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최영일 (崔英一 / Choi Young-Il) |
생년월일 | 1966년 4월 25일 |
국적 | 대한민국 |
출신지 | 경상남도 남해군 |
신체 조건 | 181cm / 76kg |
포지션 | 수비수 |
소속 클럽 | 울산 현대 호랑이 (1989~1996) 부산 대우 로얄즈 (1997~1998) 랴오닝 푸순 (1999~2000) 안양 LG 치타스 (2000) |
국가대표 (1994~1998) | 55경기 |
지도자 (2000~ ) | 동아대학교 (2000~ ) |
1 소개
홍명보와 함께 90년대 한국축구 대표팀 수비의 한축을 담당했던 선수로 악착같은 대인마크가 특기로 ‘수갑’, ‘진드기’ 등의 별명으로 불리며[1] 상대팀의 공격수들을 괴롭혔다. 98월드컵 대표팀의 주장.[2]
챔피언쉽 매니저 2001-02 유저들에게는 자기 팀 수비수가 좋은 기록을 보일때마다 나오는 '최영일 앞의 미우라같습니다!' 라는 멘트 때문에라도 낯익은 인물.
2 선수경력
2.1 클럽팀
어려서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와 세누나와 함께 어렵게 생활하는 가운데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축구를 시작하였다. 중학교까지는 미드필더와 수비수를 번갈아 맡다가, 수비수 명문인 동래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중앙 수비수로 자리매김했고 동아대학교를 거쳐 1989년 울산 현대 호랑이에 입단하여 시작한다.
현대에 입단한 이래 유공과의 강릉경기에서 선발출장하며 프로데뷔전을 치른 뒤 줄곧 주전 자리를 지키며 1989년 시즌동안 29경기 출장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점차 자리를 잡아나갔던 최영일의 모습과는 달리 소속팀인 현대는 극심한 부진을 면치 못했다. 1989시즌에서 6개 팀 중 최하위를 기록했고 이듬해인 1990년에도 5위에 그치고 말았다. 결국 최영일에게 큰 힘을 보태주었던 김호 감독은 1990년을 마지막으로 현대의 지휘봉을 내려놓게 되었다. 하지만 어지러운 팀 분위기 속에서도 최영일의 입지는 변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더 단단해졌다. 팀의 수비-허리라인은 최영일, 정종선, 윤덕여를 중심축으로 신연호등이 합류하며 재편되었고 1991시즌, 울산현대는 2위를 차지하는 성과를 이뤄냈다. 그 리빌딩의 중심에 바로 최영일이 있었다. 그 후로도 프로리그에서도 최영일의 상종가는 꾸준히 이어졌다. 1992시즌 9월에는 대우와의 경기에서 프로데뷔골을 뽑아냈고 1993시즌에는 전경기, 35경기0 무교체 출장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첫 베스트 일레븐 수상과 함께 모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95년 울산현대의 유니폼을 입고 최영일은 첫 번째 우승컵을 들어 올리게 된다. 비록 정규리그 우승은 아니었지만 정규리그 개막 전에 열린 아디다스컵에서 우승트로피를 차지하며 생애 첫 우승을 맛보았고 그해 생애 두 번째로 베스트 일레븐에 이름을 올리는 영광도 맛봤다. 그리고 이듬해인 96년에는 컵대회가 아닌 정규리그 타이틀을 차지하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96년 울산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을 마지막으로 최영일은 고향이나 다름없는 부산으로 팀을 옮겼고 98년까지 세 시즌 동안 부산에서 활약했다. 그 후 1999년 중국 수퍼리그에서 한 해 동안 머문 뒤 2000년 안양에 돌아와 선수로서의 마지막 시즌을 보내고 은퇴했다.
2.2 국가대표
1994년 처음으로 국가대표에 발탁되어 미국월드컵에 대비한 전지훈련에 참가하며 국가대표 커리어를 시작하였다. 약 한 달간 진행된 전지훈련에서 한국대표팀은 총 6차례의 평가전을 치렀다. 그 기간 동안 콜롬비아, 미국대표팀과 비기고 미국 클럽팀에게 대승을 거두는 등 나름대로 긍정적인 성과를 이뤄냈고 최영일은 많은 경기에 출전하며 자신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 기간을 거치는 동안 최영일은 어느덧 대표팀에 없어서는 안 될 주축 수비수로 자리잡으며 미국 월드컵 본선 3경기에 모두 출장하였고 이후 98년 월드컵까지 줄곧 대표팀 부동의 수비수로 활약해오며 55경기의 A매치를 치루었다.
특히 한일전이 벌어질때마다 일본의 간판 공격수였던 미우라 카즈요시의 전담 마크맨으로 출전하여 미우라를 옴짝달싹 못하게 틀어막던 모습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명장면으로 회자되며 ‘’미우라의 그림자‘’라는 별명까지 얻었다.[3]
참고로 대인마크하는 상대 공격수의 등쪽 유니폼을 계속 잡고 다닌다거나 공과 상관 없는 곳에서는 슬쩍 발을 밟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심판이 안볼때나 심판의 시야 밖에서 슬쩍슬쩍 반칙을 하는 것으로 악명을 떨쳤는데 그 대표적인 피해자로 미우라 카즈요시가 꼽힌다.[4] 참고로 이런식의 수비나 플레이를 당시에는 일본을 통해서 들어온 남미식 용어로 '마리사이' 라고 하곤 했는데 최영일은 실제로 이런 류의 수비에 능한 수비수였다. 얼굴은 순하게 생겼는데 실제로 도쿄대첩 이후 미우라가 인터뷰로 '한국팀의 4번(최영일)은 경기내내 나를 따라다녔다.'라고 할 정도였다. 당시 미우라는 일본축구의 아이콘이자 영웅이었고 지역예선에서 펄펄 날던 때인데 최영일만 만나면 경기장에서 지워졌다(...) 그래서 일본현지에서는 나름 충격이었고 국내에서도 이런저런류의 썰과 소문이 많았다. 이렇게 보면 서로 악연일 것 같지만, 경기 끝나면 상호 존경하는 사이.
3 지도자 경력
2000년 선수생활을 은퇴한 뒤에는 모교인 동아대학교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부임 이후 2001년 전국체전과 2002년 추계대학연맹전에서 준우승을 차지하였고 2009년에는 전국 춘계대학축구연맹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등 좋은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 정작 팀동료들에게는 '순대'라는 정겨운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 ↑ 홍명보가 선수 시절에는 영원한 캡틴 등으로 불렸기 때문에 대표팀 주장이었던 기간이 긴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가 대표팀 1옵션 주장이었던 기간은 최영일 은퇴 후 4년으로, 생각만큼 길지는 않다.
- ↑ 미우라는 훗날 그게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었다고 이야기했다. 한일전 펼쳐지면 최영일이 만사 제쳐두고 옆에 붙어서 수비하는데, 여간 곤욕이 아니었다고...
- ↑ 심한 경우 최영일의 손이 미우라의 바지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고 하는 둥(...)의 얘기들도 전설처럼 전해져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