shih도 쓰이기는 한다.
- 한국의 경우 국립국어원의 중국어 표기법에서 신해혁명 이후 중국 인물에 대해서는 한자 인명을 표준중국어 발음으로 옮겨 적는다는 원칙을 두었기 때문에 이에 따른 '장제스'라는 표기를 사용하거나, 아니면 한국 한자음 그대로 표기해 '장개석'이라고 한다.
- 대만에서는 '蔣介石'보다도 본명을 적은 '蔣中正'이 더 널리 쓰이며(표준중국어 발음으로 'Jiǎng Zhōngzhèng'. 한국 한자음과 비슷한 '장중정'으로 읽는다.), 대만 내 영어 문맥 표기에서는 'Chiang Kai-shek'을 쓴다. 대만어 발음으로는 Chiúⁿ Kài-se̍k.
- 일본에서는 '蔣介石'을 자신들 방식으로 읽어 'しょうかいせき(쇼카이세키)'라고 한다.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중국 인명을 표준중국어 발음에 따라 표기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은 것도 있고, 그나마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에 활약한 인물은 거의 그렇게 표기하지 않는다.
장제스의 실제 육성 연설 중 하나. 중일전쟁 승전연설(중 일부)이다. 표준중국어로 하긴 하는데 발음이 영 좋지 않은데 저장성 사투리를 오랫동안 썼기 때문이었다. 타이베이에 있는 중정기념당에서 전문을 재생해주니 갈 수있는 위키니트는 들어보자.
2 생애
장제스/생애 문서 참조.
3 평가
장제스/평가 문서 참조.
4 장제스의 사상과 성격
4.1 권위주의 성향
“좁은 의미에서 가족은 단지 한 가정을 뜻한다. 하지만 더 넓은 의미에서 가족은 민간 및 정부의 모든 조직을 포함하고 여기에 혁명당과 학교까지 든다.”
장제스는 기본적으로 유교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국가 대가정'을 추구했다. 그래서 일각에선 장제스의 정치를 '유교 파시즘'이란 독특한 형태로 풀이하기도 한다. 장제스의 정치력은 상당한 수준이었고 국민당의 일개 군관에서 유력 인물-지도자 워너비를 거쳐 최고 사령관에 이르렀다. 중산함 사건으로 쑨원의 측근이 되었고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과 쉬충즈 숙청을 담당하면서 국민당의 거물이 되었으며 중산함 사건으로 왕징웨이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고 상하이 쿠데타로 국민당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당시 중국의 정치란 것이 암살, 매수, 획략, 획책이 판을 치는 상황이었고 장제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일에 능했기 때문에 그가 지존의 자리에 올랐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장제스는 의회민주주의가 언젠가 중국에 도입돼야 함은 인정했지만 당대 중국의 상황에는 언감생심이라면서 도입을 거부했고[5] 이 과정에서 헌법 제정을 추구한 쑨커나 다른 지식인과 충돌하기도 했다.
또한 그의 지지자들은 강력한 지도력을 좋아하다 못해 준파시스트화하여 여러 인권 문제를 일으켰다. 장제스를 위한 첩보/테러 조직 남의사는 백주 대낮에 반대파 암살이나 고문과 같은 테러를 저지르고 다녔고 CC단도 한 몫 했다. 중국의 강제수용소는 이미 국민당 시절에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국민당 치하에서도 정부에 비판적인 지식인들은 이런데 끌려와서 코렁탕을 먹고 있었다. 이는 국공내전에서 일부 지식인들이 공산당으로 전향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4.2 반공
장제스의 정치를 말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반공 성향인데 한가지 재밌는 것은 장제스는 중산함 사건 이전까지만 해도 대표적인 친소, 용공 성향으로 평가받았다는 것이다.[6] 소련 고문인 보로딘은 장제스의 성향을 의심의 여지 없이 믿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고 스탈린은 자신의 사진에 사인을 해서 장제스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중산함 사건도 장제스가 국민당 내부 공산당원과 좌파들의 쿠데타를 선동하여 역이용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리고 상하이 쿠데타가 벌어지기 전까지도 완전한 반공을 보여주지 않다가 상하이 쿠데타로 완전히 공산당을 쓸어버리고 소련과 단교했다. 군벌들도 공산당을 싫어했기 때문에 장제스와 대립하던 왕징웨이도 펑위샹의 요구에 반공에 합의해야 해서 공산당은 난징 정부와 우한 정부에 모두 버림받는다. 이에 공산당원들은 발악적인 저항을 했지만 모두 진압된다. 애초에 장제스의 정책 자체가 자본주의 지상주의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는 편이다.
그 당시 군벌들이 다 그러했지만 장제스는 자신의 적들과 손을 잡아 이용하는 것을 전혀 주저하지 않던 사람이다. 장쉐량을 비롯한 만주 군벌들도 북벌 시절엔 적이었고 펑위샹, 옌시산과는 천하를 놓고 한번씩 다투어봤으며 리쭝런, 바이충시는 반란을 두번이나 일으켰던 사람들이다. 룽윈, 천지탕 등의 지방 군벌들과도 이합집산과 반목을 반복했다. 그런데 장제스가 국공합작을 깨기 전까지 일관되게 적대했던 것이 공산당이었다. 편하게 헤쳐, 모여가 가능한 군벌들과 공산당의 성격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민당이 군벌들에 우세한 점이 삼민주의를 기반으로 한 혁명사상인데 공산당은 국민당보다도 혁신적이라 위협적인 경쟁자였다. 이를 알기에 장제스는 공산당 토벌에 목을 매달았다. 단 장제스가 공산당 토벌에 집착한 것은 군벌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도 있었다. 군벌군을 총알받이로 내세우고 중앙군을 지방에 박아 군벌들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쓰촨, 윈난, 화북의 군벌들은 장제스하면 치를 떨게 되고 아예 공산당과 내통하여 태업행위를 벌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장쉐량의 시안 사건이다.
하지만 장제스가 공산당과의 합작을 아주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대장정 이후 공산당에 홍군을 해체하는 조건으로 국민당에 다시 받아주겠다고 제안한 바도 있고 시안 사건으로 강요된 합작도 번복하진 않았다. 이미 반일감정이 너무 고조되어 합작을 거부했다간 국민당의 집권 기반이 붕괴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 컸고 결국은 없애야 할 대상으로 보아 중일전쟁 이후 무리한 공세를 취하다가 망해버리지만.
5 대인관계
5.1 천치메이
장제스가 복종하고 존경했던 인물 1호
천치메이는 장제스가 일본 유학 시절에 만난 인물로 장제스의 형이자 사부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장제스는 그를 위해서 그의 정적을 병원에서 쏘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고 그를 맹렬히 추종했다. 천치메이도 장제스를 아꼈고 그에게 상하이 암흑계의 거물들과 인맥을 쌓아주기도 했다. 그리고 천치메이가 암살된 이후 장제스는 그야말로 한동안 폐인이 되어 상하이의 홍등가를 뒹굴고 다니면서 술과 여자로 나날을 보내게 된다. 이후 장제스는 천치메이의 조카들인 천리푸와 천궈푸를 최측근으로 삼아 총애했다.
5.2 쑨원
[7]
장제스가 복종하고 존경했던 인물 2호
일각에선 쑨원과 장제스의 인연이 장제스의 일본 유학 시절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장제스와 쑨원이 일본에서 만났다고 하기엔 정황이 맞지 않을 뿐더러 설사 만났다 하더라도 어쩌다 스친 정도이지 의미 있는 만남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장제스와 쑨원이 본격적인 인연은 장제스가 중산함 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쑨원을 구하면서다. 이전까지 장제스는 천중밍와 대립하던 처지라서 그와 연합하던 쑨원에게 크게 실망했었고 쑨원도 장제스에게 별다른 가치를 두지 않았으나 이 사건 이후로 자신의 측근으로 삼었다.
쑨원은 천치메이가 죽은 이후 장제스가 복종한 마지막 인물로 장제스는 거의 병적으로 쑨원의 신임을 갈구했다. 소련행을 자처하면서 그의 신임을 얻고자 했으며 그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을 왜 믿지 않냐고 거의 애원하기까지 했다. 장제스의 이런 돌발적인 행동들에 쑨원은 어린애를 타이르듯이 대처해야했다. 이후 장제스는 황푸군관학교 교장을 맡는 등 국민당의 간부가 되었고 쑨원이 가장 믿는 심복 중 한명의 위치에까지 오르지만 우리나라에 흔히 알려진 것처럼 쑨원의 정치적 후계자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 이후 쑨원이 죽은 이후 장제스는 쑨원의 처제인 쑹메이링과 결혼하는 등 자신과 쑨원의 연계를 끊임없이 강조하며 자신이 쑨원의 후계자인것처럼 행동하긴 하였다.
