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백


충남 부여군에 있는 계백 동상[1][2]

階伯

(? ~ 660[3])

1 개요

백제 말기의 장군이자 정치가.

백제의 마지막 명장, 황산벌의 영웅, 백제 최후의 보루.

흔히 계백 장군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군인이란 인상이 강하지만, 원래는 백제에서 좌평에 다음가는 관등인 달솔까지 지내는 등 정치판에서 주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고대의 고위 귀족들은 정치계에서는 물론이고 전시에 군인으로써 전공을 올리는 것이 출세를 위한 필수요소였으므로, 계백이 군인 겸 정치인이었다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황산벌 전투 당시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야말로 한국판 레오니다스라고 볼 수 있지만 전과로 보면 이쪽이 훨씬 우월하다.(…) 요즘 들어 백제라는 나라와 함께 인물들이 전체적으로 재평가되고 있기는 하지만, 계백만큼은 오랫동안 꾸준하게 사람들이 존경하는 거의 유일한 백제의 영웅이었다.[4]

명장 김유신을 1할의 병력으로, 4차례나 막아낸 백제의 대김유신 전용 결전병기.(…) 그래서인지 영화 황산벌에서 김흠순"계백이 글마 전략은 무조건 열심히 싸우는 기데이. 무대뽀로 말이다. 맨날 행님 니혼자 잔머리 쓰다가 깨진거 아이가? 니 계백이한테 한번이라도 이겨본 적 있나? 니 계백이 무서버서 이러는 거 아니가?"라는[5] 대사까지 나온다(...).[6]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 계백의 대사는 나 계백이 살아있는 한, 장군(김유신)은 황산벌을 넘지 못할 것이오!라는 폭풍간지 대사다.

2 생애

2.1 출신과 초기일생

상당히 베일에 싸인 인물. 관련 기록은 남아있는 것이 적어, 황산벌 이전의 삶은 알 수 없다. 그나마 남아있는 삼국사기의 계백 열전에 따르면 계백은 벼슬길에 올라 벼슬이 달솔에 이르었다고 기록했을 뿐이다. 달솔이라는 벼슬은 백제 16관등 중에서도 2등급에 이르는 벼슬이었으니 그 신분은 상당히 높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왕족이었거나 혹은 못해도 상당한 고급 귀족 출신에 속하는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김정호가 지은 대동지지에 따르면 계백은 백제의 수도인 부여현 출생의 사람이며, 그 이름은 승(承)이고 성씨는 백제 왕실과 동성(同姓), 즉 부여씨였다고 하였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이와 같은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계백의 본명은 부여승이며, 계백이라는 이름 자체는 또다른 이름일 가능성이 있다[7].

또한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는 해동잡록을 인용하여 계백이 백제 왕족인 부여씨 출신이며, 본래 가잠성의 성주로서 신라의 명장인 김유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면서부터 두각을 드러내었다고 하였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계백을 부여씨라고 하였다. 다만 이러한 기록은 정사라고 할 수 있는 삼국사기 등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기 때문에 쉽게 믿기 힘들다.

2.2 신라의 침공

660년, 신라이 각각 육지와 바다를 통하여 동시에 공격해오자 백제 조정은 혼란에 휩싸이고 말았다. 본래 국경을 맞대고 투닥투닥대던 신라라면 몰라도 당나라가 고구려를 내버려둔채 바다를 건너 백제를 침공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달솔 벼슬을 지내던 계백은 장군이 되어 죽음을 각오한 5천 결사대를 이끌고 출전하여 이를 막게 되었다. 그러나 계백은 이미 전황이 절망적으로 돌아가고 있어 나라를 지킬 수 없음을 직감하고는 "살아서 적의 노예가 됨은 차라리 죽는 것만도 못하다." 라고 말하며 처자식을 모두 자신의 손으로 베어 죽였다.[8]

2.3 황산벌 전투

660년 음력 7월, 좌평인 충상, 상영 등과 함께 죽음을 각오한 5천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 진을 친 계백은 '과거에 구천의 5천 군세가 부차의 70만 대군을 격파했음이니, 오늘날 너희가 가진 힘을 다하여 최후의 싸움을 끝내자'라고 말하며 병사들을 독려했다.[9]

이렇듯 비장한 각오 속에, 계백 휘하 5천 결사대는 그대로 황산벌에서 신라의 대영웅이자 최고의 명장이었던 김유신이 이끄는 5만 신라군을 맞이하였다. 네번의 전투가 이어졌고, 백제는 네 번 모두 신라군을 격퇴하는 기적에 가까운 전과를 올린다. 자세한 것은 황산벌 전투 항목을 참고하기를.

