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이 타카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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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도요 카프 No.25
아라이 타카히로 (新井貴浩)
생년월일1977년 1월 30일
국적일본
출신지히로시마
포지션1루수, 3루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98년 드래프트6위
소속팀히로시마 도요 카프 (1999~2007)
한신 타이거스 (2008~2014)
히로시마 도요 카프 (2015~)

1 개요

히로시마 도요 카프돌아온 탕아

히로시마 도요 카프 소속의 프로야구 선수. 등번호는 25번(히로시마 1기 ~ 한신) -> 28번(히로시마 2기)->25번(2016~). 포지션은 기본적으로는 3루수였지만, 팀 사정상 1루수우익수로 뛴 적도 있다. 현재는 1루수로 주로 출장 중.

재일교포 출신으로 현재는 일본으로 귀화했고,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에도 몇 차례 선발되었다. 한국 이름은 박귀홍(朴貴弘).[2]

2 선수 생활

2.1 히로시마 도요 카프 시절

대학 시절까지 특출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대학 선배인 히로시마 카프의 레전드 노무라 켄지로의 집에 직접 찾아가 본인의 스윙을 보여주며 호감을 산 덕인지 하위 지명이지만 무사히 히로시마 카프에 입단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거 덕에 이후 히로시마 팬들로부터 FA선언이 더 까인다.

히로시마 입단 2년차에 16개, 3년차에 18개, 4년차에 28개의 홈런을 치는 등 거포로서 착실히 성장해 나갔으며, 카네모토 토모아키FA한신 타이거스에 이적한 후에는 히로시마의 4번을 물려받았고, 05년에 3할의 타율, 43홈런을 기록하며 홈런왕 타이틀과 더불어 1루수 부문 베스트나인을 획득했다. 또한 이 해에 6경기 연속 홈런을 터뜨리는 등 여러 모로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다. [3][4] 이후 2006년에는 25홈런 100타점, 2007년에는 28홈런 102타점을 기록하며 카프의 주포로 맹활약했다. 2007시즌 후 아라이는 FA 자격을 얻게 되었는데, 평소에 팀에 대한 애정을 자주 드러내기도 했고, 2005년에는 '한 팀에서 선수 생활을 끝내는 게 이상적이다', 'FA? (나는) 그럴 선수가 아니다.' 라는 말을 한 적도 있었기에 카프 팬들은 그가 당연히 잔류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아라이는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을 시험해보고 싶다는 말과 함께 FA 선언을 해버리면서 히로시마를 떠나게 된다. 행선지는 히로시마 시절부터 따랐던 선배인 카네모토 토모아키가 있는 한신 타이거즈.[5] FA 선언을 알리는 기자회견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FA 같은 건 없었으면 좋았을 텐데.' , '카프가 좋기 때문에 괴롭습니다.' 라는 말로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는데.. 이게 무슨 개소리야(...) 특히나 카프 팬들 입장에서는 궤변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말이라(...) 무지하게 욕을 먹었다.[6] 위에서 언급한 말 중 괴롭다는 말을 한 덕에 辛い(쯔라이)라는 별명도 생겨버렸다. 게다가 이후 자신을 욕하는 히로시마 카프 팬들에 대해 자신을 욕하는 팬들보다도 자신이 더 카프를 사랑하고 있다고 헛소리를 또 하는 바람에 더더욱... 이에 몇몇 히로시마 카프 팬들에게는 필라델피아 필리스 팬들이 J.D. 드류스캇 롤렌을 철전지 원수로 생각하는 것과 동급으로 공공의 적 취급을 받게 된다.[7]

2.2 한신 타이거스 시절


한신으로 옮긴 08년에는 초반에는 통산 1000안타를 기록[8]하고 고타율을 마크하는 등 호조를 보였지만, 후반기 접어들면서 요통을 호소하며 성적이 저하되었다. 공교롭게도 이 해 아라이의 부상과 함께 한신의 역사적인 DTD도 함께 시작되었으며, 최종적으로 한신은 한때 13경기 차까지 벌어졌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리그 1위를 내주고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3위 주니치 드래곤즈에게마저 밀려버린다.(...) 타어강 항목 참조.
같은 해 호시노 센이치가 이끄는 베이징 올림픽 야구 대표팀의 4번 1루수로 선발되어서 모든 시합에 선발 출장했지만, 역시 요통으로 제대로 된 활약을 보였다고 하기 힘들다. 그러나 대한민국과의 예선전에서 2점 홈런을 쳐 대한민국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도 했다. 모국(母國)의 야구팬들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만든 아라이.

