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타고

1 튀니지도시

Carthage.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에서 상당히 가까운 위치에 있으며, 인구는 2013년 기준 21,276명.

작은 도시지만 아래 단락에 나오는 고대 국가 카르타고가 워낙 유명하다보니 튀니지에서도 이름난 관광지 중 하나이다.

카르타고의 이름값을 활용하기 위해 노력한 티가 역력한데 이를테면 철도역 이름도 카르타고-한니발 역이고,[1] 심지어 튀니지 제1의 관문공항 이름도 튀니스-카르타고 국제공항이다. 그러나 페니키아인의 카르타고 유적은 로마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 탓에 일부만 남아있고, 남은 대부분의 유적은 로마 시대의 유적들이다.

2 북아프리카의 고대 국가이자 로마도시

북아프리카의 역사
페니키아카르타고로마 공화국

קַרְתְּ חַדַשְתְּ - 카르트 하다쉬트 (페니키아어)
Karthago - 카르타고 (라틴어)
Καρχηδών - 카르케돈 (그리스어)[2]
Carthage - 카씨지 (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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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개요

고대 페니키아인들이 현재의 튀니지 지방에 세운 나라. 기원전 814년의 디도#s-1 여왕(엘리사라고도 한다)이 세웠다고 한다. 과거에는 기원전 860년에서 기원전 814년 사이에 건국되었다고 추측되었으나, 고고학 발굴 결과 기원전 750년 경에 건국된 것으로 추정된다.

카르타고라는 이름은 페니키아어 카르트 하다쉬트음역한 것이다. 카르트 하다쉬트란 새로운 도시라는 뜻인데, 카르타고를 세운 페니키아인 지배층들이 팔레스타인의 도시 티레에서 이주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듯 하다.

2.2 역사

페니키아인들은 바다 통상에 의존하는 자들이었고,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장기간의 원양항해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해안 곳곳에 1천명 남짓의 사람들을 남겨 보급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페니키아인들처럼 해안가에 진출하려는 그리스인들과의 경쟁을 통해 활발해졌으며 그 결과 지중해 전역에 이 두 민족이 건설한 많은 소규모의 해안 마을들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들 중 몇몇 마을들은 번영하기 시작하였고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하였는데 카르타고도 이들 중 하나였다.

이들 페니키아 도시들은 모두 이들의 어머니 도시였던 티레에 속하였으며 어느 정도의 상납금을 티레에게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티레 본국은 페르시아와 같은 강력한 중동의 제국들과 싸우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멸망당하고 만다.

티레가 멸망하자 그 역할을 시돈이라는 페니키아 도시가 대신하였으나 중동에 위치한 시돈 역시 티레와 마찬가지 이유로 외적의 침입을 자주 받아 쇠퇴하였고 곧 카르타고가 이들을 대신하게 되었다. 카르타고는 지리적으로 지중해의 서부와 동부의 중간지점에 위치하였으므로 지중해 서부에 집중되어있는 광산과 동부의 높은 문화 생산품들을 교환하기에 적합하였다. 때문에 이곳은 번영하기 시작하였으며 페니키아 도시들의 맹주역할을 하면서 이들로부터 받는 상납금도 국고에 들어오게 되자 지중해의 가장 부유한 도시로 성장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기원전 814년의 엘리사 여왕에 의해 세워졌다고 한다. 티레의 공주인 엘리사는 아버지인 왕이 죽으면서 동생과 공동으로 통치하게 하였다고 한다. 엘리사는 곧 결혼하는데 권력을 독점하고싶었던 그녀의 동생이 자형을 암살하자 엘리사는 티레를 떠나서 카르타고를 건설했다고 한다. 그곳을 통치하는 동안 리비아의 한 왕이 결혼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기 위해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엘리사는 로마의 건국신화에도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디도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훗날 로마의 건국의 시조가 되는 트로이의 왕자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카르타고에 머물며 디도와 사랑에 빠졌고 아이네이아스가 떠나자 슬픔을 못이겨 디도가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왕이 죽으면서 저주를 내려 그렇게 오랫동안 원수가 되었다고도 한다.