백제군이 엄청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승리하는 바람에 신라군이 사기를 잃자, 신라의 장군 김품일이 16세의 어린 아들 관창을 홀로 적의 진으로 돌격하게 했다.[10]

관창은 백제군에게 사로잡혔고, 계백은 어린 나이로 용전한 관창을 가상히 여겨 살려보냈다. 그러나 관창은 재차 나와 싸우다가 또 붙잡혔다. 계백은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싸우는 신라의 화랑, 관창을 보며 어렴풋이 백제의 패배를 예감했다. 그는 관창의 목을 잘라 말 안장에 묶어 신라군 진영으로 돌려보냈다. 예상했던대로 신라군은 관창의 죽음으로 사기가 올라 총공격을 감행했고, 그 기세를 막지 못하고 백제군은 패퇴하였다.

2.4 죽음

결국 계백 휘하 5천 결사대는 거의 전멸하였으며, 계백 본인 역시 이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다만 계백과 함께 전투를 지휘하였던 좌평 충상, 상영 등을 비롯한 20여 명은 살아서 포로로 붙잡혔다.

계백이 황산벌 전투에서 죽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인 사비성이 당군과 신라군의 협공을 받아 함락되었고, 백제의 마지막 왕이었던 의자왕매국노 예식진의 배반으로 인해 사로잡히면서 백제는 멸망하게 되었다.

2.5 사후

일본에서는 백제 멸망이라는 소식을 들은 사이메이 덴노가 병으로 죽어감에도 불구하고 백제를 구하라고 일본 전토에서 싹싹 긁어모아 1차 원군으로 5000명(661년)의 군대를 파견했다.[11] 2차 원군은 663년에 출정했는데 그 수가 2만 7천에 달했다.

백제 멸망 후 봉기한 백제부흥군은 한때 백제 전역에 영향을 끼치고 웅진도독부를 수세로 몰기도 했지만 내부 분열과 신라군의 지원 등으로 인해
663년 2월 기점으로 열세에 밀리고 말았다.

이를 타게하기 위해 663년 8월, 백강에서 백제와 왜 연합군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과 백강 전투(백촌강 전투)라는 결전을 치루었지만 결과는 일본군의 피로 강이 붉게 물들었다라는 기록이 말해주듯이 참혹한 패배였다. 살아남은 왜군과 백제유민들은 그대로 일본으로 도주했고 남은 임존성을 제외하면 백제부흥군들은 당에 대거 투항한다. 임존성의 지수신이 동년 11월까지 농성을 벌였으나 끝내 임존성이 함락되면서 백제부흥운동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백제부흥운동 실패 후,백제 전역은 당과 신라의 각축장이 되어 결국 신라가 671년 웅진도독부를 축출하면서 완전히 신라 영역이 된다.

3 역사적 평가

삼국사기삼국유사의 계백에 대한 기록은 고작 황산벌 전투에 그치며, 그나마도 백제본기나 계백열전에 나와있는 내용보다 신라측 기록에서의 관창열전 등에서 오히려 계백에 대한 묘사가 더 자세히 나와있다. 즉, 계백에 대한 기술은 철저히 신라의 입장에서 쓰여진 기록으로써, 신라인들 역시 비록 적대국인 백제국의 장수이지만 계백의 인품을 존중해주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12].

