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역사

< 예수

실존인물 '예수'에 대해 다루는 문서이다.

1 들어가기에 앞서

들어가기에 앞서 두가지 전제를 명심하자.

첫째, 예수가 실존 인물이라는 것은 기독교의 일방적인 주장이 아니며, 대다수 학자들이 인정하는 학계의 정설이다.

예수에 대한 증거들은 그 시대의 어떤 사람보다 압도적이다.

예수의 실존을 부정하는 것은 진지한 학자라면 아무도 하지 않는 짓이다(바트 D. 어만)[1]#

진지한 학자라면 예수의 실존을 인정한다(A Historian Looks at Jesus - 폴 존슨) [2]
나는 예수가 역사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실존인물이라고 확신한다. (존 도미닉 크로산) [3]
나는 예수가 역사적 인물임을 받아들인다. 내가 보기에는 그의 실존을 부정하는데서 초래되는 문제점이, 그것을 받아들이는데서 오는 것들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게저 베르메시) [4]

예수가 그리스도교의 표현대로 하느님인지, 유대교의 표현대로 거짓 예언자인지, 아니면 지극히 평범하디 평범한 인간이었는지와는 별개로 당대 예수라고 불린 종교 운동가는 실존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불교석가모니가 경전상의 신화적인 묘사와 별개로 실존성은 인정받는 것과 마찬가지다. 예수라는 인물의 실존성을 증명할 만한 자료는 엄연히 존재한다. 반대로 이 자료들을 논파할만한 "예수신화설의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이것은 종교적 관점과 별개로 순수한 학문적 입증의 결과다.

둘째, 예수의 역사적 실존 문제는 예수의 신성을 증명하는 문제와 전혀 성격이 다르다.

예수의 실존이 예수가 곧 신의 아들이며 세상이 정말 기독교 창세론에 따라 만들어졌다는걸 증명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검증될 수 없는 종교적인 영역이다. 석가모니의 실존이 인정된다고 해서 불교적 사후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영혼이 윤회를 거듭한다고 증명되는 것이 아닌것과 같다. 어디까지나 종교적 색채와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역사적 기록과 증거들을 탐구하는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해, 학자들이 예수가 실존했다고 주장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복음서에서 묘사하는 기적을 일으키는 신의 아들 예수가 실존했다는 것이 아니라, 당대에 예수라 불리운 종교운동가가 실존했다는 것을 지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항목의 결론은 하나의 검증 결과인 것이지 어떤 종교나 신념 상의 유불리에 따르는 것이 아님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2 예수에 대한 역사적 기록

종교적 기록(주로 복음서) 이외에 동시대의 기록은 적은 편이다. 예수 본인은 동시대 동계급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가난했다고 추정되므로 그가 직접 남겼다는 기록이나 유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당시에 가장 정확한 역사 기록을 쓰고 있던 로마 제국의 입장에서 변방의 복속국에서 일어난 흔하고 작은 소요 사태[5]는 그다지 기록할 만한 가치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예수의 활동기간은, 복음서를 토대로 유추해봐도 지나치게 짧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공생애를 '3년'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요한복음[6] 만을 근거로 한 주장이며, 실제 예수의 활동기간은 불과 3~4개월 밖에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따라서 그 이전 시기의 고대의 다른 성인과 비교해도, 예수는 그 생애에 대한 기록이 매우 적을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기본적으로 제자인 플라톤과 크세노폰 외에도 고대 그리스 희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7]등 동시대 사람들의 증언과 사료 남아 있다. 공자도 정사인 사마천 사기에 공자 전기가 있으며, 공자와 제자들과의 대화 담긴 논어, 장자 및 여러 사서들과 증언들이 남아있다. 오히려 자료가 너무 방대해서 훈고학이라는 학파가 발생했을 정도. 그리고 석가모니는 생전에 그의 시중을 들면서 가르침을 외운 제자 아난다가 있어서 열반한 직후 500명의 아라한들이 모여서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기록했는데 그게 불경이다.

예수는 부처나 소크라테스나 공자처럼 유명한 성인이면서 그들에 비해 남아있는 기록이 적은데,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석가모니는 86세(기원전 563년 ~ 기원전 477년)에 사망했고 공자는 73세(기원전 551~기원전 479)에 소크라테스도 72세(기원전 570~499)에, 20세기 기준으로도 오래 살았고, 당시 그리스인들의 평균수명이 50세 전후이고, 인도인들과 중국인들의 평균수명은 그보다 낮았던걸 감안한다면 상당히 장수한 셈. 이에 비해 예수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약 34~37세(기원전 6~4년~기원후 30년)에 사망했다. 짧은 인생을 산만큼 기록이 적을 수밖에 없다.

둘째, 석가모니공자소크라테스가 수 십년간 활동한데 비해 예수의 활동기간은 짧으면 3개월 길어봐야 고작 3년이다(이전에는 아버지를 도와 일하던 흔한 목수이었다.)

셋째, 석가모니는 왕자였으며 생전에 이미 수천명이 넘는 제자들과 신도를 거느리고 모국을 침공하는 적국의 군대를 세번이나 막아낼 정도로 정치적 영향력이 강했다. 공자는 노나라에서 다양한 관직을 거쳤고[8] 자신의 사상을 설파하기 위해서 여러 제후국을 돌아다니면서 엄청난 명성을 쌓았다. 소크라테스도 당대의 철학자로서 상당히 인지도가 있었다. 반면에 피지배민족으로서 국가 권력과 인연이 없고, 관직도 가까이 하지 않은 예수는 공적 기록에서 자료가 적을 수 밖에 없다.

넷째, 석가모니의 제자들중에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제자만 1200명이 되었고 그에 도달하지 못한 제자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공자의 제자는 총 3,000명, 게다가 72현이라는 수제자들이 있었고,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안티스테네스, 아리스티포스, 에우클리데스, 파이돈, 플라톤, 아이스키네스, 크세노폰 등등 당대의 먼치킨들이었다. 이 제자들은 부유하거나 지체높은 가문 출신이거나 여러 나라에서 초빙을 받아서 벼슬을 하는 당시 국가와 체제의 안에서 활동을 했었다. 이에 반해 예수의 제자들은 총 70명, 그중 수제자들은 모두 12명이었으나 이들의 신분은 상당히 낮았다. 예컨데, 수제자인 베드로는 어부였다.[9]

이하는 예수의 실존을 증명한다고 여겨지는 자료들이다.

2.1 복음서

그리스도교의 경전인 성경에서 예수의 행적을 다루는 마태오 복음서, 마르코 복음서, 루카 복음서, 요한 복음서를 말한다.

2.1.1 복음서는 역사적 사료인가?

이 항목은 반달리즘식 수정이 자주 이루어지므로 해당 주제를 따로 빼내어 설명한다.

일단 결론부터 내리자면 복음서는 역사적 사료가 맞다. 여기서 사료란 역사 연구에 참고할 만한 문헌이나 유물. 문서, 기록, 건축, 조각 따위를 이른다.

1) '복음서의 내용은 상호 모순되거나 그 당시 역사 기록과 상충되는 내용들이 있다. 초현실적인 기적도 나온다. 그런데 어떻게 역사적 사료가 될 수 있나?'

→ 물론 복음서는 '있는 사실을 문자 그대로 기록했다는 의미의 역사서'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종교적 경전'이니만큼 저자의 의도에 따라 상호 모순적이거나 초현실적인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복음서의 역사적 가치를 부정할 수는 없다. 이것은 고대의 역사 기록방법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고대세계에서 역사를 쓰는 저자들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객관적인 사실을 기록해 후대에 전한다'는 관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이집트 기록 중에 유명한 투트모스 3세의 카르나크 비문을 보면 아문신이 파라오의 군대의 앞장을 서며 팔을 뻗어 그들을 돕는다는 표현이 수두룩하게 나온다. 다른 기록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자료들은 학계에서 엄연한 고대 사료로 인정받는다. 비문의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파라오가 신의 가호를 받는다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비문 자체의 내용보다는 정황 근거와 함께 입체적으로 파악하는 자세가 중요해진다.

