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야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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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야오방(胡耀邦·호요방 1915∼1989)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가. 중국 공산당 최후의 당 주석[1] 을 지낸 인물.

1915년 11월 20일 후난성 시골 마을 창팡촌에서 태어났다. 15세인 1930년 공청단에 가입했으며 마오쩌둥 전 국가주석이 이끄는 홍군에 가담해 초급 장교로 복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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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공산당 조직부장을 맡으며 중앙에 진출한 그는 덩샤오핑에 의해 후계자로 선정돼 1980년 공산당 총서기에 임명됐다. 후 전 총서기는 정치·사회 개혁을 적극 추진했고 문화혁명 시기 억울하게 박해를 받은 인사들을 복권했다.
그리고 인사능력도 뛰어났다 공청단 출신중 후진타오 원자바오 그리고 상하이방의 주룽지를 발탁하여 그들이 지도자로 상장시키는데 도움을 주었고 성품 또 한 온후하였고 검소하고 개방적이였다 경제정책에도 덩샤오핑에 지지할 정도였다
하지만 후 전 총서기가 보수파로부터 1986년 말 학생 시위를 적극 진압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은 뒤 1987년 덩샤오핑에 의해 실각하면서 개혁 작업도 좌초된다. 당국은 "후 전 총서기가 자산계급 자유화를 용인하는 '치명적 실수'를 했다"고 평가했다. 후는 1987년 1월 16일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총서기 해임이 결정되었다. 다만, 이후 열린 제1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으로 무사히 선출되어, 정치국 위원직은 유지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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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4월 정치국 회의에서 발언을 마치고 얼마 되지 않아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결국 1989년 4월 15일 세상을 떠났다. 당시 후 전 총서기를 추모하고 재평가를 요구하는 분위기가 유례없는 전국적 민주화 시위로 번졌고, 이것이 바로 천안문 사태의 시작이었다.
  1. 이후 1982년 12차 당대회에서 당 주석직이 폐지되었으며, 현재 중국의 권력 서열 1위는 당 주석이 아닌 당 총서기(중앙위원회 총서기)의 직위에 오른다
  2. 이때 후의 전임 당주석이었던 화궈펑도 선출되었으며, 좌파왕(王)으로 불리던 덩리췬(등력군) 1차 투표에서 최저 득표라는 굴욕을 받고 스스로 사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