5.3 왕징웨이
어제의 동지에서 오늘의 원수로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놀라겠지만 원래 장제스는 랴오중카이, 왕징웨이와 더불어 국민당의 좌익의 대표적 인물로 꼽히던 인물이었다. 쑨원 사후 한동안 장제스는 왕징웨이와 매우 밀접한 관계였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제스를 왕징웨이의 사람으로 보았다. 이후 국민당 보수파인 쉬충즈와 후한민이 쑨원의 비서이자 국민당의 대표적 좌익인 랴오중카이를 암살하자 장제스는 왕징웨이와 함께 후한민과 쉬충즈를 모두 숙청하였다. 매우 돈독했던 두 사람이었지만 장제스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둘의 사이는 조금씩 틀어졌다. 이것이 1차로 폭발한 것이 중산함 사건이다. 장제스는 '자신을 납치하려는 공산주의자'들에 맞선다는 구실로 사실상의 쿠데타를 일으켜 소련 고문들과 공산당원들을 체포하였다가 다시 풀어주었는데 이것으로 사람들은 장제스가 좌익도 아니고 왕징웨이 똘마니도 아니라는 것을 명백하기 인식하게 된다. 사실상 이때부터 왕징웨이는 장제스를 자신의 위협적인 라이벌로 인식하게 되었지만 북벌 때문에 두 사람은 일단은 협력관계였다. 하지만 장제스가 우한과 상하이를 잇달아 점령한 이후 발생한 신수도 논쟁에서 두 사람은 완전히 갈라서게 되었고 반대파들에 의한 자신의 실각을 병적으로 겁내던 장제스는 자신에 위협적인 소련 고문 보로딘의 해임을 요구했다. 하지만 왕징웨이는 군사독재자와 폭군의 등장을 용납할 수 없다고 오히려 장제스에게 부여된 초법적인 사령관 특권을 회수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때 장제스는 미친 사람처럼 날뛰었고 결국 상하이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국민당 내부의 공산당에 대한 기습을 감행하게 된다. 상하이 쿠데타가 벌어지기 직전까지 일단은 장제스에 협조하던 왕징웨이는 당연히 경악했고 우한 정부를 세워 장제스의 난징 정부와 대립했다. 군벌 장쭤린의 공격으로 둘은 다시 일시적으로 협력하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고 왕징웨이는 펑위샹과 동맹을 맺어 장제스에 대응하려 했지만 펑위샹의 배신으로 실패했다. 결국 왕징웨이는 난징 정부에 합류하지만 둘의 대립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고 중일전쟁이 시작되던 순간까지 계속 되었다.[8] 이후 중일전쟁이 터지자 왕징웨이는 중국이 사는 길은 일본에 협력하는 것 뿐이라 굳게 믿고 일본에 붙어버리는 희대의 병크를 저질렀다. 결국 그는 혁명가에서 한간으로 추락했고 이후 장제스는 옛 동지의 무덤을 폭파시키는 것으로 배신자에 걸맞는 대접을 해주었다.
5.4 후한민
5.5 이오시프 스탈린
스탈린과 장제스가 뭔 관계가 있는가 싶겠지만 사실 둘의 커넥션은 장제스가 20년대에 소련행을 가던 때부터 시작된다. 이때 장제스는 스탈린 대신에 트로츠키를 만나긴 했지만 국민당과 소련의 협력관계의 초석을 다졌고 이후 스탈린이 권력을 잡은 후에도 이 커넥션은 유지되었다. 친소파로 인식되던 장제스에게 스탈린은 자신의 사진에 사인을 해서 보내주기도 했다. 스탈린은 한동안 공산당에 국민당에 협조할 것을 요구하며 장제스의 편의를 최대한 봐주며 여러 지원을 해주었다. 하지만 상하이 쿠데타 이후 스탈린은 돌연 노선을 바꾸어 국민당 내부 반혁명분자들을 숙청하고 공산당 자체 무력을 갖추고 국민당을 장악할 것을 지시하여 왕징웨이-공산당 합작까지 깨고 만다. 한동안 소련과 국민당의 관계는 완전히 끊어졌고 소련 고문 보로딘은 국민당을 아무리 물을 퍼부어도 악취가 가시지 않은 화장실같은 곳이라고 디스해댔으며 스탈린은 장제스를 '즙을 모두 짜낸 레몬'이라고 불렀다. 어찌 마오쩌둥을 마가린 공산주의자라고 부른게 생각난다. 음식 비유를 좋아하시는 강철의 대원수? 하지만 몇년 되지 않아 둘의 관계는 회복되었고[9] 우호관계는 유지되었으며 국공내전으로 장제스가 쫓겨나는 순간까지도 스탈린은 마오쩌둥보다는 장제스의 편에 가까웠다. 뭐 쫓겨난 이후에는 소 닭보는 사이(일단 적대이긴 해도)가 되지만.
5.6 조지프 스틸웰
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사진 2
장제스, 쑹메이링, 스틸웰. 사진에선 웃고 있지만 실제로 장제스와 스틸웰은 사이가 매우 나빴다.
장제스와 미국에서 파견한 군사고문이자 버마-중국 전역 연합국 총참모장[10]인 스틸웰 대장은 사이가 매우 나빴다. 일단 스틸웰은 인종차별주의자였으며[11] 서로가 독선주의적 성격인탓에 장제스와 의견 충돌이 잦았다.
혹자는 스틸웰이 군인치고는 어학에 상당히 소질이 있어서 프랑스어와 독일어에 능했고, 특히 중국어에도 능통했는데 (당시 중국어를 배우기도 힘들었고, 서양인이 한자를 배운다는게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해보자), 만약에 인종차별주의자라면 이게 불가능하리라 생각하지만 그건 편견일뿐이다. 예를 들어 근대 중국사에 대한 연구의 시발점을 닦은 존.K 페어뱅크만 해도 중국에 오랫동안 체류했었지만 그는 근대 중국사를 서양의 충격으로 정체된 중국이 움직였다.는 서술을 고수했으며 심지어 그의 주장이 1970년대부터 부분적으로 비판됨에도 불구하고 그는 은퇴할때까지 그러한 방식을 고수하였다. 좀 더 가까운 사례를 들으면 말끝마다 한국을 까대는 구로다 가쓰히로도 한국말에 매우 능통한 인물이다. 인종차별주의자라면 외국어를 못 배울 것이란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이며 중국말 할줄 아니까 스틸웰이 일기장과 기자들 앞에서 뱉은 수많은 인종적 편견들을 없던 것으로 치부하려는 것 자체가 매우 황당한 발상이다. 중국어를 공부하느냐 마느냐와 동양에 대한 편견을 가지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며 그건 그가 10년동안 중국에 체류한걸 감안해보면 대단한 능력이기는 하지만 특기할만한 상황이 되지 못한다. 게다가 이걸 변호하기 위해서 스틸웰이 1920~30년대 미국 장성들 중에서도 근무고과가 가장 높았던 장성으로서, 노르망디 때 아이젠하워와 함께 유럽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고려될 정도라는 왜곡까지 하는데 애초에 이론적 점수가 높은것과 실전에서 유능한건 별개의 영역이며 스틸웰의 총참모장 해임이 1944년 10월이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1944년 6월이라는것만 감안해보아도 이게 얼마나 근거없는 낭설인지는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하지만 스틸웰도 장제스와 마찬가지로 완고하고 고집불통이었기 때문에 (사관학교 교관 당시 스틸웰은 생도들에 매우 엄격했기 때문에, "신랄한 조 vinegar Joe"라는 별명을 얻고 있었다) , 장제스와 번번히 의견충돌을 빚었다. 이렇게 양측이 계속 반발하다가 1944년 이치고 작전에서 중국이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도 끝까지 군수물자와 전략예비대인 Y군의 파병을 거부하면서 오히려 그 책임을 장제스에게 떠넘기면서 양측의 관계는 마침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이후 스틸웰은 피해를 복구한다는 명목으로 전 중국군의 지휘권을 요구하였고 이에 분노가 폭발한 장제스는 미국 정부에 스틸웰을 선택할것이냐, 중국을 선택할것이냐라는 최후통첩을 날렸다. 결국 스틸웰은 해임되었고 이후 오키니와에서 근무하다가 지병인 위암으로 사망하였다.
