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당(프랑스)


프랑스 공화국의 주요 정당
(괄호 안은 프랑스 국민의회의 의석 수)
집권당사회당
(292석)
야당공화당
(199석)
녹색당
(17석)
좌익급진당
(16석)
공산당
(13석)
국민전선
(2석)
좌파당
(2석)

프랑스의 중도좌파 사회민주주의 정당

현임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가 소속된 정당이며, 제1여당이다.

1 정당 정보

프랑스의 가장 큰 좌익 정당으로 프랑스에서는 중도좌파로 인식된다. 표방이념은 사회민주주의, 민주사회주의이며, 전신은 1905년에 창당한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이다. 당은 알렘 데지르로 가입되어있는 국제조직은 진보동맹,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유럽 사회당이며, 상위 유럽의회 정당은 사회민주진보동맹에 소속되어 있다.

원래 유럽의 중도좌파 정당들은 대게 20세기 말의 신자유주의 광풍으로 제3의 길 중도주의 노선을 걸었는데 비해, 사회당은 굳건히 좌파노선을 지켜냈다. (원래 프랑스가 다른나라에 비해 좌파운동이 많은 나라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집권기간기에 굳건하게 좌파노선을 걸은 적은 프랑수아 미테랑이 집권했던 80년대 초반 정도가 고작이며, 총선에서 고배를 마신 후에는 중도좌파적인 성향으로 돌아갔다. 다만 사회당으로 명칭을 바꾼 이후에 집권기간은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은 편인데 1960~70년대에는 우파가 대선과 총선에서는 압도적인 세를 과시했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공산당이 사회당을 표를 깎아먹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테랑이 극우파를 뒤에서 키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와는 달리 정당명칭 변경이 없는 당이기도 한데 프랑스 제5공화국에서 장기간 여당을 지냈던 중도보수정당인 공화당은 자주 이름을 바꾸었지만. 여기는 무려 1969년도 부터 이름을 안 바꾸고 계속 유지해왔다.

2 역사

요약: 길고 창대한 콩라인의 역사.[1][2]

좌파가 힘을 못 쓸땐 리버럴한테 밀리고, 좌-우 이념이 확립될 쯤엔 공산당에 치이고, 5공화국이 들어선 후에는 우파한테 털리는 생각보다 안습한 상황.

2.1 19세기에서 2차대전까지

사회당의 역사를 살펴보려면 19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871년 파리 코뮌의 여파로 프랑스 좌파는 사실상 괴멸 상태에 이르렀다. 자잘한 정당들이 난립한 상황에서 중산층은 급진당[3]을 지지했고, 노동자계급과 좌익세력은 정부참여, 중도세력과의 연대 등등 다양한 기준에 따라 분열된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1906년에 이르러서야 SFIO(Section Française de l'Internationale Ouvrière, 노동자 인터네셔널 프랑스 지부)이라는 이름의 단일정당으로 힘을 합치게 되는데, 이 정당이 사실상 오늘날 프랑스 사회당의 모체다. 이름을 통해서도 알수 있듯이 SFIO는 제2인터내셔널에 프랑스 노동계급-좌익세력의 한 목소리를 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단체였다. 이 기간동안 SFIO는 주로 리버럴과 협력관계에 있었지만 연립정부에 참여하는 수준까진 아니었다. 쉽게말해 중도좌파세력의 콩라인.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SFIO는 1차대전과 러시아혁명을 거치면서 당내 좌-우파로 분열된다. 결국 1920년대 당내 좌파는 공산당으로 떨어져나가고 당내 우파는 당을 남아 지키게 된다. 그렇게 반쪽이 된 SFIO는 기타 중도좌파 정당들을 흡수합병하면서 세력을 키우다가 1935년 드디어 급진당, 공산당 등과 연립정부 구성에 성공한다. 이때 당선된 레온 블룸이 프랑스 최초의 정통 좌파 총리.[4][5] 하지만 이렇게 다양한 정당들의 연립은 유지되기 힘들었고 중도파와 좌파는 다시 이합집산을 반복하다 독일의 프랑스 침공으로 제3공화국은 1940년 멸망했다...[6]

2.2 제4공화국

사실상 사회당의 진짜 황금기.

