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이 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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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몰중인 USS 파나이 호.

1937년 12월 12일, 일본 해군항공대가 당시 미국 해군 함정 USS 파나이(USS Panay)호를 공격하여 격침시킨 사건. 시기를 보아 알 수 있듯, 당시 미국과 일본은 교전관계가 아닌 상호중립관계였다!

1 배경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격렬한 전투 끝에 상하이를 함락한 일본군은 당시 중국의 수도였던 난징으로 진격을 하고 있었다. 11월 중순이 되면, 중국 정부와 군도 수도 난징의 사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충칭으로 정부를 옮기고 있었고 난징에 있는 각국 외교공관에게 철수를 권고했다.

철수권고를 받은 각국 공관들은 난징 소재 자국민을 급히 소개시키며 철수를 시작했다. 그리고 난징 함락 직전까지 남아서 마지막 업무를 보고 있던 미국과 영국의 공관직원들은, 최후까지 잔류한 소수 민간인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미 해군 아시아함대 소속 양쯔강 초계전대 소속이었던 포함 USS 파나이는, 같은 임무를 띈 영국 해군 초계함 HMS 레이디버드(HMS Ladybird)와 HMS 비(HMS Bee)와 동행하여 난징에서 최후의 탈출작전을 시작했다.

2 전개

12월 11일 탈출을 시작하여 양쯔강을 따라 내려오던 미영 연합 탈출함대를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은 일본 육군이었다. 양쯔강변을 점령하고 포대를 구축하고 있던 일본군은 12월 12일 새벽에 미식별 함대가 예고도 없이 강을 따라 남하해오는 것을 확인하고 포격을 개시했다. 굳이 미식별예고도 없이에 강조하는 이유는 후술한다.

이들의 포격은 HMS 레이디버드와 비에 약간의 손상을 입혔으나 큰 피해는 주지 못했고, 탈출함대는 순식간에 포대의 사정권을 벗어나 이탈했다.

여기서 그쳤으면 그나마 다행이었겠지만, 일본군 지휘관은 상부에 다수의 적군이 승선한 함대가 강을 따라 이동중이라고 상부에 보고했고, 상부는 즉시 해군에게 협조요청을 했다. 평소 원수처럼 여기며 싸우던 놈들이 하필 이때는 왠일로 죽이 잘 맞아서, 해군은 육군의 협조요청을 즉각 수용하여 해군항공대에 출격 명령을 내렸고, 96식 함상공격기들이 즉각 폭장을 하고 이륙했다.

한편, 자신들이 공격받을 거라 생각치도 않은 탈출함대는 잠시 정박해서 느긋이 밥도 먹고 양쯔강 경치도 구경(…)하며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새벽의 포격사건을 교전지역에서 자주 일어나는 불상사정도로 치부하고 있었고, 포함들의 속도도 느린데다 민간 유조선 3척도 호위해야 했기에 빨리 이동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큼지막하게 게양한 성조기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12월 12일 13시 30분, 이들 함대를 발견한 일본 해군항공대는 즉시 급강하폭격에 돌입했다. 이들은 파나이를 목표로 집중폭격을 퍼부어 총 2발을 명중시켰고, 안 그래도 작은 연안용 포함에 불과했던 파나이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격침당했다. 하지만 이들 선단에는 기자들이 동승하고 있었고, 덕분에 일본군의 공격에 침몰하는 파나이의 모습이 고스란히 찍혔다.

3 후폭풍과 수습

당연히 두 말 할 것도 없이 미국은 노발대발했다. 일본군은 아무런 항해예고도 없었다고 항변했으나, 미국은 일찌감치 주일 대사관을 통해 탈출함대의 항해일정을 정식 통보한 상태였다.이것들이 어디서 개뻥을 쳐!!! 근데 미드웨이 패전도 숨기는 일본군을 보면 자기들끼리 의사소통 안한걸수도 있다 더군다나 이들 함정은 명백히 성조기와 유니언잭을 게양한 채 항해중이었고, 주간이었기에 이들을 식별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새벽의 포사격이야 안개로 인해 식별이 어려운 점을 인정하더라도 주간의 공습은 명백히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의도적 공습이라고 미국은 판단한 것이다.

이미 사건 당일 미국은 파나이와 정기적으로 주고받는 통신이 이루어지지 않자 즉각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하고 대응에 나섰으며, 상해 일대를 담당하던 일본 해군 3함대에 연락장교를 파견하여 강력히 항의했다. 미국도 14일에 주미 일본 대사를 통해 강력히 항의하고 국무부에서 정식 항의성명을 발표했으며 미 해군 조사위원회가 파나이 호 격침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이에, 아직까진 미국과 전쟁할 생각이 없던 일본[1] 즉각 저자세로 나섰다. 사건 다음날인 13일에 3함대 사령관과 참모장이 미 아시아함대를 방문, 사과하였고 본국에서는 해군성 차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사과성명을 발표하며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일본은 실비로 221만 4,007달러 36센트의 배상금을 1938년 4월에 지불하고, 공격에 나선 항공대의 사령관을 경질시키며 미국을 무마하며 양국은 사건을 종식시켰다..[2] 미국도 당장 일본과 전쟁을 벌일 마음도 없었고 그럴 여건도 아니었기에[3] 이정도 선에서 사건을 수습했다.

4 여담

당시 미국 국무부나 군, 그리고 후대 역사가들은 공통적으로 일본군의 고의적 공격이라는 입장이다. 예고도 있었고, 식별이 가능한 주간에 공격하여 격침시킨 점등을 보아 명백하다는 것. 일본이 중국 문제에서 미국의 개입을 사전에 배제하기 위한 경고의 목적에서 의도적으로 격침시켰다는 것이다.혹은 루거우차오 사건처럼 현지 사령관이 독단적으로 일으켰을지도 모른다

반면 일본은, 어디까지나 우연히 일어난 사고라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일본군 입장은 탈출선단이 중국군 병력을 대규모로 수송중인 것으로 판단하여 공격했다인데 이들 함대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게 아니라 강을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강을 따라 내려올수록 일본군이 우글우글한데 아무리 중국군 지휘관이 바보라 한들, 사지로 병력 수백을 밀어넣진 않는다.
  1.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결심하게 된 것은,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유럽열강이 자신들의 세력확장에 태클을 걸지 못한다는 점이 충족되고, 동시에 중일전쟁의 장기화로 인한 전략자원의 부족상황 속에 ABDA 포위망에 의한 석유 금수조치가 단행되었기 때문이다. 1937년 기준으로는 이 두 개가 모두 충족되지 않았다. 물론 양국은 서로를 1920년대부터 가상적국으로 취급하긴 했지만.
  2. 경질된 사령관은 나중에 더 좋은 자리로 영전한다. 즉, 미국 눈치보기용이었다는 것.
  3. 대공황에서 이제 겨우 벗어날랑말랑 하며 회복을 시작하고 있었고,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묶여있던 해군력 증강도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