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중국의 최고지도자 | |||||||||
1대 | 2대 | 3대 | 4대 | 5대 | 6대 | ||||
마오쩌둥 | 화궈펑 | 덩샤오핑 | 장쩌민 | 후진타오 | 시진핑 |
1978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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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와르 사다트[1] 1977 | → | 덩샤오핑 1978 | → |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1979 |
1985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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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위버로스[2] 1984 | → | 덩샤오핑 1985 | → | 코라손 아키노[3] 1986 |
"저우언라이의 뒤를 이은 덩샤오핑; 중국, 적이냐? 친구냐?"란 제목의 당시 타임지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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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미시 지미 카터 대통령 내외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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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일시 일본의 히로히토 덴노, 나가코 황후 내외와 함께. 키가 모두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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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북시 김일성과 함께.등소평의 표정이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다 주먹을 꽉 쥐고 있는 듯
목차
1 개요
이름 | 등소평 (邓小平·鄧小平) |
생몰년 | 1904년 8월 22일 - 1997년 2월 19일 |
출생지 | 청나라 쓰촨 성 광안 시 |
사망지 |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
정당 | 중국공산당 |
종교 | 없음(무신론) |
배우자 | 줘린 |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내 2인자 by 4인방[4]
중국의 정치가. 1978년~1992년 중국의 지도자였다. 중국 공산당 2세대[5] 중 가장 주요한 인물. 일명 부도옹(不倒翁, 오뚝이)[6] 혹은 작은 거인.[7][8] 그리고 현대 중국언론에선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로 칭한다. 오랜 정치 경력을 거치며 권력을 다졌으며, 197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장쩌민-리펑-주룽지의 2세대 지도부, 후진타오-원자바오의 3세대 지도부 승계를 계획하고 결국 죽은 후에도 이를 차례차례 실현시켰다. 즉, 죽은 덩샤오핑이 2012년까지 30여 년간 중국을 다스렸다고도 할 수 있는데, 이렇게 치면 30년의 마오쩌둥보다도 영향력이 긴 게 된다. 사상은 다르지만 아시아의 박정희,리콴유,마하티르 같은 개발독재자형 지도자이다.
2 초기이력
1921년 프랑스에서 삼촌 덩샤오성(鄧紹聖)[9]과 덩샤오핑.
덩샤오핑은 쓰촨 성에서 유복한 집안(집에 방이 12칸이나 있었다고 한다. 그것도 1900년대 초에 벽돌집으로)의 장남으로 출생해 1918년 근공검학(勤工儉學)[10][11] 운동에 따라 프랑스에 건너가 공장노동자로 일하면서 학업을 하였다. 이 때 돈이 없어 많은 끼니를 크루아상 하나로 때웠다고 한다.
그런데 1차 대전의 여파로 노동력 부족은 둘째치고 프랑스의 일자리 자체가 적어지면서 프랑스측의 대우가 나빠졌다. 처음에는 공부를 하러 프랑스로 간 덩샤오핑은 이 시기에 공부에서 운동으로 관심을 돌려 1923년 말쯤에 '중국공산청년동맹'[12]에 가입하고 조직 기관지 "적광(赤光)"에서 저우언라이와 함께 일하며 공산주의 운동을 시작한다. 1924년에 저우언라이를 포함하여 청년동맹의 지도자급들이 모스크바로 떠난 뒤 덩샤오핑이 지도자급 위치에 오르게 된다. 그후 1924~1925년 사이에 적광에서 세 편의 글을 썼는데 어조는 강렬해도 저우언라이의 글에 비하면 이론적인 뒷받침이나 문장의 퀄리티는 그냥 그랬다고 한다. 이는 덩샤오핑이 중국에서 공부하던 시절과 프랑스 예비 유학생으로서 준비하던 시절에도 항상 성적이 중간에서 멤돌았던 인물인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13]
그 뒤 모종의 사건으로 프랑스 경찰이 귀찮게 하기도 하고 어차피 결국 중국으로 돌아가기는 해야했던지라 경유지 비슷하게 하여 동지들과 같이 1926년 초 모스크바로 향한다. 물론 이는 모스크바가 공산주의자에게 갖는 상징성과도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그 후 모스크바에 간 덩샤오핑은 1926년 초에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14]에 입학했고 이때 공산당에 가입한다. 그리고 마침 1920년대 초부터 중국인들이 러시아로 유학을 많이들 왔는지 1925년에 설립된 중산대학(中山大學)[15]으로 1926년 중순 쯤에 거처를 옮겼다.
덩샤오핑은 여기서 자기 이론의 배경인 마르크스-레닌 주의를 배웠는데 이것도 깊게 배우질 않고 프랑스 시절처럼 어중간하게 공부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깊게 파고들지 않아서 극좌파 노선이 아니라 실용적인 성향을 가지게된 것으로 보인다. (아예 덩샤오핑이라는 인물 자체가 이론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커갔던 인물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1926년 말, 당대 중국의 군벌 펑위샹 밑으로 들어간 덩샤오핑은 정치적 선동 부분의 일을 맡아서 공산주의에 대한 강의를 하며 지냈는데 당시엔 이미 국공합작이 파탄나고있을 때라 펑위샹도 공산당과 국민당 중 어느 한 쪽에 붙어야만 했다. 적당히 눈치를 보다가 세력이 훨씬 강한 장제스에게 붙은 펑위샹은 덩샤오핑을 군에서 내쫓았고[16] 1927년 7월, 덩샤오핑은 당시 중국 공산당의 본거지였던 우한(武漢)으로 가서 당의 중앙에서 일하게 된다.[17] 그리고 바로 여기서 마오쩌둥을 처음 만난다. 그후 몇 개월 뒤 당 중앙이 상하이로 옮기자 덩샤오핑도 같이 따라가고 1928년 초에 중산대학에서 같이 수학했던 동지 장시위안과 결혼했는데 안타깝게도 2년 뒤 장시위안이 사망하게 되어 그의 첫 번째 결혼 생활은 그렇게 끝났다.
3 국공내전과 항일전쟁
홍군의 정치장교로 근무했다. 1933년 당시 비주류였던 마오쩌둥을 지지하고,[18][19] 대장정에 참여하였다. 항일전 내내 공산당의 팔로군(八路軍)에서 정치장교를 맡았다.
팔로군 시절 129사단 수뇌부 좌로부터 리다(후에 상장), 덩샤오핑, 류보청(후에 원수), 차이수판
어째 김민교를 닮은것 같다.
"군신" 또는 "독안룡"이라고 불리던 팔로군 명장 류보청(유백승)과 함께 129사단을 이끌고 8로군 주류와 떨어져 옌안을 떠나 중원으로 이동하여 일본군 배후에서 항일전쟁을 치루었다. 류덩군이라고 불린 이 129사단은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덩샤오핑의 군사적 재능도 높이 평가되었다.
국공내전이 시작되자 8로군은 인민해방군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29사단은 확대개편되어 제2야전군이 되었다.[20] 국공내전 초기에 전체적으로 인민해방군은 밀리고 있었으나, 류덩군은 중원에서 국민당군을 견제하면서 산둥반도를 본거지로 하여 후방을 교란했다. 류덩군은 산둥반도를 장악했고, 1948년말부터 전쟁은 전체적으로 역전되어 인민해방군이 국민당군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1949년 장강(長江) 도하작전과 난징 점령을 지도하여 중화인민공화국(중국) 수립에 공을 세웠다.[21]
스스로 군경력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던듯, 최고 권좌에 오른 후, "어떤 전공을 공부하셨습니까?"는 서방기자의 질문에 "특별히 없습니다만, 굳이 하나 말하자면 군사라고 할 수 있지요"라고 대답했다고.
