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거우차오 사건

전황도

1 개요

盧溝橋事件. 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사건. 중국에서는 7.7 사변(七七事変)이라 부른다.

이 사건의 배경이 된 '루거우차오(卢沟桥, Lúgōu Qiáo)'는 베이징 시에 있는 다리의 이름으로, 한국 한자음으로 읽어 '노구교'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양에선 마르코 폴로가 이 다리를 언급했던 탓에 '마르코 폴로 다리'라고도 부른다.

2 배경: 일본 군부의 폭주와 중일관계의 악화

사건 직전 중일 양국의 병력 배치도

만주국 건국으로 제대로 재미를 봤던 일본군 내부에서는 신나게 한탕을 저질러 전공을 세워보자는 공명심에 눈이 먼 장교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바탕으로 푸젠성에서 타이완 주둔 일본군 장교들이 도발을 감행하기도 했고 몽골 쪽에서도 도발이 벌어졌다. 이시와라 간지 소장 등이 이러한 분위기를 제어하려 했지만 내몽골에서 바이링먀오 전투를 일으켜 몽골 병탄을 획책했던 무토 아키라 대좌는 "각하께서 하신 일을 따라했을 뿐입니다"라고 이시와라를 비웃었고 그 말고도 수많은 장교들이 상급 부대와 내각의 명령도 듣지 않고 우국충정 운운하면서 상명하복을 씹어먹었고 이러한 결과로 일본 영향력하의 괴뢰정권을 몇몇 수립했지만 이는 중국의 반일 감정을 자극함과 동시에 오히려 일본의 고립화를 초래하였고 일본은 이러한 문제를 강경책으로 돌파하려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이와 함께 중일관계 역시 나날이 악화되어 중일국교조정 교섭은 1936년 12월 3일 완전히 결렬되었고 일본 대사 가와고시는 중화민국 외교부장 장췬에게 교섭의 경과를 정리한 비망록을 내놓으며 우격다짐으로 인정을 받으려 했다. 1937년 1월 12일 장췬은 다음과 같이 거부했다.

"동북문제는 일단 차치하고라도 화북의 현 상태를 급속히 개선하는 것이 우리의 최저한도의 국교조정의 조건이다. 문제는 일본이 중국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나라로서는 외교 루트를 통해 조정교섭을 진행시켜 나가겠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항일의 준비도 그칠 수 없다."

한편 1월 23일, 일본의 히로타 고키 내각은 군인의 정치관여 문제로 총사퇴하고 그 후임으로 우가키 가즈시게가 지명되었으나 일본 육군이 군부대신 현역제를 내세워 반대함으로 실패, 2월 2일 하야시 센쥬로가 신임 총리가 되었다. 신임 외상으로는 3월 3일 전 프랑스 주재대사 사토 나오타케가 취임했다. 때맞춰 중화민국의 외교부장도 왕충후이로 교체되었는데 3월 6일 일본대사 가와고시가 서안 사건의 위문 차 방문하여 중국 정부가 공산당과 타협했다는 보도가 사실인지를 물었고 왕충후이는 3중전회의 선언, 결의대로 공산당 정책에 변화가 없다고 밝혔다. 4월 초, 일본 외무성은 가와고시에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중일간 기본적 정치문제 해결을 훈령했다.

1. 중국에 만주국 존재 사실을 승인시켜 만주는 이미 잃어버린 영토임을 인정하게 한다.

2. 중국에 일본과의 특수협약에 조인시켜 극동에서 전쟁이 발생했을 때 중국의 일본에 대한 친선적 중립태도를 유지시킨다.

3. 일본이 화북에 특권을 지닌다는 것을 중국이 동의하게 하고 내몽고 문제에 대해서도 일본의 의도를 중국에 이해시킨다.

여기에 4월 16일 외무,대장,육군,해군 4상 회의는 대중 실행책, 북중 지도방책을 결정하여 화북의 괴뢰 자치정권을 내면지도하여 국민정부가 화북의 특수한 지위를 인정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하야시 내각도 정우, 민정 양당의 퇴진요구에 5월 31일 총사퇴했다. 그 뒤를 이은 것은 귀족원 의장 고노에 후미마로였다. 고노에 후미마로는 외상으로 히로타 고키를 복귀시켰고 중일관계 개선을 꾀하려 했으나 일본이 화북의 특수한 지위 운운하며 중국의 주권을 침탈하는 현실상 어림없는 일이었다. 거기에 일본의 화북에 대한 도발은 노골화되었다.

