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토 가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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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끝내기를 맞고난후.

이름사이토 가즈미(斉藤 和巳)
생년월일1977년 11월 30일
국적일본
출신지교토
포지션투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95년 드래프트 1순위
소속팀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1995~2013)
2003년 일본프로야구 사와무라상
우에하라 고지
(요미우리 자이언츠)
이가와 게이
(한신 타이거스)
사이토 가즈미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
가와카미 겐신
(주니치 드래곤즈)
2006년 일본프로야구 사와무라상
스기우치 도시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사이토 가즈미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다르빗슈 유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1 개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선발투수이자 비운의 유리어깨 에이스. 고질적인 어깨 부상으로 제대로 뛴 기간이 몇 년밖에 되지 않지만, 그 기간에 남긴 성적이 마쓰자카 다이스케, 다르빗슈 유, 이와쿠마 히사시 등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특급이었다. 굵고 짧게 선수생활을 불태웠던 투수.

2 학창시절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에는 언급이 별로 되어있지 않으나 무명인 미나미교토고등학교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었고그러나 고시엔은 가지 못했다 당시 하위권에서 머무르던 다이에 호크스의 눈에 들어 다이에 호크스의 1순위 지명을 받았다.

3 프로시절

3.1 초반

그러나 1996년 프로 입단 1년차때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발목을 잡던 어깨 부상으로 1군에 올라오지를 못했다. 1997년에는 시즌 말쯤에 드디어 1군에 등판했으나 여기서도 난타당하면서 1경기 출장에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1998년에도 어깨 부상으로 1경기 출장에 그쳤다. 덤으로 어깨 수술까지 하면서 투수생명이 끝났다고 판단한 건지 다이에 호크스 구단에서 고등학교 시절 좋은 타자기도 했던 사이토에게 타자로의 전향도 권유하기도 했다. 좌익수로 출전도 시켜봤으나 본인이 투수 아니면 은퇴하겠다고 하면서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재활 후인 1999년에도 1경기만 등판 하면서 이렇게 망한 유망주가 되는가 싶었으나, 2000년 6월 24일 홈경기에서 프로 첫 승리 투수가 되었다!! 2년전 어깨 수술로 같은 병실을 쓰던 고쿠보 히로키가 결승타점을 올려 같이 수훈선수 인터뷰를 한건 덤... 그리고 프로 첫 승리투수와 함께 이 경기에서 1이닝 4삼진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이 첫 승리를 바탕으로 후반기에는 그동안의 시즌에 비하여 무난히 등판하여 5승 2패 4.13을 기록했다. 왕정치 감독이 얼마나 기다렸는지 이 시즌 후에 내년 시즌에 에이스가 될 것이라고 대놓고 인터뷰에서 말했을 정도. 그러나 저 말이 무색하게 또 어깨 부상이 발생하여 1시즌을 거의 날려먹었다. 그나마 2002년 후반에 복귀하여 좋은 모습을 보여줬고 2003년 개막전 선발투수에 등극까지 했다.

3.2 각성

2003년 당시 최고 기록이던 선발 16연승과 함께 근 20년만의 20승을 달성하면서 승률상, 방어율상, 베스트 나인을 차지했으며 사와무라상까지 차지했다.[1] 그리고 이 기세를 몰아 2004년 개막전에서도 승리를 차지했으나, 또 어깨의 문제로 인해 컨디션 난조가 걸리면서 부진에 빠졌다. 10승은 달성했으나 방어율이 6점대까지 치솟는 등 본인으로선 풀타임 뛰고 나선 최악의 시즌을 보냈다.

그리고 2005년에도 어깨 통증으로 개막전 선발을 내주면서 불안감이 조성되었으나 그 이후에 뛰어난 모습을 보여줘 자신의 두번째 선발 14연승을 달성 14연승을 여러 번 달성한 첫 선발투수가 되었다. 다만 오릭스전에서 대량실점을 하면서 방어율이 치솟은건 흠이라면 흠. 그러나 16승 1패 2.92의 기록을 보여주면서 승률왕을 또다시 차지했다. 이 활약을 바탕으로 소프트뱅크로 팀이 바뀐 첫 해다보니 사이토를 잡기 위해 소프트뱅크에서 거액을 제시했다.

2006년도에는 선수회장에도 취임했으며, 룰 수정으로 인해 투구폼을 바꿔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요미우리전 27타자 완봉승, 교류전에서 6구단 상대 전승 등 뛰어난 활약을 보여줬고 이닝 1위, 다승왕, 방어율왕, 승률왕, 최다 완봉상을 차지했다.[2] 덕택에 에가와 스구루 이후에 끊겼던 5관왕 기록을 세웠으며, 사와무라상은 당연히 받았고 퍼시픽리그 MVP도 받는 등 개인 기록면에선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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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팀은 클라이맥스 시리즈 제 2스테이지에서 니혼햄에게 통한의 완투패를 당하며 탈락하고 말았다. 끝내기를 맞으면서 당시 사이토가 보여줬던 모습은[3] 많은 야구인들과 몇몇 리게이사이에서 언급이 되기도 했다. 사이토 본인이 나중에 언급하길 왕정치 감독이 암 수술로 인해 빠지면서 왕감독을 위해 우승컵을 안기겠다고 했으나 그걸 지키지 못해 슬퍼서 울었다고... 이 일화는 BEMANI 시리즈의 악곡 Second Heaven의 모티프가 되었다. 당시 영상

