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저민 해리슨

1 미국 건국의 아버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앤드루 애덤스존 애덤스새뮤얼 애덤스토머스 애덤스
존 앨솝에이브러햄 볼드윈존 배니스터조사이아 바틀렛
리처드 바셋건닝 베드퍼드 주니어데이빗 브렐리에드워드 비들
존 블레어리처드 블랜드윌리엄 블라운트사이먼 보름
카터 브랙스턴제이콥 브룸피어스 버틀러캐럴턴의 찰스 캐럴
대니얼 캐럴리처드 캐스웰새뮤얼 체이스에이브러햄 클라크
윌리엄 클링건조지 클라이머존 콜린스슈테판 크레인
토머스 쿠싱프랜시스 대나조나단 데이턴사일러스 딘
존 드 하트존 디킨슨윌리엄 헨리 드레이턴제임스 두에인
윌리엄 듀얼엘리퍼릿 다이윌리엄 엘러리윌리엄 퓨
토머스 피츠시먼스윌리엄 플로이드나다니엘 폴섬벤저민 프랭클린
크리스토퍼 개즈던조셉 갤러웨이엘브리지 게리니콜라스 길먼
나다니엘 고램버튼 그윈넷리먼 홀알렉산더 해밀턴
존 핸콕존 핸슨코르넬리우스 하니트벤저민 해리슨
존 하트존 하비패트릭 헨리조셉 휴이스
토머스 헤이워드 주니어새뮤얼 홀텐윌리엄 후퍼프랜시스 홉킨슨
슈테판 홉킨즈티투스 호스머찰스 험프리스새뮤얼 헌팅턴
리처드 허슨제러드 잉거솔존 제이토머스 제퍼슨
토머스 존슨윌리엄 새뮤얼 존슨루퍼스 킹제임스 킨제이
존 랭던에드워드 랭워시헨리 로렌스프랜시스 라이트풋 리
리처드 헨리 리프랜시스 루이스필립 리빙스턴윌리엄 리빙스턴
제임스 러벌아이작 로우토머스 린치헨리 머천트
제임스 매디슨존 매튜스제임스 매켄리토머스 매킨
아서 미들턴헨리 미들턴토머스 미플린거버니어 모리스
루이스 모리스로버트 모리스존 모턴토머스 넬슨 주니어
윌리엄 파카로버트 트리트 페인윌리엄 패터슨에드먼드 펜들턴
존 펜찰스 코트워스 핑크니찰스 핑크니페이튼 랜돌프
조지 레드조셉 리드대니얼 로베르도시저 로드니
조지 로스벤저민 러시에드워드 러틀리지존 러틀리지
나다니엘 스커더로저 셔먼제임스 스미스조너선 베이야드 스미스
리처드 스미스리처드 돕스 스페이트성 토머스 제니퍼의 대니얼리처드 스톡턴
토머스 스톤존 설리번조지 테일러에드워드 텔페어
매튜 손턴매튜 틸먼니콜라스 반 다이크조지 월턴
존 월턴새뮤얼 워드조지 워싱턴존 웬트워스 주니어
윌리엄 휘플존 윌리엄스윌리엄 윌리엄스휴 윌리엄슨
제임스 윌슨헨리 위스너존 위더스푼올리버 월코트
조지 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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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해리슨 5세.

벤저민 해리슨 22대 대통령의 조상이며, 독립선언서를 사인하였고,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다.

2 미국의 23대 대통령

미국 대통령
22대23대24대
그로버 클리블랜드벤저민 해리슨그로버 클리블랜드
공식 초상화
풀네임Benjamin Harrison
출신 정당공화당
생몰년1833년 8월 20일 ~ 1901년 3월 13일(77년 6개월 21일)
재임기간1889년 3월 4일 ~ 1893년 3월 3일(3년 11개월 30일)
서명
16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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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지좀 씹고 다닌 시절. 변호사 활동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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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호 할아버지가 돼서.

미국 제23대 대통령. 풀네임은 벤저민 해리슨 6세(Benjamin Harrison VI)다. 9대 대통령이자 재임 1개월만에 죽은 것으로 유명한 윌리엄 해리슨의 손자다.