4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자 고향인 쓰촨 성의 충칭 시장에 임명되었다. 3년후 중앙으로 전임되어 1952년 정무원(政務院) 부총리, 1954년 당중앙위원회 비서장, 1955년 정치국 위원이 되었다. 국공내전 말에 그와 지위가 비슷하거나 그보다 훨씬 높았던 인물들이 많았음에도 꾸준히 승진하여 지도부까지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능력과 리더십에서 성과를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1957년에는 중국 공산당의 총서기[22]가 되어 나라의 일상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마오쩌둥에게 비판의 화살이 쏟아지자, 덩샤오핑은 좀 더 큰 권력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23] 류사오치와 그는 최종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마오쩌둥을 '명목상의 지도자'로 앉히려는 계획을 세우는 한편 경제 개혁을 실시했는데, 이로 인해 당 조직과 전체 인민들 사이에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1960년 중국과 소련이 결별하자, 소련과의 수정주의 논쟁에서 마오주의를 설파, 마오쩌둥의 신임을 톡톡히 받았다. 이 마오의 신임은 덩샤오핑이 실각하더라도 다시 복귀할 수 있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
5 문화대혁명과 시련
그러나 이로 인해 마오쩌둥은 자신이 권력에서 소외될까 염려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문화대혁명이 발생하고 만다.[24]
이후 홍위병이 일어나고 중국 전역에서 문화대혁명에 따른 혼돈이 발생했다.[25] 덩샤오핑도 반마오주자파(反毛走資派, 마오쩌둥에게 반기를 든 자본주의 추종자)의 수괴라는 비판을 받고 실각하여 당직에서 은퇴한다.[26] 문화대혁명 당시, 그의 큰 아들인 덩푸팡 역시 추락사고로 장애인이 되었다.[27]
6 1차 복권
1973년 3월 총리 저우언라이의 추천으로 복권되어 국무원 부총리가 되었다. 방광암으로 투병 중이던 저우언라이는 덩샤오핑을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을 겸직하기도 했는데, 정치인인 그가 군사위원으로 간게 조금은 이상하지만, 그는 국공내전당시 정치위원역을 한 적이 있는데다가, 당시 인민해방군은 계급이 없었으므로 그다지 이상한것도 아니다. 더구나 덩샤오핑은 훗날에 정권을 잡을때도 보이듯이 군부에 엄청난 입김을 가지고 있었다. 덩샤오핑의 재부상에 문혁 이후 중국의 권세를 누리고 있던 4인방(四人幇)은 긴장했다. 덩샤오핑만 없다면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 사후 권력은 오로지 그들의 것이 될 수 있었다. 정치국 회의 등에서 4인방은 덩샤오핑을 격하게 비판했다. 린뱌오 사후 국방부장 직을 계승한 혁명원로 예젠잉(葉劍英)이 덩샤오핑을 옹호했지만 마오쩌둥의 눈과 뒤를 가리고 있는 4인방을 막기에는 무리였다.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죽었다. 인기있던 총리의 죽음에 군중은 그와 대척점에 섰던 극좌 4인방의 처벌을 요구했고 4인방은 빈소 설치 금지, 검은 옷 착용 금지 등으로 대응했다. 이때 저우언라이의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낭독한 것이 덩샤오핑이었다. 저우언라이의 명실상부한 후계자로 대중에 인식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4인방은 덩샤오핑을 향한 견제를 더욱 강화했다. 4인방은 마오쩌둥의 동생 마오위안신을 움직여 마오쩌둥에게 덩샤오핑이 문혁에 대한 평가에 인색하다고 모함하도록 했다. 문혁은 마오쩌둥의 역린이었다. 마오쩌둥의 불신이 깊어지는 상황에서 천안문 사태가 격화되자 덩샤오핑은 그 책임을 지고 다시 모든 직위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당적 보유만은 허락됐다.
7 2차 복권 및 실권 장악
홍콩97이 예언한 것처럼…그리고 그 해 9월 마오쩌둥이 죽었다. 마오가 죽었슴다 당 중앙위 주석이던 화궈펑[28]이 문화대혁명에서 살아남은 10원수 출신의 예젠잉(葉劍英), 특무부대장인 왕둥싱(汪東興)과 결탁하여 4인방을 숙청하였으나 문화대혁명을 기반으로 급성장한[29] 화궈펑의 힘만으로는 정국수습이 어려웠으므로[30], 예젠잉의 종용으로 1977년 7월 덩샤오핑은 복직되었다. 그는 중국 공산당 내에 있는 그의 지지자들을 조심스럽게 선동하여 애초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화궈펑을 교묘하게 따돌릴 수 있었고, 결국 1978년 12월 자신을 사면해 준 화궈펑을 권력으로부터 축출하였다.[31][32]
8 집권시기
8.1 문화대혁명 청산
이 시기부터 그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재평가'와 '출신성분제도 혁파'를 단행했다. 그는 그 시기에 벌여졌던 극단적인 행위와 이로 인한 고통에 대해서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한편, 기존에 공산 혁명시기에 있었던 조상의 행위를 근거로 전 중국을 두 개의 계급으로 나누어 지주 계급 출신이 제도적으로 차별대우를 받게 한 것을 철폐했다.[33][34]
이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개인숭배에 빠지지 않았다. 전임 화궈펑만 하더라도 그 짧은 집권기 동안 자신을 찬양하는 포스터나 노래, 선전물을 무수히 제작하였으나, 덩샤오핑은 개인숭배를 멀리하고, 자신에 관련된 동상이나 포스터를 절대로 제작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그의 동상과 선전화는 그의 사후에야 나올 수 있었다.
덩샤오핑은 분명 문화대혁명의 피해자였으나, 스탈린 격하 운동을 한 흐루쇼프와는 상황이 달랐고 마오쩌둥 격하 운동을 벌일 수도 없었다. 즉 흐루쇼프는 자신의 전임자를 격하하더라도 레닌이라는 대체인물이 있었기 때문에 '스탈린 이쉐기가 레닌 유언 어겼어요'라고 맘껏 격하시켜도 큰 문제가 없었지만, 마오는 중국의 레닌이자 스탈린이었기 때문에(...) 마오를 부정하는 것은 곧 공산당의 정치적 존립 기반을 뒤흔드는 일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8.2 근대화 추진
또한 이 때부터 실용주의 노선에 입각하여 과감한 개혁조치들을 단행하였다. 중국 정계의 최고 실권자로서 1978년 '4대 근대화'(농업의 근대화, 공업의 근대화, 과학기술의 근대화, 국방의 근대화)로 대표되는 개혁과 개방정책을 발표, 추진하여 기업가와 농민의 이윤 보장, 지방분권적 경제운영, 엘리트 양성, 외국인투자 허용 등으로 중국 경제가 크게 성장하는 단초를 마련하였다.[35] 덩샤오핑이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다지던 무렵, 중국의 가장 큰 문제는 농업 부문의 전근대화 및 문화대혁명의 부작용으로 인한 국가적 기근이었는데, 그는 이의 해소를 첫 번째 목표로 삼았고 결국 수년 내에 식량의 자급자족을 이루어내는데 성공한다. 중국은 광활한 영토를 가지고 있지만, 사막과 산악지대 등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이 많고 10억이 넘는 과밀한 인구 때문에 실제 1인당 경지 면적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중국 공산당의 상징적 성과물인 중국농업인민공사(줄여서 인민공사라고 부른다)에 의한 중앙통제적 농업을 과감히 버리고, 가구별 의사결정에 따른 자율적 농업 및 잉여 농산물의 시장 판매를 허용하였다. 이는 그를 반대하는 강경파 공산주의자들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카리스마와 그가 계획적으로 양성한 정치적 친위부대의 지원을 통해 이를 극복하였다. 시범지역이었던 안후이 성의 농업 생산은 3년 만에 3배가 된 곳도 있었으며, 1981년에는 사상 최초[36]로 식량의 자급자족에 성공했다. 이를 통해 안후이 성을 시찰한 중국 지도부가 "드디어 인민이 진심으로 행복해하고 있다."고 확신을 가지고 전국적으로 정책을 확대할 정도였다.
