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문
제2차 포에니 전쟁 중인 218년 한니발 바르카가 이끄는 카르타고군과 로마군의 전투. 2차 포에니 전쟁의 첫번째 전투였다.
로마군은 상당한 전사자를 내고 완패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1만여의 로마 군단병은 그들의 우수함을 보여주며 부분적이나마 우세함을 보이고 명예롭게 후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전투에서 한니발은 그의 독창적이고 뛰어난 재능을 보여줌으로써 승리한다. 성급하고 무모했던 로마군의 지휘관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 [1]는 로마군을 육체적으로 힘든 전투로 내몰아 카르타고 군을 정면으로 상대하게 하여 패배를 자초하고 만다.
2 사료
이 전투를 기록한 것 중 후대에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폴리비오스와 리비우스의 역사서이다. 그러나 두 저명한 역사가의 저서는 여러 면에서 불일치를 보이고 있다. 그 중 하나는 로마의 두 집정관의 군단이 어떻게 합쳐졌는가에 대해서이다. 폴리비오스는 두 집정관이였던 티베리우스와 스키피오는 여러차례의 회담과 논의끝에 티베리우스의 휘하에 군단을 합치기로 결정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단이 합쳐진 방식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문이 남는다. 두 집정관은 상당히 떨어진 곳에 서로 머물고 있었다. 폴리비오스는 군단이 연합하여 티베리우스 휘하에 네개 군단이 있었다고 하였고 이에 따라 전투의 경과를 설명하였으나 전투 이후 부상을 입은 스키피오가 (그는 트레비아 전투 이전부터 부상을 입고 있었던 상태였다) 어떻게 되었는지는 전혀 설명을 안하고 있었다. 리비우스는 그에 비해 스키피오에 대해 설명을 하였는데 전투 이후 스키피오는 그의 부대를 이끌고 패잔병이 달아나서 머물고 있었던 크레모나 시로 갔다고 서술하였다. 이것을 미뤄본다면 아마도 두 집정관 휘하의 군단이 하나로 합쳐진 것은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리비오스와 리비우스가 서술한 전투에 참여한 로마병사의 숫자는 일치하고 있다)
만일 스키피오의 부대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면 두 집정관은 서로의 부대를 지휘하지도 않았고 또한 전투를 서로 도운 것도 아니였다고 여겨진다. 사실 티베리우스가 전투를 개시했을 때 스키피오한테 전투를 하겠다고 통보했을 지도 의문시되어진다. 이전에 티베리우스가 스키피오에게 싸워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조언을 구했을 때 스키피오는 싸우는 것에 대해 강하게 반대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티베리우스가 전투를 치르라고 스키피오가 그에게 자신의 군대를 넘겨주는 것이 가능할리가 없다. 사실 한니발은 두 집정관이 연합하던지 따로 있던지 전혀 관심이 없었고 따라서 티베리우스가 동쪽에서 진군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렇다면, 두 집정관은 병력을 서로 합치기보단 자신의 지휘권을 그대로 유지하는 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여진다.
3 전조
한니발은 기원전 219년 현재의 발렌시아에 위치하고 있었던 사군톰을 공격함으로써 2차 포에니 전쟁을 시작하였다. 그 도시를 파괴한뒤 그는 대략 10만 2천여 병력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군하였다. 그는 피레네와 갈리아를 거쳐 알프스를 지나면서 대단한 병력의 손실을 입었고 그 결과 2만 6천여 병력만이 휘하에 남았다. 한니발은 이탈리아에 도착한 후 티키누스 강에서 로마인과 기병전을 벌여 승리하였고 그 결과 갈리아인들이 한니발 휘하에 자원하여 그의 병력은 순식간에 9만여명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이 병력 중 1만명은 기병이였다. 이것 뿐만 아니라 한니발은 북부 이탈리아에 있었던 모든 갈리아 족과 동맹을 맺었는데 그 결과 한니발은 갈라아 족의 보급과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로마 원로원은 한니발의 도착에 놀라 시실리에 주둔하고 있었던 집정관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에게 급히 이탈리아 북부로 올라가 다른 집정관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를 지원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스키피오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아버지이다). 원로원은 이때 스키피오가 티키누스 강에서의 기병전으로 인해 심한 부상을 입고 있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스키피오가 이 부상으로 인해 피아센차의 언덕에 꼼짝을 못하고 있었으므로 최근에 로마에 의해 식민지화되었던 갈리아 인들은 모두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한니발은 스키피오가 머물고 있던 군사 기지의 바로 밑에 병사를 이끌고 주둔하고 있었다.