한편 이전 버전에는 스틸웰이 유능한 장군이라고 표현하는데 그건 그의 버마 원정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파멸적인지 고려하지않은 무책임한 발언이다. 1942년의 버마 수비전에서는 10만의 병력중 75%의 병력과 대부분의 장비를 상실했으며 사단장을 포위한 고위 장교들마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음에도 본인은 자신의 주둔지가 함락되기전에 임팔로 직무유기[12][13]에 가까운 도피를 시작했고 (자신이 작전을 짠 주제에) 그 책임을 중국군에게 떠넘겼다. 이를 두고 이게 다 무능한 중국군 탓이라고 중국군 탓을 하는 자들도 보이는데 이 10만명은 중국군 중에서도 정예였고 중국에서 중국 지휘관들의 지휘를 받을 때는 한번도 이런 궤멸적 피해를 입은 적이 없었다. 게다가 중국군과 싸운 영국군들은 중국군을 매우 노련한 베테랑이라고 칭송했고 쑨리런 장군은 수만명에 달하는 영국, 인도군과 많은 민간인들을 구출하는 전과를 올렸고 스틸웰도 쑨리런 만은 동양의 롬멜이라고 칭찬했다. 게다가 이후에는 중국군을 훈련시킨다는 명목으로 50만의 중국군을 인도로 이동시켜 반격작전에 차질을 빚게 만들었고 원조 물자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장악해서 중국 주재 미 육군항공대와 중국군에게 가는 물자를 거의 차단했으며 클레어 셔놀트는 루즈벨트 대통령앞까지 가서 원조물자를 구걸해야했다. 이후 1944년 버마 탈환전에서는 일본군에 대한 정찰 부실, 영국군과의 비협조로 엄청난 손실을 입어가면서 전진했는데 이를 보고 <중일전쟁(1928-1945)>의 저자인 권성욱은 "스틸웰은 어느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채 오히려 분열과 불화만 조장할 뿐이었다."이라고 강하게 비판하기까지했다. 이 동안 중국 본토는 대륙타통작전으로 완전히 황폐화되었고 그가 버마 탈환의 명분으로 내세운 버마 공로의 재개통도 1945년 1월이라는걸 감안해보면 아무런 쓸모가 없었던 셈이었다. 즉 그는 오히려 중국에 민폐(...)만 끼쳤지,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 바는 없었다고 봐도 무방할것이다.
애초에 스틸웰이 왜 중국에 왔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스틸웰의 중국 부임은 스틸웰이 유능한 장군이라서가 아니라 중국말 잘한다는 이유로 중미 우호관계를 상징하기 위해 보낸 얼굴마담이었다. 그는 대규모 부대를 지휘해본 경험은 없었고 처음으로 대규모 전선을 지휘해보자 자신의 능력 밖의 황당한 지시만 내렸다. 그리고 스틸웰의 임무는 중미 관계를 조율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미국에 국민당은 멍청하며 공산당 잡을 생각만 하고 비겁하다고 이간질만 하였으며 전략적으로도 일본군 공세를 앞두고 중국군 예비대와 정예부대를 빼내서 자신의 개인명예를 위해 소모시키는 5열스러운 행동만 반복했다. 게다가 그는 대규모 병력을 이용한 야전에서의 승부를 노래불렀고 장제스의 지연전, 지형을 이용한 방어전을 미개하다고 비웃었는데 정작 그는 버마에서 자신이 그리 좋아하던 야전을 시도했다가 처참하게 깨지고 남탓만 했다. 그는 단적으로 명장은 커녕 범장도 못되는 졸장이었다. 오죽하면 연합군의 무타구치 렌야란 말이 나온다. 역덕들이 스틸웰 이름만 들어도 이를 가는 이유가 다 있다.
5.7 마오쩌둥
역사에 길이 남을 숙적 관계. 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사진 3
유방 vs 항우, 조조 vs 유비, 주원장 vs 진우량에 못지 않을 역사적 라이벌 중의 하나다.
장제스는 평생 마오쩌둥을 잡아 죽이거나 국민당의 밑에 복종시키려 했고 한번도 그를 믿지 않았다. 마오쩌둥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총말곤 겨눠본게 없는 이런 악연도 참 드물 것이다. 물론 찾자면 젊은 시절의 마오쩌둥이 국민당에서 활동하여 잠시 협력관계를 가진 것이 있긴 하지만 둘의 커넥션이 없었으니 큰 의미는 없다고 할밖에...
둘은 중일전쟁 후에 딱 한번 만난적이 있다. 이는 미국의 중재로 공산당과 국민당의 평화협상을 위헤 만난 것이었는데, 마오쩌둥은 큰 위험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측이 제공한 비행기를 타고 장제스가 있던 충칭으로 왔다. 이를 현대판 "홍문지연"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마오쩌둥은 충칭에 도착하자마자 마음에도 없는 "장위원장(장제스를 지칭) 만세"를 삼창하고, 기자들에게는 자신은 중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제스를 존경하며 그의 뜻을 따를 것이라고 천명. 그리하여 국공 양당의 휴전 합의를 이뤄내기도 하다. 하지만, 장제스가 먼저 "공산당이 협정을 어기고 있다"는 구실로 이를 파기하고 공산군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이는 제2차 국공내전으로 발전한다.
중일전쟁 직후인 1945년 9월 충칭으로 온 마오쩌둥을 환영하는 연회에서 마오와 건배하는 장제스.
사실 마오쩌둥은 첫아내를 장제스의 손에 잃었기 때문에, 장제스를 좋게 볼수가 없었다. 장제스는 4.12 상하이 쿠데타이후 국공합작이 붕괴되면서 공산당원의 숙청을 시작했고, 초공전에 패한 후 분풀이였는지 게릴라전을 펼치던 마오쩌둥과 떨어져 지내던 첫아내 양카이후이(양개혜)를 찾아내 처형했다.[14] 그때 징강산에서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던 마오쩌둥이 다른 여자와 동거하고 있었다는 것은 함정 마오쩌둥이 진정으로 사랑한 여자는 양카이후이가 유일했던 것을 보이며 (양카이후이의 처형소식을 들었을 때 통곡했다고 한다), 마오쩌둥은 그녀를 기리는 시를 짓고 정권을 잡은 후에도, 국가적으로 그녀를 추모하는 사업을 벌였다. 마오쩌둥의 그 이후로도 결혼을 두번 더 하지만, 다른 아내들은 양카이후이 만큼의 애정을 받지 못했다. (문혁기간중에 설친 장칭의 경우 1945년 이후로는 거의 별거상태였다.)
5.8 저우언라이
[15]
한때의 친밀한 동료였던 각별한 적
원래 저우언라이와 장제스의 인연은 저우언라이-마오쩌둥 인연보다도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제스가 황푸군관학교 교장이었을 때 저우언라이는 학교 정치주임이었다. 정치주임은 한마디로 말해서 학교에 배치된 정치장교였다. 둘은 매일 같이 아침식사를 같이 할 정도로 친했다고 저우언라이가 후에 밝힌 바 있다.
이때는 저우언라이가 공산당 뿐만 아니라 국민당 당적을 가지고 있었고, 국민당 소속 정치장교로서 국민당의 이념인 삼민주의를 학생들에게 주입하는 역할을 맡았다. 했다. 하지만 저우언라이는 황포군관학교에서 국민당 일을 하면서도 장제스 모르게 비밀리에 학생들을 포섭하여 공산당원을 모집하여 학교내에 공산당 세포조직을 만들었다. 이들중 가장 유명한 이가 린뱌오. 여담이지만 장제스의 제자였던 린뱌오는 제2차 국공내전에 국민당군에게 만주방면에서 참패(요심전역)를 안겨주었고, 이 한판으로 국민당에 유리했던 전세는 공산당쪽으로 뒤집혀 장제스는 대만으로 쫓겨갔다. 장제스로는 호랑이 새끼를 키운판.
어쨌든 장제스는 저우언라이를 각별히 여겨 그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장제스의 반공 성향을 눈치챈 저우언라이는 그와 거리를 두었다. 둘이 틀어지게 된 계기는 중산함 사건 (이 사건은 국민당 측과 공산당 측의 주장이 다르다. 서로 상대방의 음모라고 주장.)인데 장제스의 반공성향에 저우언라이는 장제스 곁을 떠나게 된다. 이후 둘은 장제스가 북벌 과정에서 상하이를 점령하면서 다시 만나게 된다. 이때 저우언라이는 상하이 노동자 세력의 거물로 장제스에게 상하이의 노동자들의 권익에 대해 협상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저우언라이는 쫓기는 몸이 되었다. 이때 저우언라이는 국민당 군에게 한번 사로잡히는데 장제스는 옛 정을 생각해서 그를 놓아주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는 실수였던 것으로 드러난다. (혹은 체포되지 않고 마오쩌둥의 해방구로 도피했다는 설도 있다.)