역사기록엔 이토록 계백에 대한 내용이 부족하지만 신채호가 쓴 조선상고사에서는 해동잡록에 계백에 대한 기록이 좀더 남아있었다며 많이 인용하였는데, 정사로서 인정받지 못하긴 하나 계백은 백제 왕족인 부여씨로써[13] 가잠성의 성주로써 김유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면서부터 두각을 나타내 신라와의 싸움에서 연전연승을 거두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김유신을 이긴 유일한 백제 장수가 계백이라는 것..인데 사실은 알려진 바와 달리 김유신은 오히려 백제에게 여러 번 패배를 당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자세한 것은 김유신 항목의 비판 부분 참고.

그만큼 김유신에게 강하다는 것이고, 그러한 사실을 의자왕 역시 알았기 때문에 소정방의 13만 대군을 막는 것이 아니라 김유신의 5만 대군을 막으라고 보낸 것으로 보인다. 본래 백제는 무역을 통해 과의 관계가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14] 신라군만 막아낼 수 있다면 당군은 협상을 통해 회군시킬 승산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던 것.[15] 이런 상상은 영화 황산벌에서 자세하게 묘사된다.[16]

짧은 일화와 황산벌 전투로 후대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평가를 했는데 대체적으로 충의롭다는 평가를 많이 받았다.

최부와 서거정 등은 계백만이 백제의 충신이라고 극찬했다. 다만 권근은 일가족을 죽인 것을 가지고 냉혹하다며 비판했다. 안정복은 그런 권근을 역으로 비판하며 계백의 충의로움을 칭찬했다.

4 왜 겨우 5천 결사대만을 이끌었는가에 대한 논란

신라가 한강 유역을 공략해 성왕을 전사시키며 그때까지의 나제동맹(羅濟同盟)이 결렬되자 백제는 고구려·일본 등과 친교를 맺고 신라에 대항했다. 고립상태에서 위기에 처한 신라는 중국과 동맹을 맺고 원병을 요청했는데, 당 고종은 소정방을 대총관으로 임명하여 원병을 이끌게 했다. 660년에 나당연합군 18만명(당군 13만명, 신라군 5만명)의 공격이 백제를 향하게 된 것이다. (관련 내용은 백제 항목의 멸망과정 부분도 참조.)

의자왕은 병사를 모았으나 의자왕과 지방세력간의 추락할대로 추락한 관계[17]로 인해 백제가 모을 수 있는 병력이라곤 고작 5천 뿐이었다는 이야기가 한국에서는 널리 퍼져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내용은 이와는 상당히 다르다. 구당서 소정방전(참고문서)에는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이 강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 백제군이 방어진을 치고 있었고, 이에 상륙작전을 벌여 백제군을 격파해서 수천 명을 죽였으며, 당군이 그 후 수륙 병진으로 사비성으로 진격하자 백제는 나라를 기울여 저항하여 대전투가 벌어졌고 이 때 다시 백제군을 격파하여 만여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내용은 삼국사기에도 나온다. 더구나 여기에는 백제군의 전멸을 암시하는 말('살아 돌아간 자가 거의 없었다' 등)이 없으므로 실제 백제군의 규모는 최소 몇만 명 수준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신라와의 싸움에 5천명밖에 동원하지 못한 이유는 어쩌면 의자왕이 진짜 막장이었을 수도 있지만, 사실은 주력이 당군을 요격해야 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왜 이러한 다른 기록이 생겼는지에 대해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몇가지 추정은 가능하다. 우선 통일 이후 신라가 당나라보다는 신라의 전공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기록을 누락시켰거나, 혹은 관련 기록이 남지 않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삼국사기 수록과정에서 당서 기록을 백제본기에서 수록해주었으니 충분했다고 보는 등의 수록과정의 문제일 가능성이 있다. 또는 계백이 동원한 5천은 국왕이 즉각 자신의 권한으로 빼올 수 있는 직속군대여서 바로 급파하였고, 백강 방어전은 인근 지방세력과 5천 병력을 급파한 후에 지방에서 끌어모은 병력이 꾸준히 투입되어서 보강되었을 가능성이다.