8-7세기에 걸쳐 카르타고는 발전을 거듭하였고 기원전 650년에는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기원전 600년에는 그리스와 충돌하여 전쟁을 벌였고 585년에 티레가 바빌로니아 제국의 포위공격을 받게 되자 티레로부터 정치적으로 완전히 독립했다. 하지만 카르타고는 여전히 티레에게 종속되었으며 따라서 티레에 꾸준히 상납금을 바쳐야 했다.[3]

어째서 카르타고가 티레를 대신하게 되었는지의 정확한 이유는 불분명하다. 가령 카르타고 옆의 우티카의 경우 카르타고보다 더 오래된데다가 카르타고와 비슷한 지형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우티카는 카르타고와 같은 영향력을 다른 페니키아 도시들에게 끼치지 못하고 맹주역할은 카르타고가 하게 된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 티레와 시돈과 같은 대륙의 페니키아 도시들이 동방 제국들의 공격을 받을 때 거주민들이 카르타고에 망명하면서 카르타고가 다른 도시들을 뛰어넘는 규모로 팽창했다는 설이 있다.

카르타고는 페니키아 이주민들이 다수의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세운 나라였다. 원주민들보다 그 수가 적었던 페니키아인들은 노예를 이용한 산업화된 농업경영과 상업활동, 특히 해양활동을 통해 번영을 누렸다. 이베리아 반도, 시칠리아 섬을 비롯한 서지중해 각지에 식민도시들을 세웠지만 이는 본토의 인구압력을 줄이는 것보다는 안정적인 무역 및 해군거점의 확보에 목적이 있었다.

전성기에는 북아프리카 해안가와 이베리아 반도, 시칠리아, 사르데냐, 코르시카 섬 대부분을 세력권 아래 두었지만 시라쿠사를 필두로 한 서부 지중해의 그리스인들과 끊임없이 항쟁해왔다. 시칠리아 전쟁에서는 밀고 밀리는 기나긴 전쟁 끝에 시칠리아의 서부 1/3 가량을 차지했으며 이후 피로스의 시칠리아 원정 때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하기도 했으나 피로스가 시칠리아에서 철수한 이후 영토를 되찾았다. 그러다가 결국 로마와의 포에니 전쟁에서 3전 전패하여 몰락해버렸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은 시칠리아를 주 무대로 싸웠으며, 한니발의 아버지인 하밀카르 바르카가 참전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한니발 바르카가 로마의 여러 군단을 패퇴시켜 전쟁을 승리 직전까지 이끌었으나, 카르타고 본국과 한니발의 동생들이 운영하던 이베리아 식민지가 로마군에 함락되면서 결국 패배했다.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로마군들이 쳐들어오자 화평을 위해서 성안의 무기란 무기는 죄다 버리고 투항하나 자비심 없는 로마군들이 그대로 쓸어버리겠다고 선언하자 맨주먹으로 수 년을 버텼지만 결국 패배하여 멸망하였다. 맨주먹으로 수 년을 버틴 것을 기적이라 말하기도 하는데, 당시 공성무기가 마땅치 않아 농성 상태의 적을 상대로 장기전이 되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과장된 면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전쟁이 결정되자 공장을 다시 돌려 매일 검 300개, 창 500개, 방패 140개 투사무기류 약 1000개를 생산했다는 말이 있는 걸로 봐서는 확실히 과장. 그 정도되는 국가가 무기공장 하나 없었을까. 하지만 전쟁준비가 사실상 제로가 된 상태에서 포위당한 후에 농성전을 하면서 더 이상 재료를 조달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다시 재무장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긴 하다. 확실한 것은 공성전이 시작되자, 입구가 요새 형태로 만들어져있던 카르타고 항구를 로마군이 배를 침몰시켜 막아버리면서 해상을 통한 보급은 막혔다는 것.

방어전은 굉장히 치열했으며 성벽이 뚫린 이후에도 로마군과 카르타고 시민들은 시가전을 벌였다. 이때 40만 정도의 카르타고군과 카르타고인들이 대부분 무장을 한채 로마군과 시가전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거나 자살하였다. 이때 학을 단단히 뗐는지 로마는 도시가 함락된 이후에 살아남은 50000명의 사람들을 노예로 팔아버리고 도시는 아우구스투스가 다시 재건하기 전까지는 폐허 상태로 방치되었다.

카르타고인들은 무역뿐만 아니라 농업으로도 명성을 떨쳤는데, 노예를 대규모로 사용하며 과학적인 영농법으로 생산량을 크게 늘리는 플랜테이션 농법을 발명했다. 카르타고가 멸망한 이후, 이 농법은 로마 제국의 부유층들에게 이어졌으며(라티푼디움 참고) 그들은 북아프리카의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막대한 이득을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로마 군대의 중추를 이루는 로마의 자작농들은 카르타고의 농업기술로 만들어진 북아프리카의 플랜테이션 농장과의 경쟁에서 패배하여 경제적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결국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로마의 자작농 병사들이 로마에 흘러들어온 카르타고의 농업기술에 몰락하고 마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벌어진 것이다.