이후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을 옆에서 보좌하게 되었고 공산당 영도에 크게 공헌하게 된다. 둘이 다시 만난 것은 시안 사건 때로 장제스는 협상을 하기 위해 나타난 저우언라이를 보고 반가워하면서 우린 적이지만 자네를 잊은 적이 없네, 언젠가 우리 둘이 다시 일할 날이 오길 바라겠네. 라고 말하였다. 이후 중일전쟁이 터지자 저우언라이는 충칭에 거주하면서 장제스가 자주 회동했지만 국공의 대립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고 결국 둘은 총부리를 겨누게 되었다.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것은 마오쩌둥과 공산당으로 장제스는 결국 대만으로 쫓겨나게 된다. 이후 장제스는 저우언라이만 있었다면 대륙을 잃지 않았을 것이라 했다고 한다.
5.9 장쉐량
장제스의 적이면서도 동지였던 인물이다. 국민당이 만주를 차지하는데 정통성을 부여했긴 했으며, 반장전쟁 당시 장제스를 지지했지만 시안 사건으로 HP 1 남은 마오쩌둥을 최종일격만 날리면 되는 상황에서 취소시킨 주역으로 장제스의 인생과 중국 국민당의 운명을 송두리째 말아먹은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시안 사건 이후 장쉐량은 10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있게 되지만 바로 다음 해 중일전쟁이 발발, 국민당의 천도가 계속되면서 장쉐량도 계속 거처지를 옮기게 된다. 어찌됐건 장쉐량은 만주지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고 전쟁 때 장제스는 비록 전에는 적 이었어도 공공의 적과 싸우기 위해 나름 너그럽게 봐줬지만 장쉐량은 예외였으므로 장쉐량의 봉천군벌은 시안 사건을 기점 으로 완벽히 몰락하게 된다.
2차대전 종전 후 국공내전을 거치면서 국부천대 까지 이뤄졌지만 장쉐량은 감옥에서 수감생활 하는 것 에서 가택연금으로 바뀌었을 뿐 그대로 묶여있었고 오죽하면 1970년대에[16] 장제스 생일에 장쉐량이 시계를 선물로 보내지만[17] 이에 장제스는 낚시대를 보내는 걸로 답한다.[18] 일설에 의하면 장제스가 죽기 직전에 남긴 말 중 하나가 '장쉐량을 절대 풀어주지 말것이라는 설도 있으니 원한이 심하게 생긴 모양. 이 탓인지 장제스가 죽은 후 후계자였던 장제스의 장남 장징궈가 계엄해제에 민진당의 활동을 자유롭게 풀어줄 정도로 민주화에 힘썼지만 장쉐량은 예외였고 그대로 연금생활이 지속되다가 장징궈도 죽은 후 후임총통인 리덩후이 시기에서야 연금이 풀린다. 이때가 1993년. 1937년 부터 수감 및 연금생활 이었으니 56년 동안 감옥에서 있었다고 보면 된다.
5.10 프랭클린 루즈벨트
카이로에서 만난 장제스, 루즈벨트, 처칠.
처음엔 괜찮았다. 루즈벨트는 중국에 막연한 호감을 가지고 있어서 장제스를 지원하지 말자는 미 육군의 조언을 물리치고 대중 지원을 승인했으며 장제스에게 수차례 친전을 보내어 안부를 묻기도 했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를 만난 루즈벨트가 장제스에게 그동안 자신이 상상하던 카리스마나 패기를 느끼지 못하고 실망하면서 틀어지기 시작했고 소통 부재와 미국의 중국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루즈벨트는 장제스가 항일 의사가 있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여기에 스틸웰의 곡해가 중간에 개입되면서 더욱 틀어졌고 말년에는 루즈벨트가 장제스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는 일을 의논할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루즈벨트는 마지막까지 장제스를 지원했고 루즈벨트가 죽었단 소식에 장제스는 후임 지도자인 트루먼이 루즈벨트만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크게 우려했다. 특히 장제스가 우려한 것은 트루먼이 공산당과 손을 잡는 것이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 실수로 망하게 되었으니...
장제스 본인은 루즈벨트에 꽤 호감을 품은 모양이로 루즈벨트를 처음 만났을 때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나는 느낌이라고 일기에 적었다.
5.11 윈스턴 처칠
꽤 험악했다. 윈스턴 처칠은 전통적인 제국주의자였고 장제스는 영국을 침략자들로 보아 매우 혐오했다. 이후 홍콩 문제나 조계지 문제로 영국과 중국은 사사건건 충돌했고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협력관계가 된 후에도 영국은 장제스가 동남아에 영향력을 확보할까봐 중국과 험악한 사이였다. 장제스도 처칠을 제국주의자 우두머리라고 욕하곤 했는데 카이로 회담에서 만나고 나선 처칠이 그래도 걸물이라고 인정했고 처칠은 장제스가 조용하고 신중하며 민완하다 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처칠은 끝까지 장제스를 카이로 회담에 불러오는 것을 반대했으며 불러온 다음에도 피라미드 관광이나 시키자는 입장으로 중국을 우습게 봤고 결국 중영의 험악한 관계는 카이로 회담 내내 지속되었다.
5.12 김구
장제스와 김구
꽤 좋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제스는 김구의 최대 후원자였고 장제스는 김구가 죽은 이후에도 김구를 항일 동지라고 높였으며 김신을 집안 사람처럼 대우하는 등 김구와 자신의 인연에 대해 수차례 강조했다.
5.13 그 외의 군벌들
- 리쭝런(이종인) : 장제스의 가장 오래된 군벌 동지임과 동시에 최대 정적 중 하나. 반란을 거듭하다가 중일전쟁 직전에 다시 한편이 되었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고 국공내전 중에 장제스는 이 양반에게 총통 자리까지 잠시 내줘야 했다. 하지만 대만으로 망명한 후, 다시 오너가 자리를 잡자
바지사장리쭝런은 축출되어 미국으로 갔고, 미국에서 생활고를 겪던 중 중공측이 접근해 좋은 대우를 약속하자 대륙으로 귀환하여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 바이충시(백숭희) : 리쭝런과 함께 광시계 군벌로서, 장제스에 반역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장제스는 그를 신용하지 않았다. 작은 제갈량이라 불리는 뛰어난 능력으로 여러차례 중일전쟁에서 유의미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런 반역경력 때문에 장제스는 그를 총참모장으로 기용하라는 스틸웰의 제안을 거부하고, 심복 허잉친(하응흠)을 이 자리에 앉혔는데, 허잉친은 바이충시보다도 훨씬 역량이 뒤졌다. 그래도 바이충시는 반역 경험에 비하면 꽤 중용되어 5전구 참모장, 군훈부장, 구이린 행영 주임을 전쟁 기간 동안 역임했고 전후엔 초대 군정부장이 되었으며 동북초비사령관이 되어 만주 진공 작전을 지휘했다. 장제스의 삽질로 국공내전의 전세가 완전히 기울어지자 화중에서 최후의 항전을 지휘하며 창사에서 린뱌오 군대를 개발살내는 등 공산당과의 전투에서도 여러차례 승전을 거두었지만 전세를 되돌릴 수는 없었고 최후의 전역인 하이난섬 방어에 실패하고 리쭝런의 망명 권유를 뿌리치고 대만으로 갔으나 별 볼일 없이 지냈다.
- 옌시산(염석산) : 역시나 장제스와는 반목과 동맹을 반복한 군벌 중 하나. 산시의 개인 왕국에서 떵떵거렸으나 처음에는 일본군, 그 다음에는 공산당의 공격으로 결국 영지를 잃어버리고 장제스에게 달려갔다. 실권없는 자리에서 별 볼일 없이 죽어갔다.
- 펑위샹(풍옥상) : 장제스와 동맹과 반목을 반복했던 수많은 적들 중 하나. 국공내전 후반기인 1948년에 소련 선박을 타고 귀국하다가 흑해에서 화재로 죽었다고 한다. 크리스천 제너럴, 즉 기독교도 장군으로 유명했으며[19] 군벌 중에선 도덕적이고 소탈한 사람이라서 누가 보면 대군벌이 아닌 노동자나 졸병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한다. 장제스와 왕징웨이 사이를 저울질하다 장제스와 동맹을 맺었으나 반장전쟁에서 장제스와 반목했고 이후 다시 합쳤다. 국민당의 거물 중에서도 강경한 인물로 봉천파나 일본에 대해서 매우 엄격한 태도를 고수했다.