5 그 외에

참고로 충남 논산시에 무덤이 남아 있는데, 죽었을 당시 백제 유민들의 손에 의해 무덤이 만들어진 이후, 그냥 계백의 무덤이라는 게 구전으로만 내려오면서 동네 주민들에 의해 돌보아지고 있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에 폭우로 봉분이 씻겨 나가고 안쪽이 노출되었는데, 이때 왜놈도굴꾼에 의해 유해는 물론이고 같이 들어 있던 물품들이 모조리 도굴당하고 말았다.댁들 그러다가 천벌받소... 이래서 안타깝게도 진짜 계백의 무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 서고서도 한참 뒤에서야 충청남도 기념물 제74호로 지정되어서 국가의 관리를 받게 되었다.

여담으로 전쟁을 나서기 전에 가족들을 모두 죽였기에 초기에는 냉혈한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시대부터는 유교의 충(忠)정신을 지켰다고 하면서 모범적인 사람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계백이 황산벌 전투 이전의 역사에서 전혀 이름이 보이지 않는 부분과 의자왕에 대한 의도적 폄하 등으로 미루어 보아 과도하게 띄워졌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한다.

참고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6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KBS에서 방영했던 사극 삼국기에서는 그 유명한 유동근씨가 맡아 열연하였다. 마지막 황산벌에서 전사할 때는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 나오는 전위처럼 부릅 눈을 뜬 채로, 온 몸에 화살이 박힌 채 서서 전사한다.

백제 멸망기를 다루었지만 의외로 의자왕이 출연하지 않은 드라마 천년지애에서 단 한 컷 나온다. 물론 전쟁에서 전사하는 안습한 역할인데다가, 그나마도 연출의 허접함으로 인해 전혀 비장하지 않게 묘사되었다(...)

영화 황산벌에서는 맛깔나는 전라도 사투리 연기를 보여준 박중훈이 열연하였는데 대체로 무척 과묵하고 우직한 성격으로 묘사된다. 영화에서 잔꾀를 잘부리는(...) 김유신의 모습과 대조된다. 여기에서는 결전을 나설때 자기 아내, 자식을 다 죽이는 장면에서 아내가 "사람은 이름때문에 죽는 것이여!"라는 일갈을 듣는다. 정확히는 계백이 아내에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냄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냄기는 법이여!"라고 하면서 죽음을 종용하자 아내가 코웃음을 치면서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씨부려야지. 호랭이는 가죽 땜시 뒈지고! 사람은 이름 땜시 뒈지는 것이여!! 인간아!!!"라고 일갈한다.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장면.

황산벌에서는 김유신이 훨씬 나이가 많고 계백이 젊은 장수로 묘사되는데, 생년이 확실치 않지만 역사가들은 대부분 최소한 김유신보다는 젊었을 것이라 보고 있다 한다. 참고로 이때 김유신 나이는 66세.[18] 환갑도 넘긴 할아버지다.

글동산에서 나온 그림으로 엮은 한국의 역사에서의 계백편에서는 어떤 근거에서인지 젊어서 불교에 귀의했다가 의자왕이 직접 부르러 와서 돌아온다는 설정으로 나온다. 이후로는 계속 중머리. 이후 신라와 고구려를 상대로 연전연승하다가, 의자왕이 사람이 변하자 이에 실망해 다시 절로 들어간다. 이 때 계백을 따르는 친위대 역시 함께 스님이 되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들이 이후 5천 결사대의 중심이 된다. 그림으로 그려진 이미지는 중머리를 한 관운장. 긴 수염에 청룡도를 든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이 당시에 계백에 대한 이미지는 주로 거룩한 희생을 하는 수도승같은 이미지로 그려졌다.