2.3 카르타고가 로마에게 패배한 이유

카르타고가 로마에게 패배한 가장 큰 이유는 카르타고와 로마 간 군사의 질적, 양적 차이가 컸다는 점이다. 카르타고는 용병에 주로 의존했지만, 로마는 사실상 국민개병제나 다름없는 시민군 제도였다. 물론 카르타고도 페니키아인으로 구성된 시민군이 있었지만, 페니키아인은 이주민족이었으므로 인구수가 원주민에 비해 적어서 시민군을 아껴야 했기 때문에 주로 용병을 써야 했다.[4][5] 포에니 전쟁 이전 시라쿠사의 그리스인 참주들과 벌인 전쟁에서 시민군을 대거 동원했다가 큰 손실을 입은 후로 시민군은 거의 본토방위에만 동원되었다. 게다가 육전도 육전이거니와 카르타고 해군은 주로 페니키아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카르타고가 해전에 능했다는 인식과 달리 1차 포에니 전쟁이고 2차 포에니 전쟁이고 로마랑 싸우는 족족 개발살났다(...). 결국 피같은 페니키아 시민들이 물귀신으로 전락하는 꼴인데 그걸 감당못해서인지 2차 포에니 전쟁 때는 카르타고가 해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카르타고는 말 잘 안듣는 피지배민족까지 다 합쳐도 로마보다 인구가 1,200만은 적었고 결국 여러 동맹국을 잔뜩 끌어들여 숫적 열세를 극복하려 했다. 하지만 동맹들이 영...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를 완전히 통일한 농업국가인 로마의 인구와 동원능력은 지중해 각지에 흩어진 교역도시들의 연합체인 카르타고에 비해 한참 우위에 있었다.[6] 그리고 카르타고 영토의 절반을 차지하던 스페인 식민지는 규모는 컸지만 카르타고에게 복속된지 수십년 밖에 안된 식민지라 반카르타고 감정이 강한데다가 현지 상황도 지극히 불안정하여 여러차례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는 통에 상당수의 병력이 여기에 붙잡혀 있어야 했다. 또 정예병인 한니발의 부대는 이탈리아에 고립되어 있어 로마군이 식민지를 공격하러 왔을 때 다른 카르타고 군대가 이에 제대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거기다 카르타고는 연합체의 특성상 유사시 다른 교역도시들에게 강제징병이나 강제징수를 하기 어려운데다가 평소 이들에게 인심을 못얻은 탓도 커서 우티카 같은 만만치 않은 경쟁세력이 나중에 전세가 더 악화되자 오히려 로마를 편드는 악재까지 발생해 안그래도 부족한 전쟁동원능력이 더 떨어졌다.

전략전술 측면에서도 로마는 북방 켈트족과의 전쟁, 이탈리아 통일전쟁, 에피로스의 피로스의 침공 등으로 단련된 베테랑 장교들이 많았던 반면, 카르타고는 하밀카르나 한니발 등 몇몇 특출난 인물을 제외하면 미숙한 페니키아인 상류층이 전쟁을 지휘했다.

또한 카르타고는 전투에서 크게 패한 장수를 사형시키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는 패전으로 인한 전술적 교훈을 활용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었고, 패전의 처벌을 두려워한 지휘관들이 소극적으로 전투에 임해 결정적인 승기를 놓치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그냥 한번 졌다고 그대로 죽이지는 않았다. 한니발도 자마 전투에서 패배하고 카르타고로 후퇴했지만 안 죽었으니까(...). 그런데 카르타고의 가장 큰 문제로 지적받는 이 관행도 사실은 카르타고의 시민 인구가 적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카르타고는 시민 인구가 적다보니 큰 전투에서 패배하면 그 인구 타격의 '슬픔'이 로마보다 훨씬 크게 다가왔고 그만큼 시민들의 분노도 맹렬했던 것이다.