3 발단

파일:Attachment/루거우차오 사건/Lugou battle.jpg
루거우차오 다리 위의 국민혁명군

한편 베이핑(현재의 베이징) 근처에는 의화단 운동 이후의 신축조약의 영향으로 1800여명의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후 각 열강은 군대를 축소하거나 아예 철수하였지만 일본만은 조약 개정을 거부하면서 만주사변 이후 여러 조약을 거쳐 군대를 5,600여명까지 증강시켰다. 이런 가운데 1937년, 베이핑 서남쪽의 요충지인 루거우차오는 베이핑의 생명줄이나 마찬가지라 중화민국의 입장에서나 일본군의 입장에서나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지점이었던 탓에 쑹저위안(宋哲元)[1]이 지휘하는 국민당군 제29군[2] 37사 219구단[3]일본군이 다리를 놓고 대치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루거우차오 일대를 연습장으로 삼아 연일 군사훈련을 벌이며 중화민국을 도발하고 있었다. 여기에 풍대에서 루거우차오에 이르는 6천 헥타르에 달하는 토지를 구입하여 비행장을 건설하려 했으나 지주들은 일본군이 막대한 금액을 불러도 땅을 팔지 않고 저항했다. 이에 분노한 일본은 행정당국을 압박하는 한편, 훈련 빈도를 더하여 중화민국을 더욱 도발하였다. 관동군 참모장 도조 히데키는 6월 6일 "일본 쪽에서 적극적으로 친선ㅇ르 구하는 것은 배일, 매일의 태도를 증가시킬 뿐이므로 차라리 일격을 가할 필요가 있다"고 육군 중앙에 상신하였으며 6월 16일 동북에 2만명의 일본군이 증강되었다. 그리고 일본군은 6월 25일 루거우차오에서 장기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러던 중 1937년 7월 7일, 베이핑(현 베이징) 근교 루거우차오(노구교)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지나주둔군 제1보병연대 3대대 소속 5백명의 장병이 대대장 이치키 기요나오(一木 淸直) 소좌[4]가 사전 협의도 없이 실탄을 쓰는 야간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다. 이에 긴장한 중국군도 만약 일본군이 중국군 진지 100미터 안에 접근하면 반격하기 위해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밤 10시 40분쯤 훈련을 끝내고 철수하려는 순간 용왕묘 방면과 제방 방면에서 수발의 총성과 함께 기병 척후병 한 명이 실종되었다. 8중대장 시미즈 세쓰오 대위가 급히 점검을 실시하자 이등병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시미즈 대위는 즉각 이것이 중국군의 소행이라 판단하고 대대장인 이치키 소좌에게 중국군이 공격해서 아군이 실종되었단 보고를 했다. 7월 8일 0시, 임팔의 영웅 연대장 무타구치 렌야에게 보고가 올라갔고 무타구치는 병력을 출동시키는 한편 중국군과 교섭을 실시했다. 베이핑 시장 친더춘이 7월 7일 자정 즈음에 기찰정무 위원회 외교위원회 주임위원 위종한, 전원인, 임경우의 "지금 일본의 특무기관장 마쓰이가 노구교 부근에서 훈련 중이던 일본군 중대가 중국군에게 사격을 받아 1명이 행방불명된 일의 조사를 위해 완평현성에 들어와 조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음으로 중국 측도 사건에 대해 알게 되었다. 친더춘은 쑹저위안을 대리하여 베이핑에서 군정을 실시하고 있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노구교는 중국 영토이며, 일본군은 우리 측의 동의도 없이 연습을 행하여 우리나라의 주권을 침범하고 있다. 이는 국제법 위반이며 행방불명돈 일본인 병사에 대한 우리 측의 책임은 없다. 더구나 일본군이 성내에 들어와 조사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 단 양국의 우호를 생각해 날이 밝으면 우리 측 군경에게 조사시키겠다고 회답하도록."

장제스도 7월 8일 친더춘의 보고를 받고 즉각 쑹저위안에게 전보를 보내 전원을 동원하여 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어 7월 9일에 쓰촨에 있던 허잉친을 난징으로 돌려보내 전면전에 대비할 것을 지시하고 26로군 사령관 쑨롄중에게 중앙군 2개 사단을 주어 북상시켰다.