3 생애

3.1 성장

1833년 8월 20일 할아버지 월리엄 해리슨의 오하이오주 농장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대통령이 되기 전이었지만 그가 태어날 당시 할아버지는 이미 미국의 유명인사였고, 아버지인 존 스콧 해리슨은 연방 상원의원을 지냈으며, 해리슨의 증조부는 독립선언서 서명자 명단에 버지니아주 대표로 이름이 올라가 있다. 그 증조부의 이름도 벤저민 해리슨(아마 윌리엄이 손자 이름을 자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은듯 하다). 이렇듯 엄청나게 빵빵한 정치 명문가 출신이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포인트 농장은 24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광할한 농장이었지만 그가 성장하던 무렵에는 할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서인지가세가 기울어 명문가 출신들이 흔히 가던 동부의 대학에 가지 못하고 오하이오의 농민대학과 플로리다 마이애미 대학에서 학업을 마쳤다. 대학생 시절에는 연설능력이 뛰어나 토론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 후 인디애나폴리스에서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했는데 뛰어난 말솜씨로 많은 승소판결을 이끌어내는 유명 변호사였다고 한다. 제법 인기 있는 변호사였던 듯하지만 그 말솜씨와 별개로 사교성이 워낙 떨어져서 '빙산', '고드름'과 같은 별명이 따라다녔다. 그리고 공화당에 입당한 것도 이 무렵.

얼마 후 남북전쟁이 터지자 전쟁에 참전했다.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윌리엄 테쿰세 셔먼 장군과 함께 싸웠다는 경력이 전부라는 정도로 적고 있지만 사실은 그 뿐 아니라 조지아의 피치 트리 크릭에 주둔하고 있던 수많은 남부연합군을 돌파하여 부하들을 애틀랜타의 중요 작전지역으로 이동시키는 전공을 세운 적이 있다. 이 공으로 육군 대령으로 승진했다. 가문의 힘이 작용하기는 했지만 그의 파격적인 승진은 꼭 가문의 힘만은 아니었다는 소리.

3.2 대통령에 당선되다

전쟁이 끝나고 공화당 내에서 활동하며 인디애나 주 주지사에 두번이나 출마했지만 모두 낙선. 1881년 가문빨이 작용했는지 인디애나주 입법부가 만장일치로 그를 연방 상원의원으로 선출했지만 이마저도 1887년 민주당이 주 입법부를 장악하자 상원에서 또 낙선 크리를 먹었다. 이 낙선 후보는 이듬해인 1888년 바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선언을 했고 그로버 클리블랜드를 상대로 선거운동에 돌입했다. 당시 공화당은 타락한 부패정당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서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었고 클리블랜드의 강직함과 개혁 열풍 때문에 민주당이 지지를 받고 있었는데, 해리슨 개인적으로도 클리블랜드 못지 않게 청렴하고 강직한 인물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해리슨 본인은 퇴역군인 연금과 흑인의 시민권 부여, 외국상품에 대한 높은 관세 유지를 주창하는 등 현안에 중점을 두어 선거운동을 벌였으나 그의 참모들은 클리블랜드에 대한 흑색선전과 비방을 일삼아서 해리슨의 선거운동은 빛이 바래버렸다. 더욱이 영국 대사에게 선거에 대한 조언을 요청했는데 영국 대사가 "우리는 클리블랜드를 원한다!"는 드립을 치자 영국과 앙숙인 (클리블랜드의 승리의 동력이었기도 했던) 뉴욕주의 아일랜드계 유권자들이 클리블랜드에게 등을 돌려 버렸다. 결국 대선에서 클리블랜드는 해리슨에게 9만여표는 앞섰지만 선거인단에서 233대 168로 지는 바람에 결국 해리슨은 백악관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3.3 대통령 재임

해리슨은 공약대로 1890년 퇴역 군인에 대한 연금법안을 제정했다. 이 법은 퇴역한 상이군인과 그 부양가족에 대한 보상을 확대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당시 공화당 의원 윌리엄 매킨리가 주장한 '매킨리 관세법'을 제정했는데 이것은 수입 상품에 매기는 관세를 높이 올리는 법안이었다. 또한 미국 국고에 매달 450만 온스의 을 매입하게 하는 법을 제정했는데 이 법들은 수입 상품 가격이 폭등하자 덩달아 다른 상품의 가격이 뛰는 바람에 물가가 올라 버려 불황을 초래해 버린 데다가 은을 구입하기 위한 자금을 또 금과 은으로 땜빵하는 바람에 은을 많이 보유한 사람들이 은을 다시 금으로 상환받아서 국고에 금이 고갈되어 버려 결국 불황을 초래하고 말았다.

또한 당시 미국에 만연하던 대기업의 독점체제 '트러스트'를 견제하기 위해 1890년에 '셔먼독점금지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 자체는 당시로서는 대단히 과감한 정책이었으나 해리슨의 추진력은 이 정책을 밀어 붙이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기업과 정치인들의 유착이 심해서 기업간의 합병과 담합은 그대로 지속되었다. 이 법이 제대로 작용한 것은 훗날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집권했을 때였다.

