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Hamilcar Barca[1]
카르트 하다쉬트의 장군(BC 270?~BC 228).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활약한 유명한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 바르카의 아버지.
2 설명
제1차 포에니 전쟁 이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일부 자료에서 그의 가문이 카르타고 본국이 아니라 키레나이카의 키레네 출신이라는 언급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히스파니아에 신 카르타고를 건설한 장본인.
장남 한니발 외에 차남으로 하스드루발 바르카, 삼남으로 마고 바르카가 있다.[2] 아들들 외에 딸도 세 명 두었는데, 장녀는 카르타고 원로원 귀족인 보밀카르[3]와 혼인하여 아들 한노를 두었다.[4] 차녀는 하밀카르의 부관으로 활약한 하스드루발[5]과 혼인했으며, 삼녀는 누미디아의 왕족인 나라바스와 혼인하였다. 참고로 세 명의 딸들은 모두 한니발보다 나이가 많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한니발을 제외한 카르타고 장군들의 한심하기 그지없는 전적이 유명한데 제1차 포에니 전쟁 때도 카르타고 장군들의 실력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시칠리아에서 벌어진 육전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 와중에 로마군과 어느 정도 겨뤄볼 능력이 있었던 거의 유일한 장군이 하밀카르였다. 하밀카르는 제1차 포에니 전쟁 후반기에 33세의 나이로 시칠리아 전선의 육군 지휘관으로 임명되자 불리한 전황 속에서도 뛰어난 전술적 역량을 발휘해 로마군의 진격을 늦추었지만 카르타고 해군이 아이가테스 제도 일대에서 참패하자 강화 후 시칠리아에서 철수했다. 한편 카르타고는 전쟁 동안 용병을 많이 고용했는데, 전쟁의 패배로 그 용병들에게 줄 봉급이 부족해져 용병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군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반란을 평정하였다. 이때 누미디아 출신인 나라바스의 공이 컸는데, 나라바스는 초기에 반란에 가담했으나 곧 휘하 부대와 함께 하밀카르에게 투항하였고 그의 도움에 힘입어 하밀카르는 신속하게 반란군을 격파할 수 있었다. 덕분에 용병 반란 진압 후 나라바스는 공로를 인정받아 우티카의 영주로 임명된다.
그 뒤 하밀카르는 국력 회복을 위해 광산이 풍부한 이베리아 반도에 진출하여 아프리카와 인접한 해안가를 정복했다. 이때 이 곳의 개발을 위해 식민 도시를 몇 개 세웠는데, 그 중 하나가 가문의 이름을 딴 바르셀로나다.[6] 이 과정에서 그곳의 원주민 세력을 성공적으로 자기 밑에 포섭시키고 이베리아 반도 일대를 카르타고의 속주화하는 동시에 자기 일족의 세력 기반으로 삼았다. 하밀카르 자신은 이베리아 정복 전쟁 도중 전사했으나 그의 사위인 하스드루발이 그의 직위를 물려받고 에브로 강 이남지역에서 카르타고의 지배권을 굳건히 하였다. 나중에 그의 아들 한니발이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던 기반도 다 여기에 있었다.
히스토리 채널에서 방영했던 한니발 편에서는 스페인 부족과 전투중에 쫓기다가 장남인 한니발을 포함한 어린 아들들이 위험에 처하자 아들들을 보호하려고 적들을 유인하고는 말에 탄 상태로 물에 뛰어 들었다가 물에 떠내려가서 사망하는걸로 나왔다. 하밀카르의 사망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다른 일화들이 전해지는데 그 중 하나를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8살 된 장남 한니발을 바알 신의 앞에서 평생을 로마를 쓰러뜨리는 데 바치도록 맹세시켰다는 설이 있지만, 신빙성은 낮다.- ↑ 바르카는 페니키아 어로 번개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 ↑ 이름이 전해지지 않은 넷째 아들이 있었다는 기록도 종종 보이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 ↑ 이후 카르타고 집정관까지 역임하는 고관이다.
- ↑ 이 한노가 칸나이 전투에서 누미디아 기병대의 지휘를 맡은 바로 그 사람이다. 말하자면 한니발의 조카인 셈.
- ↑ 하밀카르 사후 그의 뒤를 잇게 되는 한니발의 매형이다.
- ↑ 바르셀로나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논란이 있는데 바르카 가문의 이름을 따왔다는 견해도 있지만 이베리아 원주민어인 '바르케노'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후자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바르셀로나가 에브로 강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스페인의 카르타고 세력이 전성기에도 에브로 강 이북으로는 진출하지 못했다는 점을 들어 전자의 주장을 부정하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