吉川元春
1530~1586
일본 전국시대 무장.
모리 모토나리의 차남으로, '모리가 양천(兩川[1])중 한 사람이다.
모리 가문의 확장을 위해, 어머니 묘큐의 친정인 킷카와 가문으로 입양되어 6촌형제인 킷카와 오키츠네의 양자로 들어간다. 이후 모토나리에 의해 양아버지인 오키츠네가 암살되고 가문을 이어받는다.
아버지 모토나리마저 '나라도 전투에서는 모토하루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평가하였을 정도로 가문 제일의 맹장이었다.[2]
아마고 씨의 최후의 보루였던 야마나카 시카노스케와 결전을 벌여 이겼다. 오우치, 아마고, 오다 노부나가 등과의 전투에 평생을 바쳤으며, 패배를 모르고 살았으나, 단 한 번 아마고 씨와의 싸움(제 2차 갓산토다 성 공방전) 때에 퇴각한 적이 있다고 한다.
오다가의 하시바 히데요시와 하시즈가와(橋津川)에서 대치하였을 때, 모토하루는 하시즈가와의 다리를 끊고 배수진을 쳤다. 히데요시는 "죽음을 각오한 병사들을 공격해서 승리해봐야 손해가 더 많다"고하며 철수하였다. 일본 바둑에서 바둑판의 변에 붙여서 놓는 포석을 "킷가와의 다리끊기"라고도 한다.
진중에서 '태평기' 50권을 필사했다고 하는 학구적인 일면도 있다.
대세에 따라 어쩔수 없이 도요토미가문에 무릎을 꿇었지만, 성격은 불같아서 이를 인정하지 않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말도 한마디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한다.
만년에는 아들 모토나가에게 가문을 물려주고 은거하였는데, 이는 히데요시 밑에 있느니 차라리 은거를 하고 말겠다는 의지가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1585년에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 당시, 동생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적극적으로 히데요시를 따라 정벌에 참가하였으나, 모토하루는 아들 모토나가만 참가시키고 자신은 출진하지 않았다.
1586년에 큐슈 정벌이 시작되자, 이번에도 히데요시는 모토하루에게 끈질기게 출병을 요청했고, 이 때에는 동생 타카카게와 조카인 데루모토까지도 설득에 나서게 된다. 결국 모토하루는 큐슈 정벌에 참가하게 되는데, 이 때 이미 중병[3]에 걸려 있었다. 결국 12월 25일, 부젠(현재의 후쿠오카 근처) 고쿠라 성에서 사망하였다.
구로다 요시타카가 준비한 연어 요리가 자신의 병에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초대를 거절하는 것은 무례한 행위라고 생각하여 먹었기 때문에 병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고도 한다. 말 그대로 천생 무장에 의리를 중히 여겼던 그의 성격을 나타내는 일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항상 가문 최강의 무용을 지닌다. 고전 작품에서는 기마적성이 우수한 무장으로 등장했지만 궁병 개념이 생긴 이후의 작품에서는 궁 적성도 높게 등장한다. 지모나 정치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낮은 편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낮은 편은 아닌 지용겸비의 무장.
- ↑ 모토하루와 동생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를 일컫는 말로 킷카와와 코바야카와, 모두 성에 川자가 들어감으로 생긴 말.
- ↑ 그런데 태합입지전5에서는 모토나리의 통솔이 93으로 모토하루의 91보다 더 높다. 어?
- ↑ 화농성 염증. 혹은 암이었다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