시칠리아의 릴리바이움이라는 도시에 있었던 셈프로니우스는 원로원으로부터 북상하라는 명령을 받은즉시 자신의 병사를 해산시킨뒤 그들에게 포 강의 남부에 있는 아리미눔이라는 도시에서 집결하라고 명하였다. 그 뒤 그는 가도를 거쳐 북상하였다. 셈프로니우스 휘하의 2개군단은 아마도 12월 초에 집결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북상하는데 걸린 시간은 대략 40일 정도 걸렸으며 이들은 만나자 마자 바로 한니발을 향해 북상하였고 트레비아 강을 건넜다.
비록 갈리아 족이 기꺼이 한니발을 지원해 주고 있었으나 한니발은 갈리아 족들이 급증한 그의 병력을 지원하는데 애를 먹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때 로마인들은 클라스티디움이라는 곳에 상당한 곡물을 저장하고 있었고 한니발은 이 도시를 점령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근처에 집정관과 그의 부대들이 견제하고 있었으므로 한니발은 공격하는대신 그 도시를 맡은 지휘관인 다시우스 브런디시우스를 매수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로마인이 아닌 동맹시 출신이므로 이 제안에 넘어갔으며 따라서 한니발은 싸움없이 이 도시를 점령하고 곡물 창고를 손에 넣는다.
4 갈리아인들의 불만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이유는 모르나 카르타고 군은 포 강과 트레비아 강 사이에 있는 갈리아 족들이 배반할 것이라고 의심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두 저자(폴리비오스, 리비우스)는 갈리아 족들이 중립을 지키고 싶었다고 서술했으나 그외에 자세한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한니발은 분개하여 5000의 보병과 1000명의 기병을 보내 주변 마을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갈리아 족에게 어느쪽에 설 것인가를 결정하라는 경고였다. 갈리아 족들은 로마에 도움을 청했다.
티베리우스는 이에따라 1000명의 보병과 약간의 기병을 포함해 강을 건넜다. 그들은 약탈하고 있던 카르타고 병사 몇명을 생포하였고 남은 이들을 한니발의 기지로 몰아넣었다. 이에 카르타고 군은 군사를 더 내보내 로마군을 다시 강가로 내몰았다. 그러자 로마인들도 군사를 더 증원하여 맞섰다. 한니발은 이때 자신의 군사를 철수시켰는데 그 이유는 한니발이 원하는 시간, 장소가 아니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자신이 이 싸움에서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다른 집정관인 스키피오가 한니발에게서 패배했던 것을 생각하며 우쭐해 했다.
한니발은 이런 싸움을 통해 티베리우스의 공격적인 성향을 파악하고 그를 유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강 건너의 로마군을 자신의 캠프 바로 앞으로 유인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전날의 전투는 로마인들의 사기를 매우 올렸다. 티베리우스는 즉각 한니발과 결판을 내기로 결정하였다. 사실 원로원은 티베리우스를 스키피오를 도우라고 보낸 것이었으나 스키피오가 부상으로 인해 군사행동을 못하고 있었으므로 티베리우스는 주도적으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자신이 직접 결정짓기로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베리우스는 스키피오와 다음과 같은 말로 논쟁을 벌였다.
"도대체 무엇때문에 전쟁을 질질 끌어야 하는가? 지금 세번째 집정관과 그의 군대를 기다리겠다는 것인가? 이 장소는 우리의 땅이며 우리가 지켜야할 장소이다."
그는 싸우지 않는 태도에 대해 비난하며 "이탈리아의 심장부에서 겁먹어 숙영지에 숨어있다" 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리비우스는 두 집정관이 이러한 논쟁을 어디에서 했는지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그는 부상중인 스키피오가 그의 캠프에서 나왔는지 아니면 티베리우스가 직접 그를 방문하였는지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러한 논쟁을 어디서 했는지 간에, 스키피오는 충고하길 "로마군은 이대로 캠프에 머물며 겨울을 보내야 한다. 변덕스럽기로 유명한 갈리아 인들이므로 겨울 내내 카르타고 군을 지원해줄 것 같지는 않다." 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이러한 충고를 무시하고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한다.
