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라벌

통일 신라의 지방 행정 구역:
9주 5소경
수도서라벌(금성)
소경중원경북원경서원경남원경금관경
한주삭주명주웅주상주전주무주양주강주
특별행정구패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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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로 만든 서라벌 상상도

1 개요

徐羅伐

거기 서라 벌들아!!!

고대 천년 왕국 신라수도. 하나의 왕조가 하나의 수도에서 1000년을 지속한 경우는 한국사를 넘어 세계사에서도 상당히 보기 드문 케이스인데 서라벌의 경우 그 보기 드문 케이스 중 하나에 속한다.

금성(金城), 서벌(徐伐), 서나벌(徐那伐), 서야(徐耶), 서야벌(徐耶), 서라(徐羅) 등 여러가지 표기가 있었는데, 한자가 본격적으로 중국에서 넘어오기 전부터 있었던 고유어를 나중에 들어온 한자로 표기하면서 여러가지 이름들로 기록에 남은 것이다. 신라 건국 초기였던 원삼국시대에는 신라라는 국가 그 자체였고, 초창기에는 서라벌이라는 이름이 나라 이름으로 쓰이기도 했으며 사실 서라벌과 신라 둘 다 사로국, 사라 등 'ㅅㄹ' 계통의 동일 어원으로 추정된다.[1]

같은 삼국시대남북국시대고구려백제, 발해가 외침과 내부 정책에 따라 수도를 여러 번 옮겼던 것과는 달리[2] 삼국통일 이후 통일 신라 시대까지 1천년 동안 굳건한 신라의 수도였다.[3][4]

2 위치

서라벌의 인구와 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으나 적어도 소도시가 된 지금의 경주시 시가지보다는 넓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서라벌의 중심지역은 지금의 경주 시가지 중심부 기준으로 약간 남동쪽 월성동 지역에 있었다.[5] 그래서 조선 이후 비어버린 월성동 일대는 오랫동안 이 대부분이었는데, 경주에 가면 신라의 궁전으로 파악되는 경주 월성이나 첨성대, 안압지, 분황사, 황룡사지 등 주요 유적이 살짝 시가지 외곽의 논두렁 옆에 있는 게 이 때문이다. 이곳은 땅을 파헤치는 육중한 현대식 건축물이 별로 들어서지 않아서 많은 유적들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6]

3 규모

당시 수도 서라벌인구는 수십만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서는 "수도에 17만8936호, 1360방, 55리와 35개의 금입택(金入宅)이 있었다."(《삼국유사진한조)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경주 한 곳에만 8~90만 명의 인구가 살았다는 뜻. 고려 수도 개경의 2~3 배, 조선 수도 한양의 4배가 넘는 수준이다. 그러나 학계는 서라벌은 커녕 통일신라 국가 전체의 최대 인구를 400만 내외로 추정한다. 또한, 그 시대에 전체 인구 400만명 가운데 경주에만 90만 명이 몰려 살았다는 건 근본적으로 납득이 어렵다. 그리고 지도를 보면 바로 알 수 있지만 경주 중심부의 경주분지 지형상 90만 명이나 몰려살 수 있을만큼 들이 넓지 않다.[7] 아파트도 없던 시대라, 1~3층 정도 저층건물로 좁은 경주분지를 전부 꽉 채워도 90만은 어려워 보인다. 그래서 삼국유사의 17만8936호는 17만8936구(약 35만)의 오기가 아니냐는 주장부터 서라벌과 그 일대 수도권을 다 합친 기록이 아니냐는 등의 설들이 있다. 또한 신라의 수도 범위를 경주로만 한정하지 않고 넓혀서 본다면 90만명이 충분히 살 수 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8]관련 기사

그래도 17만 ~ 35만 정도라고 해도 당시로서는 엄청난 대도시임이 틀림없다. 통일신라 시대인 10세기 전을 기준으로 하면 신라와 비교도 안 되는 영토를 지닌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50만 정도, 서유럽 최대의 도시인 파리로마가 5만 정도, 런던은 간신히 만 명을 넘었다는걸 보면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의 대도시 중 하나라고 봐도 무리가 없다. 이 시절 콘스탄티노플, 바그다드, 장안을 세계를 대표하는 3대 도시로 보고, 중국에는 수십만 도시들이 몇 개 더 있었으니 못해도 세계 10위 안에는 들었을듯. 만약 정말 90만이면 장안 다음의 대도시다. 서라벌공화국 아니 왕국

4 구조

궁전경주 월성 북쪽으로 넓은 주작대로가 나 있어 정북쪽의 성동동 전랑지까지 이어졌다. 궁전의 남쪽은 남천이 흐르고 있어 정문이 북쪽인데, 옛날 동아시아 웬만한 도시들은 중국장안을 본따서 비슷비슷한 계획도시를 만들었는데[9] 중국식이라면 남쪽으로 나 있어야 할 궁전의 정문이 북쪽이라[10] 서라벌은 이런 표준에서 다소 벗어난 구조였다. 어쨌든 타고난 지형상 그건 어쩔 수 없고, 중대에 들어서 중국의 장안을 본따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도시를 네모 모양의 방리로 구획하였다. 전체가 정사각형 36방으로 이루어져 있고 1개 방은 16개의 작은 구획으로 나누었는데 구획에는 자갈 등으로 폭 13미터의 도로를 깔았다. 경주 왕경 전체는 6부 55리 36방으로 되어있었다.

5 어원

서라벌이라는 이름은 신라의 옛 명칭(국호) 및 '수도'를 의미하는 일반 명사로서의 현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동음이의어) 문서 참조.

5.1 옛 명칭 유래설

진한 6부의 사량부(새라)에서 유래하여 새라위에 있는 들판이란 의미로 새라불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유래한 설이 있다. 신라, 사로국, 사라 등도 모두 같은 유래로 본다. 국호 서벌을 새로운 땅(들판)으로 보기도 한다. 유력한 설로 알려져 있다.