조이온(HQ Team)이 개발한 국산 전략시뮬레이션 게임 '천년의 신화'의 후속작이자, 지금은 완전히 잊혀진 게임인 천년의 신화 2 : 화랑의 혼이라는 게임에서 백제측 영웅 유닛으로 등장하였다. 두 갈래로 갈라진 검을 사용하는데, 원거리 공격이 무려 레이저(…). 특수기술을 사용할 경우 맵 전체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주변에 적이 있을 경우 하늘에서 해당 적에게 번개가 내려꽂힌다. 일정 횟수를 모두 소진하면 비가 그제서야 그친다. 횟수를 강조한 이유는 이 횟수를 모두 소진하지 않으면 비가 무한대로 내리기 때문. 비가 내리는게 뭐가 어떠냐고 물어보면 자원과 관련이 있다. 동사에서 개발한 게임인 임진록과 본 게임의 전작에서는 비가 내려도 자원인 쌀이 다시 자라지 않았지만 본 작에서는 주 자원인 쌀이 자연상태에서도 매우 조금씩 다시 자라며 비가 내릴 시 더욱 많이 자라게 설정이 되어있었다. 또 다른 자원인 물은 애초에 무한이라 별상관이 없었지만, 계백을 뇌우만 쓰고 구석에 박아놓으면 비가 그치지 않으므로 계속해서 자원을 채취할 수 있었다. 백제만 있으면 무한맵이 따로 필요없었…겠지만 게임은 이미 망했고 기억하는 사람들도 거의 없어 이제는 아무래도 좋게 되었다.

웹게임인 콜로니 오브 워에서 69레벨의 HCS 시리즈 기체중 하나로 염동기체이다. 건곤감리코어 구현이 완료된 무휼을 토대로 강화된 기체들이며 그중 이름을 따와 계백이며 3기체중 가동률이 가장 짧은편으로 대략 1시간도 안된다.[19] 대신 마의 구간 후반기 기체인만큼 강력한 무장들이 있으며 공유도 가능하다.[20]

두사부일체에 "계백장군이 계씨면 똘이장군은 똘씨냐??" 라는 드립개그가 나온다. 여담으로 계백 장군의 성씨는 위 항목에도 언급되어있듯 대동지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부여 씨라고 기록 되어있다. 고로 계백은 또 다른 이름일 가능성이 많다. 다만 이러한 기록은 삼국사기 등의 정사에는 언급 되지 않으므로 신빙성이 떨어진다.

오늘날에는 이 장군의 정기가 맑은 백제의 옛 터전에서 군생활을 시작하는 입영장정들도 많다.

6.1 선덕여왕(드라마)의 등장인물

계백(선덕여왕) 문서로.

6.2 MBC사극

계백(드라마) 참조.

6.3 대왕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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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최재성이 연기 했다. 최재성은 원래 김유신 역을 맡을 예정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부상으로 인해 하차했다가 결국은 계백 역할로 합류하게 됐다. 이를 만회할 생각이기라도 하는지 첫 등장부터 무쌍을 찍으며 등장. 의자왕으로부터 김춘추를 산 채로 잡아가기 위해 좌평 흥수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왔다.

황산벌 전투에서는 그야말로 백제편의 최종보스 다운 활약을 보여주었다. 전쟁 전에 김유신(김유석)과 나무 아래서 술잔을 나누는 짠한 장면을 보여주었고 역사대로 반굴관창을 죽이고 김유신 앞에서 최후의 저항을 펼치다 날아오는 화살에 맞고 칼에 베여 피칠갑 상태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김유신은 명장의 예우로 계백을 장사지냈다.