한편 마쓰이는 7월 8일 오전 2시에 재차 수색을 요청하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완평현성을 포위하겠다고 위협했다. 친더춘은 무력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왕렁자이와 위종한을 마쓰이에게 파견하여 교섭하게 했다. 그런데 실종된 병사는 실종 20분 뒤에 무사히 귀대한 상태였다. 문제는 아무도 그가 자기 자리에 돌아온 것을 모르고 중국군과 일본군은 2시간이나 루거우차우 일대를 뒤지고 있었는데 더 어이가 없는 것은 실종되었다고 보고가 된 해당 병사까지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어둠을 뒤지고 있었다(...). 시미즈 대위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았지만 추궁이 두려워 그걸 늦게 보고했는데 이미 중국군의 공격에 병사가 실종되었단 보고가 본국까지 올라가버렸다. 7월 8일 새벽 4시에 열린 회의에서 일본군 대표 마쓰이 다쿠로 대좌와 사쿠라이 도쿠타로 중좌는 사격에 대해 항의했고, 중국군 대표 펑즈안과 베이징 시장 친더춘은 사건 현장 주변엔 중국군이 있지도 않았는데 트집을 잡지 말라고 항의했다. 마쓰이는 그 상황에서야 행방불명된 병사가 돌아왔음을 밝혔지만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행방불명의 상황을 분명히 해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쌍방 합동으로 조사하자"

이 병맛 넘치는 개드립에 왕렁자이는 실종되었다 그런 문제라면 행방불명병 자신에게 물어보면 될 것 아닌가는 지극히 정상적인 대답을 했지만 일본군은 막무가내였다. 왕렁자이는 무타구치 렌야와도 회담하였는데 무타구치 렌야는 사건을 처리할 권한이 있냐면서 마치 처리해야 할 사건이라도 있는 것처럼 왕렁자이에게 트집을 잡아댔다. 한편 친더춘은 마쓰이의 요구에 219단장, 37사 사단장 풍치안에게 경계 강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일본군과의 교섭이 나름대로 진전되면서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 했는데...

4 무타구치 렌야의 역습, 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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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핑을 공격하는 일본군 포병대

잘 해결되던 와중에 무타구치 렌야가 사고를 쳤다! 무타구치는 산포와 기관총 부대를 노구교를 향해 이동 시키는 등 갑자기 공격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중국측의 길성문 단장 등은 이러한 무타구치의 태세를 감지하고 크게 불안해했고 친더춘은 국토방위는 군인의 천직이니만큼 노구교와 완핑을 사수하고 노구교를 29군의 영광스러운 분묘로 삼으란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역시 확전을 두려워한 친더춘은 일본군이 발포하기 전까지 공격하는 것을 금지했다.

무타구치는 새벽 4시 20분, 이치키 소좌의 3대대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당황한 이치키 소좌가 교섭 중인데 공격해도 괜찮겠냐고 반문하자 무타구치는 괜찮다고 소리를 질렀다. 뒤늦게 이를 안 여단장 가와베 마사카즈 소장이 크게 노하여 현장으로 달려왔지만 무타구치를 질책하긴 커녕 그의 공격을 구경만 하다가 돌아갔다(...). 나중에 무타구치는 가와베 여단장이 자신의 행동을 허락했다고 주장했고 가와베는 이를 부인했다. 각설하고 4시 50분부터 일본군이 중국군 초소를 공격했고 용왕묘를 비롯, 노구교 북쪽의 중국군 기지는 전멸했고 중국군은 80명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했다. 이어 완핑성에서도 교전이 벌어졌으나 중국군은 4시간의 교전 끝에 일본군의 공세를 저지했다.

이 황당한 상황에 사쿠라이 중좌가 공격을 중지시키고 직접 완핑 현성으로 가서 왕렁자이와 담판을 지으려 했지만 무타구치 렌야는 사쿠라이 중좌를 돌려보내고 모든 중국군과 중국인들은 융딩 강 서쪽으로 떠나라는 내용의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 말 같지도 않은 요구를 중국에선 당연히 거부했고 무타구치는 황군의 사무라이 정신을 보여주자고 외치며 정오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일본군은 연대 규모의 증원군과 6대의 장갑차를 투입, 중국군 방어선을 돌파하려했으나 실패했다. 무타구치는 오후 5시에 왕렁자이에게 8시까지 중국군은 영정하 서안으로, 일본군은 동안으로 철수한다는 중재안을 제시했으나 왕렁자이가 거부하자 6시부터 대대적인 포격을 가해 완핑 시내를 파괴하였다. 중국군은 이 상황에서도 권총, 대도, 수류탄으로 무장한 특공대를 투입하여 야간기습을 감행하여 일본군을 괴멸시키는 등 격렬히 저항했다. 한편 무타구치는 기자들 앞에서 피 묻은 붕대를 감고 중국군의 도발을 격퇴했다고 자랑하는 생쑈까지 벌였다. 여담으로 이 싸움의 발단이 된 실종되었던 병사는 시미즈 대위가 7월 8일의 전투에서 용감히 싸웠다는 이유로 용서해줬다.[5]