실상 역사를 쓰는 사람들이 사료비판을 거친 객관적인 사실 서술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진 것은 르네상스 이후나 되서야 가능해진 일이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객관적인 역사서술' 방법론이 발전하는 것은 19세기의 일이다.[10]

2)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의 역사가들 중 상당수는 수사학적 표현으로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목표로 몰두하였고, 이러한 수사학적 역사학은 중세 시대까지도 어느 정도 지속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수사학적 역사학은 주류도 아니었고, 이 시기에도 역사의 본령은 과거의 중요한 사건을 가감없이 전달하는데 있다고 보는 역사가들이 여전히 존재하여, 그들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예수보다 훨씬 전인 기원전 484년에 출생한 역사가 헤로도토스만 해도, 그 자신이 기록한 것들 중, 비현실적인 내용들에 대해서는 헤로도토스 자신부터가 신뢰하지 않는다고 논평을 해 두었다. 기원전 200년에 출생한 인물인 폴리비오스나 기원전 460년에 출생한 투키디데스도 역사적 서술의 객관성을 중시했다. 하다 못해 서기 125년에 출생한 루키아노스마저도 그의 저서 '역사에 대하여'에서 역사가는 어떠한 왜곡도 없이 거울 같이 현실을 객관적으로 후세에 전달해야 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런데도 객관적인 역사서술 방법론이 발전하는 것이 19세기의 일이라는게 말이 되는가? 일부 기독교인의 주장에 불과하다.'

→ 헤로도토스 자신부터가 상당히 수사학적 역사가였고, 투키디데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헤로도토스는 신들의 활동을 신화처럼 상세하게 기록하지 않았다 뿐, 신적 섭리는 부정하지 않았으며, 투키디데스는 아테네 민주정에 대한 자신의 편견을 여과없이 반영하였다. 당장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에 대한 현대 역사가들의 주석서를 찾아보라. 그들의 구절 하나하나를 일일이 분석하고 검증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11]특히 그들의 사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화, 연설 등은 거의 창작이었을 가능성도 높다고 이야기되고 있다. 현대와 가까운 개념의 역사학, 사료비판이 르네상스 시기부터 시작되었고, 그것이 체계적인 학문적 방법론으로 정립된 것이 19세기라는 것은 사학사를 공부하는 이라면 상식이다. 믿기 어려우면 Our knowledge of the past: a philosophy of historiography 이 책을 참고해보길 바란다. 영미권 대학에서 사학사 교재로 쓰이는 책이다.

다음의 글은 종교와는 관계없는 고대 로마 군사사 전공자의 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많은 고대 역사가들은 책머리에 자신들의 의도가 진실을 기록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는 읽기에 즐겁고 드라마틱한 텍스트를 쓰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다. 역사는 정보보다도 즐거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개인적, 정치적 편견으로 인해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기도 했다. 불충분하거나 존재하지도 않는 사료를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었다. 이것은 전통적인 수사학적 주제를 동원해서 이루어졌다. (Adrian K. Goldsworthy, In the Name of Rome, p. 19.)" 이래도 헬레니즘과 로마 역사가들이 객관적인 역사가였으며, 수사학적 역사학이 주류가 아니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그리스인들의 기록을 제외하면 근동 왕조들의 기록은 대부분 이런 식이며, 그 기준에 따라 신적 개입이 나오는 종교적 텍스트를 모두 제외한다면 고대 이집트를 비롯한 숱한 근동 왕조들의 역사는 상당히 부실해질 것이다.

고대 저자들의 서술 기법은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정형화된 패턴, 특히 널리 알려진 고전으로부터 이야기를 차용하는 패턴을 가지고 있었다. 사례만 간략히 예를 들어보자,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등장하는 크로이소스의 이야기, 키루스의 출생 비화나 그의 최후, 캄뷔세스의 죽음 등등은 자세히 살펴보면 대단히 정형화된 패턴을 띄고 있다. 이것은 헤로도토스가 '인간은 운명을 거역할 수 없다'는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이야기를 이렇게 재구성한 것이다. 이 이야기들 중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진실이고 얼마가 가공인지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이러한 패턴은 중세, 르네상스까지 쭉 이어진다. 가령, 헤로도토스가 서술한 테르모필라이 전투 서술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의 전투 장면과 흡사하다. 이러한 방식은 로마의 역사가들, 그리고 중세의 연대기 저자들까지 차용했다. 그랬기 때문에 실제 고대 전투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복원하는 일은 난항을 겪기도 한다. 복음서의 서술 역시 마찬가지다. 복음서 저자들은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이전 기록(이 경우엔 구약성서)의 패턴을 이용해서 예수의 생애를 서술했다. 가령 예수의 탄생, 헤로데의 유아 살해, 이집트로의 탈출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모세 이야기의 변주다. 이를 통해서 예수가 새로운 모세임을 전달하려 했던 것이다. 이것은 왜곡이 아니라, 고대 세계의 흔한 서술법이었다

당연히 이런 이야기들은 역사적 '팩트'와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그걸 이유로 복음서가 사료가 될 수 없다면, 다른 고대 기록들도 마찬가지다. 역사적 예수의 경우 교차검증할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작업이 더 어렵긴 하지만, 그렇다고 복음서가 예수의 실존에 대한 사료로 쓰일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의 저자들은 고대 세계라는 한계 내에서 놀라울 정도로 객관적인 서술을 위해 노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그랬다는 것이지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객관성은 아니었다. 그리고 따지고보면 고대세계에서는 오랜 시간동안 근동식 서술이 주류였고, 그나마 객관적이었던 그리스, 로마의 저자들이 '예외적 케이스'였다.

3) '복음서는 객관적인 역사를 기록하겠다는게 아니라 종교적 목적으로 쓰여진 책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그걸 가지고 역사연구를 할 수가 있나?'

→ '종교적 목적'에서 쓰여진게 문제라면, 고대 근동 왕조들의 수많은 기록, 비문도 똑같이 문제가 된다. 그 기준이라면 아테네를 비판하려는 목적이 강한 투키디데스의 저작 역시 '정치적 목적'으로 쓴거라 문제가 된다.(실제로 투키디데스는 왜곡도 많이 했다) 위 주장은 객관적이지 않은 서술은 사료가 될 수 없다고 하지만, 애시당초에 100% 완벽한 객관적인 사료는 없다. [12] 불완전한 사료를 최대한 검증해서 객관적인 역사를 쓰려는 학자들의 노력이 있을 뿐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대해 현존하는 사료는 매우 적다. 그 중 중요한 사료 중 하나는 아리아노스의 기록인데, 여기에는 말하는 뱀이 알렉산드로스를 시와로 인도하는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그대로 나온다. 위 기준에 따르면 이것도 사료가 못 되는 셈이다.

일본서기나 세계대전 당시의 각국의 프로파간다 등의 내용은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진 정보들이다. 그러나 사실관계와는 다르고 왜곡이 심하다고 무시하기에는 다른 역사서에는 없는 유니크한 기록을 담고 있기도 하며 당대 정치가들이 어떤 식으로 국민을 통제하려고 했는지 사상의 편린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런 왜곡 자체가 또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사료로서 인정된다. 즉 사료는 그 자체가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 비평적인 접근으로 가공된 후에 역사적인 정보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지 팩트만이 사료가 되는 것은 아니다.

4) '그래서, 학자들도 복음서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는가?'