5 로마의 병력
스키피오가 마르세유를 떠났을 때 그의 휘하엔 병력이 없었다. 그는 이탈리아의 북부에 도착해 루키우스 만리우스의 두개 군단을 넘겨받는다. 그리고 가이우스 아틸리우스에게서도 한개의 군단과 5000여의 동맹군을 넘겨받는다. 리비우스가 자신의 저서에 1개 군단을 4000의 보병, 300의 기병으로 서술했으므로 스키피오는 최소 1만 2000의 로마군과 900의 기병 그리고 5000여의 동맹군을 보유하고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따라서 스키피오는 대략 1만 8000의 병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원로원이 4만의 동맹시 보병과 1800의 기병을 뽑으라고 명령하였으므로 스키피오는 추가의 보조병을 보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대략 2만 5천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을 것이라 추정된다.
셈프로니우스는 두개의 군단과 (8000의 보병, 600의 기병) 그리고 1만 5천의 동맹시 보병을 가지고 있었다. 스키피오는 셈프로니우스보다 더 많은 보병을 보유하고 있었고 따라서 이쪽 지역에서의 최고 지휘관 역할을 맡은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두 집정관은 원로원의 지시가 없는 이상 서로의 병력을 지휘할 권한은 없었다.
리비우스는 서술하길 전투가 벌여졌을때 1만 8000의 로마군과 2만여의 동맹시 보병이 있었다고 하였다. 폴리비오스는 1만 6000에서 2만여의 동맹시 보병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며 말하길 "이 숫자는 두 집정관이 그들의 병력을 합친 결과였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두 집정관이 연합했는지 쓰지 않았다. 만일 이들이 합쳤다면 이들의 군단은 4개 로마 군단병과 5개의 동맹시 보조군단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숫자는 대략 의문을 자아낸다. 그 이유는 만일 두 집정관이 합쳤다면 로마 군단병은 2만에 동맹시 병력은 4만에 이르렀을 것이기 때문이였다. 그리고 합치지 않았다면 티베리우스에겐 고작 2개 로마 군단병만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른 설명은 아마도 스키피오가 티베리우스에게 2개 로마 군단병을 주고 2만여의 보조병을 그의 캠프에 머물게 하였을 지도 모른다. 리비우스는 스키피오가 티베리우스에게 전쟁 수행의 모든 권한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스키피오와 티베리우스가 전쟁 수행에 대해 완전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미뤄보면 여기엔 의문이 남는다.
두 저자가 어쩌면 전투에 참여한 로마 보병의 수를 두배로 부풀려 서술했을 지도 모른다. 따라서 티베리우스에겐 오직 8천에서 9천의 로마 군단병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또한 문제를 낳는데 두 저자는 전투에서 1만여 로마 보병이 카르타고 군의 정면을 돌파해 피아센차로 달아났다고 서술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티베리우스는 두개의 군단병보다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던게 확실하다. 스키피오는 앞서 티베리우스에게 그의 군단병은 전투 경험이 적어 겨울 동안 캠프에서 머물며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충고한 적이 있었다. 이것으로 미뤄본다면 어쩌면 티베리우스는 북상하는 도중 2개의 로마 군단병을 새로 뽑아 보충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신병 모집에 대해서는 어느 저자도 기록해 두고 있지 않았다.
기록에 따르면 카르타고 군을 돌파하고 달아난 1만여의 베테랑들이 이 전투의 생존자의 대부분이였다. 두 저자들은 피아센자로 달아난 생존자의 수가 적었다고 분명히 서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한니발의 그동안의 관습으로 보아 틀림없이 전멸당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 군은 강을 건너 티베리우스의 캠프를 점령하지 않았다. 이것은 이들이 전투로 지쳤거나 혹은 스키피오가 많은 병력을 보존한 상태로 주변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만일 후자라면 티베리우스는 아마 신병을 모집해서 병력을 증원했을 가능성이 높다.
