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프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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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edrich Fromm

프리트리히 프롬

1888년 10월 8일 ~ 1945년 3월 12일

나치독일의 군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예비군 총사령관이었으며, 히틀러에 대한 충성과 암살 계획 사이에서 기회주의적인 처세술을 발휘하였으나 결국 의심당한 끝에 처형되었다.

최종계급은 상급대장

1 군경력

김나지움을 졸업한 후 베를린대학에 입학. 1906년에 육군에 입대하여 제55야포연대에 견습사관으로서 배속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에는 중위계급으로 대대부관이었다.

1916년에 대위로 진급 참모본부에 배속되었다.
이 전쟁에서 프롬은 두번의 부상을 당했고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의 훈장을 여러차례 받았다.

패전후에는 의용군으로서 동부에서의 국경분쟁에 종군하였고 또한 바이마르공화국 육군에 채용되어 군경력을 이어갔다.

1927년 소령으로 국방군 사령부에서 근무하였으며 1931년 중령,1933년 대령이되어 육군총국장에 취임. 1935년에 소장,1938년에 중장,1939년에 포병대장으로 승진.

9월에는 육군보충대 국장에 취임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후 1940년에는 기사철십자훈장이 서훈되었고 직후에 상급대장으로 승진하였다. 그 후, 독일 국방군 예비군 사령관에 취임하였다.

2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상세한 내용은 해당항목 참조.

1944년 일어난 암살 미수 사건에 프롬이 얼마만큼 관여하고 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주모자인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그의 직속참모였고 육군총국장이었던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 대장도 직속 부하였다.

7월 20일,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서류가방에 든 폭탄으로 히틀러에게 폭살을 시도했을 때, 빌헬름 카이텔원수로 부터 전화연락을 받고 히틀러가 생존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발키리 작전 발동을 요구하는 슈타우펜베르크에게 자결을 명령, 그러나 역으로 감금당하였으나 치안부대에게 구출된 후, 계획에 참여한 주요인사를 모두 체포한 후 즉결심판으로 총살을 명령하였다. 군 선배인 루트비히 베크 예비역 상급대장에게는 자신이 직접 총살할 수 없어 자결을 권유했고, 베크는 프롬의 권유에 따라 권총으로 자결했다.

이것은 자신이 계획에 참여하였음을 탄로당하지 않기 위한 조치였으며 한편으론 부하였던 이들이 히틀러에 의하여 끔찍한 고문을 당하는 것을 면하게 하기 위한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조치를 통해 스스로를 구하는데는 실패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허락없이 프롬이 제멋대로 용의자들을 처형한 것에 크게 분노하였고, 그가 계획에 참여하였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9월 14일, 프롬은 계급과 명예를 모두 박탈당하였고, 일반시민으로서 법정에 섰다.

그가 암살계획에 참여하였다는 사실이 입증되지는 못하였지만 "적앞에서 달아난 죄"로 사형이 선고되어 다음해 3월 12일 브란덴부르크에 위치한 구치소에서 총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