그래야 하겠지만, 역사적 자료가 담긴 고대 기록과 동일한 기준을 신약에 적용한다면, 우리는 역사적 존재를 누구도 의심하지 않은 다수의 이교도 인물들을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더 이상 예수의 존재도 부정할 수 없게 된다.(Jesus: An Historian’s Review of the Gospels - 마이클 그랜트)[13]
이를테면 Tacitus와 같은 인물은 단 하나의 중세 필사본에만 등장하지만 초기 신약성서 필사본의 양은 놀라울 정도이다(폴 존슨)
예수의 생애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1차사료는 복음서다. 교회가 그것들을 정경화했기 때문이 아니라, 복음서가 예수와 그의 첫 제자들의 역사적 환경에 가장 근접한 모습을 담고 있는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피터 J. 톰슨)[14]

이외에도 역사적 예수 연구의 거장들 E. P.샌더스[15], 게자 버마스[16]등의 쟁쟁한 학자들은 모두 복음서의 사료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그것을 통해서 역사적 예수에 다가갈수 있다고 본다. 이처럼 학계에서 예수의 생애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은 복음서를 주요 사료로 활용하고 있다. 복음서를 사료로 인정 못하겠다는건 학계의 정설을 무시하는 처사에 불과하다.

복음서가 사료로 가치가 있다는 것은 그것이 역사적 예수의 생애를 '객관적'으로 그리고 있어서가 아니고 복음서만으로도 역사적 예수에 대한 근거를 뽑아낼 수 있기 때문도 아니다. 예수의 존재는 명확하게 다른 사료를 통해서도 확인되며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예수에 대해서, 복음서는 그 구체적인 행보를 제시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사료이기 때문이다. [17]

학자들은 그런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의 사상이나 기독교의 사상적인 배경을 파악하기를 권하며 이 것이 학계의 또다른 정설이기도 하다. 즉 신화가 신화 자체나 그로 인해 얻어지는 어떤 정당성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당대의 사상을 반증해주는 것임을 인정하듯, 복음서를 사료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억지 논리는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2.1.2 복음서의 속보성

복음서는 비슷한 성격의 문서 중에선 매우 빠른 시점에 작성된 문서이다. 조로아스터에 가장 인기 있는 파시교도의 전기가 AD 1278년에 작성되었고 BC 6세기의 석가모니의 최초의 전기도 AD 1세기에 기록되었으며, 마호메트의 전기 또한 그가 죽은지 100년이 완전히 지난 767년에야 비로소 기록되었다. 이에 비해 예수 사후 30~40년 만에 기록된 복음서는 이례적으로 빠르다. 더불어 현재 남아있는 문서 중에선 예수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서 가장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기록 시기가 중요한 이유는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특정 사실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형되고 뒤죽박죽 섞여버린다. 따라서 가까운 시점에 작성된 기록일수록 신뢰성이 높다. 그리고 죽은 지 몇 십 년 밖에 안 된 인물에 대한 내용을 기록한다면 완전 조작 되고 거짓된 기록이 있을 경우 그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예수 주변)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2.2 요세푸스의 기록

유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CE 37~c.100)의 저서 『유대인 고대사』(The Antiquities of the Jews)에 다음과 같은 두개의 기록이 있다.

…대제사장직에 임명된 아들 아나누스는… 이미 언급된 것처럼 다른 유대인들보다도 범죄자를 엄격하게 심판하는 사두개파 일원이었다. 아나누스는 이러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이러한 권한을 행사할 적절한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였다. 베스도가 이제 죽었고 아나누스는 부임중에 있었다. 따라서 아나누스는 산헤드린 공의회를 소집하여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와 다른 형제들(혹은 그의 동료들)을 산헤들린 앞에 세우고 율법 위반자로 그들을 고소하여 돌로 쳐죽이도록 보냈다. 예루살렘 시민들 중 공평하고 율법 위반을 불쾌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은 아나누스가 행한 일을 혐오스럽게 생각했다…(『유대인 고대사』, 20, 199-203

이 기록을 놓고 기독교인이 '그리스도' 부분을 가필했다는 주장이 존재하는데, 유대고대사에 등장하는 예수라는 동명이인은 총 13명이다. 당시의 어법은 인물의 이름 앞에 그를 특정할 수 있는 지역이나 가족을 소개하는 방법을 많이 썼는데, 야고보를 소개할 수 있는 가장 대중적이고 확실한 것은 유명인사인 예수의 이름으로 수식하는 것이었고, 동명이인의 예수 중 나사렛 예수를 수식하기 가장 보편적인 수식어는 '그리스도'였던 것이다.'그리스도라 불리우는'이란 표현은 중립적인 입장에서 적혀진 것이다. 기독교인이 '그리스도' 부분을 가필했다면 아마 '그리스도 예수의 형제' 혹은 '그리스도의 형제'라고 적었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는 '그리스도'라는 단어 자체가 고유명사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구절이 예수의 신성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아 가필의 실익이 없으므로 가필의 가능성은 더욱 없을 것이다.

다음은 오늘날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플라비우스 증언이다.

이때에, 우리가 그를 한 인간이라고 불러야만 한다면 현자라고 말해야 할 예수가 있었다. 그는 믿기 어려운 공적을 행한 일꾼이었고,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들의 스승이었고, 수많은 헬라인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유대인들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기름부음을 받은 자)였다. 본시오 빌라도가 우리 가운데서 지도자 역할을 하는 고귀한 사람들의 고소 때문에 이 사람을 십자가형에 처했을 때, 처음부터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결코 그에 대한 사랑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죽은 지 사흘 만에 생명으로 복귀된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났다. 왜냐하면 신의 예언자들이 그에 관하여 이러한 일과 또 셀 수 없는 많은 놀라운 사건들을 예언하여 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의 이름을 따라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게 된 족속들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다.(『유대인 고대사』, Bk.16, Ch.3, 63~64)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글을 신뢰하고 예수와 초기 기독교에 대한 사실적인 증거라고 보았으나, 시간이 흐른 후 이 글 속에는 가필과 의도적 변조가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기록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근거는 4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바리사이적 유대주의에 충실했던 요세푸스가 예수를 그리스도였다고 말할 가능성이 없다는 점

둘째, 오리게네스가 그의 글에서 요세푸스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한 점

셋째, 예수에 대한 이 기록은 전체 문맥의 흐름에서 볼 때 자연스럽지 못하며 문장이 요세푸스의 문장이나 술어 등에 보이는 독특성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 요세푸스는 분명히 기독신자가 아니었으나 그의 글 속에는 오직 기독교인만이 진지하게 사용할 수 있는 독특한 표현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세푸스는 장황설을 좋아하는 역사가로, 그에 비해 예수에 대한 기록은 지나치게 간략하다

넷째, 초대 교부들과 기독교 변증가들이 이 기록을 인용하지 않았으며, 324년이 되어서야 유세비우스 추기경에 의해 인용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 유세비우스는 그의 저서 '복음적 증명'에서 "아마도 우리의 구세주에 관해 내가 이미 만들어 낸 증언들만으로도 충분할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에 더하여, 유대인 요셉푸스를 추가적인 증인으로 만드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점

허나 전체가 가필되었다고 보기에는, 미심쩍은 부분들이 상당히 많다.

첫째, 문맥, 즉 글쓴이의 입장이 일관되지 못하다. '현자' '놀라운일' '족속(단체의 비하표현)'등은 비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쓰여진 것으로 여겨지는 객관적 표현이나, '그리스도였다' '그의 진리를...' 및 '부활에 관한 확언' 등은 기독교의 입장이다. 즉, 두 사람 이상이(요세푸스 + 기독교인) 글에 손 대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둘째,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빌라도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 유대인의 입장이다. 이런 입장은 랍비자료와도 일치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죽음의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지운다.

셋째, 오리게네스는 그의 책을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요세푸스가 믿지 않았다고 했다. '예수의 기록을 찾지 못했다'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내용이다. 초기교회 내 에서의 논쟁의 초점은 '예수가 있었냐'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어떠한 신인가' 라는 것이었으며, 예수가 신인가 아닌가 하는 논쟁은 주로 기독교와 비기독교 사이에서 벌어졌다. 오리게네스 역시 예수의 '실존'보다는 예수의 '신격'에 관심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오리겐이 본 요세푸스의 책에는 뭐라고 기록되어 있었을까? 요세푸스와 예수를 연관지은 것으로 보아 오리게네스가 본 요세푸스의 책에는 틀림없이 예수에 대한 언급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쓰여진 것이었으므로 오리게네스는 요세푸스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고 밝혔을 것이다.