프랑스 해방 이후 세워진 제4공화국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 복지국가의 기틀을 잡은 시기이다. 제3공화국의 주도세력이었던 중도파의 세가 급속히 쇠락하였고, 드골파와 공산당의 세가 크게 신장되었지만 1946년에 드골파가 정권탈퇴 선언을 하고 공산당이 집권에서 배제되면서 프랑스 정치는 삼당주의 (Tripartisme)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새로운 대연정이 주도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저 삼당주의의 삼당은 대중공화운동 (Mouvement Républicain Populaire; 중도우파), SFIO, 급진공화당[7] 참고로 이때 좌파 제1당은 SFIO가 아닌 공산당이었다. SFIO는 다시 중간에 끼인 당으로 돌아간것. 그래도 대연정이라는 정권의 성격상 SFIO는 큰 영향력을 발휘할수 있었고 복지국가의 기반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알제리와 인도차이나에서 이어지는 전쟁, 점점 심화되는 냉전의 위기로 인해 삼당주의는 유지되지 못하고 결국 SFIO는 공산당과의 결별을 선언한다. 게다가 넓은 스펙트럼의 대연정 성격상 정권 교체가 잦았다. 프랑스 국민들은 점차 강력한 카리스마를 갈구하기 시작했고 SFIO는 왼쪽의 공산당, 오른쪽의 드골주의에 점점 정치적인 지지를 내주고 만다.

1958년 군부의 쿠데타 압박을 계기로 결국 제4공화국은 무너지고 드골이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5공화국이 세워진다.

2.3 제 5공화국에서 사회당 창당까지

그리고 SFIO는 멸망했다.

드골의 리더십과 공산당과의 경쟁으로 SFIO는 몇십년간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여준다. 드골주의에 찬성하는건지, 반대하는건지 애매한 태도를 취하면서 젊은 층의 마음은 떠나버렸고 몇번의 선거에서 연달아 패배한다. 설명은 필요없다, 결과를 보자.

1956년 총선: 제1당 공산당 (150석; 25.36%); 제3당 SFIO (95석; 14.93%)
1958년 총선: 제1당 프랑스인민연합[8] (189석; 17.6%)[9]; 제4당 SFIO (40석; 15.5%)
1958년 대선: 샤를 드골 당선 (78.51%); SFIO 후보 없음.
1962년 총선: 제1당 프랑스인민연합 (206석; 31.94%); 제2당 SFIO (65석; 12.54%).
1965년 대선: 샤를 드골 당선 (55.2%); SFIO 후보 없음.[10]

그리고 1967년 총선에서 선전을 거두워서 집권할수있을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기도 했지만 68 운동 와중에 치러진 1968년 총선에서 좌파정당들의 사오분열과 우파의 대결집으로 인해 예상을 깨고 참패해버렸고, 드골 사임 직후 1969년 대선에선 5.21%를 얻는 기염(...)을 토하며 정말 장렬하게 망했다. 참고로 이 선거에서 공산당은 21.27%를 얻었다. 좌파의 지지마저 완전히 놓친것. 더군다나 단순히 지지만을 놓친게 아니라 2차 선거에서 1차 선거 결과에 실망한 상당수 좌파지지자들이 투표에 불참하면서 드골파였던 조르주 풍디두가 압승을 거두며 집권을 연장했다. 68 학생운동 직후에 치뤄진 선거인지라 이러한 참패는 SFIO에게 더 뼈아픈 결과였다.

식민지 독립 문제와 기타 사회문제에 대해서 우파와 다를바 없는 보수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SFIO에게 학생운동을 통해 등장한 "신좌파"는 말이 안통하는 급진파와 같았고, 역으로 신좌파에게 SFIO는 드골과 마찬가지로 몰아내야 하는 구좌파에 불과했다. 결국 이런 좌파의 세대교체와 함께 SFIO는 사회당(Parti Socialiste)으로 재창당하게 된다.

2.4 사회당,미테랑 현재의 사회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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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IO가 사회당으로 재창당한 이후 가장 큰 변화는 바로 미테랑의 입당이었다. 좌파 전반과 느슨한 연대를 유지하며 단일 후보로 대선에도 출마했던 미테랑이 입당하면서, 사회당은 중도파와 좌파의 맏형 비슷한 이미지를 쌓게 된다. 그가 제4공화국의 장관직을 역임했고 드골의 등장 직후부터 드골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던 점 역시 미테랑과 사회당의 대중적 지지를 높히는데 도움을 준다.

