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부르디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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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ourdieu1.jpg
Pierre Bourdieu(1930~2002)[1]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사회이론가

1 생애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2], 1930-2002)는 프랑스의 사회학자이며 인류학자, 철학자이다.

프랑스 남서부, 스페인과의 접경지대에 있는 산골벽지에서 우체국 직원의 아들로 태어난 피에르 부르디외는 프랑스를 빛낸 여타의 위인들처럼 고등사범학교(École Normale Supérieure)[3]에 입학했다. 그에게 영향을 미친 철학자들은 매우 많은데, 특히 고등사범에서는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과 조르주 캉길렘(Georges Canguilhem)의 과학철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후 교원자격시험(Agrégation)에 통과한 부르디외는 잠깐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1955년 징병되어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로 파견된다. 1958년부터 62년까지 부르디외는 알제리의 베르베르(berber)인들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를 진행한다. 원래 레비 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의 구조인류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던 부르디외는 점차적으로 실제 행위자들의 실천(practice)를 무시하는 구조주의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베르베르 인들에 대한 민속지 연구는 먼 훗날까지 부르디외의 연구 전반에서 훌륭한 예시로 등장하게 된다.[4]

이후 프랑스로 돌아온 부르디외는 선배 사회학자였던 레이몽 아롱(Raymond Aron)의 눈에 들어 1964년부터 고등연구대학원(École Pratique des Hautes Études)[5]의 교수가 된다. 이 기간동안 부르디외는 프랑스의 교육, 문화, 그리고 계급에 대한 다양한 비판을 시도한다. 『상속자들』(1964), 『중간 예술』(1965), 『예술 사랑』(1969), 『재생산』(1970), 『실천 이론에 대한 개요』(1972)등이 바로 이 시기의 저작이다. 특히 교육과 문화에 대한 저술에서 부르디외는 통계방법론을 아낌없이 사용했다.[6] 이러한 작업은 부르디외의 대표작 『구별짓기』(1979)을 통해 그 결실을 맺었다. 뒤이어 나온 『실천 감각』(1980)과 함께, 두 저작은 부르디외를 프랑스 최고의 사회학자로 만들어 주었고 결국 1981년, 콜레쥬 드 프랑스(Collège de France)의 교수로 선출되었다.[7] 이후, 자신의 저서들이 영어로 번역되면서,[8] 영미권에도 이름을 알린 부르디외는 끊임없이 비판적인 저서들을 출간하였다. 예를 들어 『호모 아카데미쿠스』(1984), 『마르틴 하이데거의 정치적 존재론』(1988), 『국가 귀족』(1989), 『예술의 규칙』(1992) 등을 통해서 부르디외는 예술, 지식인, 학계, 국가 관료제 등에 대해 전방위적인 비판을 가했다.

90년대 이후, 부르디외는 참여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게 된다. 그 이전까지 학계의 자율성을 옹호하며 매스컴에 출연하는 학자들이나 예언자적 지식인들을 비판했던 그는, 신자유주의의 출현과 더불어 가장 맹렬한 참여 지식인 중 한 명이 되었다.[9]

참고로 한국에 부르디외 문하에서 수학했던 사람이 1명 있다고 한다. 현재 대학교 강사로 활둥중이라는 듯.

2 지적 배경

사회학의 창시자인 오귀스트 콩트(August Comte), 그리고 고전 사회학의 3대장 중 한 명인 에밀 뒤르케임(Émile Durkheim)을 배출한 프랑스 사회학은 2차 대전 이후, 미국 사회학에 장의 헤게모니를 넘겨주고 말았다.[10] 1960년대까지 현대사회학은 탈코트 파슨스(Talcott Parsons)의 거대이론, 폴 라자스펠드(Paul Lazarsfeld)의 연구방법론, 그리고 로버트 K. 머튼(Robert K. Merton)의 중범위 이론에 지배받고 있었다.[11] 이후에도 현대사회학은 허버트 블루머(Herbert Blumer)의 상징적 상호작용론(symbolic interactionism), 조지 호만스(George Homans)의 교환이론(exchange theory), 알프레드 슈츠(Alfred Schütz)의 현상학적 사회학(phenomenological sociology), 가장 특이한 사회이론이라 불리는 민속방법론(ethnomethodology)등 미국산 사회이론들에 의해 굴러가는 중이었다. 프랑스 사회학, 아니 유럽 사회학은 맑스, 뒤르케임, 베버를 배출한 과거를 뒤로한 채, 사회학의 패권을 미국에 넘겨줄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조류에 맞서 부르디외는 사회학 장을 혁신하기 위해 자신의 이론을 가다듬었다. 그의 지적 프로젝트를 평가하면 다음과 같다.