- 천중밍 : 장제스가 가장 싫어했던 군벌. 장제스의 절강성 사투리 때문에 그는 늘 천중밍의 광둥 출신 참모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했고 천중밍이 공공연하게 쑨원을 허풍선이라고 비방하는 통에 쑨원을 존경하던 장제스는 그때마다 반발했다. 쑨원은 장제스와 천중밍 사이의 화해를 주선하려 했지만 둘 다 거부했다. 장제스는 천중밍과의 관계를 끊으라 했고 천중밍은 반대로 장제스에게 저 무뢰배를 내쫓으라고 요구했다. 결국 천중밍이 선빵을 때리면서 쑨원과 천중밍의 관계는 틀어졌고[20] 이후 천중밍은 국민당의 첫번째 공격 목표가 되어 두들겨맞고 패망한다.
- 위안스카이(원세개) : 장제스가 두번째로 타도하고자 했던 대상이나[21] 꼬꼬마 혁명가였던 장제스와 중국의 지배자인 위안스카이 사이에 딱히 인간적 접점이 있을 리는 없어 크게 서술할 것은 없다.
- 천지탕(진제당) : 광둥의 군벌. 군벌 중에선 장제스에게 고분고분한 편이었으나 장제스 밑에 들어가고 나서도 장제스의 인형을 참수하며 장제스에게 노골적인 반항심을 드러낸 인물. 결국 미신을 믿고 반란을 일으켰다 쫄딱 망했다.(...)
5.14 장제스의 추종자 젭 부시
의외로 장제스의 추종자중에서 미국의 정치인 젭 부시가 있다. 젭 부시는 장제스을 전설의 신비로운 전사라고 표현하곤 한다.
2005년 당시 자신을 삼촌처럼 따르던 신참 정치인 마르코 루비오에게 검을 수여하면서 아래와 같이 장개석을 찬양했다.
'내가 말한것처럼 이번 선거는 '장제스를 출정시키자'는 거였다. 마르코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장제스가 누군지 잘 몰랐겠지만. 장제스은 전설적인 전사다. 장제스는 보수의 원칙을 믿고 시장을 믿고, 자유로운 사회의 버팀목이 될 도덕적 가치를 믿는 사람이다. <중략>
“I told you that we were going to ‘unleash Chang’ on the election. And Marco, being a relatively young guy, didn’t know who Chang was. Chang was a mystical warrior. Chang is someone who believes in Conservative principles, believes in entrepreneurial capitalism, believes in moral values that underpin a free society. I rely on Chang with great regularity in my public life ... Chang, this mystical warrior, has never let me down.”
검을 수여하던 당시의 사진
6 트리비아
종교는 기독교(감리교)였다. 아내인 쑹메이링과 아들인 장징궈도 기독교인. 원래 쑨원을 포함한 중화민국 및 중국 국민당의 초기 정치적 주요인사들 가운데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았다. 단, 장제스가 처음부터 기독교인이었던 건 아니고 쑹메이링과 결혼하면서 개종을 한 것이다. 쑹메이링이 장제스와 결혼할 때 내건 조건 중 하나였다고.
- 베이징 톈안먼광장에는 지금은 마오쩌둥의 초상이 걸려 있지만, 북벌 이후에서 중일전쟁 종결 이전까지는 쑨원의 사진이, 그 이후에서 1949년 인민해방군이 베이핑(베이징)을 점령하기 전에는 장제스의 초상이 걸려 있었다. 일본의 항복 직후인 1945년 12월 3일에 걸린 것으로, 지금의 마오쩌둥 초상보다 컸는데, 고작 3년 1개월 만에 내려지게 되었다.
장제스가 이겼으면 쑨원을 걸었을까 그대로 장제스를 걸었을까?
- 장제스의 사진이 톈안먼에서 내려진 것과 달리 난징 총통부 안의 옛 집무실에 그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중화민민공화국 건국 이래 옛 총통부 건물은 한국으로 치면 도청(道廳)에 해당하는 장쑤 성 정부청사 등으로 쓰여왔다. 따라서 건물을 제외하면 장제스 및 국민당과 관련된 상징물이 지속적으로 남아있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있던 정부기관을 다른 곳으로 이전시키고 옛 총통부 건물을 사적으로 지정했다. 1990년대 후반 옛 총통부는 태평천국 및 근대역사박물관이 되었고, 2003년에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다. 이 초상화는 박물관으로 재개장할 때 만든 것으로 장제스가 집권하던 시기에 저 초상화가 걸려있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여기가 그의 집무실이었다는 상징적 의미가 강한 물건이다.
- 비록 대만으로 도주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자금성에 있던 진귀한 역사적 유물의 핵심을 보존해 대만으로 실어왔다.
이때 미국이 진짜 빡쳤다이 유물들은 중국의 여러 황실에서 계속 모아온 보물 중의 보물로 지금까지도 중화민국이 가진 가장 큰 보물로 꼽힌다. 정말 문화적인 면에서는 중화민국의 유물 보존 노력이 많이 도움이 되었고 현재 유물을 전시중인 고궁박물원을 세계 4대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장제스가 유물을 이전한 이후 자금성은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아 관광객을 맞이하기도 했는데, 이후 중국 정부가 대륙 전체에서 유물을 수집해 양적으로는 과거의 규모를 능가했지만 질적으로는 국립고궁박물원의 그것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 무엇보다도 장제스가 자금성의 유물을 가져가지 않았다면 과연 문화대혁명 시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 타이베이 북부의 스린(士林)에는 그와 부인 쑹메이링이 국공내전 직후 후퇴한 1949년부터 26년 동안 거주했던 총통 관저가 있는데, 1975년 그가 타계한 곳이기도 하다. 2000년대부터 일반에 공원 및 사적지로 개방되어 관광객을 맞고있다.[22] 2층 구조로 장제스 부부가 사용했던 서재, 침실, 각종 사진, 소장품, 그리고 외국 귀빈과의 접견실 등이 마련되어 중국 현대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가볼만한 곳이다. 아쉽게도 내부 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 관저 2층에는 장제스와 쑹메이링 여사의 침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데, 이는 군인 출신인 장제스가 규칙적인 생활 습관이 몸에 배어 기상과 취침 시간이 빨랐던 반면, 쑹메이링은 올빼미 스타일로 밤에도 독서와 취미활동[23]을 해서 서로 취침시간이 맞지 않았던 점을 반영한 결과다.
- 오늘날 대만에서는 쑨원과 장제스, 장징궈의 캐리커처형 인형을 과거의 적수였던 공산당의 마오쩌둥, 덩샤오핑 인형과 함께 만들어 기념품으로 팔고 있다. 중정기념당을 포함한 장제스 관련 사적지에서 이런 인형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 한국으로 치자면 이승만(혹은 박정희) 전 대통령 인형을 김일성, 김정일 인형과 같이 만들어 용산 전쟁기념관 같은 곳에서 파는 셈이다. 이젠 중국 공산정권과의 대립을 그저 지나간 과거 정도로 인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중국 본토에서 오는 관광객들에게 어필할 목적인지는... 이 글을 읽는 위키니트의 상상에 맡기도록 하자.
- 장개석은 살아생전 자신에 대해 교장 선생님이란 호칭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황푸 군관학교 초대 교장을 지냈었는데, 이 황푸 군관학교 시절이 애착이 강했다는 것. 이 호칭에 따라 그는 직계/방계를 구분했었다고 한다. 국부천대 이후에도 국립정치대학의 총장(중국어로는 '교장'이라고 한다) 직을 죽을 때까지 겸임했다. 그러니까 장개석은 국립정치대학의 '교장 선생님'이기도 했던 셈.(물론 실제 업무를 하는 총장은 따로 있긴 했다) 장제스가 아직 기력이 남아있었을 시절에는 국립정치대학에 때때로 강연을 나가기도 했던 모양이다. 쑹추위가 2016년 총통 선거 출마 선언 직후에 대만 TV와의 인터뷰에서 국립정치대학에 다니던 리즈시절에 장개석을 강단에서 처음 봤다고 말하기도 했다.
- 여러모로 말투가 굉장히 험해서, 외국 외교관들과의 대화를 아내인 쑹메이링(송미령)이 번역하는 데 상당히 힘들었다고 한다.
아, 여보, (씨발) 욕 좀 쓰지 마!장징궈가 사실상 후계자가 된 후 쑹메이링은 찬밥 먹는 신세가 되어, 국부천대 이후엔 사실상 미국에 거주하게 된다.
