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식

정식 명칭은 32년식군도(三二年式軍刀).

1 개요

1899~1935년까지 도검 패용이 규정된 부사관~병사들에게 지급된 일본군세이버.

2 상세

구 일본육군에서 부사관 및 병사들에게 지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세이버(Sabre)이다. 본질적으로 기병들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실제로는 기병 이외에도 육군의 헌병, 치중병, 그리고 보병준사관(曹長)들을 포함한 도검 패용이 규정된 병과에도 지급되었다. 이것을 대도본분병(帶刀本分兵)이라 불렀다. 이들에게 대량생산해서 지급하기 위해 나온 칼이다.

이전에 1882년에 채용된 25식이라는 물건이 있었지만 황동제 부품이 다량 들어가 가격이 비쌌고, 당시만 하더라도 일본군 자체가 매우 소수였기 때문에 생산량도 극소수였다. 따라서 조선을 두고 청나라와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본격적으로 군대를 확장함에 따라 새로운 디자인의 도검이 필요해졌다. 거기에 부응하여 생산성도 높고 가격도 싼 철제 도장구를 다량으로 사용한 대도본분병용 군도가 1889년 채용되었다. 이때가 일본 연호로 메이지32년이었으므로 32식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기병에게 지급되는 갑형과 치중병, 헌병에게 지급되는 을형이 존재했으며, 을형은 훗날 손잡이를 일본도 양식으로 바꾼 32년식 개(改) 버젼이 생산되기도 했다. 1930년대 일본의 군국주의 광풍에 의해 일본도의 형태를 가진 95식 부사관도가 채용되면서 32식은 생산이 중지된다.

세이버의 관점에서 보아도 상당히 튼튼하게 잘 만들어진 제품으로, 측면과 후방에서 나사식으로 고정하여 베기의 충격이 나무 자루가 아닌 철제 백플레이트에 다 전달되도록 만들어졌으며, 결과적으로 내구성이 아주 좋다. 또한 판스프링식 잠금장치를 채택하여 코스트를 최소화하면서도 대량생산에서 발생할 수 있는 헐렁한 칼집 문제를 잘 해결한 것도 장점. 철제칼집 내부에는 목제 속칼집을 하나 더 넣어서 칼날이 철제칼집과 닿으면서 날이 죽는 문제도 해결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기병대용으로 2차대전 패전에 이르기까지 사용되었고, 이후 성립된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1965년 32식의 디자인을 거의 그대로 계승한 65식 기병도를 채용할 정도였다. 패용 고리를 2개로 하고 잠금장치 구조를 약간 개선한 것 이외에는 사실상 동일한 칼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정도.[1]

3 외장과 칼날

기병용의 갑(甲)형은 전체적으로 프로이센식 세이버의 영향을 받았다. 패용고리가 1개이며 조작보조용의 가죽스트랩이 가드에 붙어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 가죽스트랩에는 검지와 중지를 끼우는데 칼이 손에서 빠져나갈 걱정 없이 강하게 벨 수 있으며 전체적으로 조작성이 크게 향상되는 것으로 1개뿐인 패용고리와 함께 프로이센의 경향이 강하게 묻어나 있다. 칼날길이는 83cm로 일반적인 세이버의 날길이와 동일하다.

치중병, 헌병, 보병준사관용의 을(乙)형은 갑형과 거의 동일하지만 칼날이 77cm정도로 짧아서 패용할때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개선되었다. 마상에서 강하게 휘두를 필요가 없으므로 가죽 스트랩도 삭제되었다. 그외의 특징은 완전히 동일.

3.1 외장

3.2 칼날

칼날은 95식 부사관도와 같은 육군도검강(陸軍刀劍鋼)을 사용하였고, 기름을 사용한 통열처리로 제조하여 내구성이 매우 뛰어났다. 육군도검강의 정체는 문서와 유물의 분석을 통해 0.9%~1.2%의 탄소량을 포함한 강철로 알려져 있는데, 현대의 1095강과 비슷한 퍼포먼스를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재의 특성으로 보았을 때 칼날의 절단력이 뛰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칼날을 가볍게 하기 위해 칼날 전체적으로 깊게 혈조를 팠으며, 일본도에 존재하는 요코테를 표현한 것이 특징. 혈조가 칼날 끝까지 가며 칼날 끝부분의 형태도 전형적인 일본도 스타일로써 일본도의 칼날 디자인을 세이버 형태로 약간 변형하여 사용한 종류에 해당하며, 장교용인 19식세이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형상이다.
  1. 32식의 칼날이 폭이 좁아서 좀 불안하다고 여겼는지 칼날의 폭은 35mm정도로 상당히 늘렸으며, 칼날은 좀 길이를 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