오리게네스에 대해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한 가지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삼위일체의 정립에 중요한 기여를 한 기독교의 변호인이었다. 예수의 신성을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알렸던 그가 기독교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언급인 '요세푸스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지 않았다'라고 말했다는 것은 반대로 누군가가 '요세푸스는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믿었다.'라는 주장을 제기하였다고 유추할 수 있다. 기록으로는 남아있지 않더라도, 당시에 요세푸스의 중립적인 기록을 두고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구분짓는 사소한 논쟁이 오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요세푸스가 적은 원본에 예수가 언급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넷째, 기록인용 시기가 늦었던 것은 이유가 있다. 초기교회와 비기독교도 사이의 논쟁의 초점은 '예수가 있었냐'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신인가 아닌가'라는 것이었다. 예수의 존재를 가지고 논쟁하지 않았으므로 요세푸스가 당초에 적었을 예수에 대한 중립적 구절은 인용할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예수의 신격을 강조하기 위해 '굳이 그를 사람으로 부른다면', '그는 그리스도였다.' 및 '다시 살아났다.'는 구절을 가필함으로써 주장자의 논거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유세비우스의 발언 또한 예수의 '신성'에 대한 '증인'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당시에도 역사서를 가필하는 것은 비판받을만한 행동이었는데, 이러한 내용을 순순히 떠벌릴리가 없으므로.

다섯째, 기록이 왜 이리 간략한가? 먼저 당시의 역사가들은 자신의 관심 밖에 있던 인물은 과감히 기록에서 제외하였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요세푸스가 언급하는 세례자 요한은 필론과 사도 파울로스, 랍비문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정의의 스승은 쿰란문서에만 나오고, 힐렐학파의 창시자인 랍비 힐렐[18]도 바리사이파였던 요세푸스에 의해 언급된 바가 없다. 역시 디오 카시우스는 유대의 반로마 저항운동에 대한 기록에서 메시아적 지도자인 바르 코흐바에 대해 아무른 언급을 하지 않고 지나친다.

요세푸스는 유대의 배신자였다. 66-74년의 유대-로마간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다른 동료들이 자살하는 대신 요세푸스는 항복하여 로마의 옹호자가 된다. 자신의 책을 통해 변명을 할 필요도 있었던 그였기에 요세푸스는 유대-로마간의 항쟁에 유달리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유대전쟁사'를 쓰기도 하였다. 세례요한의 경우 헤롯의 결혼문제로 시비를 걸기까지 하는 등 로마에게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였기에 요세푸스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 또, 요세푸스는 유대전쟁사를 통해 이집트의 거짓예언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가 올리브산에 3만명을 집결시켜 자신의 무장추종세력과 함께 예루살렘에 진입하여 로마군을 몰아내려하다가 총독 펠릭스에 발각되어 현장에서 대참사가 벌어진다는 내용이다. 즉, 대로마 항쟁에 관심이 있었던 요세푸스에게 황제에게도 세금을 바치라고 했던,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던 예수는 관심 밖이었다.

여섯째, 10세기 히에라폴리스의 주교인 아가피우스가 이슬람과 논쟁하면서 인용하였던 문구는 다음과 같다.

'요세푸스는... 말한다... 이 시기에 예수라 하는 현자가 있었는데, 그는 품행이 선했으며, 덕(혹은 학식)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 사람들도 제자로 삼았다. 빌라도는 그에게 십자가형을 내려 죽게 했지만 그의 제자였던 사람들은 그 제자됨(혹은 가르침)을 포기하지 않고, 그가 자신들에게 십자가 처형 후 사흘째 되던 날 살아서 다시 나타났으며, 그러므로 그는 아마 메시아이며, 선지자들도 그에 대해서 놀라운 일들을 예언했다고 말했다.'

이 인용문에는 놀랍게도 학자들에 의해 가필로 추정되고 있는 부분 중 상당수가 보이지 않는다. 가필한 부분까지 인용을 해야만 주장을 전개하는 데에 유리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달랑 위의 구절만 인용한 것이다. 아가피우스가 이 자료를 어디서 구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아마 가필이 비교적 덜 진행된 요세푸스의 사본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인기 있는 역사학자인 요세푸스의 사본들은 그 수가 많았을 것이고 누군가가 가필을 했다면 로마와 그리스까지 퍼져 있던 그의 사본들을 모조리 가필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2.1 정리

전체가 가필되었다고 보기에는 위와 같은 증거들이 존재하며, 가필이 없었다고 보기에는 그리스도교적 요소들의 냄새가 너무 짙게 배어있다. 대다수 학자들은 이 기록이 부분 가필되었거나 개정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예수에 대해 비관적인 유태인 신학자 마이어도 동의하고 있다.

부분 가필된 것으로 추정되는 문장은 다음 세구절이다.

"우리가 그를 한 인간이라고 불러야만 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였다."
"그는 죽은 지 사흘 만에 생명으로 복귀된 모습으로..."

그것을 떼어내면 원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 된다.

이때에, 우리가 그를 한 인간이라고 불러야만 한다면 현자라고 말해야 할 예수가 있었다. 그는 믿기 어려운 공적을 행한 일꾼이었고,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들의 스승이었고, 수많은 헬라인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유대인들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기름부음을 받은 자)였다. 본시오 빌라도가 우리 가운데서 지도자 역할을 하는 고귀한 사람들의 고소 때문에 이 사람을 십자가형에 처했을 때, 처음부터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결코 그에 대한 사랑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죽은 지 사흘 만에 생명으로 복귀된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났다. 왜냐하면 신의 예언자들이 그에 관하여 이러한 일과 또 셀 수 없는 많은 놀라운 사건들을 예언하여 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의 이름을 따라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게 된 족속들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다.(『유대인 고대사』, Bk.16, Ch.3, 63~64)

물론 이 가정은 앞서 언급한 의문시되던 3가지 조항을 제거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여러 학자들은 지금도 확실한 원본을 재구성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원본이 예수에 대해 호의적이냐/중립적이냐/악의적이냐 하는 것도 중요한 논란거리 중 하나다.

아래는 플라비우스 증언 논란의 간략한 역사다.

16세기: "조지프 스칼리거"라는 인물이 "증언"구절의 진위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너무나도 기독교 색채가 짙다는 것이었다.

17세기: "리처드 몬터규" 추기경이 "그는 구원자였다"라는 구절이 훗날 기독교도가, 복사 과정에서, 덧붙여 쓴 것이라고 주장하다.

1737: "위스턴"이 "요세푸스"의 저술들을 번역하다. "요세푸스"가 유태인 기독교이었을수도 있다고 하다. 따라서 "증언"구절 전체가 원래 그에 의해 쓰여졌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다.

18 세기 - 20 세기 초반: 많은 학자들이 상기 구절이 전체 또는 부분적으로 위조되었다고 주장하다.

1929: "대커리"가 위조설을 지지하다. 그는 또 "누가 복음"과 "연대기"에 공통점이 많음을 지적하고 "누가"와 "조세푸스"의 상면 가능성을 얘기하다.

1931: "아이슬러"가 기독교 검열하에 많은 부분의 삭제가 있었다며 그 나름대로 재수정 복구된 구절을 제시하다.

1941: "마틴"이 부분적인 위조를 지적하고 나머지 부분은 정확하다고 주장하다.

1954: "폴 윈터"가 위조된 곳은 세 곳 뿐이며 나머지는 정확하다고 주장하다. 세 군데 위조는 "그는 구원자였다",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의 두 구절과 뒷 부분의 부활과 예언에 관한 구절이었다. 이 주장은 당시 많은 공감을 샀다.