8.3 개방정책
내부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자, 그는 눈을 바깥으로 돌린다. 덩샤오핑은 이제 농업보다 한 단계 높은 "기초적인 생산과 공업"을 육성코자 하였으나, 이를 내부적으로 추진할 생산 수단이나 자금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를 서방 여러 국가로부터 들여오기로 결정하고, 사전 단계로서 미국과 전격 수교하였으며[37], 미국과의 수교 직후에는 자신이 구상한 경제 개발 모델을 시험할 경제특구를 4군데 지정한다.[38] 그는 시골 어촌 마을이라는 표현조차 사치스러울 정도였던 선전을 경제특구로 개방했고, 선전의 성공을 확인한 후 경제특구를 총 20곳 지정하였다. 이곳들은 밀려드는 서방의 돈과 생산기술, 시설을 활용하여 급속하게 성장하였고, 중국 전체에 성공과 부를 전시하는 표본으로 기능했다.
8.4 대외정책
서방과의 관계도 확연히 증진되었다. 1979년 1월 미국과 공식 수교하였고 9월에는 중국 지도자로서는 최초로 미국을 방문하여 강한 인상을 남겼다.[39] 백악관에서 지미 카터 대통령과 만나기도 하였다.[40] 반면 덩샤오핑 및 동행했던 중국 지도부 역시 큰 문화충격과 경제 개발에 대한 강한 자극을 받았다.[41] 그리고 1984년 12월 19일 영국과 중국간에 체결한 중영공동선언을 이끌어내어, 이 조약에 따라서 홍콩이 1997년에 중국에 반환되었다.
반면 소련과의 관계는 이념 및 국제 정세의 문제로 인해 냉랭하였다. 1960년 중소 영토분쟁과 수정주의 논쟁으로 같은 공산주의 진영임에도 불구하고 대대로 소련과는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그 연원은 1920년대에 코민테른을 앞세운 소련의 과도한 간섭에 대한 마오쩌둥 등 비주류의 반발부터 시작된다. 미국과의 수교를 통해 소련을 견제하는 효과도 부수적으로 얻었다. 물론 이 역시 덩이 의도한 바이다.
8.5 톈안먼 사건(천안문 6.4 항쟁)
덩은 명목상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만을 가지고 있었고[42], 자신이 미는 이들을 요직에 앉혀 후일에 대비했다. 그래서 명목상의 국가원수인 국가주석에는 류덩군 시절부터 친구였던 원로 리셴녠을 앉히고, 행정부의 수장인 국무원 총리는 자오쯔양, 당 총서기는 후야오방[43]이 맡았다. 훗날 이웃나라의 독재자가 이를 모방하여 국방위원회 위원장 직함만을 가지고 실질적으로 정부를 통치한다. 하지만 이건 여기보다는 소련을 모방한 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자오나 후는 당시 후계자로 거론되어 있었다.
그러나 덩은 무조건적인 서방화를 추구하지는 않았다. 1989년 천안문 민주화 운동에서 드러났다. 학생운동에서 시작한 이때의 시위는 개혁파 후야오방의 명예 회복 요구로 시작하여 민주화 운동으로 발전하지만 이 사건에 대해 덩샤오핑은 유혈 진압을 단행한다.
덩샤오핑을 포함한 당시 중국 원로들이 이당시 학생운동이나 대중운동에 대해 특히 반감을 보인 것은, 공산당의 민주화에 대한 두려움도 있지만, 그 외에도 문화대혁명 이 홍위병이 주체가 된 학생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홍위병의 배후는 언론으로 이들을 선동한 마오쩌둥 및 4인방이지만, 그 주체는 각급학교의 학생들이었으며, 당시 덩샤오핑의 진압 성명문이나 자오쯔양의 회고록에서도 이런 운동이 일파만파로 전개되어 문화대혁명같은 혼란을 야기할 것임을 우려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그리하여 사태가 더 확대되어 대혼란을 부르기전에 진압하자는 강경론이 득세하게 된다. 덩샤오핑 및 다른 원로들은 문화대혁명 당시 시골로 끌려가서 삽질하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대중운동을 더욱더 불신하고 있었다. [44]
이때 당시 덩의 유력한 후계자로 거론되던 총리 자오쯔양은 덩의 지시로 군투입이 결정되자 천안문 광장에 나타나 군중들에게 "제가 너무 늦게 왔습니다. 군이 곧 투입될 것이니 빨리 집으로 가세요"(...)[45]라고 눈물로 호소했지만, 그곳에 모인 군중은 해산하지 않았고 탱크를 앞세운 진압에 의해 결국 수많은 인명피해가 났다.
자오의 이런 행동은 시위대에 동조하는 것으로 비춰졌다. 이 때문에 덩의 눈밖에 나서 후계구도에서 완전히 탈락했고 모든 직위를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가택연금 상태에 놓이게 된다. 결국 권좌에서 축출당한 후 사망시까지 약 20년 간을 가택연금 상태로 보냈는데, 그 와중에서도 자신의 주장이 옳았다고 믿었다.[46] 어쨌든 이렇게 축출된 후와 자오를 대신해 시위대에게 강경하다고 평가된 장쩌민을 당 총서기에 임명하는 등 권력 승계 작업은 계속 진행되었다.
또한 티베트인들의 반중국 시위를 유혈진압한 후진타오를[47] 중앙당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발탁하였다.[48] 국가주석직은 1988년 리셴녠이 사망하자 군부의 대표자 양상쿤을 앉혀 군부를 달랬다.
천안문 사태의 욕은 3세대 지도부의 핵심이던 국무원 총리 리펑(이붕)이 바가지로 먹은 감이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사람이 천안문 사태 당시 계엄령을 선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책 결정은 덩샤오핑이나 장쩌민, 양상쿤과 같은 원로들이 했지만 실제 수행은 이 사람이 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개혁개방 정책을 마음에 들지 않았던 보수파들이 리펑의 뒤에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오히려 천안문 군중들에게 대피하라고 눈물로 호소한 자오쯔양과도 비교당하며, 당연히 '인민에게 총부리를 든 자'와 같은 욕을 신나게 먹었지만 장쩌민의 비호로 총리직에는 남아있을 수 있었다. 마오쩌둥이 사실상 문화대혁명의 주범이지만, 정작 신나게 까인건 4인방인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다.
8.6 임기제 확립
모든 당직의 재임기간을 최대 10년으로 제한하고, 65세 이후에는 새로운 당직에 취임하지 못하도록 명문화하였다. 이는 1인 독재와 원로들의 간섭을 배제하고 원활한 세대 교체를 위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7~80대 원로들이 당을 좌지우지하거나 수십년씩 제왕적 권력을 휘두르는 행태는 사라졌으며 시대 변화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게 되었다.
덩샤오핑 사후 장쩌민과 후진타오 모두 10년씩 집권하면서 후계 세대를 조직적으로 양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일당독재이면서도 주기적인 세대 교체가 잡음 없이 이루어지는 특이한 모습이다. 물론 당직에서 물러났다고 해도 원로들의 영향력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현직이 아니면 힘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는 기타 공산당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지도부의 '노화현상'을 방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다만, 덩샤오핑을 포함한 8인의 원로방은 공식 직함 없이 사실상 중국을 통치했다. 예컨대 천안문 사태 당시 자오쯔양 총 서기의 해임은 원로방에서 결정됐고 이후 열린 당 중앙위원회 회의는 그저 형식적 추인을 하는데 그쳤다. 또한 덩샤오핑은 13기 5중전회에서 당 군사주석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개혁 개방의 총 설계사로서 인사권과 국가 정책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부여받았다. 당시 그는 일개 당원[49]에 불과했다.
