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런들/리그의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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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메이크 전 트런들의 리그의 심판이니 읽을 때 주의를 요합니다.

후보: 트런들
날짜: CLE 20년 11월 26일

관찰

트롤이 왔다는 걸 광고라도 하듯 코를 찌르는 썩은 내가 진동한다. 발톱이 바닥을 긁는 소리, 힘겹게 쉬는 숨소리, 지저분한 발을 티 한 점 없는 대리석 바닥 위로 질질 끄는 발걸음 소리가 트런들을 앞서 대전당에 울려 퍼진다. 전쟁 학회의 깔끔하게 단장된 실내와 극도로 안 어울리는 행색을 가리려 애쓰기라도 한 듯 누더기를 덮어썼다. 트런들은 작달막한 키에 거의 맞먹는 다루기 불편하고 조잡해 보이는 몽둥이를 고쳐 잡는다. 피부는 온통 물집이 잡혀 있고, 여기저기 시뻘겋게 염증이 생겨, 허물이 벗겨지며 뭉떵뭉떵 떨어져 나간다. 몸에 살이 아직 남아 있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트런들의 지친 시선은 정문 위에 새겨진 문구에도, 발로란 최고의 예술성을 떨치는 아름다운 조각상에도 머무는 법이 없이 그저 대전당 내부를 쓱 훑어볼 뿐이다. 이런 물질적인 것들은 트런들에겐 아무 의미도 없다. 상처투성이인 혀로 문드러진 입술을 축이더니, 회고실로 통하는 문쪽으로 손을 뻗는다. 그러자 한 쌍의 문이 마치 그의 손길을 피하기라도 하듯, 스르르 먼저 열린다. 트런들은 이런 반응쯤 한두 번 겪어본 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방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회고

뭔가 날카로운 게 손을 쿡 찌르자 트런들은 놀라 두 눈을 번쩍 떴다. 대충 만든 제단에 몸이 묶인 채, 주위에는 룬들이 둥그렇게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묶인 몸 위를 마을 주술사들이 에워싸고서 평생 고통을 지워주게 될 의식을 막 치르려 하고 있었다.

이번엔 의식을 처음 치를 때처럼 흥분, 공포, 자부심이 뒤섞인 소용돌이치던 감정 같은 건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차분하게 거리를 두고 남의 일을 보듯 지켜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땐 너무 어려, 매일 같이 다른 어린 트롤들한테서 괴롭힘을 당하는 상처가 더 쓰라렸지. 어린 날의 자기 모습을 돌이켜 보건대, 다른 아이들 탓만 할 일은 아니었다. 트롤이 잘생겨 봤자 거기서 거기겠지만, 트런들은 그중에서도 심하게 못생긴 데다 왜소하고 힘까지 약해 늘 도리 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더 못생기고 약한 트롤이 태어나기만 했다면 트런들 역시 앞장서서 녀석을 괴롭혔을 게 뻔했다.

어른들이 소리 낮춰 했던 약속들이 아직도 귀에 선했다. 일족에게 내려진 저주를 혼자 몸으로 받아내 주기만 한다면 그야말로 유사 이래 가장 고귀한 희생으로 기록될 것이다. 타고난 재생력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에, 오직 트런들만이 일족을 구원할 수 있다… 어린 트런들은 어른들의 이런 말에 그만 넋을 잃고, 자기를 놀려대던 녀석들의 눈빛이 존경의 시선으로 변하는 모습, 부족 전체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자신의 미래, 고귀한 희생에 대한 모두의 감사를 만끽하며 부와 명예를 누릴 나날에 대한 환상에 젖었었다.

다른 건 다 차치하고라도, 아이들의 괴롭힘만 안 당한대도 그게 어딘가.

그래서 트런들은 끔찍한 질병에 자기 몸을 내주기로 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러고스크 부족은 마침내 질병을 벗어난 데에 기뻐하며 한마음으로 트런들을 경배했다. 문제는 그런 감사의 마음이 결코 오래가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가족과 친지들조차도 트런들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트롤이라 해도, 또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똑같은 질병을 앓고 있었긴 해도 시뻘겋게 벌어진 상처와 곪아 짓물러가는 살을 쳐다보는 건 고역이니까.