6 카르타고 군의 병력
한니발은 트레비아에 9만의 병력을 데리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두 저자는 한니발은 4만여 병력으로 싸웠다고 하였다. 이 중 2만여는 갈리아 군과 스페인, 아프리카 중보병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1만여는 기병 그리고 2천명은 매복을 하고 있었다. 8천여 병력은 발레리아스 투석병이였다. 카르타고 군의 사상자에 대한 언급은 되어있지 않으나 1만여 로마 보병이 중앙을 돌파했을때 카르타고 군의 중앙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고 서술되고 있다. 만일 한니발이 5만여 병력을 전투에 투입했었다면 이러한 중앙돌파는 불가능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7 마고의 매복
기원전 218년12월은 춥고 눈이 많이 내리는 기간이였다. 스키피오는 그의 부상에서 회복중이였고 셈프로니우스는 성급하고 공격적이였다. 그는 스키피오가 다 낫기전에 한니발과 결판을 내고 싶어했다. 게다가 새로운 집정관 선거가 다가오고 있었다. 셈프로니우스에겐 불행하게도 한니발은 그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에 따라 한니발은 이러한 셈프로니우스의 성격을 이용하기로 계획을 짠다. 한니발은 이에따라 차갑고 폭이 넓은 트레비아 강을 사이에 두고 진을 친다.
한니발은 주변의 지형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에 따라 복병을 숨겨놓았다. 강의 근처엔 하나의 늪이 있었는데 이 늪 주위엔 가시나무와 그 밖의 숲이 자라고 있었다. 한니발은 여기에 병력의 일부를 숨겨놓기로 결정하였다.
한니발은 갈리아인 스파이를 통해 로마인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 스파이들이 한니발에게 로마인들이 전투에 나설 준비가 되었다고 말하자 그는 100명의 정예를 각 부대에서 보내 이들이 각각 10명씩을 뽑게 하였다. 그 결과 1000명의 보병과 1000의 기병이 새로 편성되었으며 이들은 한니발의 동생인 마고에게 주어져 그 앞서말한 숲에 매복하게 하였다. 이들은 밤에 이 숲으로 들어가 다음날 아침에 있을 공격에 대비하였다.
파일:Attachment/트레비아 전투/trebia.jpg
(1. 카르타고 군의 진영 2. 카르타고 기병 3. 카르타고 보병 4. 마고 바르카의 매복군 5. 트레비아 강 6. 로마 기병 7. 로마 보병 8. 로마 진영 9. 포강 10. 피아센차 시)
8 누미디아 기병의 유인
다음날 아침 한니발은 그의 누미디안 기병을 모두 내보내 트레비아 강을 건너 로마 캠프를 공격하게 한뒤 후퇴하게 하였다. 이로써 로마인들을 한니발의 복병이 공격하기 좋은 위치까지 유인하고자 하였다. 누미디아 인들은 로마 캠프 바로 앞까지 도착하여 그들의 투창을 보초를 서고 있었던 로마 인들에게 던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샘프로니우스는 로마 기병을 즉각 투입하여 누미디아 기병을 쫒게 하였다. 그 뒤 6천여의 투창병을 투입하고 남은 중보병은 전투 대형을 짜도록 하였다. 이 캠프엔 1만 2천의 로마 군단병과 2만 여의 동맹시 중보병이 있었다.
다음은 미국 남북전쟁 당시의 장교였던 시어도어 닷지의 위 전투에 대한 서술이다.
그날은 춥고 눈이 내리는 날이였다. 로마군은 아직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았을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모두 내보내져 트레비아 강을 건네게 되었는데 트레비아 강은 가슴까지 차올랐고 또한 매섭게 차가웠었다. 로마인들은 이 강을 건넜을때 덜덜 떨었고 간신히 그들의 무기를 들어올릴 수 있었을 뿐이였다. 한니발은 이들을 자신의 배불리 먹고 또한 따뜻한 횃불 앞에서 몸을 녹인뒤 온몸에 기름을 바른 병력으로 맞서게 하였다. 한니발은 로마인들이 강을 절반정도 건넜을때 공격할 수 있었었다. 그러나 한니발은 그들이 강을 완전히 건낼때까지 내버려 두었는데 이것은 그가 로마인들을 완전히 쳐부숨으로써 갈리아의 동맹군들에게 완벽하고 철저한 승리를 보여주기 위해서 였다.