5.2 불교 유래설

인도의 도시 슈라바스티에서 유래한 설이 있다. [11] 현장법사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을 번역하면서 슈라바스티를 室羅伐悉底(실라벌실저)로 음차하였는데 사위성(舍衛城)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12] 실라벌실저에서 서라벌과 신라가 유래하였다는 것인데, 한반도불교에서 유래한 지명이 많다는 것도 뒷받침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신라 중기에는 아예 왕족 이름을 석가모니의 가족 이름으로 짓는 등 굉장히 불교에 심취해 있었기에 그렇기도 하다. 다만 서라벌이나 신라와 동일 어원으로 보이는 비슷한 이름은 불교가 전해지기 훨씬 이전부터 쓰였으므로[13] 신라 초기 연대가 좀 끌어올려졌다고 쳐도 시대가 안 맞는 문제가 있다. 물론 우연히 음가가 비슷했고 나중에 입수한 불교적 지명에서 찾아 끼워맞췄을 수도 있고 불교가 공인되기 이전에 불교와 관련된 문화가 이미 퍼져있을 수도 있다.[14]

6 기타

  1. 하나의 도시 정도에서 시작해 영역국가로 성장했고 도시 이름이 곧 나라 이름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지구 반대편의 도시 로마로마 제국의 관계 역시 이와 유사하다.
  2. 사실 신라의 수도 서라벌이 동남쪽으로 치우쳐 있고 또 산과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서 지형적으로 조건이 좋았고 왜구의 소소한 깝침만 뺀다면 대규모 외침을 당한 적이 없다.
  3. 찬찬히 살펴보면 지금의 경주시 영역 안에서 산발적으로 조금씩 왔다갔다한 적은 있다. 예를 들면 자비 마립간보문관광단지 근처의 명활성에 궁전을 옮겨 살았다. 먼 곳으로의 천도는 31대 임금 신문왕이 지금의 대구광역시 쪽으로 천도하려 시도했던 적이 한 번 있었으나 무산되었다.
  4. 통일 이후에는 한반도 전체에서 동남쪽으로 치우친 위치라는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해 옛 금관가야, 고구려, 백제 땅에 5개의 소경을 설치하였다. 5소경은 각각 금관경(김해시)·남원경(남원시)·서원경(청주시)·중원경(충주시)·북원경(원주시)에 있었는데, 단지 좀 큰 지방도시 정도가 아니라 통치거점으로서 상당한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다.
  5. 조선시대에 경주읍성이 오늘날의 중부동 일원 (북부, 서부, 동부동)에 세워지면서 그 때 경주시 시가지 중심부가 북서쪽으로 약간 옮겨가고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6. 일제강점기에는 동해남부선 철도가 경주에 놓이면서 이 곳을 관통해 사천왕사 등 많은 문화재 터가 훼손되기도 했다. 세계유산 보호를 위한 유네스코의 권고도 있고 해서 동해남부선은 현재 외곽 건천읍의 신경주역으로 이설공사 중이며 공사가 완료되면 경주 시가지의 경주역은 폐역, 선로는 모두 철거될 예정이다. 단선철도 하나 까는 것에도 이러한데 본격적으로 현대식 시가지가 개발되었다면 훨씬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7. 그래서 그런지 경주분지 땅에서 비교적 외곽 지역인 구 경주경마장 부지에서도 집단 집터와 숯을 굽던 가마터가 20기나 발견됐다. 이는 당시 경주분지 땅 안에서 인구 집중이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사례이다.
  8. 사실 신라도 천년이나 되는기간동안 경주를 수도로 삼았기때문에관청도 많았고 살기에는 다른곳보단 괜찮았을것이다.그래서 아마 수도집중현상(?)으로 90만명이나 되는 인구가살았을수도....(흠좀무)반면 고려의수도 개경(개성)은 주변에 산이 많아서 많은인구가 몰려살기엔 좋지도않고 수도만 집중적으로 개발한것이아닌 5도양계 곳곳에 목이라는 행정체계를 두고 그곳을 발전시켜왔기에 개경에만 인구가 집중된것이 아닐수도있다. 또한 개경은 서라벌과는 다르게 많은 외침을당하고 함락당하는 수치를 겪어야했기때문에 인구가 전쟁중에 줄어든것일수도있다. 조선의 경우는 다산 정약용이 자식에게 서울에서 벗어나지 말라도 당부할 정도로 서울 집중 현상이 심했지만, 그래도 수원 화성 등을 통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였다.
  9. 발해상경용천부, 일본나라, 교토 등도 똑같이 장안을 본따서 정궁과 주작대로를 두고 구획을 지었다.
  10. 정석에 가까운 구조는 경복궁이나 자금성을 떠올려보면 된다. 경복궁의 경우 광화문 광장이 주작대로
  11. 금강경이 설해진 배경이 되는 도시이다.
  12. 구마라습의 번역은 슈라바스티를 사위성으로 표기하였다.
  13. 가령 3세기에 쓰여진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나오는 사로국이라는 이름. 정사 삼국지가 쓰여진 시기는 말할 것도 없이 불교가 처음 들어오고 이차돈 순교로 공인된 시대보다 하안참 수백 년 이전이다. 어쨌든 중국까진 불교가 확실히 넘어왔던 시대고 중국과 교류는 했으므로 어찌어찌 불교적 지식을 입수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어쨌든 아직 이차돈 순교 이전으로 신라의 토착신앙이 건재하기 때문에 수도 이름을 불교식으로 지어줄 이유가 부족하다.
  14. 인접한 곳에 위치한 가야는 이미 일찍부터 불교를 수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