- 유명한 카이로 회담에서 담소하는 장제스 사진은 연출이다. 장제스는 영어를 전혀 못 했고 회담 내내 본국에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상덕 전투의 불리한 전황과 이를 자꾸 캐묻는 미국과 영국 때문에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다만 쑹메이링의 활약으로 회담 자체는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 장징궈의 동생(?)인 장웨이궈(장위국, 蔣緯國)은 원래 장제스의 아이가 아니라 손문의 동지이자 신해혁명에 참가하였던 다이지타오(戴季陶)가 일본 여자와 관계해서 낳고 키울 수 없어서 맡은 아이다. 이 아이에게 자기의 성과 항렬까지 준 대인배였고 장위국은 독일 유학파 장교로 강하엽병 장교로 오스트리아 병합에 참가한바 있다.[24] 사실 장위국의 혈통에 대해 논란이 많고 장제스의 친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 장제스가 고자였다는 것은 확실하나 언제 생식기능을 상실했는지에 대해선 말이 많다.
내가 고자라니첩까지 둔 걸로 봐서는 성관계는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장징궈는 장제스의 아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씨라는 말도 있는데, 이게 장웨이궈의 일방적 주장이고 장징궈를 엿먹이려는 의도가 강해서 신빙성이 없는 걸로 판단된다. 장제스가 고자가 된 시기에 대한 가장 유력한 설은 장제스의 두 번째 부인인 천제루(陳潔如)의 회고록에 나와있는 대로 장제스가 30대 초반에 상하이의 윤락가들을 들락이다 성병을 옮아 부고환염에 걸려 고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제스는 자신의 성병을 아내에게 옮겨서 천제루까지 불임의 몸이 되었다.(...) 다만 천제루도 장제스가 장제스의 모친인 왕차이위의 불륜의 결과물이라고 하는 등 신빙성이 없는 주장을 하기도 해서 수상쩍기도 하다. 어렸을 때 고환을 화로에 데어 그 여파로 고자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 굽시니스트의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는 충공깽스럽게도 조석의 마음의 소리의 주인공으로 패러디되어[25] "차가운 도시의 총통, 하지만 자본가에게는 따뜻하겠지."(…)라고 말한다. 개드립이긴 하나,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공산당이 주장하는 대로 자본가의 지지가 아니라 군대의 권위로 인해 성립된 권위주의 정권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필요하면 자본가든 노동자든 가리지 않고 족쳤으니까또한 해당 만화에서 장제스는 매 장면마다 다르게 나오며 심지어 마오쩌둥(?)이 나올 때도 있다.
- 1915년부터 1973년까지 57년간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붓으로 일기를 썼다. '제요(題要)'라는 제목 아래 그날 있었던 주요 사건과 알게 된 과정을, '예정(豫定)'이라는 제목 아래 급히 해야 할 일을, '주의(注意)'라는 제목으로 정세 평가와 판단, 유념할 일을 적고 '기사(記事)'라는 제목 아래 그날 한 일을 적어놓았다. 그리고 매주마다 반성할 점과 다음 주에 할 일을, 매달마다 반성할 점과 그달 있었던 사건들을 적었으며, 매년마다 반성할 점을 적어두고 빠진 기록들을 보충해놓았다. 주위 인물에 대한 평이나 쌍욕, 또는 검열삭제 관련 기록을 적어두기도 했다. 미국 후버연구소가 유족으로부터 이걸 빌려와 2006년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일기를 공개했다.
- 이후 레이 황[26] 교수가 이를 분석하여 <장제스 일기를 읽다>(從大歷史的角度讀蔣介石日記)란 책으로 내놓았고, 국내에도 번역, 출간되어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국부천대 이후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공개가 되어있지 않다.
-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한 일기는 시안 사건때 장제스의 목숨을 구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장학량은 장제스를 체포했지만, 장제스의 일기를 읽어본 후, (항일을 기피하던) 장제스가 생각보다는 애국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장제스를 처형하려는 생각을 바꾸었다고 한다.
- 무척이나 무뚝뚝하고 웃지도 않고 과묵한 성격으로 젊은 시절 이후로 술 담배를 끊었으며[27] 차조차도 사치라고 즐기지 않았지만 고향인 저장 성 특유의 생선요리를 무척 좋아하여 대만에 가서도 저장 성 생선 요리를 먹을 때면 생선의 풍미에 대해 얘기하며 어린 시절을 회상하곤 했다 한다. 이 때문에 마오쩌둥은 내가 살다살다 담배 안 피우고도 오래 사는 인간은 장제스 말고 본 일이 없다고 50년대에 장제스를 까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이런 말이 나올만한 게 그때는 담배가 건강에 안 좋다는 것이 잘 알려지지 않기도 했고, 마오쩌둥은 장제스와는 대조적으로 하루 50개비씩(두 갑 반) 꼬박꼬박 피운 골초였다.
나의 증조부 장개석
- 증손자인 장여우보(장우백, 蔣友柏)가 매우 미남이라 한때 화제가 되었으며, 대만 여성이 뽑은 멋진 남자 2위에 올랐다. 장여우보는 장징궈의 3남 장샤오융(장효용, 蔣孝勇)의 아들이다. 장징궈의 아내 장팡량(장방량, 蔣芳良)이 소련 출신이라 장제스의 손자대부터 혼혈 외모가 나타나는 것.[28] 그는 미국 유학 후 대만에서 광고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진정한 엄친아. 반대 급부로 마오쩌둥의 유일한 손자인 마오신위(모신우, 毛新宇)는 후덕한 외모로 비교가 되기도 했다. 대만과 대륙의 여성 네티즌 사이에선 얼굴로
증조할아버지의 숙원인대륙을 탈환해달라는 반응도 있다. 정치와는 큰 관련을 맺지는 않지만 장제스의 대만 통치에 대해 반성의 태도를 나타내는 등 장제스에 대해 여타 장씨 가문 인사들과 다른 인식을 보여 화제를 모은 바 있다.
- 한편 장여우보의 동생인 장여우칭(장우청, 蔣友青)은 모교인 타이베이 아메리카 스쿨에 "교사와 학생을 다 죽이겠다", "학교를 폭파하겠다"는 등의 협박을 일삼은 죄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 환빠들 중 상태가 특히 안좋은 일부 환빠들은 장제스가 중일 전쟁 종전 후에 만주족의 본거지인 만주에 치를 떤 나머지 만주를 조선에 양도하려 했지만 마오쩌둥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는 바람에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주장하며 장쉐량을 천하의 개쌍놈으로 매도하기도 한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몽골조차도 중국 땅이라도 하는 장제스가 만주를 포기? 정말 아낌없이 주는 나무군요!
- 2차 세계대전 당시 주요 연합국 지도자 중에 장제스는 마지막 생존인물이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1945년 졸), 조지 6세(1952년 졸), 이오시프 스탈린(1953년 졸), 윈스턴 처칠(1965년 졸), 클레멘트 애틀리(1967년 졸), 해리 트루먼(1972년 졸)에 이은 마지막 사망자.
- 장제스의 증손자 중 하나인 장완안(蔣萬安, 장만안)은 장징궈(장경국)의 비서이자 내연녀 장야뤄(章亞若) 사이에서 난 자식의 아들로, 장징궈의 본처 장팡량이 장징궈의 친자식으로 인정하는 것을 반대하는 바람에 내연녀의 성을 따라 章씨였다. 후에 장팡량이 죽고 장씨 가문에서 인정받아 2005년 3월에 蔣씨로 성을 바꿨다. 장완안은 2016년 제9대 중화민국 입법위원 선거에서 타이베이시 3선거구(중산구, 쑹산구)에서 중국 국민당 후보로 국회의원(입법위원)에 당선되어 국회의원으로 활동중이다. 장징궈 이후 장씨 집안은 정치에서 한발 물러나 있었는데[29] 2016년에 장완안이 다시 장씨 정치인 집안을 잇게 된 것이다.
7 한국과의 관계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해주었다.
장제스가 한국 독립운동을 후원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1932념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 남의사 계열이나 CC파를 통해 지원하였고, 난징 중앙군관학교 분교 지원금을 김구에게 보내줘서 이범석 등의 걸출한 독립운동가들이 나올 수 있었다. 한국광복군 창설에도 장제스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물론 장제스가 생색도 냈고 광복군 창설 당시에는 "한국 광복군 9개 준승 사항"이라 하여 활동을 제약한 편이라고는 하나, 별다른 기반이 없었던 망명 정부에 불과한 임정과 광복군은 그것만 해도 감사하며 받아들여야 했고 냉정하게 말하면 그렇게 과한 요구사항도 아니었다.
