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4의 사진. 사진 기준 오른쪽에 발을 내밀고 탑승한이가 바로 개발자인 이고르 시코르스키다.
1942년 첫 비행한 헬리콥터. 헬리콥터 사상 최초로 대량생산된 기종이며 1942년부터 1944년까지 130여대가 생산되었다.
1 개발 과정
미 육군 항공대는 시콜스키의 VS-300의 비행시범을 보고 헬리콥터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에 미 육군 항공대는 보트-시콜스키 항공사에 군용으로 쓸 수 있는 헬리콥터 개발을 주문하였다. 보트-시콜스키 항공사는 실험기였던 VS-300을 기반으로 사내 프로젝트명 VS-316 이란 헬리콥터를 개발하였으며, 미 육군 항공대는 첫 실험기에 XR-4라는 제식 명칭을 붙였다.[1].
실험기로 제작된 XR-4은 기존 VS-300은 물론, 그 때까지 개발된 헬리콥터들에 비해서도 많은 가능성을 보여줬다. 최대 1200km 이상 편도 비행에 성공하였고, 고도 3.7km까지 상승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최대 비행속도는 140km/h 정도였다(당시 헬리콥터들은 대략 100km/h 수준). 또 비행시간 기준 100시간 동안 무사고여서 신뢰성도 입증하였다.
이에 미 육군은 최초에 29대의 시제기 생산 계약을 맺었고, 이중 3대는 YR-4A라는 제식명을 붙여 먼저 생산하여 성능 시험기로 사용하였다. 최초 생산된 29대는 180마력 엔진을 사용하여 기존 XR-4보다 엔진힘이 25 마력 정도 더 강력해졌고 이에 맞춰 로터 직경도 30cm 가량 더 커졌다. YR-4A의 여러 비행시험을 통해 시콜스키는 연료탑재량을 약간 늘리는 등 몇 군데 성능개량을 하였으며, 이 개량된 형태로 제작된 나머지 시제기들이 YR-4B다.
이후 본격 양산 모델은 200마력 엔진을 탑재하였으며, 이 양산 모델의 제식명이 R-4B다.
R-4는 미 육군항공대 뿐만 아니라 미 해군 및 영국 공군/해군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특히 해군 입장에서는 갑판에서 바로 뜨고 내릴 수 있는 헬리콥터를 이함/착함 과정이 복잡한 수상비행기나 오토자이로에 비해 훨씬 매력적으로 보았다.
미 육군은 R-4의 성공에 만족하여 더 대형화된 R-6도 개발한다.
2 생산
최종적으로 R-4는 최초 생산된 시제기 포함 131대가 생산되었다.
- XR-4 : 165마력 엔진을 탑재한 최초 시험용 시제기. 1대 생산 되었으며 나중에 XR-4C로 개조 됨
- YR-4A : 180마력 엔진을 탑재한 시제기. 3대 생산.
- YR-4B : YR-4A를 약간 개량한 모델. 27대 생산. 이중 일부는 미 해군에 HNS-1으로 명명되어 해군에 인도 됨
- R-4B : 200마력 엔진을 탑재한 대량샌산 모델. 100대가 생산되었으며 이중 20대는 미 해군, 45대는 영국 공군이 사용.
- HNS-1 : 미 해군의 YR-4B 및 R-4B의 제식 명칭. 2대 가량 미 해안경비대에 이관 됨.
- 호버플라이 I(Hoverfly I) : R-4 시리즈의 영국군 명칭
- S-54 : 관측요원용 좌석을 메인로터 기어 박스 뒤쪽에 추가하는 시험을 한 시험기
3 실전기록
R-4는 중국-버마-인도 전역에서 부상병 구조 및 후송용으로 활약하였다. 보통 그 이전까지는 매우 짧은 거리로 이착륙할 수 있는 관측기로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1944년 4월 22일, L-1 연락기 한 대가 일본군의 공격에 추락하였는데 이 연락기에는 조종사 뿐만 아니라 3명의 부상당한 영국군 병사도 타고 있었다. 이들의 추락지점이 험지여서 고정익 연락기로는 접근이 어려웠는데, 마침 이곳 전장에 YR-4B가 배치되었다. 당시 총 4대가 배치되었으나 당시 쓸 수 있던 것은 1대 뿐이었다. YR-4B 조종사 카터 하만은 본래 조종사를 제외하면 1명만 탑승시킬 수 있는 YR-4B로 이틀에 걸쳐 계속 왕복 비행하여 조종사 및 부상당한 영국군인들을 구출하였다. 구출된 이들은 근처 안전한 모래사장에 대기 중이던 L-5 연락기에 태워져 후송되었다. 이는 최초의 헬리콥터를 이용한 전선 구조 활동이기도 하다.
같은 중국-버마-인도 전역에서 1945년 1월 22일에는 기상관측소에 있던 병사 1명이 오발사고로 손을 다쳤는데 추가 감염으로 위험한 상태가 되었다. 해발 1400미터에 위치한 관측소에 의무관이 없었다. 의무관을 낙하산으로 투입하는 방법도 잠깐 검토되었으나 근처 지형이 험하여 이마저도 어려웠다. 결국 이번에도 R-4가 부상병 후송 임무에 나섰다. 문제는 해당지역까지 가기에 R-4의비행가능 거리도 짧았고, 중간에 3000미터 가량의 봉우리도 건너야 했다. 또 당시 R-4 조종을 맡은 조종사는 이곳에 배치된지 얼마 되지 않아 근처 지형에 익숙치 않은데다가 R-4에는 무전기 마저 없었다. 결국 L-5 연락기 두 대가 항로개척 임무를 맡았고, R-4는 비행 중간중간 내려서 연료 재보급을 받아가며 기상관측소에 도달, 부상병을 태워 후방으로 후송하는데 성공하였다.
또 R-4는 남태평양 지역에 미군이 미육군 항공대의 지원을 위해 운용하던 선상 항공수리 부대(Aircraft Repar Unit, Floating)의[2] 함정에 배치되어 부품 수송이나 인원 수송임무에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