1) 그는 분석에 있어서 미시적 수준과 거시적 수준을 통합하려고 시도하였으며, 주관적인 경험과 객관적인 구조 양자를 모두 고려하였다. 이를 통하여 “미시/거시 논쟁”에 있어 주요 인물이 되었고, 그의 저작들은 양 진영 모두에게 필독서가 되었다.

2) 그는 맑스와 베버의 비판 사회학의 주요 부분을 교조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그가 자신의 연구를 비판적 프로젝트의 한 영역으로 생각했다는 점 때문에, 이론적인 통합을 하고자 했던 기든스나 신기능주의 등의 다른 시도들보다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다.

3) 그는 추상적인 이론적 모델을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구체화된 중범위의 경험적인 연구도 수행하였다. 이로 인해 순수 이론가와 방법론적인 측면을 보다 중요시 여기는 문화사회학자 모두의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4) 그의 경험적인 저작은 (교육, 대중문화, 예술과 같은) 다수의 영역과 (인류학, 사회학 등의) 다수의 학문 분야를 넘나들었으며, 이로 인해 잠재적인 독자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

5) 그는 (장, 아비투스, 문화자본 같은) 다수의 개념을 발전시켜왔으며, 이 개념들은 학문적으로도 주목의 대상이 되었고 다양한 연구 영역에 광범위하게 적용되었다.

요약하자면, 부르디외의 작업은 이론과 방법론의 거짓된 이분법을 돌파하는 것이었으며, 사회학적 이론틀을 정교화함으로써 구조/행위자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객관주의와 주관주의를 통합하는 성찰적 사회학(reflexive sociology)을 전개하였다.

3 성찰적 사회학

먼저 부르디외는 구조주의, 즉 레비 스트로스의 구조인류학을 공격한다. 그는 구조주의를 '관찰자로서의 사회과학자의 입장이 만들어낸 왜곡된 객관주의의 구현’이라고 비판하였다. 외부인, 즉 이론가가 일상행위자들의 세계를 묘사하기 위해 만든 모델은 마치 그것이 실제 세계를 객관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것처럼 약속한다. 하지만 객관주의적 사회 이론은 행위 수행(agency)의 역할과 전략(strategy), 인정(recognition), 존경과 같은 주관적인 문제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규칙과 기호 체계에 의한 결정론으로 귀결된다. 한편 주관주의적 사회 이론은 이론가의 해석과 상식이 인식론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는데, 부르디외는 이를 기각하며 사회구조의 억압적 특성을 드러내는 사회학적 지식의 우위를 지키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부르디외는 구조나 행위자의 한 쪽으로 환원되지 않는 성찰적 사회학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성찰적 사회학은 우리(이론가)가 만든 이론적 모델이 우리가 처한 맥락과 위치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음을 성찰하고, 그 모델에 우리의 선입견이 투사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만 사회 이론은 객관주의의 오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주관적인 요소들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한편 부르디외의 프로그램은 구조/행위자 문제를 장/아비투스의 도식으로 설명함으로써 구체화된다.

4 아비투스

부르디외의 성찰적 사회학은 분석의 초점을 구조/행위자, 혹은 객관/주관의 이항대립에서 사회적 실천론(social praxeology)로 전환한다. 그러면서 그는 실천이 객관적인 사회적 관계(relation)과 주관적인 해석(interpretation) 모두를 반영하고 재생산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이를 매개하는 개념으로 아비투스(habitus)를 도입한다. 아비투스는 “영속성 있고, 전환 가능한 성향(dispositions)의 체계, 즉 구조들을 구조화하도록 미리 기능 지어진 구조화된 구조들, 다시 말해 실천을 생성시키고 구조화하는 원리”로 정의된다. 쉽게 말하자면 아비투스는 상황에 따라 전환 가능하며 일련의 영속성을 띤 성향들이다. 여기서 성향이라는 말은 곧 아비투스가 의식적이고 성찰적인 개념이 아니라 무의식적이고 반성찰적이며, 몸에 체화되어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예를 들어 경기 중에 네트를 향해 뛰어가는 테니스 선수를 생각해보자. 그 순간 테니스 선수는 라켓을 왼쪽으로 휘두를 지 오른 쪽으로 휘두를지, 혹은 발리를 쳐야 할지, 아니면 자신이 왜 테니스를 치고 있는 지 의식적으로 성찰하지 않는다. 테니스 선수는 자신에게 공이 온 순간 ‘적절히’ 대처함으로써 게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나가면서 자신이 아비투스를 체화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즉 아비투스란 주어진 상황에서 적절한 판단과 행동을 유도해주는 암묵적으로 당연시하는 감각이다. 그리고 이는 머리가 아닌 신체에 각인된(inscribed) 것으로서, 여기에는 오랜 시간의 투자(investment)가 필요하다. 몸에 배이는 데 시간이 걸린 만큼, 한번 체화된 아비투스는 환경이 바뀌어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운동을 오래 쉬면 감이 떨어져버리는 것처럼, 그 실천을 지속하지 않으면 아비투스도 결국은 사라지기 시작한다.

