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장

高麗葬

1 고려가, 혹은 고려시절에 묻거나 장례했다는 뜻

조선시대 후기 기록 중 고려장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경우는 대충 아래와 같다. 해석을 보다시피, 고려가, 혹은 고려시절에 묻거나 장례했다는 뜻으로 늙은 사람을 갖다버리는 악습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1654-? 회은집(晦隱集)
特深穿窟。如鑿井之形。築以小石。今往往崩毁處。稱以高麗葬者是也。
특별히 깊게 굴을 판다. 우물을 파는 모양과 같이 작은 돌로 쌓는다. 지금 왕왕 무너진 곳은 고려시대에 묻은 것이라고 한다.

1689-1756 입재유고(立齋遺稿)
山野處處。高墳大塚。俗謂之高麗葬
산야 곳곳에 고분과 대총은 속인들이 고려시대에 묻은 것이라 일컫는다.

1897 성재집(省齋集)
元主元不書葬。元世葬於漠北起輦谷。不加築爲陵。故史不書葬。 高麗葬
원주는 원래 장사지낸다고 쓰지 않는다. 원 시절에는 막북의 기연곡에 장사했는데, 능(봉분)을 만들지 않은 고로 역사서에 장사지낸다고 쓰지 않았다. 고려는 장사 지낸다.

1757 승정원일기 영조 33년
上曰, 古者以鐵爲釘耶? 曮曰, 高麗葬, 多用鐵釘矣。
주상께서 가로되, "옛 사람들은 철로 정을 만들었는가?" 묻자 엄이 대답하길, "고려가 장사 지낼 때에는 철정을 많이 썼습니다."

1713 연행록(燕行錄 홍대용)
且滿漢公卿。擧皆不火葬。而地室設炕。傍開通穴。守直之人。出入燃燭云。有如我東昔日高麗之葬。만족(滿族)이나 한족(漢族)으로서 공경(公卿)은 거의 화장하지 않고 광중(壙中)에 온돌을 만들며 옆에 통래(通來)하는 구멍을 뚫어서 수직하는 사람이 드나들며 촛불을 켠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옛날 고려의 장례와 같은 것이다.

고려의 무덤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했으며 그럴 경우 고려총(高麗塚), 고려산(高麗山), 고려곡(高麗谷), 고려분(高麗墳)이라고도 했다.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 내에서 쓰이게 된 '늙고 병든 사람을 지게에 지고 산에 가서 버렸다는 고려 시대의 풍습'을 뜻하는 고려장과 다른 말이다. 마찬가지로 후술되는 고려장과 구별해야 한다.

1908년 11월 11일 <대한매일신보>의 고려장 굴총이라는 기사에도 용례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서도에서 온 사람의 말을 들은즉 근일에 일인들이 고려장을 파고 사기를 내어가는 고로 온전한 고총이 없다더라.' 무덤을 칭하는 말로 고려장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실제로 이때부터 개성 주변의 고려 고분들이 일본에 의해 대거 도굴당했다.

이런 뜻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또다른 자료로 조선총독부가 정리한 <조선보물고적 조사자료>가 있다. 발행연도가 1942년이지만, 그 내용은 1916~17년께 조사한 고적 대장의 자료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으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고려장'을 비롯하여 '고려총', '고려분', '고려산', '고려곡' 등으로 표기된 고분들이 두루 기록되어 있으며 그 수가 전국에 걸쳐 90여곳이나 된다. 그 시절에도 흔히 이름모를 무덤들을 일컬어 ‘고려장’이라고 불렀던 사실만큼은 분명히 엿볼 수 있다. 즉 '고려장'이라는 명칭은 그것의 실체가 무엇이었던지 간에 전국 곳곳에 흩어진 '이름 모를' 고분들을 대체하는 이름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라 짐작할 수 있겠다. 흔히 주인 모를 무덤을 일컬어 '당장(唐葬)'이나 '호총(胡塚, 되무덤)'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사용했던 평안북도 지역 정도를 제외한다면, 고려장은 전국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정말 '흔한' 용어였던 것이다.