이후 당권을 잡은 미테랑은 당의 정책을 정통적 사회주의가 아닌 시장경제와 접목된 사민주의로 트는 것과 동시에, 공산당등 기타 좌파 정당들과의 연대를 추구하므로서 집토끼와 들토끼를 둘다 잡는데에 성공한다. 그리고 1974년 대선에선 1차 투표에선 승리를, 2차 투표에선 석패를 거두며 사회당의 부활을 알렸으며 1977년 지방선거에서 역사적인 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1978년 총선에서 1차 투표에서 선전했음에도 2차 투표에서의 분패로(그래도 공산당을 앞지르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동거정부 수립에는 실패하고 다시금 잠잠해졋다가

1981년 대선에서 결국 미테랑은 대권도전에 성공하고, 취임 직후 치뤄진 총선에서도 사회당이 단독과반에 성공하면서 사회당은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았다. 냉전이 계속되고 소련과 중국의 현실이 드러나면서 공산당은 지지를 잃었고, 다수의 좌파 유권자들이 사회당에 전략적 투표를 할것이라는 미테랑의 예측이 맞아 떨어진 결과였다.

미테랑의 집권 초기는 "110개조 강령" 이라는 좌파 정책들을 충실히 이행한 시기였다. 하지만 집권 중반기를 지나면서 미테랑 정부는 고환율, 재정적자등의 이유로 우파적인 정책들을 도입했고 공산당등 기타 정당과 결별하게 되었다. 1986년 총선에서 과반을 내주면서 우파 자크 시라크총리와 정권을 공유하는 "동거정부"를 구성했지만 미테랑 사회당 정부는 외교적인 성과를 기반으로 1988년 재선에 성공했다. 14년간의 재임기간을 통해 미테랑은 역대 최장 재임 프랑스 대통령으로 활약할 수 있었다.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오늘날의 사회당은 미테랑의 당이라고 볼수 있다. 일단 5공화국에서 대통령직을 역임한 사람이 미테랑과 현 올랑드 대통령 밖에는 없어서, 사회당 요직을 차지한 사람들은 전부 미테랑 밑에서 일을 했던 사람들이라 좋으나 싫으나 미테랑 라인일수 밖엔. 그런데 미테랑 밑에서 일하면서 정무적 능력은 배우지 못한 모양인지 미테랑 퇴임 이후 사회당은 내내 영 상태가 좋지 않았다. 시라크와 사르코지에게 연달아 대권을 내준것도 그렇고, 대권주자로 손꼽히던 양반이 성폭행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질 않나. 심지어 2002년 대선에선 후보로 내세운 리오넬 조스팽은 국민전선장 마리 르펜에게 밀리며 결선 진출에 실패했다. 물론 당시 시라크의 득표율도 딱히 높지는 않고 시리크와 죠스팽의 양자구도였기 때문에(당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죠스팽이 약간 더 앞섰다.) 죠스팽의 지지율이 낮았다고 보기는 힘들었지만 막상 장 마리 르펜이 2위 자리를 차지하면서 대 충격이 벌어졌던것. 그래도 결선에선 좌파쪽에서 직간접적으로 시라크를 밀어줘서 압승을 거뒀으니, 나름 대인배라면 대인배.[12]

그러다가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의 당선으로 정말 오랜만에 정권을 잡았다. 총선도 승리해서 동거정부를 꾸릴 이유도 없다는건 덤.[13] 하지만 계속된 경제난과 연달아 터진 큼직한 테러의 여파로 올랑드에 대한 지지도는 개막장이다. 이러다보니 올랑드와 함께 사이좋게 몰락하고 있는 중.

3 출신 인물

4 역대 선거결과(편의상 지방선거는 제외)

1973년 총선 89 18.9%
1974년 대선 1차 43.3% 2차 49.2%
1978년 총선 104 22.6%[19]
1981년 대선 1차 2차 51.8% 프랑수아 미테랑 당선
1981년 총선 269 36.0%[20]
1986년 총선 206 31.0%
1988년 대선 1차 34.1% 2차 54.0% 미테랑 재선
1988년 총선 260 34.8%
1993년 총선 53 [21]
1995년 대선 1차 23.3% 2차 47.4%
1997년 총선 255 23.5%
2002년 대선 16.2%[22]
2002년 총선 140 24.1%
2007년 대선 25.9% 2차 47.0%
2007년 총선 186 24.7%
2012년 대선 51.6% 프랑수아 올랑드 당선