9 한니발의 우세한 기병
강을 다 건넌 로마군에게 한니발은 8천명의 투창병과 발레아레스 투석병을 투입하였다. 이들이 로마군을 견제하는 동안 한니발은 2만명의 아프리카, 스페인, 갈리아 보병대로 이루어진 중보병 대의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런다음 1만여의 기병과 약간의 코끼리 부대를 양익에 배치하였다.
누미디아 기병은 카르타고 군에서 나와 로마 기병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티베리우스는 공격받는 기병을 양 익으로 물러나게 하였다. 그러자 누미디아 기병은 로마 투창병 (벨리테스)을 공격하여 벨리테스의 투창을 모두 소모하게 하였다. 로마와 카르타고 군이 점차 가까워지자 티베리우스는 이들 경보병을 모두 중보병 뒤로 물리게 하였다.
같은 때에 한니발 또한 투창병과 발레아레스 투석병을 모두 물러나게 하였는데 중보병 뒤로 물린 로마군과는 달리 한니발은 이들을 양익으로 물러나게 하였다. 이 시점에서 양 쪽의 포진은 다음과 같다. 중앙에서 3만 2천여의 로마 중보병은 2만여의 카르타고 중보병과 맞섰는데 이는 1.6 대 1의 비율로 로마가 우세하였다. 양 익에선 각각 2천여의 로마 기병이 5천여의 카르타고 기병과 4천여의 투창병을 상대해야 했으므로 1대 4.5의 비율로 로마가 열세였다. 더군다나 양 익엔 코끼리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경보병이 물러난뒤 중보병이 서로 점점 다가서서 싸우기 시작하였다. 그와 동시에 카르타고 양 익이 로마 기병을 4.5 대 1의 비율로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숫적으로 대단히 열세였던 로마 기병은 순식간에 강으로 밀려났고 곧 전장을 이탈했다. 그 결과 로마 중보병의 양 익은 완전히 노출되었다. 역사학자 사무엘은 로마 기병이 밀렸다고 서술되어 있으나 사실상 격파당해 패주당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말하였다. 로마의 배후가 노출된 것을 보고 근처에 매복하고 있었던 마고의 복병은 진군하여 로마의 배후로 돌아 뒤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피로에 젖어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로마군은 이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그들의 위치를 버린채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비록 두 로마 역사가의 저서에서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이렇게 달아난 로마군은 대부분이 새로 편성된 신병들이고 고참병들은 그 자리를 지킨 것으로 보여진다.
로마군이 흩어져 강을 건너자 이것은 한니발에게 이들을 전멸시킬 기회를 주었다. 한니발은 이들을 추격하여 대부분의 병사들을 강 위에서 죽이거나 익사시켰다. 그러나 고참병으로 구성된 2만여의 로마 중보병은 그대로 남아 티베리우스의 지휘를 받았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티베리우스는 양 익보단 중앙에 자신의 주력을 배치하였고 그 또한 직접 중앙에서 그 주력을 지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로마군에서 가장 경험이 많고 또한 가장 우수한 질을 가진 병사들이었다. 이들의 우수함은 포위당한 상황에서 두드러졌는데, 그것은 뒤쪽에 있던 병사들이 재빨리 뒤를 돌아 방원을 형성했던 것이다. 그 결과 로마 보병은 모두 바깥을 향하였고 빙 둘러싼 원형으로 포진을 하였다. 그리고 그 빈 가운데 공간엔 티베리우스가 서서 지휘를 하고 있었다. 그 진형으로 로마군은 사방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카르타고 군에게 맹렬히 맞섰다. 이렇게 되자 카르타고 군은 이들을 공격하기 보다는 강을 건너고 있는 로마군을 향해 공격을 집중하였다.
중앙의 로마군에 포함되어 있었던 투창병들은 코끼리들을 향해 맹렬히 투창을 퍼부었다. 그 결과 코끼리들은 성이 나서 적, 아군을 가리지 않고 날뛰기 시작하였다. 이에 한니발은 이 코끼리들을 왼쪽으로 물려 좌측에 있었던 로마측의 갈리아 병사들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 로마측의 갈리아 부족은 세노마니 부족이었고 이들은 갈리아 족 중 로마측에 선 유일한 부족들이었다. 이들 부족은 곧 대부분이 전사하고 만다.