외교와 국방 면에서는 라틴 아메리카 국가와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우호적 무역 협정을 추진했으며 해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해군을 현대적으로 무장시키는 기반을 닦았다. 또한 해리슨은 중앙아메리카 어딘가에 태평양대서양을 잇는 운하의 건설이 필요한 것 같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결국 이것은 약 10여년 뒤에 파나마 운하가 착공되면서 이루어지게 된다.

해리슨은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다. 대통령으로서 세부적인 면도 매우 꼼꼼히 챙겼고, 다른 부서의 전문가들이 못미더웠는지 대통령이 된 후 16개월 동안 거의 매일 1,700명(...)에 달하는 정부 임명직의 후보자들을 직접 면접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그러나 이런 독자노선은 의회와 공화당과 마찰을 겪어 결국 지지를 잃게 되었고 법 제정은 하면서도 정작 법을 시행하는 데는 상당히 소극적인 입장을 유지해서 나라의 발전은 그다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인사가 만사라는 시각에서 본다면 적절할 수도 있지만, 진짜 인사가 만사였다면 다른 부서의 전문가들을 제대로 보는것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당시 유력한 공화당 상원의원 토머스 플랫은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백악관 밖에서 마주앉아 저녁식사를 하면 그는 아마 공손한 신사일 것이다. 그러나 백악관 안에서 어떤 공직을 청하는 사람을 접견할 때 그는 시베리아에서 모피를 벗은 것 같이 차갑고 냉담한 모습이다."[1]

해리슨에 대한 평가는 당시 미국시민봉사위원회 위원장인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평가가 가장 압권이다.

빌어먹을(Damn) 대통령! 그는 냉혈한이고 편협하고 속은 좁고 고집불통에 소심하게 오래된 찬송가나 부르는 인디애나폴리스의 대통령이다."

과연 비범한 테디의 기상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공화당에 끌려다니기만 했다고 적고 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공화당 각료들과는 다른 독자노선을 고집했다. 바로 그때문에 여당과 마찰을 겪으면서 정책은 제대로 시행되지는 않았고 그 개인도 공화당 의원들을 설득하고 타협하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해리슨 개인적으로도 사람을 만나는 것을 싫어했고 그의 쌀쌀맞은 인간성 또한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강직한 면모나 개인적으로는 청렴했던 점, 그리고 고집이 셌던 성격은 대권을 두고 다툰 숙적 클리블랜드와 제법 비슷하다.

또한 경제 공황이 지속되자 1890년 민주당에게 전체 하원 의석의 2/3를 내주고야 말았다.

3.4 퇴임 후

1892년 해리슨은 백악관 탈환을 노리는 클리블랜드와 다시 격돌하게 되었다. 그러나 선거 2주 전 영부인 캐롤라인이 사망하자 의욕을 상실하고 선거운동을 하지 않았다. 다만 이것은 당시 출마했던 모든 후보(클리블랜드, 농민당의 위버, 금주당의 피드웰)이 모두 예의를 지켜 선거운동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역시 매킨리법에 의해 빚어진 불황으로 유권자들의 지지를 상실해서 결국 클리블랜드에게 떡실신. 백악관을 나와야만 했다.

퇴임 후에는 인디애나주에서 변호사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1894년에는 스탠포드대학에서 강의를 했으며 베네수엘라 국경선에서 일어난 영국령 기아나와 베네수엘라 간의 국경 분쟁에 대해 베네수엘라 측 법률고문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1892년 영부인을 잃었지만 이 노인은 퇴임 후 자신보다 25세 연하의 여성인 메리 디믹과 재혼했고 63세였던 1897년에 그녀와의 사이에서 딸을 얻었다. 클리블랜드가 27세 연하의 여성을 키잡까지해서 결혼한 것에 비하면 포스가 딸릴지도 모르지만 '이런 쪽'으로도 클리블랜드와 닮았다.(...) 어쨌든 퇴임 후에도 공직생활을 하면서 다망하게 지내다가 1901년 3월 13일 폐렴으로 숨을 거두었다.

해리슨 개인적으로는 강직하고 청렴한 인물이었다. 일도 나름대로 열심히 했고 뛰어난 말솜씨의 소유자로 이름이 높았지만,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의 역량이나 반대파들을 타협하고 중재해나가는 능력과 정책을 밀어붙이는 추진력은 많이 부족했고 특히 친화력도 상당히 떨어져서 정책 수행에 스스로 걸림돌을 만들었다. 결국 이런 면모는 대통령으로서의 평가를 떨어뜨렸다.

4 여러 이야기거리

키가 167.7cm이었는데 8대 마틴 밴 뷰런과 함께 역대 미국 대통령 중 2번째의 단신이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꼬마 해리슨(Kid Gloves Harrison)', '작은 벤(Little Ben)'.