8.7 말년
중국 개혁개방 100년의 약속
1989년의 천안문 사태와 그 후폭풍으로 경제개혁과 개방을 반대하는 세력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개방은 산산조각난 소련꼴 나고[50] 공산당은 무너질거라는 우려가 많았기에 좀 더 강력하게 통제하던 옛날 마오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반대세력이 엄청 크기에 순방 처음에는 장쩌민도 덩샤오핑 지지를 주저하기도 했다.
그러자 덩샤오핑은 1992년 소위 '남순강화'라고 일컫는 행보를 시작한다. 88세의 노구를 이끌고서 선전과 상하이 같은 경제특구를 돌면서 중국은 더욱 개방하고 경제발전을 해야 한다는 연설을 하였고, 이런 개방정책에 열렬히 환영하던 중국인들의 여론을 타고서 베이징의 개혁반대세력을 엄청나게 압박하기 시작한 것. 허나 1992년 1월 처음 덩샤오핑이 일반당원 신분으로 전용열차를 타고 남방시찰을 시작했을 때는 중앙당 간부들은 그를 모두 고의적으로 무시하였다. 일반당원의 사적인 나들이로 폄하한 것. 1992년 당시 덩샤오핑은 어쨌든 겉으로 보기엔 모든 공직에서 사임한 공산당 일반당원일 뿐이었고, 이걸 핑계로 중앙당의 보수파들은 덩의 남방시찰을 중앙언론에서 보도하지 못하도록 막았고, 장쩌민은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허나 개방된 연안지방의 여론을 무시하지 못한 장쩌민과 중앙지도부가 덩샤오핑쪽으로 돌아서면서 CCTV와 신화통신 등 중앙언론과 중앙당 선전부서들이 덩샤오핑의 메시지를 전국적으로 발표하였다. 그리고 3월 전용열차가 마지막 시찰지인 상하이역에 도착했을 때에는 장쩌민을 위시한 중앙당 정치국원 전원과 군사령관들이 도열해서 덩샤오핑을 영접했다.(...) 이 중국 공산당내의 마지막 개방 반대 vs 개방 찬성의 대결에서 이긴[51] 덩샤오핑과 개방세력은 결국 중국의 경제정책 방향에 마침표를 찍고 중국은 달리기 시작했다. 1993년에 NBA를 라이브로 중국공영방송에서 틀어주기 시작한거나 같은 해에 상하이증권거래소, 선전증권거래소가 세워진 것이 대표적인 예.
이후 중국은 급속도로 성장하였고 현재 미국에 이은 제2위의 경제 대국에 이르게 되었다. 덩샤오핑이 아니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업적이다. "마오쩌둥은 산이요, 저우언라이는 물, 덩샤오핑은 길이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니다.
9 죽음
이후 은퇴하여 별다른 활동없이 지내다가 1997년 2월 19일 베이징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93세. 말년의 가장 큰 소원이 바로 중국으로 반환된 홍콩 땅을 밟는 것[52]이었지만 고작 5개월 남짓 앞두고 사망했으며, 이에 따라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홍콩 앞바다에 비행기로 뿌려졌다. 또 다른 유언은 도광양회(韜光養晦)로, 섣불리 나서지 말고 인내하며 힘을 키우라는 뜻이었다. 충분한 국력을 기르기 전까지는 미국 등 강대국들과 충돌을 삼가라는 속내가 담긴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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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신문연파 보도
10 평가
마오쩌둥이 공산 중국을 만든 건국의 아버지인 반면 덩샤오핑은 현대 중국의 아버지이다. 중국 역사에 흔히 보이는 이른바 창업 군주와 수성 군주 중에 수성군주 역할을 해냈다[53]. 흑묘백묘론[54]이란 말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와 개방 무역을 중국에 도입한 인물로 현재 중국이 경제강국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은 사람으로 평가된다.
그의 평가는 공산주의의 폐쇄된 경제 체제에서 개방된 자본주의 체제로 돌려 새로운 성장으로 이끈 지도자라는 긍정적 평가와 천안문 사태로 대표되는 중국 내 민주주의 운동과 내부 불평등, 사회적 모순의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짓밟은 탄압자라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고 있다. 이에 대해 임기제 확립 항목에서 후술하듯 1인 독재를 견제하기 위해 종신이 아닌 임기제를 확립하고 자신은 권력을 내려놓고 은퇴했다는 점에서 독재자란 비판은 애매하다는 말도 있으나 현실은 덩샤오핑을 포함한 8인의 원로방이 공식 직함 없이 중국을 통치했고(...) 그들끼리도 서로 견제가 있었다 하더라도[55] 사실상 덩샤오핑이 공식적인 직함보다도 더 큰 권한을 가지고 통치를 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1인이 아닌 1당 독재를 더욱 공고하게 한 주범이라고 보면 모범적 지도자라고 보기도 힘들다. 훗날의 관점에서 보면 덩샤오핑의 집단지도체제 자체가 공산당이 특정인물에게 장악당하지는 않을 정도에서나 작동할까 말까 한 불안정한 체제였고 결과적으로 시진핑이 본격적으로 1인독제체제로 나아가기 시작하면서 독재를 막는다는 집단지도체제 자체가 유명무실해졌다.
다른 시각으론 마오쩌둥 시절을 그리워하는(?) 일부 지지자들에겐 중국 내 양극화의 시초를 낳은 주범이라는 비판도 받는 모양이다.
한국에서는 좌우를 떠나 경제적 성장과 부국강병을 우선하는 쪽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언론의 자유, 사회적 자유와 민주정 지지를 우선하는 쪽에서는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보수적이라는 경제 관련 언론에서 덩샤오핑을 치켜세우다가, 정치 쪽 사설이나 서적에서 덩샤오핑을 독재자 운운하며 오락가락 비난하는 건 이런 맥락.[56] 현재에도 중국의 경제를 발전시킬 기반을 마련한 사람으로서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위대한 지도자이다. 해외에서는 톈안먼 유혈 진압의 과오 등 민주주의 거부의 과가 있지만 경제개혁으로 중국을 경제대국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의식주도 보장받지 못하는 극빈층 중국인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켜 중국인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킨 공이 크기에 전체적으로 보면 독재자임에도 서방에서도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 주류 의견이다. 현실주의자인 헨리 키신저는 덩샤오핑을 만나 그의 결단력과 통찰력을 보았다면서 덩샤오핑을 20세기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명이라고 극찬했고 역사의 종언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승리를 주장한 프랜시스 후쿠야마도 덩샤오핑을 훌륭한 지도자라고 평가하며 민주주의 체제의 지도자는 아니지만 민주주의 정치인이 할 수 없는 경제 대변혁을 이룬 위대한 황제(!) 라고 말했다.(말 그대로 그를 민주주의 체제의 지도자가 아닌 황제, the Great 대제라고 부른 것이다) 그러나 과거 중국 왕조 시대에도 강희제 등 위대한 철인 황제가 있었음을 언급하며 민주주의 체제의 권력 견제가 없는 체제라도 황제가 좋은 사람일 때는 나라도 잘 되지만 그러나 늘 이런 좋은 지도자가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면서 마오쩌둥이라는 카리스마 있는 황제가 절대 권력을 장악해 폭군이 된 것을 거론했다.