  1. 삼지창을 든 것이 1966년, 창이 없는 것이 1979년 작이다. 옮겨진 이유에 대해서는 무성한 소문만 있을 뿐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2. 최근 논산 군사박물관에 새로운 계백 장군 동상이 건립되었다.
  3. 음력 7월 9일 의자왕 21년
  4. 애초에 초등학교 역사교육시에도 영웅으로 가르치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 전통은 삼국사기에서부터도 이어져 오던 전통.
  5.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도 김유신이 소극적으로 나오자 하는 말
  6. 이 말을 듣고 김유신은 잠시 표정이 일그러지다가 이내 니 우째 알았노? 내는 계백이 갸가 무섭데이...억수로 무섭데이라고 받아친다.
  7. 다만 대동지지의 기록은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애초에 대동지지는 역사서가 아니라 지리서이기 때문. 그러나 지리서라고 해서 마냥 무시해도 되는건 아니다. 고려말엽 이전까지 역사란 국가의 흥망성쇠를 군주의 입장에서 기록한 것이 거의 전부였고, 아주 약간을 열전이라 하여 다른 인물을 기록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때문에 정사에서는 비중있게 다루지 않는 고을읍현의 옛지명이라거나 향족, 거족 등의 인물은 지리서에 주로 기록되었다.
  8. 아들이 없고 딸만 있었거나 아들이 어렸을 것으로 보인다. 장성한 아들이 있었다면 신라 측의 김품일이나 김흠순의 들처럼 전장에 데리고 나왔을 터. 그래서 계백은 황산벌 전투 당시 의외로 젊은 나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있다.
  9. 계백은 이 말에서도 차마 '이기자'는 표현은 쓰지 못했다. 사실 처자식을 벤 시점에서 이미 상황이 절망적임을 깨달았다고 해야 옮다.
  10. 관창 이전에 화랑인 반굴 역시 마찬가지로 백제군으로 닥돌해서 죽었지만 왠지 관창에 비해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11. 이 일본군이 한반도에 도착하던 날 사이메이 덴노는 사망했다.
  12. 다만 '인품 존중' 같은 이유보다는, 의자왕을 정말 '막장' 으로 만들기 위한 장치였다는 설명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즉 계백을 띄워주는 것만으로도, '의자왕은 이렇게 훌륭하고 충성스러운 신하를 죽게 만든 폭군' 이라는 결론이 자동으로 나오기 때문. 물론 이에 더해, 충신이라는 점에서 추모받았다는 점도 한 요인이 될 수는 있겠다.
  13. 조선시대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에서도 계백의 성이 부여씨라고 기술되어 있다. 또한 위에서 기술한 것처럼 당시 의자왕과 귀족들 사이가 벌어질대로 벌어져 있었고 5천 결사대는 국왕 직할 병력이었을 가능성이 크므로 그 병력의 지휘관인 계백도 왕족으로 보는 것이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14. 하지만, 당나라 고위급들은 전에 백제가 수나라와 고구려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다 결국 고구려에 붙어버린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15. 하지만 당태종의 고구려 침략 때 신라는 당의 요청에 따라 고구려로 군대를 보냈는데 백제는 고구려를 공격하지 않고 정작 고구려 파병 때문에 방어체계에 구멍이 뚫린 신라를 공격한 적이 있다. 원래 당은 백제를 어르고 달래서 신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로 파병하라고 설득 중이었는데, 이 사건 이후 외교관계에 있어 백제보다 신라를 우선시하게 된다. 특히 수나라 때부터 백제는 파병하겠다고 말로만 하고, 실제로는 단 한 번도 고구려로 파병한 적이 없는 반면 신라는 백제가 틈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김춘추의 억지로 군대를 보낸 것이라 당은 백제를 불신하고 신라를 더 신뢰하게 된다. 그렇다고 당과 백제의 국력이 비슷한 것도 아니고. 신라가 없었다면 모를까 당시 백제가 당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낼 확률은 낮다고 봐야한다.
  16. 작중 의자왕이 보낸 서신 중 '네가 하루 이틀만 더 거시기 해뿔면 나가 소정방이와 쇼부(...)을 쳐불텐디. 알아먹었제?' 라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작중 소정방의 모습은 'ㅎㅎㅎ 백제땅도 먹고, 신라땅도 먹고염 ㅋㅋㅋ'이런 식이라 어찌됐을지는...
  17. 의자왕의 왕권강화 움직임으로 인해 백제 귀족세력과 의자왕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고, 그것은 이 시기에 이르러 절정에 치달아 있었다.
  18. 그래서, 김유신 배역을 맡은 정진영은 나이가 들어보이고 흰 수염을 기르고 있다.
  19. 대략 50분 후반이며 김유신장군 모티브인 유신과 을지문덕장군 모티브인 문덕에 비하면 기름먹는 하마, 게임할때 콜로니밖에 1시간정도 방치하면 그야말로 우주미아다.
  20. 3기 전부 슬롯이 3개고 식별이 HCS로 공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