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항목 : 독일 국방군/원수
1 개요
이름 | Wilhelm Bodewin Johann Gustav Keitel (빌헬름 보데빈 요한 구스타프 카이텔) |
출생 | 1882년 9월 22일, 독일 제국 헬름슈르트 |
사망 | 1946년 10월 16일, 독일 뉘른베르크 |
복무 | 독일 제국군(1901년 ~ 1918년) 바이마르 공화국군(1918년 ~ 1933년) 나치 독일군(1933년 ~ 1945년) |
최종 계급 | 육군 야전원수(Generalfeldmarschall)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
주요 서훈 | 기사 철십자 훈장 |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 국방군 육군 원수로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Oberkommando der Wehrmacht, OKW)의 최고사령관이었다. 강직해보이는 인상과는 반대로 제3제국 최고의 무능한 예스맨으로 악명 높다.
2 생애
2.1 제2차 세계대전 전
헤름슈르트 출신으로 1901년 육군 장교로 입대해 제1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한 경험이 있는 히틀러의 부하 중에서도 짬밥을 좀 먹은 케이스. 하지만 벨기에 전투에서 부상 당한 탓에 주로 참모부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경력을 인정 받아 전후 군비 축소 과정에서 군에 잔류할 수 있었던 4000명의 엘리트 장교 중 하나였고 소련군과 교환훈련을 다녀온 뒤 참모 장교로 일하다가 소장까지 진급해 육군 참모본부 소속 편제부 부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때 카이텔은 참모본부 내에서 있으나 마나 한 인물로 취급받고 있는 그저 그런 장성이었다.
2.2 국방군 최고사령부의 수장이 되다
그런데 1937년 상관이었던 국방군 총사령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육군 원수가 블롬베르크-프뤼치 사건[1]으로 인해 모함으로 사퇴하자[2] 대장으로 진급됨과 동시에 히틀러가 내각에 속한 전쟁성을 해체하고 새롭게 만든 '국방군 최고사령부'(OKW)의 수장이라는 엄청난 자리에 임명되었다. 이때 히틀러는 사퇴 전이었던 블롬베르크에게 이렇게 물었다.
"카이텔은 어떤 자요?" 블롬베르크가 대답했다. "괜찮은 사람이지만 그저 자기 사무실이나 지키는 자에 불과합니다." 그 대답에 히틀러는 환호했다.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사람이오!" |
어찌보면 보로실로프보다 막장이다. 그는 스탈린과의 친분으로 원수 계급과 국방장관 자리를 얻었어도 그 친분이 그가 스탈린을 도와준 것에서 생긴 것이니[3]…게다가 사석에서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에게 접시를 던지거나 뺨을 때리는 극히 무례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4] 그러나 카이텔은 예스맨이었기 때문에 뽑힌것이고, 히틀러의 눈에 들기 위해 온갖 무리한 요구를 군에 전달하다가 군에 해를 끼쳤다. 하지만 국방군 최고사령부(OKW)자체가 전시에는 별다른 실권이 없는 조직이었고 육해공군에 작전에 명령할 권한도 없고 그냥 협조요청만 할수있는 통합군체제로 가는 과도기적 조직이었기 때문에 카이텔의 권한은 극히 미미했다. 육군에서는 그나마 군선배라 대놓고는 앞에서 무시 안했지만 제국해군시절부터 따로 작전권을 행사하며 놀던 크릭스마리네나 헤르만 괴링 제국원수란 든든한 뒷배경이 있는 루프트 바페는 아예 카이텔을 대놓고 무시했다.[5] 그런데 괴링도 무시했잖아?