1960: "콘젤만"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내포된 신앙관과 "증언"의 공통성을 발견하다. 따라서 "증언"전체가 기독교도에 의해 위조됐다고 주장하다.

1963: "펠드만"이 거의 모든 부분이 정확하다고 단정하다.

1971: "파인스"가 9-10세기 아랍 및 시리아 본을("아가피우스"의 구절)발견 하다. 이들 사본에는 "구원자" 운운의 구절과 "인간이라 부를 수...." 두 구절이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들어 이것이 위조되지 않은 원본 기록일 수도 있다고 주장하다.

1973-1983: "렝스토푸"가 "요세푸스"의 저술을 집대성 재구성하여 용어 색인 체계를 만듦으로 학자들의 연구에 편리한 도구로 쓰이게 하다.

1984: "버즈올"이 "렝스토푸"의 색인체계를 이용하여 "증언"의 문체를 분석하다. "요세푸스"의 문체와 너무 다르므로 "증언" 전체가 위조라고 주장하다.

1991: "마이어"가 "폴 윈터"의 설을 지지하다. 즉 세 군데만 위조됐다는 것이다. 그의 연구는 현재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1995: "골드버그"가 "증언"과 루카 복음서의 엠마오 노상의 이야기 (예수가 부활 해서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에게 나타난 이야기) 에 신기한 공통점을 발견하다. 따라서 "증언과" "엠마오 이야기"는 이제는 잃어버린 어느 초대 기독교 문서에 공통적으로 근거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다. 결론으로 그는 "구원자" , "사람일 수..." 구절 두 개만 빼고는 전부 원본에 있었다는 것이다.

2.3 타키투스의 기록

예수에 대한 또다른 증거로는 타키투스의 연대기(Annales)에서 네로 때의 로마 대화재 사건에 대해 쓴 다음 기록이다.

...결과적으로 그 소문을 없애기 위해서 네로는 그들의 혐오감을 주는 행위 때문에 증오받았던 단체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가장 극심한 고문을 가했다. 그들은 대중에 의해 그리스도인라고 불러진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그리스도라는 사람에 그 기원을 갖는다. 그리스도는 티베리우스의 재위기간에 우리의 행정관 본시오 빌라도에 의해 극형으로 고통받았던 사람이다. 이 부패한 미신은 잠깐 동안 억눌려 있었지만 나중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으니, 그 신앙이 처음 발생한 유대 지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혐오스러운 것과 흉악한 것들이 밀려들어와 횡행하고 있는 로마에도 세력을 뻗쳤다. ..(중략).. 그래서 유죄를 인정한 모든 사람들에 대해 최초로 체포가 행해졌다. 그 때 그들의 정보를 바탕으로 엄청난 사람들이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도시 방화죄 때문이 아니라 인류에 대한 증오 때문이었다.

일단 이 기록은 요세푸스의 "플라비우스 증언"과는 다르게 가필 논란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우선, 빌라도를 행정관(procurator)으로 묘사하고 있어 신약성경과 배치된다. 기독교인들이 적었다면 신약성경과 일치하는 내용인 총독(praesidio)이라 적었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기독교를 인류를 증오하는 ‘부패한 미신’집단으로 보며 그리스도를 악의 근원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이 기록들이 기독교인들에 의해 기록되었을리 만무하다. 의도적인 가필이라면 그 목적이 있었을 것이나 이 기록으로 기독교인들에게 득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는 반면 흠집만 더해지는 꼴이니 의도적 가필의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이다.

타키투스가 C.E.55년 경 출생한 인물임을 감안할 때 예수의 존재가 조작이라면 타키투스는 그 사기성을 고발하는 글을 적었을 것이다. 자신이 젊었을 때는 전혀 없던 인물에 관한 이야기가 늘그막에 느닷없이 나타나는 것을 관료인 그가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에 대해 ‘부패한 미신’이라고 일컬을 만큼 좋지 않은 시각을 가진 그였음에도 예수의 존재를 '사기'로 보지 않고 짧은 글이나마 사실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2.4 수에토니우스의 기록

'황제들의 생애(De vita caesarum)'[19] 중 클라우디우스의 치세를 적고 있는 '클라우디우스의 생애' 편에서 수에토니우스는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49년에 '크레스투스'의 사주로 인하여 분란을 일으키는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Crestus'가 당시의 흔했던, 특히 노예의 이름으로 자주 사용되었던 이름으로 이 문서에서 크레스투스가 예수를 특정한다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있지만, 학자들은 수에토니우스가 C.E.54년 당시에 로마에 막 자리잡기 시작하였던 기독교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굉장히 생소하였을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Cristus'라는 단어는 매우 낯설었을 것이다. 학자들은 그 결과 수에토니우스가 자신이 전혀 몰랐던 'Cristus'라는 단어가 잘못된 정보일 것으로 여겨 자신의 책에 'Crestus'라고 적었을 것이라는 추론을 한다.

또한 "크레스투스에 의해 미혹"되었다라는 말은 굳이 로마에 예수가 있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표현으로서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가 초기 기독교의 핵심이었다는 것을 잘 반영하고 있다. 또 어떤 인물이 주동이 되어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면 클라우디우스는 다른 로마 황제들처럼 강력하게 진압을 했을 것이나 단순한 추방명령을 내린 것을 보면 그 원인은 단순한 사상이나 종교적 문제에 대한 대처라고 볼 수 있다. 결정적으로 수에토니우스의 이 기록은 사도행전 18:2의 기록과 연대와 인물이 정확히 일치하여 단순히 철자 하나가 다르다는 이유로 수에토니우스의 '증거'를 무시하기에는 역부족이다.

2.5 랍비 자료

누구보다도 예수를 가까이에서 경험했던 유태인들의 기록에서도 예수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랍비자료에는 예수가 마리아와 판델라(Pandera, Pantera, Pandila등 여러 표기가 있다)라는 로마 병사[20]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등 예수에 대한 언급이 수차례 언급되고 있으며, M.윌콕스에 의하면 초기의 랍비들이 모두 예수를 이단자나 사기꾼으로 보지 않았다는 기록도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여러 랍비문서 중 인용할 만한 대표적인 자료로는 탈무드 중 아래의 텍스트(bSanh 43a)가 있다. C.E. 2세기 이후인 타나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파스카 축제 전날 밤 사람들은 예수를 매달았다. 사십 일 전 전령이 이렇게 외쳤다. '그 사람은 마술을 행하고 이스라엘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여 불충한 자들로 만들었으니, 끌려가서 돌팔매질을 당할 것이다. 그를 변호할 자는 나와서 말해보라.' 그러나 아무도 그를 변호하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파스카 축제 전날 밤 매달았다. 랍비들은 이렇게 가르쳤다. 예수에게는 마타이, 나카이, 네제르, 부니, 토다 이렇게 다섯 명의 제자가 있었다. 사람들이 마타이를 끌고 갔을 때 예수는 그들(재판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 "마타이를 처형해야 하는가? '언제 내(마타이)가 나아가서 하느님을 뵈울 수 있을까? (시편 42,2)라고 기록되지 않았나?" 그들은 예수의 말에 이렇게 응수했다. : "물론이지. 마타이는 처형될 것이야. '저 자가 언제 죽어서 그 이름이 없어질까?' (시편 41,5)라는 말씀도 있으니까." (후략... 이와 비슷한 말놀이들이 예수의 다른 네 제자의 경우에도 이어진다.

신학자 마이어(J.Maier)는 대략 예수 사후 220년까지의 랍비 문서에는 단 하나의 '예수 문구'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 자료는 기독교의 도전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독자적인 역사적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으나, 탈무드는 C.E. 200년 이후 부터 구전되는 율법해석 등을 문서화하는 식으로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므로, 그 이전의 랍비 자료에서 예수의 흔적을 찾기를 기대하기란 무리일 것이다. 유대인들은 대체로 이단에 대해 상세히 조사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20년 이후 예수의 기록이 탈무드에서 나타난 것은 늦은 것만은 아닌 셈이다.