2 개요

고려 시대에 늙고 병든 사람을 지게에 지고 산에 가서 버렸다는 풍습으로 세간에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대 문헌에 전혀 이런 풍습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현재 관련 연구자들은 실존 가능성에 대해 부정하며, 설화가 퍼지는 과정에서 그 내용이 왜곡되어 고려시대의 풍습으로 잘못 전해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3 상세

중국 <효자전孝子傳>의 원곡(原穀) 이야기가 고려장 설화의 원형으로 보이며 불경 <잡보잡경雜寶藏經>의 '기로국연(棄老國緣)조의 설화'에서 기로국이 고려로 와전된 이야기가 고려장 설화의 원형일 수도 있다.

고려장이라는 단어 자체는 고려의 무덤 등의 뜻으로 쓰인 적이 있기 때문에 일본에 의해 창작되었고 명명된 것은 아니며 처음으로 고려장이라는 용어가 '늙은이를 버리는 풍습'의 의미로 사용되었던 기록은 1882년도에 발간된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의 책, <은자의 나라 한국(Corea : The Hermit Nation)>이다.

(조선 왕조)이전까지는 일본에서도 오래전부터 유행하여 17세기에 이르기까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풍속이 한국에 성행하고 있었다. 고려장은 그 자세한 내용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노인을 산 채로 묻어버리는 풍습이었다.(Heretofore the same rites which were so long in vogue in Japan, traces of which were noticed even down to the seventeenth century, held unchallenged sway in Corea. Ko-rai-chang, though not fully known in its details, was the habit of burying old men alive.)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한국을 실제로 여행했던 영국의 여류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쓰고 1897년 출간 된 그녀의 책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가 있다. 이사벨라가 원산에서 60리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대 무덤들을 방문했을 때 고려장을 연상케하는 전설에 대해 들은 내용이 실려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참고

이전 왕조에서는, 즉 5백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면, 늙은이나 병자가 가족들에게 짐이 될 경우 이 고분들에 딸려있는 돌방에 약간의 음식과 물을 남겨둔 채로 유폐시키고는 거기에서 죽게 내버려 두는 일이 관습적으로 행해졌다고 한다.(During the last dynasty, and more than five centuries ago, it was customary, when people from age and infirmity became burdensome to their relations, to incarcerate them in the stone cells which these mounds contain, with a little food and water, and leave them there to die.)

일제강점기의 자료를 통해 확인해 보면, 고려장 설화와 관련된 것으로 1919년에 발행된 <전설의 조선>이라는 책이 먼저 눈에 띈다. 이것이 고려장 설화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일단 현재까지 드러난 것으로는 그 시기가 제일 빠르다. 이 책의 지은이는 평양고등보통학교 교유인 미와 타마키(三輪環)로 표시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그가 채집한 조선의 구비전설(口碑傳說)이 수록된 가운데 말미에 동화부분이 들어 있고, 그 가운데 '불효식자(不孝息子)'라는 대목이 보인다. 그 내용은 "늙은 제 아비를 지게에다 지고 산 속에 버리려는 어떤 사내가 산에서 내려오던 길에 아들보고 그 지게가 필요 없으니 버리라고 하자, 그 아들이 하는 말이 나중에 아버지도 늙으면 필요할 텐데 또 써야하니까 버리지 못한다고 하매 곧 크게 뉘우치고 버린 제 아비를 다시 모셔왔다"는 바로 그 얘기이다. 그리고 이 얘기는 1924년에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동화집>에도 '부모를 버린 사내'라는 제목으로 등장하며, 곧이어 1926년에는 나카무라 료헤이(中村亮平)가 정리한 <조선동화집>에도 약간 내용을 달리하여 '부모를 버린 사내'라는 제목으로 거듭 수록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식민통치자들이 고려장 설화를 널리 퍼뜨린 주범인 듯도 하지만 이러한 자료에 수록된 내용은 어쨌거나 실제로 조선 땅에서 통용되던 설화나 전설을 채집한 결과였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에 명확한 결론은 내릴 수 없다.