한신에서의 모습은 그야말로 계륵인데, 카네모토의 뒤를 이을 4번 타자 후보감으로 기대하고 데려왔음에도 신통치 않은 성적을 기록하는 바람에 한신 팬들 사이에서는 아라이의 보상선수로 나간 아카마츠 마사토를 아까워하는 의견도 꽤 많았다. 한신 이적 후 08년에는 8개, 09년에는 15개의 홈런을 쳤는데, 홈런 숫자를 보면 나아지는 것 같을지 몰라도 20개의 병살타로 리그 병살타왕도 획득. 헌데 10년에는 카네모토의 부상 공백을 틈타 4번 자리에 안착, 112타점을 올리며 타점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더니, 11년에는 93타점을 올리며 센트럴리그 타점왕에 등극했다.그래도 찬스에서 못 친다고 왠지 까인다 하지만 12년에는 .250 9홈런 52타점으로 영 좋지 않은 성적을 기록했다.



13년 6월 8일 치바 롯데 마린즈와의 시합에서 역전 투런포를 날리며 통산 1000타점을 기록하였다. 그 해 올스타전에도 출장해 한신 선수로서는 7년만에 올스타전 MVP를 수상하기도 했지만, 후반기에는 삽질을 거듭하다가 .267 15홈런 70타점으로 여전히 이름값에 못 미치는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2014년은 마우로 고메즈맷 머튼의 존재로 인해 대타요원으로 위상이 격하됐고, .244 3홈런 31타점으로 사실상 프로 입단 이후 커리어 로우를 기록했다. 시즌 후 연봉 1억 엔 삭감을 제시받더니, 결국 시즌 후 퇴단을 하게 되었다.#

한신 시절을 요약하면 짤없는 먹튀. 이미 히로시마에서는 금지어 취급을 받게 된데다, 한신에서도 타격이나 수비나 만족할만한 모습을 못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쉴드를 쳐주는 팬들도 적어서 일본 웹상에서 가장 욕을 많이 먹는 야구선수로 등극해버렸다. 오죽하면 옛날 한국 웹에서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를 농담조로 썼던 것처럼, 한신이 에러를 내거나 난투극에 휘말리거나 하면 '아라이가 나쁘다'라는 코멘트들이 달렸을 정도.[9]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2:1 상황에서 9회 대타로 나와 현재 팀 동료인 오승환과 맞붙었다. 하지만 삼진당했다

2.3 히로시마 복귀

2014시즌 종료 후 친정팀 히로시마로 복귀했다. 등번호는 28번으로 변경.

사실 처음에 히로시마와 계약할 거라는 소식이 있었을 때는 2000안타 기록을 위한 광고탑 비스무리한 계약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많았고 2천안타 달성을 할 때까지 묻지마 기용을 할 것 같다는 예상이 많아서 까였으나, 대폭 삭감되긴 했어도 7천만엔을 제시했던 한신의 오퍼를 거절하고 히로시마와 고작 2천만엔에 계약했다는 발표가 되면서 여론이 반전, '연봉도 적으니 삽질하더라도 팀에 큰 피해는 없을테고, 만에 하나 부활해서 유종의 미를 거둬준다면 더 좋지' 라는 의견으로 바뀌었다. 입을 잘못 놀려서 그렇지 확실히 카프에는 상당한 애정이 있다고 봐야 할 듯.

그리고 시즌에 들어선 2015년 초반에는 예상을 뒤엎고 3할을 넘는 타율과 9할에 육박하는 OPS를 기록하면서 맹활약, 4번을 꿰차게 되었다. 6월 4일에는 자신의 통산 1900안타를 기록하기도 했다. 시즌 성적은 .275 7홈런 57타점 OPS .733. 통산 1971안타로 시즌을 마감하며 2000안타까지 불과 29안타만을 남겨놓게 되었다. 우여곡절이 많긴 했지만 어쨌든 친정팀에 복귀해 마일스톤을 달성하고 명예롭게 은퇴할 수 있는 길은 확보해놓게 되었다. 팀 내 우타자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멘토 역할을 해준 것은 덤. 시즌이 끝난 뒤 원래 등번호였던 25번을 되찾았다.

2016년 4월 26일 메이지진구 구장에서 열린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경기에서 2000안타를 달성해 명구회에 가입할 수 있게 되었다. 4월 28일 현재 타율 .320, 출루율 .383, 장타율 .392(OPS .775)의 괜찮은 성적을 기록하면서 주전 1루수로 꾸준히 출장중이다. 노쇠화로 인해 장타력이 많이 떨어지면서 예전처럼 시원시원한 장타는 많이 안 나오고 장타율도 4할을 못 넘기고 있지만 득점권 타율은 4할을 상회하는 등 적절한 클러치 히팅을 보여주고 있다.

2016년 6월 이후로 주로 5번타자 1루수로 출전하고 있다. 브래드 엘드레드가 부상으로 이탈한 4번 타자 자리를 교타자 헥터 루나가 채우면서 테이블 세터가 4명이 되어버린 히로시마 타선의 해결사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후반기 첫 1, 2차전에서 모두 밀어서 홈런을 터뜨리며 아직 장타력이 죽지 않았음을 과시하고 있다. 7월 19일 기점으로 홈런도 1개만 더 치면 통산 300홈런이 된다. 그리고 8월 2일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원정경기에서 2회 초 풀카운트 때 2점 홈런을 터뜨리면서 선제타를 기록함과 동시에 드디어 300홈런을 기록했다. 그 뒤 팀이 2점홈런 2개를 포함해 17안타나 터뜨리면서 16-4로 대승했다.