이후 양측의 공방 끝에 8일 심야에 열린 정전 협상에서 일본은 북경 내의 반일운동 세력의 소탕, 루거우차오 사건에 대한 중국측 책임을 인정할 것, 그리고 쑹저위안과 29군 고위장교들의 사과를 요구했고 7월 11일에 일본군 특무기관장인 마쓰이와 중국측의 친더춘 간에 가까스로 3개항의 합의가 이뤄졌다. 그 내용은 쌍방은 즉시 사격을 중지한다, 중국군은 영정하의 우안으로 일본군은 풍대로 철수한다, 원평현성의 수비는 반일 성향이 강한 부대 대신 다른 부대를 배치한다 등이었다(마쓰이-친더춘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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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지휘하는 무타구치 렌야, 안타깝게도 그 붕대를 두른 모습이 아니다.

그러나 애당초 일본은 협상을 타결시켜서 전투를 멈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미 7월 10일에 일본군 참모본부는 중국 내 주둔군의 방어와 거류민의 보호를 위해서는 북지(중국을 가리키는 당시 일본의 용어) 파병이 불가피하다는 보고를 육군성에 올린 상황이었다. 마쓰이-친더춘 협정이 체결된 그날 일본 국내에서는 이미 5개 관련부처 장관들이 중국에 일본의 위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등의 이유를 내세워 3개 사단의 파병이 합의되었고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이 이를 밀어붙임으로서 사태는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7월 10일 국민정부는 일본 대사관에 '일본군의 행위는 계획된 도발이며 극도의 불법행위'라는 항의 문서를 보냈고 장제스는 전시체제를 상정한 긴급조치를 하달했다.

1. 항전을 위한 군대로 제1선 1백개사, 예비군 80개사를 편성하고 7월 말까지 대본여으 각급 사령부를 비밀리에 조직한다.
2. 현재 보유한 6개월 분의 탄약은 장강 이북에 삼분의 이, 장강 이남에 삼분의 일을 배치한다. 탄약공장이 폭격되는 경우를 고려해 프랑스, 벨기에에서 구입을 교섭하고 홍콩, 베트남 경우의 수송 루트를 확보한다.
3. 병사 1백만, 군마 10만두의 6개월 분 식량을 준비한다.

이 당시에는 이미 국민정부의 대일 유화정책은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라서 이 이상의 타협은 오히려 국민정부를 붕괴시킬 염려가 있었고, 더욱이 일본이 여기서 만족하지 않으리라는 건 누가 봐도 명백했다. 결국 장제스도 전쟁밖에 답이 없음을 깨닫고 7월 17일 루산(노산)에서 "진정으로 피할 수 없는 운명의 갈림길에 놓였다면 전 민족에게는 희생과 항전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내용을 담은 루산 담화를 발표했고 중국과 일본은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5 음모론

이 사건의 발단이 된 총성에 대해서는 양국이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일본은 '중국군이 자신들을 향해 발포했다'라는 주장을 하고 있고, 중국은 '우리가 쏜 게 아니라 일본 쪽 진영에서 들리던데?'라는 식.

또한 전투에 들어가게 된 배경에 대해서도 일본은 '중국측의 사격 이후 실종된 병사의 수색에 중국이 합의를 했음에도 그 후 또 한 번 중국측의 사격이 있었고, 이로 인해 전투에 들어갔다', 중국은 '애초에 그딴 거 합의한 적도 없는데 일본군이 수색을 구실로 부대를 끌고서 쳐들어오길래 반격했다'.

결국 일본에서는 중국군의 우발적 발포로 원인을 돌리고 있고, 중국에서는 싸울 구실을 찾기 위한 일본측의 자작극으로 보고 있는 추세다.