2.3 전쟁에서 한 일
국방군 최고사령부가 이전의 전쟁성을 대체하는 자리이자 기존에 존재하는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OKH)의 권한을 침해하는 기관이었지만 정작 국방군 최고 사령부가 하는 역할은 너무 모호했다. 육해공군에 협조와 통합작전에 중재는 할수 있지만 육해공군 모두 최고사령관과 최고사령부와 참모본부를 보유하고 독자 작전권을 행사했다. 애시당초 국방군 최고사령부의 위치가 히틀러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기존 군부 인원들로 이루어진 육군 최고사령부를 견제하기 위해 조직되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OKW(국방군 최고사령부)와 OKH(육군 최고사령부)가 지상군 작전에서 명목상 교류를 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OKH가 지상 작전을 주도하는 상황이었다. 해, 공군 통합 작전에서 조율을 담당하게 되어 있으나 여기서도 별 시원찮은 역할만 맡았다. 그 때문에 명목상 독일 전 군의 총사령관인 카이텔은 군사적으로 하는 일이 없다시피 했다. 심지어 카이텔이 직접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존재가 운전병과 부관 및 참모 몇명에 불과하다는 비아냥까지 받을 지경이었으니...되려 카이텔의 참모장이자 국방군 최고사령부 총참모장(지휘작전부장)인 알프레트 요들 상급대장이 히틀러의 개인 참모 노릇을 하며 더 하는 일이 많았다. 전장 중반이후에 동부전선은 OKH(육군사령부) 서부전선, 발칸 반도, 노르웨이를 비롯한 잡전선(?)은 OKW로 역할이 분화되긴하지만 역시 카이텔의 권력과 역할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 애초에 1941년 모스크바전투에 아돌프 히틀러가 육군최고사령관으로 취임하고[6], 공군은 전쟁말기 며칠 빼면 괴링이 총수인데 명령권도 없는 누가 누구한테 협조요청을 하겠는가...
그러자 카이텔은 일단 사람 자체가 권력의 맛을 좋아한건지 아니면 단순히 히틀러가 두려웠던 건지 모르겠지만[7] 히틀러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전형적인 아첨꾼 및 예스맨으로 활동했으며 동료 장성들에게 '아부꾼 카이텔'이란 뜻의 리카이텔(Lakeitel)이라고 불리는 등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알베르트 슈페어 군수장관의 회고록에선 다른사람들이 카이텔보고 '주인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당나귀'라고 비웃었다. 당시 카이텔의 보좌관이었던 장교들의 말에 의하면 히틀러가 참석한 작전회의에서 늘 "총통각하께 경례", "총통각하, 당신은 사상최고의 군사지도자입니다", "총통께서 직접 나서실순은 없습니다"등 손발이 오글거리는 아첨스러운 발언들을 했다고 한다.
또한 당연히 군부의 나치화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그 유명한 나치식 경례를 육군에 도입하게 했다. 이런 성격의 장성들이 그렇듯 전술 능력은 범인 수준에 교과서적 이론에 머물렀다. 히틀러도 카이텔은 범장이라고 평했다. 작전 능력보다는 관리 능력으로 높은 자리에 오른 경우이고, 카이텔 자신도 이를 잘 알았기 때문에 작전 수립에 적극 관여하지 않았다.
무능하고 졸장 수준의 전술 능력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IQ는 129로 생각보단 높은 편이었다고 한다....어? #
물론 독소전쟁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다거나 프랑스전 초기에는 히틀러의 작전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 욕을 먹은 적도 있다고 한다. 사실 히틀러의 군사적 역량이나 판단이 워낙 막장이었던지라...그리고 됭케르크 철수작전 때는 히틀러의 진격 중지 요청을 지지하며 프랑스 침공의 완벽한 승리를 놓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카이텔은 계속 히틀러의 아부꾼이자 예스맨으로 활동했지만 유일하게 히틀러의 뜻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때가 있긴 했다. 1942년에 청색 작전중 후퇴를 주장하던 A 집단군 사령관 빌헬름 리스트 원수에게 화가 난 히틀러는 카이텔에게 리스트를 해임할 것을 명령했다. 그런데 카이텔은 요들을 직접 리스트에게 보내 리스트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요들의 보고서를 받고 리스트의 해임을 정면으로 반대했다. 이에 히틀러는 카이텔에게 유래 없는 분노를 퍼부었고 카이텔은 싹싹 빌며 리스트의 해임에 동의했다.