9월 10일 현재 타점 부문에서 세리그 수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야말로 말년을 불태우는 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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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종료 후 헹가래를 받는 아라이.

9월 10일, 팀이 25년만에 센트럴리그를 우승함으로써 선수 생활 첫 우승을 경험하게 되었다.[10] 그러나 일본시리즈에선 홋카이도 닛폰햄에게 패해 두번째 준우승을 얻는 데 그쳤다.

3 기타

  •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일본프로야구 선수회 7대 회장을 지냈다.
  • 아내는 전직 아이돌로 "혹시 아들이 태어난다면 야구를 시키겠다"고 할 정도의 야구광이라고 한다.
  • 실책왕의 기록도 있는 등 전체적으로 '수비가 조잡하다(粗い:아라이)'는 평을 들어서 '아라이'라는 성과 엮여서 곧잘 놀림을 받는다. 아예 감독한테 "아라이는 수비가 성하고 똑같이 '아라이'다."라는 소리까지 들었으니.
  • 친동생인 아라이 료타(한국명 : 박양태)도 한신 타이거스에서 뛰고 있는 야구 선수다. 2011시즌부터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한신 타이거즈로 이적하게 되어 형제가 같은 팀에서 뛰는 2012년 기준 2형제밖에 없는 케이스가 되었다. 흠좀무. 2012년에는 동생쪽이 포텐폭발(이라기 보단 주전중 거포들이 다 시망이라 밀려 올라간 감이 있지만)하는 바람에 동생에게 4번타자 자리를 내주는 훈훈한 상황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1. 2015년도 사진.
  2. 박동희가 재일한인 야구계의 거목인 한재우 옹을 취재했을 때 언급됐던 아라이 타카히로의 한국이름이다. 이 기사가 게재되기 전까지는 그의 이름을 그대로 따 한국이름이 박귀호로 알려졌다. 여담으로 '귀홍'도 훈독을 하면 '타카히로'로 읽는다.
  3. 일본 기록은 랜디 바스, 오 사다하루의 7경기 연속 홈런이 최다다.
  4. 하지만 당시 홈구장이던 히로시마 시민구장의 작은 크기 때문에 홈구장 버프의 거품이란 소리를 들었다. 실제로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 시리즈에서는 히로시마 시민 구장을 홈구장으로 쓰던 시절 제작진들이 히로시마 선수들의 홈런수에 비해서 장타력을 제법 너프시키는 경향이 있었다.(2009년 마쓰다 줌줌 스타디움으로 이후엔 그런 건 없다.) 아라이는 한신 이적 후 40+홈런은 커녕 20개를 넘기기도 버겁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요통으로 인한 타격폼 변경과 나이로 인한 노쇠화도 어느 정도 작용했겠지만, 무엇보다 히로시마 시민구장보다 넓은 고시엔 구장을 홈으로 쓰게 된 것이 큰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상승기류 때문에 구조적으로 타구가 뻗어나가는 도쿄돔의 홈런을 돔런이라고 부르듯이, 히로시마 시민구장에서의 홈런을 탁런이라고 부르는 국내팬들도 있다.
  5. FA를 선언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일단 선언했으면 무조건 한신 간다 라는 걸 다른 팀들도 다 알아서 제대로 접촉도 하지 않았을 정도다.
  6. 이 발언들에 대해선 팀의 대선배인 오가타 고이치가 나가는 선수가 그런 발언을 하는것은 맞지 않다고 깠다. 오가타는 이전 FA상황에서 요미우리를 비롯한 여러 팀에게 열렬한 러브콜을 받았지만 가족과 팀 동료를 위해 카프에 남아 더더욱 비교되는 상황.
  7. 과거 카프의 옛 홈구장이었던 히로시마 시민구장에 다른 선수들의 사인과 함께 그의 사인이 남아있었는데, 분노한 팬들에 의해 지워졌다. 히로시마 시민구장의 철거를 앞두고 이 사실을 지역 방송사에서 보도하면서 한 시민을 인터뷰했는데, 그는 아라이의 이름을 끝내 언급하지 않고 "25번이었던 선수"로 부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8. 같은 날 카네모토 토모아키는 통산 2000안타를 기록했다
  9. 심지어 고시엔 경기 때 타석에 들어서면 3구정도까지 팬들이 응원가를 안 불러준 적도 있었다.안습 하지만 그 와중에도 유니폼 마킹은 많이 보였던 것으로 봐선 애정어린 까임이었던 것 같다. 워낙 기대치가 높았다 보니...
  10. 2014년 일본시리즈를 경험하긴 했으나 시즌 순위는 일단 2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