공산주의를 멀리하고 사실상 자본주의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공산주의 국가로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산주의를 무너뜨린 반동분자란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사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무너뜨리자고 주장한 적이 없으며 자본주의는 공산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첫과정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 사회주의 -> 공산주의 순으로 거쳐야하는데 그동안 소련과 중국은 그걸 무시하고 억지로 공산주의만 넣었을 뿐, 진정한 공산주의는 시작도 안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덩샤오핑의 자본주의화는 공산주의를 버리는게 아니라 공산주의를 위한 길을 이제서야 걷는 것이다.[57] 그러나 중국의 자본주의 체제는 엄밀히 말하면 국가, 더 정확하게는 공산당의 주도로 행해지는 체제였고 지나친 정부의 시장간섭은 중국 내 시장체제의 왜곡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아쉬운 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물론 당시 상황에서 그것만 한 것도 대단한 거긴 하지만.
복권 이후 백화제방 백가쟁명[58]을 외치며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인방을 숙청하고 화궈펑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린 후에는 그 탈을 벗어던졌다.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경제발전을 우선하면서 서방을 자극하지 않는 지극히 현실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 덕에 냉전 이후 중국은 천안문 사태로 이미지가 실추된 후에도 안정적으로 국제사회에 정착할 수 있었다. 개방 이후 중국이 오히려 점점 중국제일주의로 주변국들과의 마찰로 반쯤 고립을 자초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11 어록
생전에 자신의 실사구시 사상을 응축해서 남긴 표현들이 유명하다.
「모두가 가난한 것이 사회주의는 아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59]
「자본주의에도 계획이 있으며, 사회주의에도 시장이 있다.」
「일부가 먼저 부자가 되는 것을 인정해 가난한 사람이 따라 배우게 해야 한다.」- 선부론(先富論)
「20만 명의 목숨을 희생하더라도 20년간의 평화를 손에 넣자.」
12 트리비아
마오쩌둥은 개인적으로는 덩샤오핑을 굉장히 좋아했다고 한다. 덩샤오핑이 자신을 반대하다가 실각했어도 항상 그를 염려했다고. 그렇기 때문에 두번이나 실각하여 공장노동자로 일하게 되지만, 몇 년후 다시 마오쩌둥의 부름을 계속 받게 된다. 작아서 귀여웠나 대부분은 저런 실각 후에는 강제노동소에서 죽을 때까지 일하다 병사하거나 혹은 마오쩌둥이 사망할 때까지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탁구외교로 대표되는 미국의 친중 정책에 따라 닉슨 대통령이 방중한 이후, 이에 보답하여 1979년에 방미를 했는데 우주비행사 훈련소에 방문을 했다고 한다. 무중력 상태를 훈련하는 기기를 탔을 때는 '어린 아이처럼'(...) 기뻐하며 떠나길 주저했다고.결국 그 기분으로 시작한 프로젝트가 우주정거장을 세울거라고는 예상 못했을듯[60]
신해혁명 100주년을 앞둔 2010년 대만 총통부 직속의 역사편찬 기관 국사관(國史館. 한국의 국사편찬위원회에 해당)이 인터넷으로 '중화민국 100대 인물'의 선정 투표를 실시했는데, 덩샤오핑이 중간집계 1위를 차지했다. 당황한 대만 정부는 덩샤오핑, 마오쩌둥 등을 후보에서 제외했고, 결국 조사 자체를 취소했다. 대륙인들이 투표했나? 하긴 이 둘도 처음에는 중화민국 사람이였다.
크루아상과 콘트락트 브리지 게임을 몹시 좋아했다고 한다. 1970년대 부총리로 복권된 이후 해외에 파견되었는데, 귀국시 외국공항에서 크로와상을 사와 중국에서 부하들과 나눠먹었다고 한다. 또한 마작과 포커를 매우 좋아해서 충칭 시장으로 재임시에 집무실에 사람을 불러 자주 했는데, 이것이 문혁때 비판되어 실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역시 잡기는 안 좋다. 주더나 펑더화이는 장기를 좋아했고 일 중독자였던 저우언라이는 늘 업무에 바빠 놀 여유가 없었으며, 마오는 1인자의 위엄 때문인지 적어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는 잡기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엄청난 골초였고, 외국 정상들을 접견할 때조차 재떨이와 타구(침뱉는 그릇)를 옆에 두고 항상 줄담패를 피웠다.[61] 요즘 같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본인도 이게 좀 그렇다는 것을 알았는지 정상회담 시 사진 찍을 때는 치웠다가 끝난 후 다시 내왔다.(...) 참고로, 이렇게 골초였음에도 불구하고 93세까지 장수하였다.
루마니아의 독재자이자 천하의 개쌍놈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처형 비디오를 입수한 후 중국 공산당 간부들과 같이 봤었다. 처형 비디오를 보고 나서 덩샤오핑이 한참만에 "어쩌다 저 꼴이 되었는가?"라고 간부들에게 물었고, 이에 한 공산당 간부가 "반동분자들을 때려잡지 않아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으나, 덩샤오핑은 오히려 "틀렸다. 우리도 개혁하지 않고 인민들에게 베풀지 않으면 저렇게 된다."고 대답하면서 그 간부를 데꿀멍시켰다.[62] 덩샤오핑이 불과 수개월 전 천안문 사태의 유혈 진압을 주도한 장본인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의외로 여겨질 수 있지만, 이후의 남순강화를 통해 개혁개방에 가속도를 붙인 점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요컨대 "천안문 사태 진압에 대한 국내외의 비판을 불식시키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길은 대외개방 확대와 이를 통한 경제성장 성과의 극대화 뿐"이라는, 나름대로 절박한 인식의 반영이었던 셈이다.
결국, 덩샤오핑은 자신이 직접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하면서 본격적으로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중국은 최고의 자본주의 시장으로 경제성장을 하게 되었다. 그래도, 차우세스쿠와 김정일보다 덩샤오핑이 인민들에게 많이 베풀은 것은 사실이니까 거짓말은 하지 않은 셈이다.
더불어 축구를 무척 좋아하여, 등소평 집권 시기에 처음으로 CCTV에 유럽 축구가 방송이 되기 시작했고,[63] 1994년 갑을리그라고 부르던 프로축구리그를 창설하는데 기여했으며[64] 살아 생전에 국가대표팀이 월드컵에 나가는 걸 보고 싶어했으나 중국의 월드컵 본선 진출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 이르러서야 가능했고, 덩샤오핑 본인도 중국이 월드컵 본선은 출전한 것은 보지도 못한 채 1997년에 사망했다.
1994년에는 중국시간으로 새벽에 열리던 월드컵 전경기를 위성으로 시청할 정도로 축구광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관중들에게 방해가 될까봐 축구장에 간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1991년 아무런 직위 없이 있을 때 김일성과 비밀리에 만나 개혁개방에 대해 조언했다고 한다. 이에 자극을 받은 김일성은 1994년까지 나진 개방, 비핵화 딜,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했다. 근데 이 경우는 제대로 된게 없지? 김정일에게도 이 조언을 해줬는데 김정일은 그를 수정주의자라고하며 거절하였다.
홍콩97이라는 말같지도 않은 게임에 5분도 안 되어서 끝판왕으로 등장한다.[65] 참고로 이 게임은 우연의 일치로 덩샤오핑이 사망한 년도를 맞추었다... 흠좀무. 자세한건 항목참조.
좀 마이너한데, 1983년 실행했던 중국판 범죄와의 전쟁, 일명 "엄타(嚴打)"운동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징역을 받거나 사형당하였다. 취지는 치안 강화였으나, 법과 처벌은 고대 진나라 이상으로 엄격하고, 사법적 절차는 상당히 줄여버렸기 때문.
