還穀制度
1 개요
춘궁기때 국가에서 곡식을 줬다가 수확기에 갚게 하는 사회보장제도. 환정이라고도 한다.
2 역사
농사 기술이 제대로 개발되지 않던 과거에는 봄부터 곡식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는데(보리고개라는 말이 나온 것도 이런 이유) 이것 때문에 아사하는 경우도 많아 국가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한국에서는 고구려의 재상 을파소가 진대법을 시행한 것이 최초의 환곡제도로 기록되고 있다.다만 정확히는 을파소가 직접 진대법을 시행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그가 집권한 시기에 실행되었고 집권하기 전 농사일을 하면서 농민들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자였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 동기와 능력이 되는 자여서 그럴 것이라 추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훗날 고려에서는 의창에서 춘대추납의 형식으로 실시했고, 조선에서는 최초에 의창에서 이자가 없이 운영했으나 운영될리가 없어 중간에 폐지되었고 고려 때의 물가조절기구였던 상평창이 환곡기구로 이용되었다. 춘대추납에 이자률은 10분의 1이었다.
조선은 중앙집권이 잘 이루어졌고 농민생활의 안정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환곡제도를 적극적으로 운영하였다. 기근이 아닌 평상시에도 종자와 식량을 공급하였고 비축량은 천만석에 이르렀던것. 하지만 조선시대때 환곡은 군량이며 당시 환곡제도의 목적은 군량의 비축이었는데, 그 이유는 당시까지 농약도 방부제도 없어서 쌀이 쉽게 썩어버리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 쓸 수 있는 싱싱한 군량이 필요했기 때문.[1][2]
조선후기 환곡은 부세제도로 변질된다. 가뭄이 들어 곡식을 진대하면 반드시 손실분이 생긴다. 이를 해결하기위해 조선초부터 사창제 실시를 했으나 부작용이 있어서 폐지된다. 결국 명종때 일분모회록을 실시해 10퍼센트의 이자를 받게했고 인조때는 청나라 사신접대에 위해 30퍼센트의 이자를 수취하는 삼분모회록을 실시한다. 이렇게 원곡 손실분을 보전키 위해 부세제도화가 시작된다.
대동법실시 이후 유치미보다 상납미의 비율이 높아지고 균역법실시로 지방재정이 악화되자 환곡을 부세제도로 적극 활용하게된다. 주객전도 그것이 극대화된것이 19세기이다. 쌀에 모래를 섞거나 하는 식으로 실제 주는 쌀은 적으면서 이자를 받게 하는 방법을 쓰게 한 것이 대표적인 예. 이를 군정, 전정과 묶어 '삼정의 문란'이라고 하며 조선 말 민중봉기 등 사회혼란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 세도정치기 시기 진주민란이후 삼정의 문란을 개선하기위해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파환귀결 즉 환곡의 조세기능을 결당 2냥 씩 내는걸로 개혁했지만 이내 취소, 흥선대원군이 사창제[3]를 실시하여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이 역시 안되다 갑오개혁 때 와서야 시정된다.
국사에서는 꽤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으로 평가원이나 수능에도 빈번하게 나오는 주제 중 하나이다.
중국에도 송나라때 사창이라는 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국가에서 생필품을 통제하는 제도의 일종이기 때문에 중앙집권화가 된 국가가 아니면 보기 힘든 제도.- ↑ 박지원의 소설 「양반전」에서 관찰사가 주인공이 환곡을 타먹고 못 갚는 상황에 깊게 빡치면서 "어떤 놈의 양반이 이처럼 군량을 축냈단 말이냐"며 주인공을 잡아 가둔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 ↑ 참고로 조선정부는 미친듯이 곡물저장에 열을 올렸다. 이는 전근대 시절에는 기술의 결여로 인해 흉년 등 자연재해에 취약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환곡비축량은 만기요람 등을 통해 알 수 있는 데, 18세기 후반에는 무려 1천만 석에 달하는 양을 비축하고 있다. 이걸 쌀로 환산하면 6백만 석에 달하는 데, 조선정부의 평균세입이 4백만 석이니 국가재정보다 큰 사회보험기금을 운용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환곡제도를 운용한 동시대 중국은 쌀로 환산시 2천 3백만 석이다. 인구대비로 보면 2억 명을 넘긴 중국보다 1천 5백만의 인구를 지닌 조선이 1인당 곡물비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세도정치가 활성화되기 이전 조선은 중국보다 사회안전망이 튼튼했다고 볼 수 있다. 애초에 사회안전망이란 개념이 없었던 일본은 제외하자. 일본의 경우는 환곡이니 하는 제도가 없었고 막대한 양의 생산곡물이 시장으로 흡수되었다. 그로인해 국가경제는 대단히 활성화되었으나 정작 생산자인 농민들은 가난했고 영주와 미곡상 등 관련산업종사자와 도시민들에게 혜택이 돌아갔다. 국가재난에 있어서도 조선이나 중국이 중앙정부의 지휘하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면 일본은 지역영주나 제후들이 그나마 해결에 나서거나 외면해버리기 일쑤였다. 즉, 에도막부 등이 나서서 기근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건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일본경제력과 인구가 조선에 비해서 우월했던 것은 전국적인 육해상 유통망의 완성, 전문유통업자의 등장, 유통망의 정비와 확충, 2모작과 2기작에 따른 농민당 생산량과 그에 따른 인구부양력, 농민의 상품작물을 소비하는 거대도시시장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물론 조선도 유통망이 존재했고 소비시장이 있었으나 남도로 한정되는 제한적 2기작과 2모작과 대부분의 지역은 1기작 1모작이었다는 점, 부보상이라는 유통망은 인력에 의존하여 상품수송량이 적고 유동적이었다는 점, 전문적인 소비시장이 한정적이었던 점에서 차이가 난다.
- ↑ 지방의 명망있는 관리가 환곡을 운영하는 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