한편 부르디외는 이러한 아비투스의 형성 과정이 권력과 계급에 의한 체계적인 불평등과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아비투스는 불평등한 관계에서 발생하며, 아비투스를 체화한 행위자들의 실천은 이러한 불평등을 생산하는 객관적 구조를 재생산하는 데 일조한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피지배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의 아비투스는 삶을 개선하는 것이 아닌 자신들의 열등한 처지를 재생산하려고 한다. 부르디외는 가족과 학교가 아비투스의 상이한 분배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제도는 부유한 배경의 사람들이 가난한 계급 출신보다 여러 가지 이점을 갖도록 한다.

5

(field)이란 관계에 대한 개념이다. 장 내에는 여러개의 객관적 위치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위치는 위치를 점유한 행위자의 의지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행위자들은 소유하고 있는 자본[12][13]의 양과 그 비중에 따라 결정되고 수행자, 그리고 장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구사한다.

부르디외에게 장은 단순히 경계가 명확한 물리적인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사회적인 공간으로서, 일루지오를 공유하는 참여자들이 모여 상징자본을 놓고 투쟁하는 장소이다. 여기서 일루지오(illusio)란, 여러 장 내의 행위자들이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집단적 활동의 정당성(legitimacy)에 대해 갖고 있는 믿음이다. 일단 장이 열리려면, 그곳에서 행해지는 활동이나 경쟁이 정당하고, 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때 어떤 참여자가 일루지오를 가진다는 것은 장에서 공유되는 규칙을 따르고자 하는 성향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장 내에서 일어나는 우연들과 변화에 조응하여 ‘적절하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짐을 의미한다. 그런데 상징자본은 장의 참여자들이 얻고자 하는 내기물인데, 일상 행위자들이 추구하는 물질적 이윤과 달리 오직 일루지오를 공유하는 이들에게만 의미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복싱 체육관에 대한 바캉의 현지조사 연구에서처럼 일상 행위자들은 복싱 챔피언 트로피를 따내기 위해 몸을 희생하는 복싱선수들을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챔피언이 되었을 때 얻는 경제적인 이윤이 있지만, 그 확률은 매우 낮으며 설령 된다고 해도 펀치 드렁크(punch drunk)와 같은 신체적 후유증에 시달려야 한다. 요컨대 복싱선수에게 중요한 것은 경제적 이윤의 대차대조가 아니라 챔피언 트로피라는 상징 자본과 그것이 보장하는 보람이다. 만약 복싱 선수 모두가 어느 날, 자신이 그토록 추구했던 챔피언의 자리가 주어진 목표가 아니며 그가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걸 알아버린다면, 요컨대 일루지오가 사라져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이 경우 복싱은 챔피언의 자리를 놓고 벌이는 숭고한 스포츠가 아니라, 그저 인간 간의 의미 없는 주먹질이 되어버릴 것이다. 역으로 생각해본다면, 특정한 장은 자신의 믿음을 의심하지 않는 집단적 오인을 견지하며 공모하는 구성원들의 일루지오에 의해서 성립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장의 경계는 어떻게 구획되는 것일까? 앞서 장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일루지오를 공유하는 이들의 사회적 공간이라고 말했다. 이때 특정한 장의 경계는 말로 온전히 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들어갈 수 있고, 누구는 들어 갈 수 없는 지’를 통해서 드러나는 열린 개념이다. 예컨대 누군가가 사회학 장 안에 있으며, 혹은 바깥에 있음을 판단해 주는 명시적인 가이드라인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특정한 틀로 장의 경계를 구획하려는 시도는 틀림없이 그것으로 다 잡아내지 못하는 잔여(residual)를 남길뿐더러, 오히려 왜곡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의 경계는 특정한 행위자가 그 장에 진입하기 위해 얼마의 비용을 지불했느냐는 ‘자격 요건 충족’의 문제로 귀결된다.

6 자본

부르디외의 논문 「자본의 형태」(1986)에 따르면 사회적 권력과 사회적 불평등을 결정짓는 데 작용하는 세 종류의 자본이 존재한다. 그 중 『구별짓기』(1979)의 중심 개념인 문화자본은 앞서 설명한 아비투스의 한 측면이다. 아비투스처럼 문화자본 또한 여러 의미를 가진다.