일제강점기의 자료를 더 알아 보자면 생계로 인해 부친을 생매장한 사건을 다룬 1924년 9월 13일자 동아일보, 사위가 장인을 생매장한 사건을 다룬 1934년 6월 9일자 조선중앙일보에서도 고려장을 특정 풍습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종합하면 고려장 설화를 고려 시대 때 실제 있었던 장례 풍습이라고 일반인들이 두루 믿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라고 생각된다. 삼국시대 이후로 조선시대까지 나온 한국의 역사책, 지리서, 수많은 문집들 어디에서도 노인을 산 채로 산에 버리는 고려장 얘기는 찾아볼 수가 없는 반면, 일제강점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거나 경험한 사람들은 대개 고려장 이야기를 알고 있으며 자기 동네에 고려장했던 곳이라는 전설이 내려오는 바위나 굴이 있었다는 기억까지 갖고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일제강점기에 고려장 이야기가 널리 보급된 것은 분명하다.

3.1 잘못 알려진 사실

조선왕조실록#에도 고려장으로 추정할 만한 풍습에 관련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는 내용이 웹상에 퍼져 있는데 이는 '외사(外舍)로 내어 두게 되니'라는 구절을 '밖에 내다버리니' 라고 오독한 것을 확대해석한 것으로 외사(外舍)는 '안채'인 내사(內舍)와 대비되어 '바깥 행랑채'를 일컫는 말이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의 기록을 참고하면 이해하기 쉽다.

칠원공(漆原公, 이언결)이 말년에 심양(心恙, 심병心病)이 있어서 외사(外舍)에 거처하게 되자, 공이 정성을 다해 보호하고 봉양을 함에 늘 문밖에서 선잠假寐을 자고 옷에 띠를 풀지 못한 것이 여러 해였고, 대고(大故)를 당하자 공의 나이 이미 60이 가까웠는데도 집상(執喪)을 예절에 지나치게 하였다.

4 논란

4.1 일본의 고려장 왜곡

일부에서는 위와 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고려장이 일제시대에 일본측이 문화재 약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입으로만 전해져 오던 설화를 사실처럼 둔갑시키고 퍼트린 소문이 정착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며, 반대로 고려장이 역사적으로 허구였더라도 고려장이라는 용어 자체를 일본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강점기 대 1대 총독을 지닌 데라우치 총독에 대한 책을 펴낸 이의 견해다. 문제시되는건 용어가 아닌 그 본질적 의미의 문제... 신뢰여부는 당신의 몫) MBC의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2011년에 관련 내용을 방송했다. 그러나 이사벨라 비숍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인터넷에 떠도는 일제가 일본의 풍습을 우리의 풍습으로 조작하였다는 주장은 분명히 사실무근이다.

4.2 그리피스의 한국 방문 여부

그리피스는 두 차례 한국을 방문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1차 방문시기는 밝혀지지 않았고 2차 방문 시기는 1926-27년 사이이다. 한때 학계는 그리피스의 1차 방문을 사실로 여겼다. 그러나 그 이후, 그리피스가 1871년에 신미양요가 있을 당시 조선에 방문하였다고 주장했던 정수일 교수를 포함한 학계는 최근 여러가지 연구를 하고 내용을 검토한 결과 그렇지 않다는 쪽에 무게를 싣고 있다. 사실 이전에도 문일평이 <은자의 나라>에 실린 식탁이나 두발 모습 같은 그림들이 한국적인 것이 아니란 점을 증거로 그가 한국에 오지 않고 일본에 앉아서 쓴 것이라고 지적한 바가 있었다. 특히 <은자의 나라>에는 일본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 경우가 많다는 것도 그 신뢰성을 의심하게되는 주요 근거다. 대표적인 사례로 그리피스가 고대부터 1868년까지 부산이 대마도주의 영지였다고 기록한 것이 있다.[1]

5 관련 설화들

중국 <효자전孝子傳>의 원곡 이야기에서 수레만 지게로 바꾼 이야기가, 우리나라에는 할아버지를 버리려고 한 아버지가 아들의 재치로 뉘우친 '할아버지의 지게'라는 이야기로 교과서에 실렸을 정도로 유명하다. 은비까비의 옛날 옛적에에서도 나오는데, 이쪽은 할아버지가 할머니로 치환되어 있지만 내용은 같다.[2][3]

어느 날 할아버지가 70세가 되자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지게로 업고가서 버린다.