말솜씨는 뛰어났지만 정작 유머감각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던 듯하다. 무대체질(?)이었는지 모르지만 사람이 수많은 청중들 앞에서 연설할 때는 펄펄 날아다녔지만 개인적으로 사람을 독대할 때는 침묵을 지켰다고(...) 오죽 사람이 냉정했으면 그와 악수한 어떤 사람은 "시들어 버린 피튜니아 같은 악수"라고 평가했을 정도다. 친화력이 부족했고 감정 표현도 서툴렀던 해리슨 본인은 말년에 '감정 토로에 있어서나 대통령의 관점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거의 동요 없이 자신의 일을 처리해야 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회상한 바 있다.

나름 유머감각을 발휘한 사례를 들면, 대통령 시절 인디애나 출신의 어떤 사람이 해리슨에게 청탁을 했다. "와바시 지역에 새 우체국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는데 해리슨이 이유를 묻자 "지금 우체국장이 민주당원이니까요"라고 대답했는데 해리슨은 당연히 그게 무슨 이유같지도 않은 이유냐며 반문했다. 그러자 이 사람이 "제 기억이 맞다면 클리블랜드가 대통령께 진 이유는 바로 민주당이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자 해리슨은 이렇게 받아쳤다고 한다.

"그렇지요. 하지만 제 기억이 맞다면 클리블랜드는 임기를 완전히 마쳤습니다. 저는 우체국장도 임기를 채우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 대선에서 참모들과 함께 개표 결과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뉴욕의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서 참모들이 당황하자 해리슨은 태연하게 있었다고 한다. 해리슨은 당황하는 참모들을 보고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닌데 뭔 걱정들 하나? 우리 텃밭인 인디애나주에서만 승리하면 되지. 낙선하면 고향에서 살면 되는 거고"라며 허허 웃었다고. 이윽고 밤 11시에 인디애나주에서 이겼다는 보고가 오자 해리슨은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접한 해리슨의 친구가 축하전화를 해 주려 했지만 해리슨이 자고 있어 연락하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친구가 해리슨에게 "자네 왜 그리 일찍 잤는가?"라고 묻자 해리슨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가 졌다면 밤을 새도 달라질 건 없지. 하지만 내가 당선된다면 다음날 얼마나 할 일이 많겠나. 그래서 밤에 푹 자 두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 일찍 잔 걸세."

제법 대인배의 기상이 느껴지는 일화. 참고로, 뉴욕주도 이겼다.[2]

비록 단명한 대통령이긴 하지만 할아버지인 윌리엄 해리슨을 상당히 자랑스러워 했다고 한다. 남북전쟁에 참전한 이유 중 하나가 본래 군인이었던 할아버지의 노선을 타기 위한 면도 있었고, 뇌물이나 청탁이 들어와도 "내 할아버님의 명예를 봐서라도 안 되네"라고 거절했을 정도였다. 할아버지 드립을 치는 것이 농담이 아니라 거의 모 살인탐정이나 모 삼국지 하렘 주인공 수준이었다고 한다.

우연의 일치였는지 할아버지 윌리엄 해리슨의 취임식 때도 비가 왔는데 그의 취임식에도 비가 왔다고 한다. 대신 할아버지처럼 무모하게 옷을 벗고 취임 연설을 하지는 않았지만 취임 연설의 내용은 무척 지루했다고.

이 사람이 세운 사소한 기네스가 있는데, 바로 역대 대통령 중 목소리가 남아있는 최초의 대통령이라는 점이다. 사실 음성기록을 남긴 최초의 대통령은 19대 대통령인 러더퍼드 헤이스지만, 그 음성은 현존하지 않는다. 그리고 백악관에서 전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의 재임기. 그런데 해리슨은 감전되는 게 무서워서 전등 스위치를 만지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창작물에서는 낮은 인지도 때문에 그다지 등장하지 않지만왜? 클리블랜드와 같이 남자의 로망실현했는데도! 일본만화 죠죠의 기묘한 모험 제7부 스틸 볼 런의 시대적 배경이 이 사람 집권기의 미국이다. 다만 해당 작품에서 미국 대통령으로 등장하는 가상의 인물인 퍼니 밸런타인과 인물상적 접점은 전혀 없다. 당연히 북미대륙 횡단 레이스도 열지 않았고, 스탠드도 못 쓴다.

  1. 윗 대목을 잘 보면 약간 과장된 인상과 달리 그의 차가움은 엽관 청탁을 거절하는 면모 때문에 더 강조된 감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2. 뒷날 33대 대통령인 해리 트루먼도 비슷한 일화를 남겼다. 재선에 출마했지만 지지도가 낮아서 트루먼 본인도 재선되리라는 기대는 접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지만, 다음 날 일어나 보니 재선에 성공했다는 결과를 보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