장제스가 임정을 지원한 데는 한국이 독립하면 중화민국의 위성국으로 만들려고 했다는 의혹이 있다. 카이로 회담에서 중국은 한국, 태국, 류큐의 독립을 목표로 삼았고 전후 류큐와 17도 이북의 인도차이나를 할양하겠다는 제의까지 거부했을 정도로 장제스가 영토 확장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30] 이러한 장제스의 의도를 나쁘게 보더라도 한반도에서 일본을 떼어놓고 신생 독립국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가지려는 생각 이상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당시 (대륙시절)중화민국 신문이 한국의 정세에 대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한 것으로 봐서 아예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1942년 11월 장제스의 처남이자 외교부장이었던 송자문(쑹쯔원)이 외교부장으로 취임하고 가진 첫 기자 회견에서 만주와 타이완의 중국 복귀를 주장하고, 조선이 전후에 독립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듬 해 7월 장제스는 임정 간부들을 맞이한 자리에서 한국의 독립을 강대국 정상들과의 회의에서 합의를 얻도록 "힘써 싸우겠다(力爭)"고 약속했다.
장제스가 카이로 회담 출발전에 휘하의 군사위 참사실에서 올린 의제로 중국 영토 회복 다음으로 한국 독립 승인 건이 올라 있었고, 국방 최고위 비서청에서 올린 의제에도 정치 부문에서 첫머리에 한국 독립 건을 내세웠다. 장제스가 카이로로 떠나기 바로 전날의 일기(1943년11월17일)에도 회담의 의제를 기록했는데 조선 독립 항목이 들어가 있고, 의제 전 항목도 국방 최고위에서 제출한 내용과 같았다. "중국, 미국, 영국, 소련이 즉시 한국의 독립을 공동 혹은 개별적으로 승인하거나, 전후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선언을 한다"는 조선 독립 조항을 위한 교섭지침까지 제시되어 있었다.
장제스의 한국 독립에 대한 의지는 강고했다. 회담중 걸림돌이 발생할 경우의 전략까지 언급했는데 "한국 독립 조항이 미·영의 반대로 합의가 되지 않아 선언에 삽입할 수 없게 된다면, 중국 단독으로 일방적으로 일본 패망 후에 한국의 즉시 독립을 지지한다"는 강경한 방침을 정했다. 당시 영국은 인도 문제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염려하여 한국의 독립 문제에 대해서 부정적이었고, 소련 역시도 일본과 중립 조약을 맺은 관계로 의견 제시가 어렵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장제스는 영국 때문에 미·영이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게 되면, 미국이 주저하게 되겠지만 중국이 독단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면, 세계는 연합국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고 보게 되고 이러한 사태가 오기 전에 결국 영국과 미국의 타협안이 나오게 될 것이라는 치밀한 시나리오였다. 결과적으로 카이로 선언은 중국의 판단대로 흘러갔고 장제스의 강경한 태도에 반대 입장을 피력한 영국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회담 후에 장제스는 한국 독립 조항을 넣은 것을 자신의 '유례없는 외교적 성공(Unprecedented Diplomatic Success)'이라고 일기(주간 회고 부분)에 적었다. 출처
한국의 진짜 국부. 재조지은 1992년 한중 수교 당시와 지금까지도 중화민국과의 단교를 비판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주요 논리가 일제시대 당시 장제스와 중화민국 정부의 도움일 정도로, 미국과 함께 그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기여한 바는 매우 컸다.
이승만과의 관계는 처음에는 안 좋았다. 해방 직전에 한국이 해방되면 누가 한국의 대표로 UN에 출석할 것일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는데 장제스의 처남이자 중국의 외교부장인 송자문(쑹쯔원)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표로 나섰던 김구, 이승만, 한길수에게 회담을 요청했다. 한길수야 처음부터 송자문에게 줄을 대고 있었고 김구는 장제스의 지원을 받는 입장이니 당연히 응했지만 이승만은 이 요청을 씹었고 기분이 상한 송자문은 이승만에 대해 장제스에게 안 좋게 말했다. 당연히 장제스는 이승만은 무시하고 한국의 차기 지도자로 김구를 지지했다. 장제스가 김구에게 준 20만 달러의 독립 자금의 사용처를 두고도 두 사람은 충돌했었다.
이후 기선을 잡은 것은 이승만이었는데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1949년 8월에 이승만의 별장이 있는 진해에 장제스가 방문하자 이승만은 그에게 "당신처럼 분열이나 조장하는 사람은 믿을 수 없고 차라리 마오쩌둥이 훨씬 믿음직하니 앞으로 한반도 문제는 마오쩌둥 주석하고만 논의할 것이다!"라고 일갈했다고. 근데 마오 주석과 회담했으면 아마 한국이 지도상에서 사라졌을수도 이에 이미 그에게 밀려 타이완으로 쫓겨나기 직전이던 장제스는 송자문 탓을 하며 이승만을 대형이라고까지 부르면서 사과했다는 말이 있다.(...) 아...안습 근데 이 일화에 너무 의미를 둘 것은 없는 것이 대형이란 칭호 자체가 당시 중국에선 굉장히 헤픈(...) 칭호였다. 장제스가 형제 운운했던 사람들 중에선 그와 적이 된 사람도 여럿 있다. 대표적인 것이 펑위샹이나 리쭝런. 그 둘과도 의형제 결의를 맺고 하하호호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의 의도가 어쨌건 현실에서는 중화민국이 대륙에서 밀려난 결과, 한국을 위성국화 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작금에 와선 물 건너간 소리가 되어버렸다. 한국도 결코 큰 나라라고 할 수는 없지만, 중화민국의 남은 영토인 타이완 섬은 거리도 멀 뿐더러 한국의 1/3을 조금 넘는 수준의 섬이 영토의 거의 전부인 한국보다 많이 작은 나라로 전락해버렸기 때문.(…)
(장제스에게 수여된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정기념당에 전시되어 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정부에서 한국의 독립에 대한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의 공헌을 기려서 건국 훈장을 수여하였다. 결국 받아간 것 없이(…) 독립운동 지원만 많이 해준 셈이 되었다.(...) 북한도 이에 대한 보답으로 6.25 전쟁을 말아먹어 중공의 타이완 침공을 무산시켰다 카더라. 이후 박정희 정부 시기에는 그의 부인 쑹메이링, 쑨원, 천궈푸, 천치메이와 같이 임시정부와 한국의 독립 운동을 도운 중화민국의 정부 요인들에게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박정희와는 이념적 반공동맹을 유지하는 우호관계였다. 하지만 대만이 국제연합에서 추방당하고 미국에게도 버림받자 박정희 정권도 슬슬 중국과 접촉을 시도하는 등 장제스의 애간장을 태웠다. 하지만 한중 수교 때까지 한국과 대만은 현실적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김구와는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고 김구의 아들인 김신의 안가를 주선해 주는 등 인연이 깊었다. 1962년 김신이 공군에서 예편하여 대만 대사로 부임하자 몹시 반가워했으며 김신에게 "나는 자네를 일개 대사로 생각하지 않네. 자네 부친과 나는 항일투쟁 동지였으니 자네는 나의 집안 사람이나 다름없네."라고 환대했으며 복잡한 의전을 생략하고 김신과는 정말 가족을 불러올 떄처럼 허물없이 자주 대화하곤 했다고 한다. 과묵하고 웃지도 않는 장제스였지만 김신과 함께 있을 때는 자주 웃고 떠들었으며 장제스가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경호원들이 김신을 데려와서 장제스 기분을 풀어줄 정도였다 한다.[31]
1963년 한국에 대흉년이 들어서 긴급히 쌀을 사와야 할 일이 있었는데 박정희 국가재건최고의장은 김신 대사에게 대만에서 쌀 5만 톤을 사올 것을 지시했다. 그런데 대만에서도 흉년이 들어서 한국에 쌀을 팔 여유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결국 대만 행정원장은 쌀을 팔 수 없다고 김신을 돌려보내야 했는데 그 소식을 들은 장제스가 즉각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한국에 쌀을 팔 것을 지시했다. 장관들이 반대했지만 장제스가 막무가내로 밀어붙여 김신을 쌀 5만톤을 사서 한국에 보낼 수 있었다. 이에 김신이 장제스에게 감사를 표하자 장제스는 우리가 대륙을 아직까지 갖고 있었다면 그까짓 5만 톤이 아니라 55만 톤 정도는 거저로 주었을 것이라고 한국 같은 각별한 나라에게 쌀을 돈 받고 팔아야 하는 것이 애석하다며 오히려 미안해했다고 한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과 회담했을 때는 박정희의 손을 잡으면서 "내 나이가 이제 80이 다 되어가니 아시아의 반공 지도자는 박 대통령이 이으시오"라고 말했다 한다.