살아생전에 세가지 소원이 있었는데, 하나는 대만과의 통일, 두번째는 홍콩의 반환을 보는 것, 세번째는 자국이 FIFA 월드컵 본선에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가지 다 이뤄지기 전에 사망했다. 그나마 두번째는 덩샤오핑 사후(死後) 5개월 뒤에 자국에 반환이 되었고, 세번째 역시 2002년에야 본선에 진출하긴 하였지만, 첫번째는 아직도 이뤄지지 못하였다.- ↑ 이집트의 대통령. 부통령으로 재직하다가 1971년 혁명동지였던 낫세르 대통령이 사망하자 뒤를 이어서 대통령이 되었다. 소련과 군사적으로 협력하면서 반미,반이스라엘 노선을 유지하였다. 제4차 중동전쟁의 주역으로 한때 이스라엘을 붕괴위기에 몰아넣기도 하였다. 그러나 1977년에 친미유화노선으로 전향하고 지미 카터의 중재하에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결국 이 반발로 1981년 암살 당한다. 그리고 부통령이던 무바라크가 대통령이 되었다.
- ↑ 1984 LA 올림픽 주최자이며 100여년이 넘는 올림픽 역사상 처음으로 흑자 올림픽을 기록해낸 인물.
- ↑ 필리핀 대통령. 필리핀의 피플파워 운동을 주도한 민주화운동가로 86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 ↑ 문혁 시기의 일이다. 물론 당내 1인자는 류사오치라고 했다.
- ↑ 중국 공산당 최고지도부의 시대 구분. 마오쩌둥 시대가 1세대, 덩샤오핑 시대가 2세대, 장쩌민이 3세대, 후진타오가 4세대이며 2012년 당 대회에서 시진핑을 중심으로 한 5세대가 출범되었다.
- ↑ 직역하면 쓰러지지 않는 늙은이.
덩샤오핑을 쓰러뜨릴 수 없어몇 번이나 권력에서 쫒겨났어도 다시금 권력을 차지한 데서 유래. - ↑ 작은 키와 강렬한 카리스마로 인해 서방 세계에서는 이렇게 부른다. 이 작은 키 때문에 일어난 에피소드 하나. 마오쩌둥이 권력을 장악했을 당시 한 회의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곤 '내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시오' 하자 당연히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마오는 '그럼 모두 내 의견에 찬성한 것으로 알고 그대로 실행하겠소.'라고 했는데 실제론 덩샤오핑 혼자 일어서 있었다. 하지만 너무 키가 작아서 눈에 띄지 않았다고.
안습 - ↑ 실제로는 마오쩌둥이 자리에서 일어선 덩샤오핑을 발견했지만, '덩샤오핑 동지는 어차피 키가 작아서 앉아 있으나 서 있으나 똑같아 보이니, 그냥 앉아 있는 것으로 알고 있겠소'라며 그냥 넘어갔다고 한다. 마오가 덩샤오핑을 아껴서 넘어간듯.
어딜 봐도 그냥 디스로 보이는데 - ↑ 소련에 유학중 독소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 ↑ (근면히) 일하면서 (검소히) 공부한다는 뜻으로 1918~1920년에 약 1500명의 중국 학생들이 프랑스로 유학한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노동력이 부족해진 프랑스의 상황과 맞물려 생긴 일로 이중 200명이 후에 공산주의 운동에 적극 가담했고 그 중 20명은 미래에 중국의 요직을 차지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근공검학에는 그 근본부터 프랑스와 중국 사이에 심한 괴리가 존재했다. 프랑스는 '(근)공'에 초점을 둔 반면에 중국은 '(검)학'에 초점을 뒀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프랑스에서는 중국 유학생들을 꽤 박하게 대했고 공부를 하기 위해 프랑스로 갔던 어린 덩샤오핑은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공산주의자가 된다.
- ↑ 덩샤오핑은 나중에 자신이 프랑스로 유학한 이유를 "중국을 구할 방법을 찾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그런데 동시기에 마오도 프랑스로 유학할 기회가 있었지만 정작 그는 가지 않았다. "중국의 붉은 별" 저자가 왜 프랑스로 유학을 가지 않았는지 마오에게 묻자 마오는 "중국 문제의 해결책은 중국에서 찾아야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당시 시대상을 고려하면 마오가 매우 비범한 사람임은 틀림없다. 이 생각은 적중해서 중국 인민을 정확하게 파악한 마오는 조각조각난 중국 대륙을 통일하는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겼다.
- ↑ 공산당과는 약간 다르다. 1920년 초에 이미 존재했던 조직으로 덩샤오핑이 청년동맹의 주요 인물로 부상한 뒤 프랑스 경찰을 피해 동지들을 이끌고 모스크바로 가는 1926년 까지 유지된다. 덩샤오핑이 공산당에 입당한 것은 모스크바로 간 뒤의 일이다. 또한 저우언라이와도 여기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저우언라이는 중국 공산당에서 평생 동안 덩샤오핑을 후원했고 덩샤오핑도 6살 차이의 저우언라이를 항상 큰형님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 ↑ 덩샤오핑은 프랑스를 떠나기 전 자기가 일했던 자동차 공장과의 계약을 해지했는데 당시 공장장의 평가는 이렇다고 한다. "사직 이유 : 귀국, 근무 성적 : 괜찮음, 전반적 태도 : 양호함"
- ↑ 일종의 아시아의 공산주의자를 위한 대학교로 여기에서 공부했던 인물들 중 상당수가 후에 중국에서 한 자리씩 차지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사람이 덩샤오핑, 류사오치, 런비스, 녜룽전 장징궈 등이다. 그리고 그 외의 유명 인물들로는 조봉암, 주세죽, 허정숙, 호찌민 등이 있다.
- ↑ '중산'은 쑨원의 자(字)로 중국 공산주의자를 위한 대학교였다. 프랑스에서는 일개 하류 노동자 취급을 받았던 그들이 러시아에서는 혁명 동지로 대우받았다고 한다. 러시아 측에서도 꽤 신경을 썼는지 중산대학 초청 강연자 중에 레프 트로츠키까지 있다.
- ↑ 덩샤오핑은 후에 펑위샹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했는데, 이 당시 장개석은 공산당을 궤멸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펑위샹이 장제스에게 적극 동조했다면 덩샤오핑의 목숨이 날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펑위샹은 장개석이 고까웠는지 적극 동조하지 않았고 덩샤오핑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을 쫓아내면서도 그들에게 여비까지 챙겨줬다고 한다. 그리고 몇 년 후에 펑위샹은 장에게 반기를 든다.
- ↑ 여기서 이름도 바꾸게 된다. '소평(小平)'이라는 이름은 덩샤오핑의 세번째 이름으로 태어날적 이름은 '선성(先聖)', 청소년기 이름은 '희현(希賢)', 그리고 마지막 이름이 '샤오핑(小平)'이다. 뜻 풀이가 재미난데 태어날 때 이름은 "옛 성인과 같이 되어라."이고 두 번째 이름은 "현명해지기를 바람."이고 마지막 이름인 소평은 "작고 평범함."으로 점점 이름의 뜻이 소박해진다. 참고로 앞서 두 이름은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고 소평이라는 이름은 본인 지은 것이다.
- ↑ 1920년대 말부터 마오쩌둥을 지지하였는데, 이 때문에 주류파였던 강서소비에트 정부의 거부를 받아서 마오와 함께 엄청난 고초를 겪었다. 심지어 아내와도 이혼해야 했다.
- ↑ 마오쩌둥은 1935년 대장정 기간 중에 열린 준의 전원회의에서야 비로소 당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이때부터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주더가 당 중앙지도부를 형성하게 된다.