또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그들만의 전승'의 가능성이다. 1900년대 초반 요셉 클라우스너(Joseph Klausner)[21]는 최소한 몇 개의 신뢰할 만한 전승들을 찾아 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위의 텍스트는 다른 기록이나 복음서에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데, 바로 '돌에 맞아 죽은 후 매달렸다', '40일 동안 증인을 찾았다.', '엉뚱한 다섯 제자의 이름' 등이 바로 그것이다. 기본적인 사실은 일치하면서 나름대로 개성있게 기록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은 기록되면서 급조된 이야기라기 보다, 예수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그들 사이에서 전승되어 왔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마이어의 이론은 전적으로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으로 이런 식의 주장은 그 어떠한 역사적 추론에도 딴지를 걸 수 있게 된다. 다른 텍스트에서는 굳이 예수가 마리아와 로마 병사의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예수 출생과 관련한 특이한 점이 있었을 암시하고 있다.

2.6 마라 바르 사라피온의 편지

시리아스토아 철학자인 마라 바르 사라피온(Mara Bar Sarapion)은 로마의 감옥에서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는 아들에게 전해주는 권고와 경고들로 가득차 있는데, 그 중 '유대인의 현명한 왕'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아테네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를 죽여서 무슨 이익을 보았느냐? 그들이 무슨 일을 했길래 기아와 역병으로 대갚음을 당했느냐? 사모스 섬 사람들이 피타고라스를 불태워 온 나라가 한 순간에 모래로 뒤덮이게 되었으니 그들에게 무슨 득이 있겠느냐? 유대인들이 현명한 왕을 처형하고 그때부터 그 나라를 빼앗겼으니 그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신께서는 그 세 현자들을 위하여 똑같이 복수를 행하셨다. 아테네 사람들은 굶주려 죽었고, 사모스 섬은 바닷물로 뒤덮혔으며, 유대인들은 살육당하고 자기네 나라에서 쫓겨나 여기저기서 흩어져 살게 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죽지 않았다-플라톤 때문에, 피타고라스도 아직 살아 있다-헤라스타누에 때문에, 현명한 왕도 살아 있다-그가 준 새로운 율법 때문에.

일단 이 편지는 73년 직후에 집필되었다는 추측이 유력하다. 편지의 다른 부분에서 마라는 아들에게 반로마 정서를 가진 사모사타 주민들이 실루기아로 피난한 일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73년 로마인들이 안티쿠오스4세를 폐위하고 사모사타에서 추방한 사건과 연관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유대인이 나라를 잃었던 사건은 두가지의 후보가 있다. 하나는 66-74년에 벌어진 유대-로마 전쟁이고, 하나는 132-135년 있었던 바 코흐바 전쟁이다. '현명한 왕'이 예수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가정이 사실이라면 마라가 언급한 전쟁은 전자의 전쟁일 것이다. 그러나 연대를 132년 이후로 보더라도 이 '현명한 왕'이 예수를 가리킨다는 사실은 별로 위협받지 못한다. 가능한 다른 인물이 없기 때문이다.

정확한 이름이 나와있지 않으니 여기서 말하는 '왕'이 예수인지 세례자 요한인지 아니면 정의의 스승인지는 알 수가 없다는 반론 또한 존재하지만, 편지 속의 '현명한 왕'이 예수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정황이 많다. 우선, 예수의 탄생과 죽음(십자가의 명패)에 이르기까지 왕이라는 수식어는 항상 그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유대-로마 전쟁에서의 유대가 패하여 예루살렘이 멸망당한 사건을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유대인들의 죄의 대가-벌로 보는 것이 당시의 보편적 평가였다. 그리고 '그가 준 새로운 율법'이라는 표현은 예수가 새계명을 준 사실과 일치한다. 새로운 율법과 왕의 칭호, 이 두가지 조건은 예수 외에는 일치하는 인물이 없다.

2.7 땅이 어두워진 날

복음서에 나와있는,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숨을 거둘때 찾아온 거대한 어둠에 대하여 동시대의 역사가들이 기록하고 있는 문건이 2개 있다.

1. 탈루스
탈루스는 1세기 로마인 혹은 사마리아인으로 추정되는 인물로 52년 이후 세권의 역사책을 썼으나 소실되었다는 것만 알려져 있다. 탈루스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비문에 자주 언급되고 있으며 요세푸스가 "유대고대사"에서 언급한 티베리우스 황제(재임기간14-37)에게 사면받은 부자와 동일한 인물로 추정되고 있다.
그의 저서는 지금 없지만 221년 기독교인인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170-240)가 그의 저서를 반박하는 자료에 의해 당초 탈루스가 적었을 내용을 유추할 수 있다.

"역사책 제3권에서 탈루스는 이 어둠을 일식이라고 부른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불합리한 것 같다."
(이후 율리우스는 예수가 파스카 축제, 즉 만월이었을 때 십자가형을 당했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보름달일 때는 일식이 일어나지 않음을 주장한다.)

당초 탈루스가 기독교인들의 주장에 대해 반박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둘때 닥친 그 거대한 어두워짐에 대해 자연현상인 일식으로 설명했던 것이다. 1세기 역사학자인 탈루스도 기독교인들과 예수의 죽음과 관련된 사건을 두고 일련의 논쟁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2. 플레곤
그리스 작가 플레곤(2세기초)의 기록에 의하면 202회 올림피아드의 4년째 해 즉 A.D.33년(일부학자들에 의하면 A.D.29년) '가장 큰 일식 현상'이 발생했다. 그의 보고에 의하면 "하루중 6시경 즉 정오에 밤이 되어서 심지어 하늘에 별이 나타날 정도로 어두워졌다"라고 되어 있다.

예수에 대해 회의적인 유대인 학자 폴 마이어도 그의 저서 '본시오 빌라도(1968)'에서 위 기록들을 근거로 "이 현상은 분명히 로마와 아테네 그리고 지중해의 다른 도시에서도 볼 수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2.8 기타 증거

기독교는 유대교의 분파로 출발했으며 로마 제국의 박해를 받았던 이유로 로마의 지식인들은 이 신흥종교를 맹렬하게 공격했고, 기독교인들이 믿던 예수 또한 예외가 아니었으나, 기독교의 초기 역사 당시 이러한 반그리스도교 입장의 비판자들도 예수의 실존 자체는 인정했다. 예를 들어, 로마의 지식인이었던 켈수스는 성모 마리아가 로마 병사 판테라와의 간통을 통해 예수를 낳았다(=즉 사생아다.)라고 주장했다. 이외에도 당시 기록들을 살펴보면 '예수라는 비천한 인간이 어떻게 신적 존재가 될 수 있는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정치범을 숭배한다는게 말이 되는가' 등등 다양한 비판이 있었으나, 이런 비판자들도 예수의 실존 자체를 문제시하진 않았다- 예수가 정말 허구의 인물이었다면 그 점을 지적하는게 가장 효율적인 공격일텐데도 말이다.

그리고 로마는 비교적 행정체계가 잘 잡힌 국가였고, 법정 최고형인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처형수는 실존 자체를 조작하기는 매우 어렵다. 즉 완전한 허구의 인물 A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형을 받았다"고 주장할 경우 현지인들이 "예루살렘에 그런 시형수는 없었는데?"라고 증언하면 완전히 논파되어버리고, 이러한 약점은 두고두고 씹힐 먹잇감이 되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초기 기독교에 대한 반대 주장 중 가장 많은 것이 "저놈들이 숭배하는 놈은 십자가형 선고받은 중범죄자"라는 논리였으며, 초기 기독교 신자들은 "우리는 제국에 반기를 드는 세력이 아니다. 그분을 죽인 것은 로마 제국이 아니라 그분을 못알아본 민초들이다"라고 엄청나게 어필을 했는데, 이럴바에는 처음부터 가상인물을 이런 위험한 설정으로 만들 이유가 전혀 없다. 차라리 "우리 구원자는 시골 깡촌에서 돌에 맞아 죽었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훨씬 조작에는 도움이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가 사형수라는 점이 당시 사람들에게 그의 실존을 뒷받침하는 큰 증거가 된 셈이다.