참고로 이 2003~2006년 동안 기록은 64승 16패(승률 .800!, 시즌 평균 16승 4패...)에 사와무라상 2번 수상...[4]

3.3 클라이맥스 시리즈 니혼햄전 완투패 이후

2007년에도 2006년의 활약을 바탕으로 개막전 선발투수에 등극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어깨의 문제가 생기면서 빠지는 경기가 많았고 후에 1군에 올라오긴 했으나 7일 간격 등판 100구 한정을 걸었고 6승 3패 2.74에 그쳤다. 후에 본인이 언급하길 이때 공을 던지고 나면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고 했을 정도니... 그리고 이 시즌 후에 사이토의 1군 등판 기록은 없다.[5]

2008년에는 어깨 건판 복원 수술, 2009년은 재활로 날렸고, 2010년 또 어깨 수술... 다르빗슈 유도 사이토가 없어서 재미가 없었다는 뉘앙스의 인터뷰를 했으며 소프트뱅크에선 본인들이 플레이오프에서 돌린 것도 있고 돌아와서 좋은 공을 던질 거라는 기대감에 재활군 코치로 보직을 변경시켜 재활에만 집중시키기도 했다. 김무영의 증언에 의하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재활을 피나게 한다고...[6] 2011년에도 2012년에도 재활을 했다. 2012년에는 배팅볼 투수를 할 정도로 회복되었고 2013년에는 드디어 100구를 던질 수 있는 몸이 되었으나... 구속이 예전같지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1군에서 뛸 급의 구속도 나오지 않자 바로 은퇴를 해버렸다. 은퇴 후에는 야구 해설가로 활동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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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기자회견. 이천수??

여기까지 읽은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선수생활의 태반이 부상 이야기다...

4 플레이 스타일

최고 152km/h, 평균 144km/h의 패스트볼과 최고 146km/h에 이르는 고속 스플리터를 던지는 우완 파워피쳐이다. 보조무기로 사용하는 커브와 슬라이더도 수준급으로 스플리터의 구속이 증가함에 따라 첫 번째 사와무라 상을 수상했던 2003년에 비해 2006년의 스플리터 구사 비율이 꽤 높아졌다.

이중키킹 금지로 2006년부터는 이중키킹에서 중간에 잠깐 멈칫하는 동작으로 바뀌었는데, 그 디셉션도 타자를 힘들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였다.

통산 승률이 8할대에 육박하다보니[7] 속칭 등판만 한다면 지지 않는 에이스. 다만 포스트시즌의 승률은 영 좋지 않은 편이다.

5 기타

  • 자신의 기록이 어떻든 팀이 이기면 그걸로 좋다의 취지의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이기면 장땡
  • 야구 내적으론 재활도 열심히 하는 선수고 선수 회장까지 역임을 해 선수들에게 신임을 얻는 선수긴 하나, 외적으론 그렇지 못한 듯 보인다. 전부인과 이혼할 당시 DV와 불륜 의혹으로 시끄러웠으며, 이후 재혼 상대인 스잔느와 2015년 3월 이혼하면서 또 다시 불륜 의혹에 시달리고 있다. 약탈혼으로 시작된 결혼이라서 그런지 이번엔 상대 여성에 대한 동정여론은 그다지 없어 보인다 일본내에선 말이 많은 상황 덕택에 일본판 위키백과에선 출처를 분명히 하라고 서두에 적혀있다.
  • 등번호 66번을 은퇴할 때까지 달고 있었는데, 그 이유가 부인 할아버지의 장례식에 부득이하게 당시에 입고 있던 유니폼을 입고 왔으며, 후에 천국에서 보고있는 그 사람이 자기를 못 알아볼까봐 못 바꾸고 있다고. 근데 이혼했다
  1. 당시 이가와 게이와 함께 공동수상.
  2. 이때 당시 방어율 1점대를 기록했는데 옆동네에서도 꼴지팀의 에이스가 1점대 방어율왕을 기록해 약 40년만의 양리그 1점대 방어율왕이 나왔다.
  3. 바로 위의 사진이다. 덕아웃에 갈 때까지도 엄청나게 울었다고.
  4. '03년 20승 3패, '04년 10승 7패, '05년 16승 1패, '06년 18승 5패
  5. 사실 로테이션 관리로 어찌어찌 버티던 선수를 플레이오프에서 무리하게 당겨서 써서 당연한 결과일지도... 그 이유였는지 구단에서 사이토의 재활훈련을 많이 도와주기도 했다.
  6. 다만 2010년에 수잔느와의 열애설이 뜨면서 까이기도 했다. 참고로 사이토는 당시 이혼남...
  7. 7할7푼5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