- ↑ 항일전 초기 수백명으로 시작했던 129사단은 항일전쟁 끝은 12만명 규모로 불어났다.
- ↑ 이 때의 공적 덕분에 그는 중국 군부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고, 이 시기에 군부에 만든 인맥들 특히 생사고락을 같이하던 제2야전군 출신들은 훗날 그의 권력 탈환에 크나큰 힘이 되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류샤오치를 지지하던 군부 인사들이 류의 실각과 함께 숙청당했던 반면, 덩샤오핑의 인맥이었던 군부 인사들은 문혁시기에서도 실권을 가진 현직에 남아 있었다. 군 실세의 한 명이기도 했던 후야오방은 "덩샤오핑 동지가 장악하고 계시면 한마디로 끝날 것이, 우리들로서는 다섯 마디나 필요하다."라는 말로 덩샤오핑의 군에 대한 영향력을 표현했다. 덩사오핑이 최고지도자가 되는 1980년대 이후 제2야전군 출신들이 군의 주류가 된다.
- ↑ 다만 마오가 당 주석으로 군림하고 있어서 당내 서열은 2위였다.
- ↑ 중국 공산당과 중국 인민해방군 및 국무원에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당시 중국 지도자들 중에서 당, 군, 정 모두에서 덩샤오핑보다 더 강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은 마오쩌둥 단 한 명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특정분야에서의 영향력만을 가졌을 뿐이었다.
- ↑ 이때 당시 마오쩌둥은 실권을 잡은 덩샤오핑에 대해 "(덩샤오핑은) 나를 죽은 아버지 모시듯이 한다."라고 비꼬았다. 즉, 겉으로는 마오쩌둥을 최고위직인 당 주석 자리에 올려놓고 모시기는 극진히 모시지만, 대부분의 의사결정을 내릴 때는 "뭐 이런 것 갖고 주석을 귀찮게 해드려야 쓰겠습니까?"라는 자세를 취하면서 정치국 상무위에서 자기들끼리 알아서 처리해 버리는 식으로 마오쩌둥을 배제해 버렸던 것이다.
- ↑ 아이러니하게도, 마오쩌둥을 홍위병의 분란을 핑계로 당 대회에서의 투표로 추방하려던 류샤오치의 계획을 성사 직전에 파탄에 빠뜨린 것은 덩샤오핑이었다. 당시 덩은 "마오 주석의 지시는 절대 이행되어야 한다."면서 지방에 있던 마오쩌둥 지지자들을 북경으로 옮기려던 린뱌오의 작업을 지지하였다. 덕분에 류샤오치와 펑더화이, 허룽, 리리싼 등이 고초를 겪던 시기에서도 덩샤오핑은 주자파의 2인자라는 낙인이 찍히고도 살아남았다.
- ↑ 등소평은 결국 장시 성 시골의 트랙터 공장으로 쫒겨나 생산 노동자를, 그것도 4년이나 하면서 지내야 했다. 이 정도면 사실상의 정치적인 사형 선고지만, 덩샤오핑은 언제일지 모를 재기를 기약하며 이 기간을 묵묵히 버텨냈다. 하지만 문헌에 따라서는 4년 내내 25사를 읽으면서 지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 ↑ 홍위병의 모진 고문을 견디다 못해 2층 베란다에서 추락했고, 척추 골절로 인한 영구적 하반신 마비가 되었다. 덩샤오핑은 이 일을 자신의 생애 중에서 가장 슬픈 사건으로 기억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덩샤오핑은 장애인 인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오늘날 중국은 장애인 인권이 어느 정도 잘 보장된 국가로 알려져있다. 덩푸팡은 훗날 중국장애인협회 주석이 되나 부정부패로 온갖 구설수에 오른다. 그럼에도 덩은 미안한 감정에 어쩌지 못했다고...
- ↑ 이데올로기적 신봉만이 아니라 실무능력도 우수했고 인망도 높았기 때문에 유언으로 마오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하지만 이 유언은 화궈펑의 조작이었다는 루머가 있다.
- ↑ 이것이 화궈펑이 오래 집권하지 못한 원인이다.
- ↑ 당시 민중들은 문화대혁명을 극도로 싫어해서 마오는 물러가시오!와 같은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그래서 나온 사건이 제1차 천안문 사건.
- ↑ 이 당시에도 이미 서방 외교관들은 화궈펑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당시 영국 대사의 말에 따르면 "전제적인 황제였다."고 할 정도.
- ↑ 여담으로 화궈펑은 권력에서 축출되었지만 그래도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대략 우리나라 국회의원급)으로 20년 동안 활동하고 후에도 원로로 잘 대우받다가 2008년에 세상을 떠났다. 중국 공산당내에서 권력에서 축출되어도 어느 정도의 지위와 대우를 받게 된 최초의 케이스. 이후 자오즈양과 같은 몇몇 예외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중국 공산당내의 권력다툼은 지더라도 한직으로 밀려나는 수준이다.
- ↑ 당시 덩샤오핑은 "마오 주석은 공이 과보다 많다."라는 말로 마오쩌둥의 권위를 보호해주는 척하면서 실질적으로 마오쩌둥을 계승한 문화대혁명 당시 마오쩌둥의 직계들을 차례차례 제거한다. 마오쩌둥을 잃은 문화대혁명 지지세력에는 권위나 경력에서 덩샤오핑을 상대할 인물이 없었기 때문에 이 일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문화대혁명에 대한 대중의 비판이 일어나게 함으로써 그 사건에 정치적 책임을 지고 있던 사람들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그 시기에 고통받았던 자신과 같은 사람들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 두 행동은 그가 그의 정적을 따돌리기 위한 주요 전략 중의 일부였다고 믿고 있다.
- ↑ 현재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둥에 대한 공식적인 평가는 공칠과삼(功七過三). 항일전/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고 공산당이 대륙을 차지하게 한 공(功)이 있으나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과(過)가 있다는 평가다. 이를 통해 마오쩌둥의 권위를 이용하면서도 그의 기존 정책은 싹 엎어버릴 수 있었다. 근데 잼있는건 애초에 이 공칠과삼이라는 표현이 마오쩌둥이 스탈린을 평가할 때 쓴 표현이라는 점.
그리고 이후 수많은 독재자들의 단골 변명거리로 쓰여지게 된다. - ↑ 본래 중국의 4대 현대화는 1964년 저우언라이 국무원 총리가 제2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에서 처음 제시한 것이었는데, 2년 후 시작된 문화대혁명의 혼란으로 덩샤오핑의 집권기에 본격화될 수 있었다. 결국 오늘날 중국 4대 현대화는 덩샤오핑의 업적으로 기억되고 있다.
- ↑ 중국은 역사상 기근이 일반적인 나라였다. 마오쩌둥의 병크로 일어났던 대약진운동후의 3년대기근도 사실은 역사상 있었던 기근의 하나일 뿐이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항상 존재했던 기근을 퇴치했으니 덩샤오핑의 업적은 이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 ↑ 대신 중국은 미국에 대만과의 단교를 요구했다. 대만은 자국의 영토에 불과하므로 단교가 당연하다는 논리였으며, 미국은 고민 후에 이를 수용한다. 대신 미국 의회는 '대만관계법'을 제정하여 대만의 군사적 안전을 간접적으로 보증하였다.
- ↑ 따라서 이 4곳의 경제특구는 모두 남서쪽 해안가에 위치하게 된다. 물자의 유통 및 수송이 편하고, 아직은 자본주의 영향을 내륙으로 퍼지지 않게 관리하기 위함이었다.
- ↑ 카우보이 모자를 눌러쓰고 로데오 경기를 관람하는가 하면, 공식석상에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를 열창하는 등 미국인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려는 모습을 보였다.