이 즈음해서는 오히려 괴롭힘을 당하는 편이 이런 지독한 따돌림보단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적어도 자기를 놀리던 그땐 곁에 다가오기는 했으니까.

누군가의 목소리가 상념에 빠진 그를 홱 흔들어 깨웠다. "리그에 들어오려는 이유가 뭔가?"

트런들이 몸을 돌리며 일어나 앉았다. 제단에 몸을 묶었던 끈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푸른 로브로 몸을 감싼 소환사 한 명이 그의 뒤에 우뚝 서 있었다. 하지만 두건을 깊숙이 눌러쓴 그의 얼굴까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이 병의 치료법을 구하기 위해서." 트런들이 지친 목소리로 읊조렸다.

"치료법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면 어쩌겠나?"

"내가 그따위 거짓말에 속을 것 같아!"

"그대에 대한 조사는 이미 끝났소, 트런들. 이 학회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후보자에 대한 건 모두 다 파악해 내는 게 리그니까. 그 질병에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놀라운 재생 능력 덕분에 자신을 희생해서 그 병이 다시 동족에게 퍼지지 않도록 막고 있지."

트런들이 코웃음을 쳤다. "뻔한 얘기만 계속할 거요? 이 뼈에서 떨어져 나가는 살덩이나 썩어들어가는 고약한 냄새는 바보천치라도 알 수 있는 거잖소. 난 트롤이지, 멍청이는 아니오."

"맞아, 하지만 그대가 모르는 게 있소, 트런들. 그대가 동족을 대표해 질병을 짊어졌을 때 그들의 몰락이 시작됐다는 사실을 말이지. 그대의 부족이 겪던 질병은 몸을 쇠약하게 만들긴 했지만, 결국 신체는 그 병에 적응하게 됐소. 그래,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줬고 늘 병마에 시달려야 했지만, 그 병이 재생과 치유의 능력을 키워준 뿌리가 됐던 거요." 소환사의 목소리는 어딘지 의사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그래서 드디어 병마를 떨쳐내게 되자, 재생 능력도 함께 사라져버렸지. 이제 그들의 육신은 스스로 버틸 능력조차 없다고 봐도 무방하오."

소환사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대의 일족은 그 의식을 통해 치유 받은 게 아니오. 오히려 피할 수 없는 절멸의 시기만 앞당긴 거라고나 할까."

트런들은 엄청난 사실에 압도당해 두 눈을 감았다.

소환사는 그의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다시 묻겠소. 러고스크의 트런들이여, 동족에게 내려진 천형을 치유하기 위해 리그가 필요한 것이오?"

전엔 생각지도 못했던 광경이 감은 눈앞에서 펼쳐졌다. 또다시 모두 똑같은 병마에 시달리는 동족의 모습. 더 끔찍한 운명을 피할 길은 이런 희생임을 모두에게 알려주는 자신의 모습. 마침내 모두들 트런들이 진정한 부족의 구원자였음을 깨닫게 될 바로 그 순간.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다가, 문득 이 얼마나 순진해 빠진 상상인가 하는 깨달음이 그를 흔들어 깨웠다. 일족을 대신해 병마를 짊어지기로 선택했어도 그가 왜소하고 약해빠진 트롤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었지. 동족을 위한 희생 아니라 그 어떤 대단한 일을 한들 변하는 건 없다.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에 뒤틀린 미소가 지나갔다. "러고스크는 고통을 겪도록 둡시다. 그들이 내게 준 선물은 내가 간직할 테니."

"그렇게 하지요. 다시 묻겠소. 리그에 들어오려는 이유가 뭡니까, 치료법을 찾으려는 게 아니라면?"

"내가 찾아 헤매던 소위 ‘치료’라는 게 바로 이거였던 것 같소만."

"그래, 속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니 기분이 어떻소?"

트런들이 오래 생각에 잠겨 있다 다시 입을 열었다. "난생 처음 혼자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소. 고맙군."

소환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사라졌다. 이제 트런들은 긴 복도에 홀로 서 있고, 아까 들어왔던 길을 따라 지저분한 흙과 벗겨져 나간 살점들이 점점이 떨어져 있는 게 보였다. 트런들은 어깨를 으쓱하며 또 곪아 터진 살점을 우수수 떨구고 나서, 리그 오브 레전드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