1975년 장제스가 타계하자, 한국 정부에서는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을 대표로 조문단을 파견했다. 관련 영상
결론적으로는 한국에겐 있어선 도움이 된 인물이다. 그가 2차 대전에서 승전 후, 마오쩌둥에게 쫓겨나는 상황을 맞게 되면서, 이전에 한국의 독립을 적극 지원하면서 당초 품었던 계획이나 속셈 등을 이룰 기회조차 없어졌기 때문에 정말 한국에 도움만 준 꼴이 되었다.
8 매체에서
1989년에 제작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40주년 기념 영화 개국대전의 장제스는 그야말로 간지폭풍의 인물로 나온다. 배우 쑨페이후가 분했다.
2009년에 건국 60주년 기념으로 제작된 영화 <건국대업>에서도 재평가된 장제스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장국립이란 배우가 분했는데 마오쩌둥만큼은 아니지만 근엄한 걸물로 나오며 국민당은 국민당 손으로 망했다고 씁쓸하게 읊조리며 퇴장하는 등 가볍게 나오지 않았다.[32] 마오쩌둥의 공산당과 대립하면서도 나름대로 중국의 발전과 통일을 위해 노력하는 인물로써 긍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타이완으로 쫓겨나기 직전 장징궈와의 대화가 인상적이다.
2000년 중국 CCTV에서 만든 공산당 창당 80주년 기념 드라마 장정에선 건륭제 전문배우 진도명이 장제스 역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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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진도명은 중일전쟁중의 허난성 대기근을 다룬 2012년작 1942(영화)에서 또 장제스 역을 맡았는데 여기에서 장제스는 카리스마는 있으되, 기근에 허덕이는 국민들은 별로 신경 안쓰는 암군으로 그려진다.
난징대학살을 다룬 영화 존 라베에서도 잠깐 나오는데 큰 비중은 없다.
9 참고문헌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장제스의 전반적 생애 관련.
-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 중일전쟁 시기와 공업화 관련.
- 중국혁명사, 서지영, 한울아카데미 - 장제스의 농업 정책 관련.
- 중국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 - 난징 10년 관련
- 덩샤오핑 평전, 벤자민 양, 황금가지 - 국공합작 결렬과 상하이 쿠데타, 펑위샹 관련.
- 장개석은 왜 패했는가, 로이드 이스트만
- 모택동 VS 장개석, 이건일, 도서출판 삼화 - 초공작전 관련.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역사 - 중일전쟁 관련.
- 중일전쟁과 중국의 대일군사전략, 기세찬, 경인문화사 - 중일전쟁 관련.
- 모택동의 사생활 1~3권, 리즈수이, 고려원 - 반우운동 관련.
- 장칭, 정치적 마녀의 초상, 로스 테릴, 교양인 - 장칭의 난징 정부 회상 관련
- 학문의 제국주의, 폴 코헨, 순천향대학교 출판부 - 서양 학계 시각 비판 관련.
- 남경정부 시기 국가주도하 국민경제 건설, 강명희, 한세대학교 - 장제스 경제정책 관련.
- 1930년대 농촌위기와 남경국민정부의 농업정책, 아주대학교 - 장제스 농업정책 관련.
- 1920~30년대 난징 국민정부의 농촌정책:장쑤 성을 중심으로, 박정현, 고려대학교 - 장제스 농업정책 관련.
10 관련문서
- ↑ 현 중화인민공화국 저장 성 닝보시 펑화시(오타가 아니다)
- ↑ 1930년경 쑹메이링과 결혼하면서 개종
- ↑ 다만 친부는 다이지타오라는 것이 정설이고 본인도 생전에 이를 인정했다.
- ↑ 마지막 링크가 상당히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장제스가 없었더라면 리쭝런이 미국으로 망명한 직후의 혼란상태를 버티지 못하고 타이완 천도고 뭐고 할 겨를도 없이 삽시간에 와해되었을 것이다. 긍정적인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중화민국이 타이완에서나마 버틸 수 있었던건 장제스가 그나마 남은 군대와 국유 재산을 타이완으로 이동시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 거부하긴했지만 중일전쟁 발발직전에는 이미 제헌 의회를 위한 총선거가 완료된 상황이었고 1937년 12월 입법원이 열릴 예정이었다.
- ↑ 그러나 장제스 본인은 소련 방문을 기점으로 오히려 공산주의에 대해 회의감을 품어 여러번 쑨원에게 국공합작을 끝낼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 ↑ 이 사진은 본래 장제스 외에도 2명의 동료 장교들이 쑨원과 함께 찍은 것이었지만, 쑨원의 후계자로서 장제스의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다른 2명의 모습을 삭제한 것이다.
- ↑ 하지만 왕징웨이가 명백히 수세였다. 특히 왕징웨이는 좋지 않은 자신의 건강을 핑계로 결정적인 순간에 매번 유럽 유람을 떠나곤 했는데 결국 장제스의 공세에 제대로 된 대응을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암살기도로 큰 부상을 입으면서 더욱 몰락한다.
- ↑ 이 둘이 잘 해서 다시 관계가 좋아진게 아니라 정확히 말해서 마오쩌둥과 소련의 관계가 소원해지자 적의 적 은 나의 친구라는 말 처럼 스탈린과 장제스의 관계가 회복된거다. 1차국공내전과 대장정을 거치면서 마오쩌둥은 소련에서 유학한 공산주의자 들을 모조리 숙청했고 공산주의의 바티칸과 같았던 소련에서 그걸 좋게 볼 리가 만무했으니.
- ↑ 이전버전에서는 총사령관이라고 번역되었는데 아시아 대륙지역 연합국총사령관은 엄연히 장제스다.
- ↑ 그가 기자들앞에서의 발언으로만 봐도 충분하다. “중국 문제는 매우 간단합니다. 우리는 무식하고 문맹이고 미신적인 농민 개자식들과 연맹을 맺은 것입니다.”
- ↑ 좋게 봐줘서 그나마 직무유기지 사실상 적전 도주다.
- ↑ 심지어 스틸웰에 우호적인 데이비스조차도 "지휘 판단에 문제가 있다."에 있다고 혹평했으니 말 다했다.
- ↑ 사실 양카이후이는 마오쩌둥의 아내일 뿐, 혁명운동과는 거의 무관했기 때문에 이런 처형은 장제스의 분풀이에 불과했다. 처형은 장제스의 부하였던 군벌 허젠이 실행했지만, 장제스의 승인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양카이후이는 마오쩌둥과의 결별을 선언하면 살려주겠다는 제의를 받았으나 이를 거부, 처형된다.
- ↑ 해당 사진은 황푸군관학교 시절의 것으로 당시 장제스(왼쪽)와 저우언라이(오른쪽)는 각각 교장, 교감이었다.
- ↑ 정확한 연도를 알게되면 추가바람
- ↑ 시간이 이렇게 많이 흘렀다. 풀어줄때가 되지 않았느냐
- ↑ 시간을 보내는데는 낚시가 제일이다.
- ↑ 부하들에게 소방 호스로 세례를 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 ↑ 진형명이 손문의 총통부를 공격하여 손문이 위급할 때에 군함 영풍을 가지고 손문을 상해로 무사히 탈출시킨 것이 바로 장개석이다.이후 영풍은 이름을 중산으로 개명한다.
- ↑ 첫번째는 당연히 청나라다.
- ↑ 공원은 무료지만 관저 입장료는 NTD 100원을 내야 한다.
- ↑ 주로 자수, 그림을 했으며, 관저에 걸린 미술품의 상당수가 쑹 여사의 작품이다.
- ↑ 일설에는 폴란드 침공 때도 있었다고 한다.
- ↑ 짱개(중국인) + (조)석 이라서 짱개석이라고 한다...
- ↑ 본명은 황런위(黄仁宇)로 중일전쟁에도 참전했던 중화민국군 장교 출신이다. 1950년대 미국으로 유학한 이후, 2000년에 타계할 때까지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다.
- ↑ 다만 중일전쟁 중에는 담배를 조금 피우기도 했다.
- ↑ 다만 장징궈에게는 비서와 사통해서 낳은 쌍둥이가 있었기 때문에 이쪽 계통 자손들은 해당되지 않는다. 장징궈 항목 참조.
- ↑ 장징궈는 본처 사이에서 3남 1녀를 두었는데, 세 아들이 1988~1996년 사이에 모두 죽었다. 그나마 정치가로 활동한게 셋째 며느리인 장팡즈이(蔣方智怡)와 서자 장사오옌(蔣孝嚴, 장완안의 아버지) 정도.
- ↑ 출처 : 장제스 평전
- ↑ 1975년 4월 7일자 장제스 사망을 다룬 동아일보 기사.
- ↑ 다만 실제 장제스를 묘사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장제스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타이완을 잠시 머물 공간으로 삼았을뿐, 언젠가는 본토로 돌아가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