비록 티베리우스는 한니발의 적수는 안되었으나 우수한 야전 사령관임을 입증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런 상황에서 침착하게 카르타고 군의 중앙을 돌파하라고 지시하였기 때문이었다. 로마군이 모든 전력을 중앙에 집중해 맹공을 퍼붓자 카르타고 군은 곧 상당한 피해를 입게 된다. 카르타고 군에 포함된 두 민족인 카르타고 인과 갈리아 인 중, 갈리아 인들이 이 공격으로 인해 대부분의 피해를 입게 된다. 한참을 싸우다 로마군은 곧 이들이 어느덧 카르타고 군의 배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즉 돌파에 성공한 것이었다). 로마군은 뒤를 돌아보았고, 동맹군이 카르타고 군의 공격으로 매우 위급한 상황임을 목격하였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이들 동맹군을 구원하는 것을 포기하였고(이것에 대해 폴리비오스와 리비우스는 거세게 내리는 비때문이라고 변호했다) 대신 피아센차로 향했다.
10 민중의 반응
리비우스는 그날밤의 일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캠프에 남겨진 수비병과 많은 생존자들, 그리고 부상병들은 트레비아 강을 뗏목으로 건넜다." 스키피오가 이들을 맞이하였다. 그는 "그의 병사를 소리내지 않고 진군시켜 포강을 건넌뒤 크레모나 지역에 도달하였다. 크레모나는 로마가 마지막으로 보유하고 있는 북이탈리아의 식민지였다. 스키피오는 곧 패잔병이 머물고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스키피오는 이렇게 진군하는 동안 한니발이 머물고 있는 캠프를 지났으나 한니발은 이들을 추격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스키피오에겐 아직 상당한 병력이 있었고 한니발의 병력은 대규모 회전을 치른 직후였기 때문이었다.
스키피오의 로마군이 카르타고 군의 캠프를 지나갔을때 공격에 노출되어 있었으나 공격하기엔 기후가 혹독했는데 아침에 내린 비는 추운 기후 때문에 모두 눈과 얼음으로 얼어있었다. 그리고 한니발 군 역시 한마리를 제외한 모든 코끼리가 죽었으며 많은 부상병과 전사자의 피해를 입은 상태였었다. 따라서 한니발은 더이상의 군사행동을 할 수 없었다.
두 명의 집정관이 티키누스 강과 트레비아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민중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이들은 한니발이 로마의 성문앞에 곧바로 나타날 것이라는 두려움에 떨었다. 사실 전투의 패배는 그들이 생각한 것 만큼 심각하지 않았는데 2.5개의 로마 군단병(레기온)이 탈출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스키피오 휘하의 3개 군단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2개의 군단은 스페인에 남아있었으므로 로마 원로원은 총 7.5개 군단을 고스란히 보유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동안 카르타고 군은 병력을 재정비하였다. 카르타고 군은 포 강을 통해 갈리아 인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카르타고 군을 피해 로마로 되돌아왔고 로마 집정관 선거를 주관하였다. 두명의 새로운 집정관이 선출되었는데 한명은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였고 다른 한명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 네포스였다(플라미니우스는 훗날 트라시메노 호수에서 한니발에게 대패를 당한다). 이들 집정관은 3월 15일까지는 집정관 역할을 할 수 없었다. 티베리우스는 집정관 선거가 끝난뒤 즉각 지휘권을 다시 넘겨받는다. 새로 선출된 집정관들은 로마와 동맹시에서 더 많은 병사를 뽑기 시작하였다. 이들 신병은 사르데냐와 시칠리아, 그리고 타렌툼과 그 밖의 많은 도시들의 수비를 강화하는데 배치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60여개의 군함(퀸쿼레메)을 건조하였고 아리미눔과 아레티움에 군수 물자 거점을 세워 북상할 준비를 한다. 그들은 시칠리아의 지도자인 히에론에게 군사 원조를 요청하여 1천 5백명의 병력을 지원받는다. 플라미니우스는 아레티움에 있는 캠프로 이동하였고 세르빌리우스는 아리미눔에 있는 캠프로 갔다.