그곳에 아들이 따라가서 아버지에게 묻는다.
“아버지 왜 지게를 두고 가세요?”
“할아버지 고려장 다 지냈다. 지게는 버리고 가야지.”
“아버지, 제가 지게 가져갈래요.”
“지게는 가져가 무얼 하려고.”
“할아버지 져다버린 지게인데 뒀다가 아버지도 여기에 져다 드려야죠.”
이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는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를 다시 모셔와 잘 봉양한다.
그리고 이 가족들은 행복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불교 경전인 잡보장경에 실려 있는 '기로국' 이야기[4]가 있는데 위기에 빠졌던 기로국이 노인의 지혜로 위기에서 벗어났다며 효도를 강조하는 내용이다.

이 기로국 이야기를 원형으로 한 한국의 전설이 6차 교육과정 초등학교 읽기 교과서에도 실린 적이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5]

옛날에 효성이 지극한 신하가 살았다. 이 당시에는 고려장이 법으로 제정되어 있었는데 그 신하의 어머니도 60이 거의 다 되어 산 속에 내다버려야 할 처지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냥 자신을 산 속에 버려달라고 했지만 효자 신하는 그럴 수 없다며 차라리 무거운 벌을 받겠다고 했다. 궁리 끝에 효자 신하는 어머니를 뒤채에 숨겨놓고는 일부러 어머니를 고려장 보냈다고 소문을 퍼뜨린다.

얼마 뒤, 중국에서 사신이 찾아와 지혜겨룸을 하잡시고 굉장히 어려운 3가지 문제를 냈다.
1. 구멍이 구불구불한 구슬어떻게 만들었지?에 명주실 꿰기
2. 똑같이 생긴 어미말과 새끼말을 손 안 대고 구분하기
3. 가지 하나만 가지고 백 가지 나물 만들기
대단히 어려운 문제들이었다. 1번과 2번은 몰라도 3번은 너무 억지같다. 효자 신하가 뒤채에서 어머니에게 이를 얘기하였더니, 뭐라뭐라 해법을 제시했다.
다음날, 효자 신하가 그 해법대로 중국 사신 앞에서 문제를 풀어 보였다.
1. 개미 허리에 명주실을 맨다. 그리고 한쪽 구멍 근처에 꿀을 바르고 반대쪽 구멍에 개미를 넣는다. 개미가 꿀을 향해 기어가면 반대쪽 구멍으로 빠져나오게 되어 명주실이 구슬에 꿰어진다.(이것은 원래 중국에서 공자를 주인공으로 한 민담에 나오는 이야기로, 공자천주 고사성어에 대한 유래다)
2. 마른 풀더미를 놓고 두 말에게 동시에 먹으라고 해서, 먼저 먹는 말이 새끼말이고 나중에 먹는 말이 어미말이다.
3. 그냥 가지를 하얗게 깎은 다음 나물로 무친다. 백(白)가지 나물 완성. 참 쉽죠?
중국 사신은 GG를 치고 돌아갔다.
임금이 어떻게 그런 지혜를 발휘할 수 있었느냐고 묻자, 효자 신하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고려장을 보내지 않은 자신을 벌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임금은 노모의 지혜 덕에 위기를 모면했다며 오히려 상을 내려야 할 일이라고 말하고 그때부터 고려장을 금지했다고 한다.

속초 지명의 어원이 된 이야기로 동일한 전설이 울산바위에도 있는데 울산에서 울산바위에 지세를 걷으려는 것을 거부하자 울산에서 재로 꼰 새끼로 바위를 묶으면 가져가겠다고 했고, 그 다음은 이와 동일.