1944년에는 발키리 작전이 실패로 끝나자 재빠른 대처로 반란자들을 소탕하고, 부상당한 히틀러를 직접 부축해 벙커를 빠져나오는 충심을 보여 히틀러의 신임을 확고히 했다.
2.4 전쟁범죄
독소전쟁 기간 중 카이텔은 히믈러 휘하의 무장친위대가 점령지에서 벌인 전쟁 범죄에 대해서도 방임했고, 히틀러가 내린 정치위원 등 비정규 전투원에 대한 학살 명령서에도 서명하는 등 정규전의 원칙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이러한 행동은 전후 전범으로 기소되는데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카이텔은 히틀러가 내린 전쟁범죄 명령들을 수행할 것을 항상 적극적으로 명령했으며 1941년 9월에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볼셰비즘에 맞서는 투쟁은 무엇보다도 볼셰비즘의 주축인 유대인을 상대로 벌이는 무자비하고 엄격하고 강력한 행동을 요구한다." |
2.5 전후와 처형
나는 나의 총통에 대해 충성을 한것이다. 그리고 소련군도 스탈린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하지 않나?
막판에 베를린이 포위당하자 탈출을 권유했지만 히틀러가 탈출을 거부했다. 그 직후 히틀러의 명령으로 요들과 함께 베를린을 떠나 대통령이 된 해군원수 카를 되니츠 제독이 이끄는 정부에 합류한다. 5월 8일에 요들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원수 앞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긴 했지만 독일은 연합국을 통해서가 아니라 소련에게 직접 항복해야 한다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요구에 따라 카이텔은 5월 9일에 소련군의 게오르기 주코프 육군원수가 내민 항복선언문에 서명했다.[8] 일화로 항복하러 나타나서 게르만 귀족전통으로 말채찍을 들고 인사, 물론 연합군에선 쌩깠다. 소련군에서 항복 후에 제공한 식사는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항복 직후 범죄자로 체포당해 침략전쟁의 기획 및 전쟁범죄의 책임자로서 기소되었고,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당한다. 그러나 카이텔은 자신이 무죄라고 주장하는 다른 전범들과는 다르게 재판에서 자신을 변명하지 않고 묵묵히 입을 다물면서 재판에 임했으며 혐의를 인정했으며 사형당할 것도 각오했다고 한다. 미 육군 군의관으로, 당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당시 정신분석가로 있던 더글러스 케리 소령은 "카이텔은 목적을 잃어버린 자로 자살위험이 높다"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1946년 10월 2일 사형판결이 내려지자 카이텔은 자신을 군인답게 총살형을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교수형에 처해진다. 사형 당하기 직전에 유언은 다음과 같다
"나는 하느님의 축복이 모든 독일인들에게 있기를 바란다. 200만이 넘는 독일군인들이 아버지 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 이제 나도 아들들(죽은 독일군인들)을 따라간다- 모든 것은 독일을 위해!"
《역사의 원전》에서 재인용하자면, 항복할 때보다 죽을 때 용감하고 단정했다고 한다.
처형된 카이텔. 혐짤 주의
자살한 괴링을 포함한 11명의 핵심 전범들은 뮌헨 근교의 화장장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소각되었고, 유골은 이자르 강의 지류인 콘벤츠 강에 뿌려졌다. 2006년에 새로 발견된 카이텔의 유언장에는 "히틀러에게 충성했기 때문에 배신자는 될 수 없었다"고 적혀있었다고 한다.
3 인간관계
무능했지만 겸손했으며 누구에게도 미움받는 사람은 아니었다. 나치당이나 군에서도 무능하고 아부떤다고 무시는 당해도, 마르틴 보어만처럼 월권을 휘두르거나 권력투쟁하거나 경쟁자들 모함하는건 하지 않고 히틀러가 의도한대로 '자리만 지키는 역할'에 충실했다. 권력핵심에서 밀려난 대신 보상으로 감투 수집덕후로 변한 괴링이 국방군총사령관 자리를 탐내도 히틀러는 카이텔을 계속 유임시켰다.
