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모토 세이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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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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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시대의 반영이나 사상의 빛을 받아 변모를 이루어 간다.”

まつもとせいちょう | 松本清張. 본명은 마쓰모토 기요하루. 필명인 세이초는 본명 기요하루의 한자를 음독으로 읽은 것.
(1909년 12월 21일 ~ 1992년 8월 4일)

일본의 추리소설가. 단순한 추리소설가를 뛰어넘어 거장으로 추앙받고 있다. 일본문학의 거인이자 진정한 국민작가 이며, 사회파추리소설이란 새로운 장르를 창시하고 이끌어간 사회파 추리소설의 아버지이다.

일본 추리소설의 여왕 미야베 미유키는 '세이초의 장녀'를 자처하고 있으며 그녀를 위시하여 요코야마 히데오, 모리무라 세이이치, 키리노 나츠오, 타카무라 카오루 등의 사람들이 세이초 월드를 이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위키에서 항목 개설이 가장 늦은 추리소설가 중 한 명이다. 다른 항목에 링크는 무지하게 많이 걸려 있는데 다 빨간색이다 이 항목에도 빨간색이 무지하게 많은 것이 한국 추리소설계의 유구한 안습의 역사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 외에도 이미 언급한『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의 편집을 직접 맡은 미야베 미유키, 마쓰모토 세이초 연구서를 다수 발표한 아토다 타카시, 세이초 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두각을 드러낸 요코야마 히데오, 야마모토 켄이치 등 일본의 많은 작가들이 마쓰모토 세이초를 읽고 사랑하고 있다.

워낙 열정적인 창작활동을 벌인 덕에 생전에 "글공장을 돌린다"라는 루머에 시달린적이 있다. 일본 내에서도 실제 지면상으로 몇몇 평론가들이 이걸 두고 작가를 공격하기도 했다. 국내에 출간된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에도 한국의 평론가가 마쓰모토 세이초를 해설하면서 이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당시 이 루머를 그대로 믿고 마쓰모토 세이초를 깐 적이 있는 이어령 교수 또한 이 책에서 다른 일본 평론가들과 함께 까이고 있다.
여담으로 사회파 추리소설가이지만 <점과 선>에선 본격 추리적 요소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2 생애

1909년 호적상으로는 키타큐슈의 코쿠라에서 실제로는 히로시마 현 히로시마 시에서 태어난 세이초는 가난한 집안을 부양하기 위해 이타비쓰 심상고등소학교만 마치고 바로 취직했다. 작은 전기회사의 급사였다 카더라. 아버지가 잡역부 등 막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리는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신문기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독서하였다. 그러나 대학을 나온 사람이 아니면 신문기자가 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꿈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27세 때 지사장에게 용감하게 편지를 써 신문기자로 아사히신문에 입사하였으나 거기서도 학력에 따른 차별을 맛보고 다시 한번 좌절했다 한다.

평소 교련에 잘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징집되어 입대하여 이듬해 6월에 전속되어 위생병으로 근무하였으나 일본의 패망을 맞고 귀국하였다. 1944년 임시 소집으로 구루메 시 제86사단 보병 제187연대에 입대, 다시 보병 제78연대 보충대외 소속되었다. 원리는 뉴기니에 갈 부대였으나, 예정과 달리 한국 경성부 용산에 주둔하였다. 1945년 전라북도 정읍에 배치되었다. 패전을 정읍에서 맞이한 후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한국에 1~2년 정도 머물렀다.[1][2] 귀국한 후 아사히 신문사로 복귀하였다.

그리고, 생계를 위해서 근무 중에 쓴 ‘사이고사쓰’가 주간 아사히의 백만인의 소설에 응모된 총 992편의 작품 가운데 3등으로 입선하면서 41세라는 늦은 나이에 등단했다. 원래는 등수가 더 높았으나 아사히 신문사 직원이란 이유로 밀려났다!!! 동족혐오?[3] 소설 줄거리 구상은 출퇴근 시간에 걸어다니며 했다고 한다.