그밖에 유사한 이야기로 삼국유사에는 가난 때문에 사람을 묻으려 하던 신라 때의 '손순 설화'가 남아있는데, '어머니를 굶길 수는 없으니 차라리 애를 묻읍시다.'라고 하다가 돌종을 발견했는데, 그 이야기가 알려지자 임금이 그 부부에게 도움을 주어 구원을 받은 이야기다. 현대인의 윤리적 기준으로 보았을 때, 백제 계백 장군의 가족 살해가 '비뚤어진 충(忠)의 강조'라는 비판이 있듯이, '아이는 더 낳을 수 있어도 부모님은 한 분'이라는 논리는 '비뚤어진 효(孝)의 강조'라는 비판이 있다. 물론 앞에서는 결말이 좋았지만.....[6]

한편 일본에는 '우바스테야마(姥捨て山)'라는 옛부터 전해져 오는 설화가 있다. 이름부터가 할머니 모/ 버릴 사/ 산 산으로서, 우바스테야마(또는 오바스테야마,姥捨山)라는 이름으로 실제 나가노현에 존재하는 산에, 고령의 노부모를 버리는 풍습이 있었다는 것.

6 현대판 고려장

존속유기 참조.

7 인터넷 용어 고려장

여느 인터넷 용어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이것도) 안좋은 의미로 많이 쓰긴 하는데, 비유적으로 쓰는 경우 대체로 스포츠에서 왕년에 잘 나가던 베테랑 선수가 신인 선수에게 대패를 당하면서 한순간에 인기 선수에서 퇴물로 전락하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면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씨름에서의 이만기강호동. e스포츠에서는 변형태송병석 고려장 사건으로 변형태가 고려장테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2013 시즌 이후 스토브 리그에서 고참 선수들을 정리하는 두산 베어스의 행보를 두고 고려장 야구라는 말이 있다.

8 기타

폴 펠리오와 아우렐 스타인등의 고고학자가 발견한 돈황문서 중 일부에는 고구려로 보이는 나라 Keu-li에 대해 기술되어 있다. 해당 구절에 따르면 "Keu-li 경내의 주민은 턱을 숙여 가슴에 붙이며 인육을 먹고 연로한 부모와 노인을 발가벗겨 죽였다"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장의 모습과 흡사하다. 그런데 이걸 믿으면 바로 아래 문장인 그 아래 주민들은 물 속에서 고기처럼 살고 있다도 믿어야겠지?

토사구팽과 비슷한 용어이긴 한데(쓸모 없어지면 제거한다) 차이점은 토사구팽이 '필요해서 데려왔다가 쓸모 없어져서 내쳤다'는 뉘앙스인 반면 고려장은 '원래 있던 존재였는데 쓸모 없어져서 내쳤다'는 것으로 좀 다르다.그런데 폴아웃 세계관에서의 시저의 군단의 경우 늙고 약해지면 고려장과 동시에 토사구팽을 행한다고 한다.
  1. Fusan has been held by the Japanese from very ancient times. Until 1868 it was a part of the fief of the daimio of Tsushima.(p.202)
  2. 한편 옛날 옛적에에서는 임금이 이 광경을 우연히 보고 고려장을 금지시키게 되는 장면도 나온다.
  3. 또한 은비까비에서도 고려장이 실제로 잘못 전해진 풍습임을 강조한다.
  4. 한 나라에서 나이 들은 노인들은 밥벌이가 안 된다고 산속으로 내쫓았는데 근처에 있던 강대국이 이 나라를 침략하기위해 재로 새끼줄을 꼬아오라는 말도 안되는 트집을 잡았다. 그러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하던 왕은 결국 노인들이 버려진 산속으로 들어가 지혜를 구했는데, 노인들은 새끼줄에 소금물을 적신후 불로 태우면 된다는 간단한 해결책을 내놓아 나라를 구한 뒤 그 나라는 노인을 공경하며 살았다.
  5. 교과서에는 가지 하나만 가지고 백 가지 나물 만들기 문제가 두께를 똑같이 깎은 나무의 뿌리와 줄기를 구분하기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판본이 존재하는 듯. 여기서의 정답은 물에 담그면 뿌리 부분이 더 잠기니 물에 띄워본다.
  6. 사실 손순 설화는 늙은 부모를 잘 모시려고 아이를 희생하는 이야기니 고려장과 반대되는 경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