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벌해야 할 것은 개념(행위)이 아니라 행위자이다.Nicht der Begriff wird gestraft, sondern der Täter.
학문은 그에게 조용한 명상의 독백도, 그렇다고 온갖 논란을 벗어난 진리도 아니었다. 그것은 끝없는 논쟁, 공격, 방어 그리고 휴전이었다. 난타하는 논리의 싸움이었으며, 때론 단순하고 극단적인 표어였다. 또한 이론이란, 그의 입장에서는 그 끝없는 논쟁으로 향하는 훈련의 과정이었다. 그에 따라 그의 교과서는 판에서 판을 거듭했는데[1], 그것은 가장 생동하는 생명이자 언제까지나 이어지는 논쟁의 일시적 휴지점이었다.-독일의 법철학자 구스타프 라트브루흐(Gustav Radbruch)
프란츠 폰 리스트(Franz von Liszt, 1851.3.2 ~ 1919.6.21)
피아니스트인 프란츠 리스트와는 사촌지간이긴 한데, 나이차가 꽤 있다. 《권리를 위한 투쟁》을 지은 법학자인 예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사실 이쪽은 법학을 배우는 사람이 아니면 거의 모른다. 리스트라고 하면 보통 음악가 리스트를 떠올린다.
그래도 법학사에서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다. 목적형 사상으로 유명하며 그의 목적형 사상은 많은 국가의 형법에 영향을 주었다.
목적형 사상이란 간단히 말해서 "형벌의 목적은 범죄자가 다시 범죄를 저지르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라는 것으로, 즉 범죄자의 재사회화가 형벌의 목적이자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형벌은 범죄자가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부과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응보형 사상과 대립한다. 이는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처벌하는가(응보형), 죄를 저지르지 않게 하기 위하여 처벌하는가(목적형)?"라는 문제이며, 형법의 목적은 무엇이고, 정당성은 어떻게 확보되는가에 대한 대립이다. 이 두 사상은 현대에 와서는 절충적으로 받아들여지지만, 과연 어느쪽을 더 우선시해야 할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리스트는 이 둘 중 목적형 사상의 대표자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목적형 사상을 주장한 리스트는 형벌을 단순히 범죄자에 대한 응보라고 보지 않았다. 그는 형벌을 범죄자가 미래에 다시 범죄를 저지르게 하지 않기 위한 수단, 즉 범죄자를 재사회화시키기 위한 수단이라고 보았는데, 그는 이러한 형벌제도로 범죄를 줄이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사상 아래 그는 범죄자를 재사회화가 가능한 부류, 필요가 없는 부류, 불가능한 부류로 나누어 각각의 범죄자에게 적절한 형벌을 통한 교화, 간단한 조치에 의한 경고, 사회로부터 완전한 격리를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단점이 많으며, 현대에는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다. 그래도 그의 이러한 사상은 1975년 개정된 독일 형법에 영향을 주었으며, 독일법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는 물론 각국의 형법 개정에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리스트가 목적형 사상을 주장하긴 했지만 응보형 사상을 완전히 배척한 것은 아니다. 이는 그가 《형법에 있어서 목적사상(Der Zweckgedanken im Strafrecht)》[2] 에서 적은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결국 보호형이란 올바르게 이해된 응보형이다.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와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이의 대립은 착각의 산물이다. 다시 말해 진압과 예방은 결코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물에 빠졌기 때문에 헤엄치는가, 아니면 익사하지 않기 위해서 헤엄치는가? 내가 병이 들었기 때문에 약을 먹는가, 아니면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 약을 먹는가? (……) 이러한 모든 물음들은 수천 년에 걸쳐 철학적 법 이론에서 분쟁의 씨앗이었던 물음과 똑같은 가치를 갖고 있다. 형벌은 진압을 통한 예방이다. 또는 예방을 통한 진압이라고도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마지막으로 이 항목은 《마르부르크 강령》에 수록된 차병직 변호사의 해제를 참조하여 작성하였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