해군의 경우 포에니 전쟁 이전에는 카르타고가 로마보다 우월한 것으로 여겨졌다. 카르타고가 해상 무역을 주도하는 국가이기도 했고, 시민들이 육군은 용병에게 주로 맡기고 해군 지원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해전에서 연전연패하여 제1차 포에니 전쟁 이후에는 대체로 제해권을 로마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우선 카르타고는 노잡이와 같은 선원 숫자가 부족하여 함대 규모가 로마에 비해 작았으며, 로마는 전함에 더 많은 수병들을 실었기 때문에 수병을 적게 싣고 주로 충각으로 들이받는 전법을 쓰던 카르타고 함대는 함상 백병전이 벌어지면 답이 없었다.

여러가지 이유를 종합하자면, 카르타고는 시민들의 인구가 적었던 데다가 그나마도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어려워서 졌다는 것이 궁극적인 결론이다.

2.4 제도 및 사회

초기에는 왕정이었다가 하밀카르 1세의 사망 이후 실권이 장로회로 넘어갔으며, 보밀카르가 왕권 회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공화정이 된다. 정치체제는 전형적인 과두정으로 로마와 유사하게 해마다 두 명의 집정관[7]이 선출되었고 장로들로 구성된 원로원, 104명의 고관으로 구성된 백인회, 시민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민회가 존재했다.

가죽으로 만든 통화를 썼다고 알려져 있으나, 자세한 것은 불명이다. 다만 카르타고에서 발행한 동전들이 남아있으며 대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기도 하다.

유달리 동명이인이 많아 역사서에서 이름을 헷갈리게 하는 경우가 잦다(한니발, 하스드루발, 마고 등). 당장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만 한정해도 똑같은 이름을 가진 지휘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여럿 등장한다.

문화 쪽에서는 로마나 그리스와 달리 페니키아 문화의 영향이 강해 실용적인 것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고대 카르타고 서적 중 후대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항해일지나 농장경영서 등의 실용서적들이다.

어린아이를 산채로 불에 태워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양 의식이 유명하며, 희생된 아이들의 유골을 매장한 묘지인 토펫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다만 토펫에 매장된 유골이 제물로 바쳐져 죽은 게 아니라 질병 등으로 자연사한 아이들의 유해를 묻은 것이라는 견해도 일부 존재한다.

2.5 역대 국왕 목록

  • <디도 왕조>
    • 디도 : BC 814 ~ BC 760 (미상)
    • 한노 1세 : BC 580 ~ BC 556
    • 말쿠스 1세 : BC 556 ~ BC 550
  • <마고 왕조>
    • 마고 1세 : BC 550 ~ BC 530
    • 하스드루발 1세 : BC 530 ~ BC 510
    • 하밀카르 1세 : BC 510 ~ BC 480
    • 한노 2세 : BC 480 ~ BC 440
    • 히밀코 1세 : BC 460 ~ BC 410 (시칠리아 왕)
    • 한니발 1세 : BC 440 ~ BC 406
    • 히밀코 2세 : BC 406 ~ BC 396
    • 마고 2세 : BC 396 ~ BC 375
    • 마고 3세 : BC 375 ~ BC 344
    • 한노 3세 : BC 344 ~ BC 340
  • <한노 왕조>
    • 한노 대왕 : BC 340 ~ BC 337
    • 기스코 : BC 337 ~ BC 330
    • 하밀카르 2세 : BC 330 ~ BC 309
    • 보밀카르 : BC 309 ~ BC 308

2.6 멸망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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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 의해 재건된 카르타고.

로마 제국에서 옛 카르타고가 있던 자리에 재건한 도시. 원조(?)인 페니키아인의 도시 카르타고는 로마군이 철저하게 파괴했기 때문에, 현재 남아있는 카르타고의 유적은 거의 로마 제국 시절의 것들 뿐이다. 다만 옛 카르타고 항구의 일부 흔적과 비르사 언덕의 주거지, 인신공양의식에 처해진 아이들의 유해가 묻힌 토펫 등 원래의 카르타고 유적이 약간은 남아있다. 제3차 포에니 전쟁 때 로마 병사들은 어린아이들의 영혼이 자신들에게 저주를 내릴까 두려워하여 다른건 다 불태우고 부쉈지만 토펫만큼은 손대지 않았다고...

카르타고를 철저히 파괴해 멸망시키기는 했지만 워낙 항구도시로서 입지가 좋은 땅이었기 때문에 로마에서도 카르타고의 공포가 희미해져가자 재건논의가 자주 있었다. 이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재건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암살당하면서 중지되었다가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로마에 의해 재건되었다. 단 재건된 카르타고가 옛 카르타고와 어떤 공통점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냥 도시의 위치와 이름만 물려받은 것이다.