2012년 총선 280 29.4%
  1. 프랑스 = 좌파 국가 라는 인식때문에 사회당이 오랜 기간동안 집권했을거 같지만 사회당 본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전임정당들까지 다 합쳐도 실제 좌파가 집권한 기간은 길지 않다.
  2. 사회당과 전임정당들의 집권기 대부분의 경우 다른 정당과의 연립을 통해 권력을 잡았다.
  3. Parti Radicale, 프랑스 혁명 직후 창당된 정당으로 처음 만들어졌을 땐 반-왕정 스탠스로 "급진"이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이때쯤에 이르러선 중산층의 리버럴 정당으로 자리 잡은 상태였다.
  4. 그전까지 급진당등 중도파가 권력을 잡은 일은 있었지만, 이념적으로 따졌을땐 사회주의 정권은 아니었다.
  5. 지금 프랑스 정치는 강력한 대통령이 주도하는 모습이지만, 5공화국 수립 이전까지 총리가 사실상의 행정수반 역할을 맡았다. 그 전통이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어서 프랑스는 흔히 대통령과 총리의 "이원집정부제"라고 묘사된다.
  6. 항목을 계속 읽어보면 알겠지만, 사회당의 역사는 뭣좀 해볼만 하면 전쟁이라던지, 쿠데타라던지, 학생혁명이라던지 등등으로 무너지는 스토리의 반복이다. 그만큼 그 지지기반이 쇠약하다는 의미도 된다.
  7. 제3공화국에 비해서 세가 크게 약화되었지만 일종의 대 연정이 구성된 덕택에 이 시기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8. 드골의 신생정당
  9. 총 의석 576석
  10. 대신 좌파 단일 후보로 미테랑이 출마했다.
  11. 1981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미테랑의 승리를 예측하는 방송사 출구조사이다.
  12. 물론 정말로 비판적 지지였다. 당시 시라크에 대한 좌파의 지지를 촉구하던 모토가 "Votez Escroc, pas Fasho" (빠쇼말고 부패한 놈 뽑자) 였으니 말다했다.
  13. 대통령 임기가 7년에서 5년으로 줄면서 동거정부 형성의 가능성이 줄어들긴 했다.
  14. 최초의 사회당 출신 대통령이자 프랑스 대통령중에 무려 14년간 최장기간으로 집권하였고 사회당 뿐만이 아닌 프랑스 좌파계열 중에 가장 대표적인 인물.
  15. 2016년 현 프랑스 대통령.
  16. 1995년 대통령 선거에서 의외의 선전을 거두면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고 1997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1997년부터 2002년 까지 당시 대통령이었던 자크 시라크(우파)에게 반강제 레임덕을 선사하고와 같이 좌우동거정부를 구성하여 당대에는 슈뢰더와 토니블레어와 더불어서 유럽을 이끄는 좌파지도자라는 평을 받았지만 2002년도 대선 때 좌파가 대분열하는 상황에서 왠 쓰레기한테 밀려버려 1차 선거에서 탈락한 이후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17. 2007년니콜라 사르코지와 2차 선거까지 대선을 치룬 경험이 있는 여성 정치인 이다, 그리고 한때 프랑수아 올랑드의 동거인(여자친구)으로 무려 밑에 3명의 자식까지 낳았었다..... 하지만 2007년도에 대선을 치르면서 결별하였는데 올랑드가 내각을 구성할 당시에 루아얄를 환경부 장관에 임명하였다....
  18. 2016년 현 프랑스의 총리이다.
  19. 이 선거를 기점으로 공산당의 의석수를 넘어섰다. 사실 사회당 입장에서 볼때 2차 선거에서의 역전패로 그리 좋게 기억되지 않는 선거이기는 하지만
  20. 이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회당이 단독과반을 차지했다.
  21. 사회당 역사상 최악의 참패로 기록 되고있는데 집권 여당의석수가 전체의석의 10%에도 못 미치는....(전체 577석) 엄청난 참패였다...
  22. 당초에는 조스팽 총리가 나름대로 인기가 좋았기에 시라크대통령에게 조금 우세했지만 정작 출구조사가 발표되니까 장 마리 르펜 결선 투표 진출....이라는 충격과 공포의 결과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