1952년 미타문학에 '어느 '고쿠라 일기' 전'을 발표했다. 이 ‘어느 '고쿠라 일기' 전’은 당초 나오키상 후보가 되었지만, 낙선한다. 그러나 당시 나오키상 심사위원이었던 나가이 다츠오에 의해 "이 소설은 나오키상이 아니라 아쿠타가와상에 더 적합한 작품"이라는 평을 들음으로서, 후에 아쿠다가와상 선고위원회에 넘겨지고 전형 위원의 한 사람이었던 사카구치 안고로부터 격상을 받아 마침내 제28회 아쿠다가와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1955년, 세이초는 최초의 사회파 추리소설인 ‘잠복’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추리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일반적인 소설처럼 인간성이 드러나는 추리소설을 읽고 싶다고 평소에도 말하던 그는 그 이후로도 제10회 일본탐정작가클럽상 등을 받은 단편집 〈얼굴〉은 등 수많은 추리소설들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58년에 발표하여 베스트셀러가 된 추리 소설 ‘점과 선’, ‘눈의 벽’은 범죄의 동기를 중시한 ‘사회파 추리소설’로 불리며 세이초 붐을 일으켰다. 심지어 '세이초 이전, 세이초 이후'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 후에도 왕성한 필력을 발휘하여 ‘아지랑이 그림’, ‘검은 화집’, ‘비뚤어진 복사’등을 출판하였다.

또한 그는 제로의 초점, 너를 노린다, 모래그릇 등을 내며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또한 ‘일본의 검은 안개’와 같은 논픽션 장르에서도 새로운 작업 방식으로 새 지평을 열었다. 1964년부터 1971년까지, 세이초는 주간문예지 《문예춘추》에 《쇼와사 발굴》(昭和史発掘)을 연재하였는데, 일본 현대사의 유일한 군사 쿠데타라고 할 수 있는 2.26 사건을 시작으로 쇼와 시대의 은폐되고 잊혀졌던 여러 사건들과 그 정치적 내막을 관계자 취재나 사료에 근거해 그렸다. 당시의 산 증인을 찾아내어 새로운 증언들을 확보하기도 하고, 누구도 본 적이 없는 자료들을 집요하게 찾아냈는데, 연재 도중 일본 우익의 거물로부터의 항의로 불려나간 자리에서도 세이초는 자신이 쓴 글에 오히려 하나하나 근거를 제시하며 조목조목 설명했고 이에 그 거물은 그를 풀어주었다는 일화도(...).[4]

고대사 부분에도 많은 관심을 보여서 고대사를 다룬 역사소설과 논픽션을 썼으며, 본인이 사회자로써 직접 역사 다큐멘터리를 진행하기도 했다. 고대사는 자료가 너무 없기 때문에 상상력을 자극하고, 근현대사는 자료가 너무 많기 때문에 그것을 교차검증하여 진실에 다가가는 과정에서 매료된다는 것이 세이초 본인의 설명이다. 다만 야마타이국의 위치 논쟁에 있어서는 아무래도 본인의 연고가 있다는 점에서(...) 규슈를 지지했으며, 여왕 히미코의 죽음에 대해서는 '타살'이라는 독특한 가설을 내놓기도 했다.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는 히미코의 죽음 바로 전에 구노국과의 왕 히미코코와 전쟁을 벌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구노국와의 전투에서 야마타이국은 패배했으며 히미코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사제'로써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5] 이러한 세이초의 고대사에 대한 가설들은 현대에 와서는 대부분 사실과는 맞지 않는 것으로 확인되었지만, 오히려 세이초라는 당대의 대문호가 역사를 연구하고 학설을 발표한다는 사실 자체 때문에, 세이초가 있는 동안은 전문적인 사학자들도 텔레비전 같은 매체에서 적당히 말할 수만은 없는 어떤 분위기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고고학자 모리 고이치(森浩一)는 술회하고 있다.[6]

1992년 임종을 맞을 때까지 편수로 1000편 이상의 작품을 남기며 수준 높은 작품을 단기간 내에 초대량으로 만들어내는 어마어마한 작밀레를 보여주었다.[7][8] 이와 같이 끊임없이 노력하며 스스로 공부하고 여러 장르에서 대활약을 펼친 그는 실로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라고 해도 무방할 듯 하다. 죽기 3년 전인 1989년 6월 10일에 작성된 세이초 자신의 유서에는 "나는 노력만은 해왔다(自分は努力だけはして来た)"는 글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1998년 고향인 기타큐슈 시립 마쓰모토 세이초 기념관이 개관하였다.
2009년 기타큐슈 시에서 마쓰모토 세이초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 설비하였다.

3 작품목록

한국에 출판된 작품들만 나열, 추가바람.