새롭게 건설된 카르타고는 로마 제국 시대에 아프리카 속주(지금의 튀니지 북부)의 중심도시로 부와 번영을 누렸다. 특히 로마 제국이 동, 서로 분열되었을 때 서로마의 중요한 세수원 지역이었다. 이 지역을 반달족에게 빼앗긴 이후로 서로마 제국은 재정적 부담을 감당하지 못하고 급격히 무너지게 된다.

참고로 흔히 로마 제국 말기 반달족의 침략으로 큰 피해를 입고 몰락한 것으로 여겨지나 이는 사실과는 다르다. 카르타고는 반달 왕국의 통치하에 오히려 로마 시대보다 더한 번영을 누린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특히 많은 사람들에게 오류를 불러일으키는 부분은 반달 왕국의 통치가 시작된 이후 북아프리카 지방에서 많은 토지가 버려진 사실인데,[8] 이는 로마 제국시기 제국에서도 가장 대규모 농장이 발달한 아프리카 속주의 특성상[9] 상당수의 자영농이 몰락하여 생산성이 떨어지는 내륙지역의 반사막 토지로 몰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달 왕국의 통치가 시작되며 구질서가 완전히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부분 무너지며[10] 농민들에게 쓸만한 토지들을 분배할 여유가 생겼고, 그 반동으로 생산성이 떨어지는 내륙지역의 반사막 토지들이 대거 버려진 것이다. 굳이 농지면적만을 번영의 기준으로 잡는다면 반달왕국이 통치하던 시기 카르타고가 쪼그라 들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런 식으로 번영의 기준을 잡는 사람을 없을 테니. 그러나 카르타고가 극심한 타격을 받은 시기가 한 번 있긴 했는데, 바로 벨리사리우스의 원정으로 동로마 제국에 편입된 직후. 막 통치자가 뒤바뀌어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급작스런 선페스트까지 겹치는 바람에 카르타고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고, 이를 복구하기 위해 상당한 금액을 써야했던 동로마 제국은 심각한 자금압박에 시달리게 된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카르타고 수복은 제국에게 큰 이득이 되었는데, 훗날 페르시아 제국에게 아시아 지방을 대거 상실한 동로마 제국이 헤라클리우스 황제 시절 카르타고로 수도를 옮기려고 했던 것이나,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대반격시절 중요한 재원을 담당했던 것만 보아도 여전히 제국의 손꼽히는 중요도시이자 부를 축적한 번영하는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결국 포에니 전쟁으로 멸망한 이후 로마에 복속되어 재건된 후에도 계속해서 번영을 누렸으나, 역사의 중심에서 빗겨나간 탓에 유명하지 않을 뿐이다.

카르타고라는 도시의 최종 소멸은 698년 아랍인의 침략이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속국들이 하나둘씩 제 갈길을 가는 와중에 중동 지방은 아랍 제국의 큰 파도가 몰아쳤다. 북아프리카 및 카르타고는 이집트와 달리 200여년을 더 버텼으나 유스티니아누스 2세 이후 동로마 제국의 내란을 틈타 지속적으로 침입해온 아랍인들에 의해 도시가 결국 함락되었다. 후계 황제인 레온티우스가 구원단을 파견했지만 결국 격파되었고 이는 황제 자신의 실각에도 영향을 미쳤다. 아랍인들은 자신들이 점령한 후 동로마 제국에서 해군을 보내 재탈환하는 바람에 다시 공성전을 벌여야했던 알렉산드리아의 예를 떠올려 역습의 기회를 차단하기위해 카르타고 성벽을 허물고 시가지를 황폐화시킨 후 근처에 튀니스를 건설했다. 1400년에 이르는 도시의 최후였다.

또한, 아랍인의 북아프리카 통치는 고대 세계 풍요의 종말을 뜻하였다. 지나치게 관개농업이 발달하여 큰 생산성을 누리던 북아프리카 지방은, 오랜 전란과 혼란기 속에서 수리시설이 황폐화되어 쓸만한 영지가 줄어들고 있었다. 여기에 태생이 사막 유목민족이었던 베두인족 출신의 아랍인이 들어오자 농업기술의 중요성을 모르는 지배자들에 의해 토착민들은 기술을 전달할 틈도 없이 노예가 되어버렸고, 사람 손을 타지못한 밭과 과수원들은 자연 속에서 살아남을 힘이 없었다. 결국 급속한 사막화로 북아프리카 지방 대부분은 현재의 사막이 되었고, 로마 본국보다 풍요롭고 호화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북아프리카 지방의 모습은 과거의 유적 속에서만 볼 수 있게 되었다.[11] 결국, 중세를 지나 현대에 와서 석유가 발견될 때까지 이 지역은 어업 외에 별다른 산업이라곤 해적들과 노예상만이 있을 정도로 군사력말고는 별 볼일 없는 동네가 된다. 현재도 마찬가지.