게다가 성격도 괜찮은 편으로, 비록 무능한 졸장이기는 하지만 부하들을 잘 챙겨주는 덕장의 면모를 가진 인물이었다. 일단 일선 장병들의 사기가 중요하다며 술, 초콜릿, 커피 같은 기호식품들을 장병들에게 더 많이 지급하면 사기가 높아질 것이라고 하기도 했고 부하들에게 고함을 지르거나 욕을 한 적도 별로 없으며 차분했다. 무엇보다도 부하들의 복지에 신경을 쓰는 편이었는데 장교나 하사관 뿐만 아니라 일개 병사들의 복지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게다가 부하가 실수를 하면 그게 어느정도 넘길 일이다 싶으면 타이르는 수준에서 끝냈다고. 덕분에 뉘른베르크에서 그가 사형선고를 받자 카이텔 밑에서 일했던 OKH 장병들이 격렬히 항의한 바 있다.
자신의 직위가 분에 넘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이만큼 높은 자리에 앉혀준 히틀러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의외로 매우 용감했다고 하며 사형되기 전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태연하고 비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4 기타 매체에서
- 굽시니스트의 본격 세계 2차 대전 만화에서도 등장하는데 이사람 아부로 우랄산맥을 뚫어버릴 기세라는 말이 나올정도로 히틀러를 핥는 모습을 보여줬다.
- 나치 독일의 전쟁 말기를 다룬 영화 다운폴에서 히틀러가 분노를 터뜨리는 유명한 장면에서 히틀러에게 지목당해 폭풍같이 욕을 먹은 네 사람 중 한 명이다.
- Easy Tech의 세계 정복자 3에서 보병능력 2성, 장갑능력 2성, 화포능력 1성, 공군능력 1성, 행군능력 2성으로 나온다.
- ↑ 둘다 친 히틀러 성향으로 블롬베르크는 음모 창녀출신 여성과 재혼이 까발려지면서 히틀러가 이혼을 요구하며 유임시키려했는데 스스로 거부했고 프리치는 괴링과 히믈러의 음모라고 추정하나 육군 내 다른 파벌도 동조했다는 썰이 유력하다.
- ↑ 육군 최고사령관 프리취의 후임은 브라우히치.
- ↑ 소련-폴란드 전쟁에서 과오를 저지른 스탈린을 국방장관 트로츠키가 심하게 디스했으나, 보로실로프가 이때 스탈린을 변호해서 스탈린은 별 처벌받지 않고 지나갔다. 트로츠키의 가장 큰 정적이 스탈린이었음을 보면, 보로실로프는 스탈린 집권의 1등 공신인셈. 그리고 한국에서 역사를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독소전쟁을 매개로 한 나치 독일과 스탈린 치하 소련 정권의 전체주의적 유사성에 더 강조를 두며 전간기, 1930년대의 행적을 중심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강해서 정작 중요한 적백내전 당시의 커리어를 간과,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나치당의 핵심적인 두뇌들 빼고 대부분은 제정 시절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무난한 커리어를 쌓다가 나치 정권으로 수평이동한 경우가 많은 독일의 경우와 달리 보로실로프나 부됸늬 같이 밀덕들은 우습게 아는 스탈린 시절 소련의 수뇌부들도 바뀐 세상에서 걸맞지 않은 자리에 올라 삽질하기 전에는 충분히 해당 분야에서는 혁명가이자 투사로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을 했던 인간들이 더 많다.
- ↑ 심지어는 겨울전쟁에서 대패하고 와서, 스탈린이, "너 이 무능한놈"이라고 질책하자, 보로실로프는 "네가 유능한 장교 다 죽여놓고 왜 나에게 삿대질이야."라고 대들었다고.
- ↑ 이덕에 그의 부하장병들(특히 알프레드 요들)은 이런 공군과 해군의 행적에 아니꼽게 보았고 역시 그들도 똑같이 무시했다.
- ↑ 물론 군 통수권자인 국방군 총사령관지위도 계속유지.
- ↑ 아니면 괴벨스처럼 히틀러를
사랑좋아했다는 설도 있다. - ↑ 전쟁 중 거의 유일하게 존재감있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