일본 극우파 측에서는 중국 공산당의 음모라는 식의 주장도 내놓고 있다. 가사이 준이치라는 사람이 중국 공산당 음모론의 대표적 인물로, 그는 중국 공산당의 팸플릿에서 "루거우차오 사건은 류사오치(후에 중화인민공화국 제2대 국가주석이 된다)의 지시로 이뤄진 것이다"라고 쓰여진 것을 보았다고 주장하며 근거로 내세웠다. 그러나 가사이가 자기가 봤다는 중국 공산당의 팸플릿 실물을 내놓지 못해서 말도 안 되는 주장으로 치부되고 있다. 뭣보다도 노구교에서 벌어진 총성은 부차적인 것이고 결정적 원인은 미쳐 날뛴 무타구치 렌야, 방관한 가와베 마사카즈[6], 그리고 폭주한 일본 육군 주전파 등이 문제니까 누가 총 쐈는진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다.

6 기타

설사 때문에 병사가 실종되었다는 인식이 퍼져있는데 사실 해당 병사에 대한 추궁을 아무도 안 해서 그 원인은 미상이다. 설사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성매매를 하러 갔다는 설도 있고, 훈련하다가 발을 삐끗해서 넘어지는 바람에 기절(...)했다는 설도 있다.

중국에서 29군은 중일전쟁 중 최초(이 루거우차오 사건이 시작이었으니)로 항일대도를 실전용으로 사용한 부대로 유명하며, 맥신이라는 사람은 1937년에 이 루거우차오에서 소총이랑 대도만 들고 일본군과 맞서는 것을 보고 대도진행곡을 썼다. 해당 문서 참고.

독립운동가이자 국민혁명군 참전자이기도 한 김자열(金子烈)이 이 루거우차오 사건에서 29군 소속으로 싸운 적 있다.

대만 영화 호소자 2에서 산 속에 살면서 할아버지에게 무술만 수련받아서 상식이나 역사는 도무지 모르는 세 손자를 타이베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려던 할머니가 아이들을 교장에게 데려다주는데 교장이 몇 가지 질문을 하면서 "7월 7일에 벌어진 사건을 토대로 벌어진 전쟁이 뭐냐?"라는 질문을 한다. 이에 한 손자가 "초류향이 싸움을 벌여 이긴 날이었습니다" 라고 당당하게 답변을 하여 교장을 뒤집어지게 한다(...).

쓰르라미 울 적에 코믹스 마츠리바야시 편에서 히나미자와 증후군 연구를 반대하는 세력이 나오는데 다름아닌 루거우차오에서 히나미자와 출신 병사가 복무했기 때문. 만약 히나미자와 증후군의 존재가 밝혀진다면 중일전쟁 개전의 책임이 완벽하게 일본측에 돌려진다면서 연구를 반대하는 논리가 성립된다. 하지만 루거우차오에선 누가 총을 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확전을 작정한 것은 일본군이었기 때문이다.

중국 FPS 광영사명에서 2015년 9월 1일에 승전 70주년을 맞아 루거우차오 사건을 다룬 코옵 모드가 업데이트 되었다. 지금까지 매체에서 나온 닥치고 돌격하는 일본군이 아닌 굉장히 천천히, 신중하게 수색에 임하는 일본군의 움직임이 포인트. 국민혁명군 29사단은 그저 뒤쪽의 배경으로만 나오는 주제에 군장 재현만은 쓸데없이 고퀄리티다.

7 참고문헌

  • 중일전쟁, 권성욱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서문당 편집실
  • 쇼와사 1권 전전편, 한도 가즈토시
  1. 펑위샹의 서북군벌 출신. 그래서 다른 군벌 출신의 국민혁명군 지방군처럼 29군 역시 남색 군복을 입었다.
  2. 불운하게도 29군은 루거우차오 이후에 베이징-한커우 철도 작전을 마지막으로 1937년 12월-1938년 1월 동안 산산조각나서 해체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3. 단장은 길성문이었다.
  4. 바로 과달카날 전투에서 일본군 900명을 잘 정비된 미군 진지로 몰아넣어 전멸시킨 그 이치키 지대의 이치키 대좌.
  5. 이상 문단의 출처는 중일전쟁(권성욱), 미지북스의 189~203쪽을 참고, 요약했다.
  6. 여담으로 이 사람은 훗날의 행적도 비범(?)한데, 버마 방면군 사령관으로 재직하면서 임팔 작전을 렌야와의 개인적인 친분을 이유로 승인해줬다. 즉 임팔 작전의 책임은 렌야 다음으로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