  1. 세이초의 소설 가운데 「진위의 숲」에는 조선이니 조선총독부니, 심지어 종로파고다공원이니 하는 한국인에게 굉장히 익숙한 단어들이 등장한다. 그의 작품 중에는 실제로 「백제의 풀」(원제: 百済の草)이라는 제목의 소설이 존재하는데, 물론 배경이 백제인 것은 아니고 해방 직전의 한국의 모습을 다룬 소설이다. 1964년에 발간된 세이초의 소설집 《현란한 유리(絢爛たる流離)》에 실려 있으며, 한국에는 아직 번역되어 있지 않다.
  2. 또한 아예 임화 한 사람을 놓고 쓴 「북의 시인, 임화」(원제: 北の詩人)라는 소설과 논픽션을 섞은 형태의 작품도 있는데, 내용은 해방 뒤 결핵이 심해진 임화가 미군정으로부터 약을 타먹다 해방 전 총독부 경찰에게 전향서를 썼다는 약점 때문에 미군정의 스파이 노릇을 하게 되었고 결국 1953년에 북한에서 미제의 간첩으로 몰려 사형당하고 만다는, 임화가 미제의 간첩이었다는 북한에서의 판결을 그대로 전재한 듯한 다분히 충격적인 내용 때문에 이어령은 세이초를 정신병자라고 욕하기도 했으며, 정영진은 이를 반박하는 실명소설을 쓰기도 했다. 당시 자료의 한계 문제도 있지만, 세이초가 특별히 북한을 지지했다거나 한 것은 결코 아니니 오해하지는 말자. 일본의 검은 안개 항목 참조.
  3. 라고는 하지만 아사히 신문사에서 주관한 소설 공모에 그 아사히 신문사에 근무하는 직원이 높은 등수를 받는 것도 제 식구 챙기기로 오해를 살 부분이 있다.
  4. 이때 세이초가 필요로 하는 자료를 모아주고 그의 담당 기자를 맡았던 후지이 야스에는 기타큐슈에 세워진 마쓰모토 세이초 기념관의 관장이 되었다.
  5. 여기서 세이초가 근거로써 제시한 것이 《삼국지》 부여전의 "곡식이 익지 않으면 왕에게 죄를 돌려 왕을 죽여야 한다고까지 했다"는 기록이다. 고대의 제정일치 사회에서 군주는 통치자이자 제사장으로써 필요한 '영험'이 없다고 여겨진다던가, 천재지변이 일어난다던가, 전쟁에서 패배한다던가 하는 일이 생길 경우 '장로'로써 책임을 지고 죽어야 하는 관습이 있었고, 히미코 또한 구나코쿠와의 전쟁에서 패한 책임을 물어 장로이자 제사장으로써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6. 또한 정치사 중심으로만 이루어지던 일본 학계의 경향에 대해 국제적인 인적 교류나 무역사의 시점을 강조하거나, 한국이나 중국 같은 대륙 문화의 영향을 비중있게 평가하던 당시의 학계 풍조에서 조로아스터교 같은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력을 강조한 점 등은 일본 학계에 적지 않은 자극이 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7. 이렇게 너무 많은 작품을 '찍어내듯이' 발표하는 세이초가 실은 김화백(...)처럼 밑에 다른 자잘한 '스탭'들을 거느리고 대필하게 하는 식으로 소설을 써내는 것 아닌가... 라는, 이른바 '세이초 공방(工房)'에 대한 의혹까지 도는 바람에, 세이초 본인이 집필하고 교정을 본 흔적까지 남아 있는 친필 수정 원고까지 공개해야 했다고. 물론 대필 의혹은 사실이 아니다. 세이초 본인은 여러 작품을 같은 시간에 돌아가면서 한꺼번에 쓰는, 이른바 '교환작업'이라 불리는 과정으로 여러 편의 소설들을 썼다고.그런데 인간이 그게 가능하긴 한가?
  8. 이러한 '세이초 공방' 의혹은 세이초가 소설을 쓰던 당대에도 있어서, 작가 히라바야시 다이코(平林たい子)가 한국의 잡지 《사상계》 1962년 8월호에서 대놓고 "몇 명의 비서를 시켜 자료를 모아들이게 하고 그 자료를 쓸 뿐이니 마쓰모토로 말하자면 인간이 아니라 타이프라이터라고 할 수 있다." 고 발언하기도 했고, 이에 세이초는 "사무처리 하는 어시스던트가 한 명 있을 뿐 사실과 어긋나는 것"이라고 일본독자신문(日本読者新聞)에서 반론하였다. 다작의 결과 만년에 손에 경련이 오면서부터는 사람을 시켜 자신이 소설 내용을 불러주고 받아쓰게 시킨 후, 거기에 세이초 자신이 가필, 교정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