- ↑ 당시 덩샤오핑은 국무원 부총리였으나 미국은 사실상의 국가원수로 대우하였다.
- ↑ 보잉사 등 미국내 주요 산업시설을 돌아보았다.
- ↑ 마오는 '권력은 총부리에서 나온다'고 설파하였다. 덩도 충실하게 이것을 따라 군인사권을 가진 군사위 주석으로 당과 행정부를 간접적으로 지배하였다.
- ↑ 1980년대 한때 덩의 후계자로 거론되었으나 다당제 등의 강력한 정치개혁을 주장하였고, 이에 보수파의 역공을 받아 실각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충격으로 사망했다. 1989년 2차 천안문 사태는 그의 죽음을 계기로 천안문 광장에 집결한 추모대열이 시위로 번지면서 시작되었다.
- ↑ 일부에선 문화대혁명을 소련식 대숙청과 같은 정부주도의 변란으로 알고 있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문화대혁명은 최고지도자 마오가 정권을 잡기 위해 대중을 선동해 벌인 일종의 친위쿠데타며, 정부기관은 한켠으로 물러 서 있는 가운데 순수 민간조직인 홍위병이 언론기관을 장악한 4인방의 선동에 이끌려 나선 것이다. 이랬기 때문에 문혁때 무지막지 고생한 당시 중국지도부들은 대부분 대중운동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천안문 사태를 무자비하게 진압하게 된다.
- ↑ 이 때 자오쯔양의 옆을 지킨 사람이 이후 총리가 되는 원자바오다.
- ↑ 이는 자오쯔양이 덩샤오핑을 비판한 구술 녹음 테이프가 자오쯔양의 사망 이후 발견됨으로써 알려졌는데, 자오는 감시원의 의심 및 수색을 피하기 위해 이 녹음 테이프들을 자신의 손자가 가지고 놀던 낡은 곰 인형 속에 숨겨놨었다. 그러다 2005년 1월 그가 사망하자 또다시 시위가 벌어질까 우려한 중국정부는 천안문 광장 등 주요 지역에 무장경찰을 배치하고, 언론보도 또한 통제하였다.
- ↑ 당시 티베트 지역 당 서기였던 후진타오는 반중국시위가 일어나자 시위현장에서 철모를 쓰고(...) 직접 강경진압을 진두지휘하였다. 덕분에 개방에 유화적인 태도와 함께 내부 문제에선 강경파로 덩샤오핑과 보수파 양쪽에게 인정받는다.
- ↑ 천안문 사태로 덩샤오핑은 보수파의 요구를 받아들여 개방에 회의적이던 장쩌민을 후계자로 지명하였으나, 그 이후는 개방을 적극 지지하던 후진타오로 내정하였다.
- ↑ 중국 공산당의 당원은 수 천 만명에 이른다.
- ↑ 중국은 한족과 56개 소수민족이 결합되어 있는 다민족 국가이다. 소수민족의 분리독립 혹은 자치로 인한 국가 해체는 공산당의 가장 큰 두려움이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며 최근에는 '중화민족'이란 신조어를 만들어내어 모든 소수민족에게 '하나의 중국인'이란 정체성을 심어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규정한 동북공정도 만주와 조선족을 중국에 묶어두기 위한 공작이다.
- ↑ 중국공산당 내부의 보수파들의 수장은 덩샤오핑과 동급의 영향력을 가졌다고 평가되던 천윈(진운, 陳雲)으로, 덩샤오핑이 먼저 죽으면 보수화가 진행되고 천이 먼저 죽으면 개혁개방이 유지된다는 것이 당시 해외의 중국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본디 천윈이 병약했던지라 덩보다 일찍 갈 것이라는게 대부분의 예측이었으나, 부인의 극진한 간호로 인해 의외로 장수하여 세간의 관심을 받았는데, 결국 남순강화가 시작될 무렵에 천윈이 먼저 죽었고 결국 승부가 결정지어졌다.
- ↑ 실제로 덩샤오핑의 홍콩에 대한 집념은 초지일관이었다.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가 홍콩 반환시기를 늦춰달라고 요구하자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도 모자라 "중국 인민해방군은 당장 오늘이라도 홍콩을 접수할 수 있다."라고 경고했을 정도.
- ↑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 교체가 많지 않아 느끼기 쉽지 않지만, 중국역사의 경우 창업군주가 어느정도 해냈지만 수성 군주가 삽질하여 창업군주가 죽자 나라가 망하는 경우가 꽤 많았다. 우리 역사를 예를 들자면 태조 왕건이 죽고 혼란 스러웠지만 광종이 잘 수습해 고려가 500년 유지될 수 있었고, 조선의 경우 이성계 이후 태종, 세종이 있어 조선의 기틀이 마련됐다.
- ↑ BBC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정작 등소평이 했던 말은 "검은 고양이든 얼룩 고양이든"이었다고 한다. 이걸 증언한 사람은 덩의 최측근이었던 총참비서(그러니까 비서실장).
- ↑ 어차피 당시 공산당에는 마오쩌둥의 철저한 숙청으로 인해 마오쩌둥의 사후 특정인물 한 명이 당을 장악하는 건 매우 어려워진 상황이었다.
- ↑ 어떤 기준으로 봐도 보수우파인 조갑제, 이원복은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매우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 ↑ 사실 현실사회주의 기준으로 보면 별 의미없는 얘기다. 애초에 마르크스는 어떻게 공산주의가 완성될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남긴 게 없다. 이걸 현실에서 실현가능한 정책으로 만들어낸 게 레닌이고. 그래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오늘날 중국은 계속해서 경제체제를 자본주의화, 시장경제화 시키고 있으므로 마르크스의 구체적인 실천방법이 언급되지도 않은 주장을 근거로 자본주의→공산주의 드립을 치려면 한국이나 미국도 공산주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물론 중국은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 달리 계속 본인들이 사회주의를 지향하고 있다고 떠들긴 하는데, 정작 정책적으로는 계속 시장경제를 추구하고 있고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대안을 제시하지도 못하고 있다.
- ↑ 백가지 꽃이 만개하게 하라, 백 가지 의견이 경쟁하게 하라라는 뜻으로 원래 50년대 후반 쌍백운동의 방침이었다. 여기에 낚여 사회와 당, 국가에 비판을 하던 지식인들이 많았다. 물론 직후 반우파투쟁이 벌어지게 된다.
- ↑ 앞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이 말은 저우언라이가 한 말을 덩샤오핑이 인용한 것이다.
- ↑ 중국의 우주계획은 나름 꽤 오래 된 계획이었다. 과학기술의 개혁 항목중에 하나였기 때문.
- ↑ 유튜브에 올라온 기록영상을 보면 김일성이 방중해서 등소평이나 모택동과 담소하면서 맞담배(..)를 피는 장면이 나온다.
- ↑ 반대로, 북한의 김정일도 이 처형 비디오를 봤는데 독재자 집단 총살에 충격을 먹고 오히려 인민들을 더욱 더 잔인하게 통제하게 된다.
- ↑ 이 때 주로 방송하던 리그가 이탈리아 세리에 A 였다. 때마침 이 때는 세리에 A 최고의 전성기 시절의 이른바 "칠공주", "세븐 시스터즈" 시대였고 이 때를 계기로 중국에서 세리에 A 인기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 ↑ 나중에는 중국 슈퍼 리그로 명칭이 변경된다.
- ↑ 이 게임을 리뷰한 AVGN의 제임스 롤프는 자신의 실력대로 하기보단 여러 이유로 일부러 발컨수준의 플레이를하는데 그점을 감안라도 5분내에 끝판왕이 등장해 클리아했다 말할정도면 정말 못만든 게임이나 마찬가지인셈 그것도 난이도와 내용면 모든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