여기에 "정말로 예수라는 인물을 날조할 필요가 있는가?"도 고려해야 한다. 당대엔 메시아를 자칭하는 인물이 흔하디 흔했고, 물론 그 추종 세력도 우후죽순 격이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교주란 사람이 증언상으로만 존재하고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선교라는게 가능할까? 교주를 날조할 작정이라면 적당한 인물을 얼마든지 내세울 수 있고, 베드로 같은 인물이라면 그 자신을 교주로 내세우는 것도 가능했으며 초기 기독교에서 이미 성인 취급을 받던 세례자 요한도 그럴 자격은 충족한다. 굳이 가상의 인물을 창조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는 것이다.

3 결론

앞부분에 말했듯이,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이 존재했다는 게 학계의 주류적 의견이다.

적어도 예수가 역사적으로 존재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중략)....요세푸스의 글에서 우리는 예수가 메시아 사상을 주장한 유대 종파주의자였고 그가 죽은 이후에 그를 추종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일들이 로마 제국을 아주 귀찮게 했다는 것 등을 예상할 수 있을 뿐이다. 예수를 언급하였던 다른 비-기독교 문헌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이들 문헌들은 예수의 역사성을 확인해 주기는 하지만, 그 이상의 다른 정보를 제공해 주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연대기'에서 타키투스는 64년에 일어난 로마 화재사건을 언급하면서 기독교를 '혐오스러운 미신'으로 불렀으며, '이 종파의 설립자인 그리스도'는 티베리우스 황제 때에 본디오 빌라도 총독에 의해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는 사실을 기록해 놓았다. 112년에 플리니우스가 쓴 문서에는 기독교 종파를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찬양하였던' 무리들로 기록하였다. 수에토니우스가 쓴 문헌에서도 기독교에 관한 언급이 등장하고 있는데, 클라우디우스 통치 때엔 41~54년에 로마에는 이미 기독교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당대를 기록한 역사물들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실재했던 인물임이 확실하다.(기독교의 역사 - 폴 존슨)

기록을 종합하면 유대인이었으며 갈릴리 지방에 살았고, 그 지역에서 일정 이상의 영향력이 있었으며,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과 어떠한 마찰로 인해 로마법정에서 십자가형을 받아 처형 당했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4 기타

4.1 예수 신화설

예수가 순수한 신화적 존재이며 가공의 인물이라는 주장도 있고, 이 경우 바울로를 비롯한 초기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이 선교상의 이점을 위해 가공한 인물이라고 설명한다. 학계에선 실존인물설이 주류므로 진지하게 다뤄지지는 못하지만, 자극성 덕택에 간간히 언급되는 수준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저서 <만들어진 신>에서도 소개되었다.

학계의 폭넓은 지지를 받지는 못하겠지만, 예수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논증도 시도할 수 있다. 이런 논증은 런던 대학 G.A.Wells 교수의 <Did Jesus Exist?>를 통해 선보이기도 했다. -The God Delusion(만들어진 신), 97p

문제는 이 G.A.Wells라는 사람, 성서학자나 역사학자가 아닌 독일어/철학/자연과학 전공이고 독일어 교수다. 학계에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 중에 진지하게 예수 신화설을 주장하는 경우는 드물다. 따라서 이것은 거의 음모론에 가까운 이야기다. 이것 때문에 자꾸 논란이 되자 결국 도킨스도 예수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철회했다 #

따라서 신화설은 음모론이며 일종의 편견이고, 오히려 '비성경적인 주장이니 무조건 틀렸다.'는 기독교 근본주의적인 관점을 무신론, 반기독교적으로 로컬라이징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일부 기독교인이 광신적 내용을 유포하고 다니는 것처럼 일부 몰지각한 무신론자나 반기독교인들이 예수신화설을 정설인양 주장하지만, 사실이 아니며 이는 극과 극은 통한다는 사례에 불과하다.

신화적 영웅의 이상적 유형에 일치하는 삶을 살았던 어떤 인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경우 그 문제의 인물이 적어도 몇몇 사람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예수가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거나 아무런 중요성을 갖지 않았을 것이라는 대안적인 주장은, 신약의 복음서들이 나사렛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이 끼쳤던 중대한 영향력에 대해 분명한 증거를 담고 있다는 주장에 비해서 개연성이 훨씬 적다. 이것이 바로 "예수 신화" 이론이 갖고 있는 치명적 결함이다. 어떤 가상의 인물을 순전히 무로부터 고안해내면서 자신들과 동시대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불가능할뿐 아니라, 그런 공교한 신화를 변방 갈릴리 출신의 별 볼일 없는 인물에게 덧입혀주었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제임스 D. G. 던) [22]

학계에서는 진작에 논란이 끝난 '예수의 실존성 자체'를 두고 자꾸 예수 신화설이 주장되는 이유는 대개의 음모론이 그렇듯이 자극적이고 빠져들기 쉬은 데 있으나, 예수가 허구의 인물이라는 것을 밝혀내어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공격하고자 하는 반기독교의 근본주의적인 노골적 의도에 있다. 인터넷을 뒤져보면 주로 반기독교나 무신론을 표방하는 블로그나 사이트에서 예수 신화설을 물고 늘어지는 것은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 될 수 있다. 이 문서도 제대로 정리되기 전에는 예수 신화설이 정설인 것처럼 쓰여있었다.

자칭 이성을 중시하고 중립적인 시각으로 문서를 접하고 논한다는 무신론자들도 이런 예수 신화설에 낚여서헛소리를 하는 광경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신화설과는 다르지만 '이스라엘 관광수입'과 연관되어 있어서 학계에서 건드릴 수 없다는 음모론도 있다. 이전 항목에도 이스라엘 관광수입이 GDP의 20%라는 말이 적혀있었으나 실제 이스라엘(2012년 기준 GDP 2428.97억$)의 관광 수입은 약 40억 달러이며 GDP의 약 2%이다. 또한 이를 임나일본부설과 동북공정에 비유하여 '기독교 내부의 학설'로 취급하는 경우도 있으나, 예수의 실존은 전체 학계에서도 주류 이론이다.

디시위키의 개독 문서에서도 예수 신화설을 주장한 위키러가 설득력이 없다며 비판받는 것을 볼 수 있다.

4.2 예수의 모습에 관한 논쟁

예수에 관해 성경에 쓰여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미가5:2 ; 마태오 복음서 2:1~8)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성경의 기록이 신뢰할만한 것인지, 혹은 예수가 하느님(야훼)의 아들인지 아닌지는 제쳐두고 일단 베들레헴은 이스라엘예루살렘에서 1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고대인들의 행동반경을 생각해보면 예수와 가족들이 이스라엘 너머의 어디에선가 왔을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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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영국BBC에서는 '실제 예수의 모습'을 추정하여 2000년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예루살렘에서 발굴된 유골을 토대로 CG를 씌워 얼굴을 재현해냈다. 중동 사람에 가까운 인상이며 어쨌건 소위 '백인'은 아니다.[23] 게다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목수의 아들이었다면 어려서부터 가업을 했을 테고, 노동으로 단련된 꽤나 우락부락한 인상이었을 것이다.[24]

