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퀴리


오른쪽의 인물은 피에르 퀴리의 부인인 마리 퀴리.
1859년 5월 15일 ~ 1906년 4월 19일

< 1903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
1902 - 헨드릭 A.로렌츠,
피에터 제만
앙투안 앙리 베크렐,
피에르 퀴리,
마리 스쿼도프스카 퀴리
1904 - J.W.S 레일리

1 개요

그 유명한 퀴리 부인의 남편. 그러나 그냥 단순히 유명인의 남편이 아닌 그 스스로도 훌륭한 과학자였다. 한국에서는 어처구니없게 퀴리 부인의 남편으로만 알려진 듯 하지만...

"라듐은 범죄자들 손에 들어가면 위험한 물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바로 이 자리에서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자연의 비밀을 캐는 것이 인류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그 비밀을 안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 만큼 인류는 성숙한가?"

1903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식에서 그가 한 연설이다. 과학자가 인류에게 던지는 자성의 질문이 담긴 명연설로 회자되고 있다.

2 일생

파리에서 태어난 피에르 퀴리는 16세에 소르본대학교에 입학,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하였다.

19살 때 연인을 잃은 충격으로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고 결심했지만 35세의 늦은 나이에 마리 퀴리와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폴란드 출신 이민자였고 여성이었던 그녀를 프랑스 과학계의 기득권들이 인정하지 않았을 때 그녀의 곁을 지켰다.[1]

1895년 결혼한 이들은 서로 깊이 사랑한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냈다. 마리 퀴리가 남긴 '내 사람 피에르 퀴리'에 따르면 피에르 퀴리는 자상한 남편인 동시에 자연과 과학의 꿈을 사랑하며 연구에 정진했던 성실하고 독창적인 과학자였다고 한다.

노벨상 수상 후 소르본대학 교수에 위촉되었으나, 1906년 4월 19일 아침에 대학으로 출근하던 중 마차사고로 급사하였다. 술이 덜 깬 마부가 마차 바퀴로 그를 깔고 지나가서 현장에서 즉사한 것. 이후 마부는 '비가 와서 앞이 안보였다.' '어느 미친 놈이 자살하려고 뛰어들었다.' 라고 횡설수설했는데, 사고현장에 있던 어느 사람이 신문에서 본 노벨상 수상자를 닮았다고 증언하면서 경찰이 와서 소지품을 보고 피에르 퀴리임을 확인하자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 마부를 두들겨팼다고 한다. 이 마부는 프랑스의 위대한 과학자를 죽인 살인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남편을 잃은 후 마리 퀴리가 쓴 일기장에는 "당신 없는 삶은 잔인하고,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번민이자, 바닥없는 고뇌이며, 끝없는 비탄입니다." 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3 업적

소르본느대학교에서 수학,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파리 소르본대학교 교수와 과학 아카데미 회원을 역임하였다. 상술한 1903년 노벨물리학상 외에 1901년 루카스상, 1895년 프란테상을 수상하였다.

결정물리학계에서는 광물학을 전공한 형과 함께 결정 연구를 하여 1880년 피에조 전기 현상을 발견하였고, 이 연구를 위하여 새로운 전기계인 '퀴리전기계'를 고안하였다.

이후 물질의 자기적 성질의 연구를 하여, 상온에서 1400도까지의 온도 영역에 걸친 물질의 자기화를 조사하여 자화가 온도에 역비례한다는 '퀴리의 법칙'을 발견하고 퀴리온도를 확립하는 등 자성물리학 분야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마리 퀴리와 결혼 후, 방사능 연구에 흥미를 느껴 아내와 공동으로 우라늄화합물의 방사선이 원자적 성질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새로운 물질탐구에 노력하여 라듐폴로늄을 발견하여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정리하자면 피에르 퀴리도 결정학과 전자기학, 방사선 연구의 선구자로 아내의 후광에 빛이 바랬을 뿐이지 역사에 남을만한 과학자였다.
  1. 노벨물리학상도 애초에는 피에르 퀴리에게만 줄 계획이었는데, 이를 안 피에르 퀴리가 끈질기게 청원을 내서 부부 공동 수상으로 변경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