1) 예술과 문화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

2) 문화적 취향과 선호

3) 공식 자격(대학 학위, 컨테스트 입상 등)

4) 문화적 기술과 실제적인 지식(악기를 다루는 능력 등)

5) 스스로를 차별화하고 좋고 나쁨을 구분하는 능력

『구별짓기』에서 부르디외는 미학적인 판단이 무엇이 고상하고 천박한 취향인지에 대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에 근거하고 있다는 철학적 사고를 비판한다. 그 대신 그는 취향이 사회적으로 결정된다고 보았다. 『구별짓기』는 프랑스 사회의 특정 계급과 직업집단이 음악, 예술, 음식에 있어 구분되는 취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문화자본이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사회적 위치를 반영하는 하나의 지표임을 드러낸다. 한편 부르디외는 문화자본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어내고 동시에 구별과 불평등의 영속화를 도와준다는 점을 강조한다. 아비투스와 마찬가지로 문화자본은 무엇이 가치 있고 없는 지를 규정해준다. 『구별짓기』에 묘사된 대로 문화자본을 많이 가진 엘리트집단은 자신들의 ‘고급문화’를 대중문화와 구별 짓고 정당화함으로써 문화의 위계, 더 나아가 계급 위계를 영속화하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주의할 점이라면, 부르디외 모델의 매력이 사회가 공식적으로는 사회이동에 있어 개방적이라고 주장한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아비투스가 전-성찰적이고 무의식적인 성향이었던 것처럼, 문화자본을 체화한 지배계층은 결코 사회 이동을 막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이 가진 특권은 대부분이 못 보고 있는 문화적 편견의 섬세한 작용을 통해 재생산된다.
  1. 저작권 없는 사진을 구글 이미지에서 구할 수 없어 부득이하게 그림을 올린다. 수정바람
  2. 프랑스식의 발음기호는 buʁdjø이며, 부ㅎ듀에 가깝다.
  3. 고등사범학교 출신 선배로는 사회학의 창시자 에밀 뒤르케임이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 모리스 메를로-퐁티가 있었다. 또한 청년기의 부르디외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루이 알튀세르, 미셸 푸코는 그의 가까운 선배들이었으며, 후일 그의 『호모 아카데미쿠스』(1984)을 두고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되는 자크 데리다는 그의 동창생이다.
  4. 특히 부르디외의 가장 훌륭한 이론서로 일컫어지는 『실천 감각』(1980)에서도 책의 절반 이상이 베르베르 인들에 대한 분석으로 채워져 있다.
  5. 훗날 EHESS로 알려진 고등사회과학연구원(École des Hautes Études en Sciences Sociales)의 전신
  6. 이는 매우 난해한 축에 속하는 부르디외의 저서들이 미국사회학계에 좀 더 친근하게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7. 여담에 의하면 이미 콜레쥬 드 프랑스에 있었던 미셸 푸코는 부르디외의 저작들에 매우 큰 감명을 받고 그를 선출하도록 힘을 썼다고 한다. 한편 『실천 감각』에서 "객관주의적 오류"의 대표자로 비판받은 레비 스트로스는 부르디외에게 반대표를 던졌다.
  8. 운이 좋게도 부르디외에게는 Richard Nice라는 매우 훌륭한 전문 번역자가 있었다. 그 덕에 부르디외의 영역본들은 번역 논란에 시달리지 않는 편이다.
  9. 이 시기의 저작으로는 『세계의 비참』(1993), 『맞불』(1998)등의 저서들이 있다.
  10. 물론 프랑스에도 모리스 알박스(Maurice Halwachs)나 레이몽 아롱(Raymond Aron)과 같은 뛰어난 사회학자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이름을 사회학 교과서에서 찾아보기는 매우 어렵다. 그만큼 2차대전 종전 이후 미국사회학이 강력했다는 뜻이다.
  11. 특히 파슨스와 머튼의 사회이론을 구조기능주의(structural functionalism)라고 부르는데, 이 사조는 거시적인 구조와 체계를 강조하며 그 안에서 행위자(agent)들의 역할이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후 68운동을 거치며 보수적인 가치를 지지한다는 혐의를 받으며 몰락할 때까지 현대사회학계를 지배했다.
  12. 경제적 의미만의 자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부르디외는 기본적으로 경제적 자본, 문화적 자본, 사회적 자본, 상징적 자본을 토대로 장을 설명했다.
  13. 경제적 자본이란 간단히 말해 돈, 문화적 자본은 여러 종류의 지식, 사회적 자본은 사람들간의 관계, 상징적 자본은 명예, 위세 등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