당연하지만 현재의 예수상은 서양인들에 의해 창작된 모습이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유럽 화가가 예수를 그리면서 당대 유럽인들에게 친근하게 보이도록 위엄있는 당대 로마귀족의 전형적인 외형적 특징을 가진 인물로 바꿔놓은 것.[25] 실제로 아프리카에서는 흑인 예수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남아메리카에서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모습으로 그리기도하고, 대한민국에서 운보 김기창 화백은 예수의 모습을 마치 조선 시대의 선비처럼 그리기도 했다. 지역에 따라 편의로 '친근하게 보이도록' 예수의 모습을 바꿔 그린 것이나 다름없다. 라엘리안 무브먼트에선 우주복을 입은 예수를 그려놓는다. 이 자식 안 되겠어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미국의 흑인인권운동가인 맬컴 엑스를 다룬 동명의 영화에서 엑스가 "예수가 백인이라는 보장 있습니까?"라는 대사를 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서양에서 만들어진 장발웨이브에 긴 수염 예수 모습을 쓰고 있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BBC의 복원도 역시 기본적으로 그냥 '당시 이스라엘 사람 A'를 가지고 만들어진 거라 확실하다고 볼 순 없지만, '가장 가깝다'라고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도 예수에 대해 예언하는 이사야 53장 2절에 예수의 얼굴에 대한 묘사가 잠깐 나오긴 하는데, "그는 메마른 땅에 뿌리를 박고 가까스로 돋아난 햇순이라고나 할까?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예언에 불과하지만, 사도행전 8장에서는 그 구절을 읽는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필립보가 "그 사람 예수에요"라고 친히 말해 주었다. 쉽게 말하면 대놓고 예수 못생겼음 이라고 못박아버린 것이다.[26]

적어도 교인들은 이런 예수의 추정 모습이 못생겼다고 해서 날조한 모습이라느니 하면서 화낼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얼굴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뭘 했느냐가 중요한 거지. 아니 애초에 자기가 믿는 신의 얼굴을 따져가며 믿는게 말이 되는가 외모지상주의를 신봉하는것도 아니고 강남의 신이시여
  1.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종교학부 학장. 신약성경에 대한 문헌비평학적 연구와 초기 기독교회사 연구 분야에서 최고 권위자로 손꼽힌다. 스스로를 불가지론자라 밝히고 있으며 예수의 신성에 대해서는 부정한다
  2.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저널리스트. 국내에도 많은 서적들이 번역되어 소개된바 있다. http://en.wikipedia.org/wiki/Paul_Johnson_(writer)의 "Paul Bede Johnson (born 2 November 1928) is an English journalist, historian, speechwriter and author."
  3. '예수 세미나'로 유명하며, 현대의 역사적 예수 연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학자
  4.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 종교학자로, 유대계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사제가 되었으나 이후 유다교로 개종. 사해문서와 역사적 예수 연구, 유다교 연구의 거장이며 그의 세대에서 가장 위대한 역사적 예수 연구가라는 평을 받았다.
  5.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예수와 비슷하게 메시아를 자칭한 종교적 선동가는 많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세례자 요한 등이 있으며, 로마 제국이 관점에서 보면 예수보다 훨씬 큰 사고(군사 반란 등)를 일으킨 종교가도 많이 있다.
  6. 제일 후대에 쓰여졌다고 추정되는 복음서로 1년에 한 번 있는 유월절이 3번 나온다.
  7. '구름'이라는 희극작품에 소크라테스가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개막장 엉터리 궤변론자로 그려진다.
  8. 54세 때에는 '사구'(현 법무부장관)에 오르기도 했다.
  9. 어부가 과연 낮은 신분이었나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제자 중 일부는 배를 소유했던 것 같고, 일꾼도 거느리고 있었다. 어선 대량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는 요즘도 작은 어선 한 척에 못해도 1억은 한다. 하지만 그렇게 봐줘도 잘해야 지역유지 정도지 위에 언급된 다른 성인의 제자들처럼 중앙의 명문가나 관료는 아니니 엄청난 차이가 있다.
  10. 그래서 역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본 투퀴디데스사마천이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러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하지만 그나마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객관성이다. 도널드 케이건의 <투퀴디데스, 역사를 다시쓰다>와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자유인 사마천과 사기의 세계> 등의 책을 참고하면 이들의 역사서도 근대적 의미에서의 객관적 역사서술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을 알수 있을것이다.
  11. 아마존에서 commentary herodotus나 commentary thucydides만 검색해도 많이 나온다.
  12. 매우 사소한 사생활까지 모두 다 들어가 있는 조선왕조실록조차도 불완전하거나 객관적이지 않은 부분들이 있다.
  13. http://www.goodreads.com/author/show/31375.Michael_Grant 이 링크의 본문 중 일부를 발췌한다.Michael Grant was an English classisist, numismatist, and author of numerous popular books on ancient history., classisist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http://en.wikipedia.org/wiki/Classical_antiquity 항목 참조
  14. 브뤼셀 대학교 신약학 및 교부학 교수, 'Jesus and Judaism', in Markus Bockmuehl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Jesus (Cambridge, 2001), p. 26.
  15. 미국 듀크 대학교 종교학 교수
  16. 유대교와 역사적 예수 연구의 권위자
  17. 예를 들어서 전국시대 당시 일본 무장들의 행보는 종종 기록이 누락되기도 하는데 당연한 이야기지만 출세하기 이전 무명 시절의 행보는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다. 기록 자체가 전혀 없거나 교차 검증이 불가능한 자료가 대부분이다. 아예 존재 여부 자체가 불투명한 인물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하여 그런 기록들이 사료로서 전혀 무시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간접적인 기록과 비교한 후에 어느 정도 신뢰성이 있는지를 파악하는 정도며 단정을 내리지 못하거나 어떤 기록은 지나치게 칭찬 일색이라 미화되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한다.
  18. 예수보다 약간 앞선 시기에 활동했던 학자. 높은 가르침과 인자한 태도로 인해 존경받았다
  19. 으레 '황제열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20. 현재도 이런 주장을 하는 학자들은 대체로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아브데스 판테라' 상세 내용 이라는 로마군 백인대장을 이 인물로 추정하고 있다. 예수 출생과 비슷한 시기에 유대 주둔군에 복무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21. http://en.wikipedia.org/wiki/Joseph_Klausner
  22. 영국 더럼 대학교 신약학 교수.
  23. 물론 아랍인 중에도 예수가 살던 레반트 지역의 아랍인들은 유전적으로 유럽인에 상당히 가깝기는 하다. 하지만 '백인'이라는 말 자체가 19-20세기를 거치면서 단순히 인류학적인 의미가 아닌, 특정 집단을 비호하고 여타 집단은 차별하기 위해 쓰이는 단어가 됐음을 잊으면 안 된다. 또한 사실 유럽인의 피가 섞였던 안섞였던 중동인들은 피부색과 관계없이 코카소이드에 속하며 백인으로 분류된다.
  24. 특히 예루살렘 입성 후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내고 좌판을 뒤엎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상인들이 자기 좌판 뒤집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리는 없고, 물리적 충돌이 있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상인들을 물리친 걸로 봐서 최소한 일반인보다 체력이 좋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무쌍 예수의 성전 정화 항목 참조.
  25. 이러한 현상이 체자레 보르지아를 예수 외모의 모델로 하여서 발생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곱슬거리는 장발의 백인 예수는 체자레가 태어나기 전인 12세기때도 이콘에 나타나던 모습이다.
  26. 이 문단에 나오는 '예수의 얼굴에 대한 묘사'는 사실은 그리스도교에서 흔히 예수에 대한 예언이라고 해석하는 구약성서 이사야의 '고난의 종' 이야기에서 그 '고난의 종'을 묘사한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학 내에서는 이 '고난의 종'을 예수로 해석해야만 하는가가 약간의 논쟁거리가 되고 있긴 하지만 절대 다수의 학자들은 고난의 종과 동일시 한다. 위에 필립보의 예에서도 보이듯, 사도행전을 정서라고 보았을 때, 달리 해석할 유의미한 이유가 없다. 당장 반대 입장을 표명한 journal article의 양과 academic 출판사의 질을 보면 소수 의견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