11 피아센차에서의 마지막 군사활동
로마군은 이제 피아센차에 요새화한 숙영지를 지었다. 한니발은 이들을 시험해 보기 위해 야습을 해보지만 로마군은 대비가 단단히 되어있었다. 보초들은 한니발 군을 보고는 크게 고함을 질러 피아센차에 있는 군단병이 알아챌 수 있게 하였다. 다음날 새벽 티베리우스의 기병이 출전하여 카르타고 군을 내쫒았고 한니발에게 경미한 부상까지 입힌다. 이러한 방어에 대해 리비우스는 "매우 훌륭한" 것이라고 서술했다.
며칠 후 한니발은 빅투비아이라는 도시로 진군한다. 이곳은 한니발에 반대하는 모든 갈리아 부족들이 피신한 도시였다. 이들은 훈련이 부족한 상태에서 한니발과 맞서기위해 3만 5천여 병력이 싸우러 나오나 금세 패배하고 모두 항복한다. 한니발은 뒤이어 이 도시를 약탈한다.
그 뒤 견딜수 없을 정도의 추위로 인해 한니발 군은 군사 활동을 멈춘다. 봄이 다가오자 한니발은 트레비아 강 남쪽의 에트루리아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아펜니노 산맥에서 이들은 대단히 강력한 돌풍을 만나 이들은 캠프를 칠 수 없게 된다. 뒤이어 엄습한 강한 비와 눈이 오자 이들은 텐트를 평평하게 핀 뒤 그 밑으로 들어간다. 그 돌풍 이후 강한 추위가 찾아온다. 이로 인해 모든 코끼리와 많은 말이 죽는다. 이틀뒤 한니발은 피아센차로 되돌아와 캠프를 친다. 이제 임기가 얼마남지 않은 티베리우스는 다시 전투를 하기로 결정하고 북상하여 한니발 군으로부터 3마일 떨어진 곳에 캠프를 친다.
그때 한니발 휘하엔 1만 2천 보병과 5천의 기병만 있었는데 이렇게 수가 줄은 이유는 전사로 인한 것이 아니라 갈리아 족 병사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그들의 부족으로 되돌아 갔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아침 한니발은 병력을 이끌고 나와 티베리우스의 캠프를 공격한다. 한니발은 많은 보병을 배치한뒤 로마인들이 중앙을 공격하길 기대했지만 로마인들은 그렇게 하질 않았다. 로마인들은 해질 무렵 후퇴하기 시작했고 한니발은 그 배후를 공격하였으나 로마인들은 이 공격을 견뎌냈다. 밤이 오자 한니발은 공격을 멈췄다. 사상자는 양측이 거의 비슷했다. 이것은 그 해의 집정관의 마지막 군사 행동이었다. 이 해에 로마인들은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그 다음 해에 비하면(트라시메노 호수의 패전)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었다.
12 전술적 분석
다음은 영국 역사학자 왈터 랠레이그의 분석이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는 세가지의 큰 실수를 하였다. 첫째는 그는 기병이 매우 부족한 상태에서 한니발과 평원에서 정면으로 대결을 한 것이였다. 그는 고르지 못한 땅, 숲 등의 여러가지 지형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두번째 실수는 그는 싸우기 전 지형의 상태를 전혀 조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그는 추운 겨울날 아침에 강을 건넜고, 마고의 복병에 그대로 당한다. 세번째 실수는 그는 자신의 병사를 식사도 안한 상태에서 차가운 강에 그대로 내몬다. 그 결과 병사들은 평소보다 전투력이 훨씬 손상된 상태에서 싸워야 했었다.- ↑ 롱구스는 개선장군에게 붙이는 별칭으로 한니발의 칸나이 전투 승리 이후 벌어진 이탈리아 전역의 전쟁에서 샘프로니우스의 군공을 기리기 위해 붙여졌다. 한니발이 전쟁 이후 카푸아 인근의 캄파이나 지역에서 머물면서 주변지역 점령에 집중할 때 남부를 맡은 한노라는 장군이 브루티 대부분을 손에 넣고 캄파니아와 브루티의 사이의 루카니아에 북상했을 때 샘프로니우스는 그를 상대로 2천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고 로마인들은 그에게 롱구스라는 별칭을 붙여준다. 이는 공화정 당시의 로마인들이 한번의 전투에서 패배한 지휘관에게도 꽤 좋은 대우를 해주었던 좋은 예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