시저 3시저 4에서는 로마의 적으로 나오며 다 파괴된 도시를 플레이어가 로마의 도시로 재개발하는 미션이 있다.

3 스타크래프트 맵

카르타고(스타크래프트) 항목 참조.
  1. 근처에도 카르타고 이름이 붙은 역이 몇개 더 있다(카르타고-살람보 역, 카르타고-아밀카르 역 등).
  2. 그리스의 지명 Χαλκηδών(칼케돈)과 헷갈리는 경우가 있다.
  3. 포에니 전쟁 때도 한 번도 안 거르고 상납금을 꼬박꼬박 티레로 보냈다고 한다.
  4. 페니키아인이 40만 정도로 추정되고 피지배 민족이 그 6~7배 정도 되었다고 추정된다.
  5. 사실 시민 인구가 적었던 것은 카르타고의 사회 구조가 로마에 비해 폐쇄적인 탓도 컸다. 로마는 일단 군사력으로 굴복시키되, 배신 안하고 보조병만 일정 수 제공해주면 참정권만 없을 뿐 나머지는 로마 시민권과 똑같은 라틴 시민권을 주었고, 그 지방 토착 세력의 특권은 왠만하면 건드리지 않고 서서히 동화시키는 방식을 이용했으므로 동원력을 카르타고에 비해 병력 동원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칸나이에서 7만 명의 병사를 잃긴 했지만, 다소 무리를 해서 또 다시 동원했고, 결국은 한니발을 이탈리아 밖으로 몰아낼 수 있었다. 반면에 카르타고는 그런게 없어 타민족은 용병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고 시민권을 주는 일도 절대 없었다. 거기다 선민 의식도 심해서 타민족을 야만인으로 멸시하기까지 했다. 때문에 타민족들의 불만이 상당하여 카르타고에 제대로 충성하지 않고 툭하면 반란을 일으키곤 했다.
  6. 전 근대의 국가에서 인구수는 국력과 직결되는 수치이고, 제아무리 상업이 발달한 지역이라고 하더라도 농업의 인구부양력은 상업 따위와는 비교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넘사벽을 형성한다. 괜히 동아시아에서 농사는 천하의 근본(天下之大本)이라고 한게 아니다. 물론 카르타고 외에도 후세의 베네치아 공화국, 네덜란드처럼 상업으로 패권을 형성하는 국가들이 있었지만 이들도 결국엔 주변국의 압도적인 생산력을 못 이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7. 로마의 콘술과 유사한 직책으로 카르타고에서는 수페트라고 호칭했다.
  8. 정확히 따지자면 반달리즘으로 유명한 반달족이 통치했다는 게 가장 클 것이다. 대략 "반달족? 걔네 때문에 북아프리카 막장됨!"의 느낌.
  9. 한창 때는 아프리카 속주 영지의 절반 가까이가 황제의 개인영지였고, 이후 북아프리카 속주 농토의 6/1을 개인소유로 보유한 원로원 의원에 대한 기록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러니 북아프리카 속주의 자영농자들이 죽어날 수 밖에.
  10. 영지고 뭐고 다 버리고 로마로 도망친 사람의 수가 적지 않았다.
  11. 물론 아랍인이 무조건 농경지를 황폐화시킨 것은 아니다. 재빠르게 아랍 문화권으로 편입한 기존 문명권의 사람들은 옛날과 비슷하게 풍족한 생활을 누렸고, 그곳을 통치한 진출한 아랍인들도 이들의 문화를 어느정도 받아들이는 수준을 넘어 발전시키기까지 했다. 다만 북아프리카는 이와는 정반대여서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이 떠오를 정도. 어느 정도냐 하면, 로마인들이 세워놓은 목욕탕의 용도를 이해하지 못해 노예시장으로 썼을 정도.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노예수용소로 변한 '목욕탕'이 원래는 유별나게 위생관념이 강했던 로마인들의 작품이라는걸 상기해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