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랑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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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민족의 통칭

고비 사막의 북방의 지방(주로 몽골을 가리킴)의 동부에 활거하는 몽골계 종족 이름 혹은 거기서 유래된 이민족에 대한 한국어 멸칭.

2 실제 민족

2.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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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26,654 명(2010년)
언어오이라트어, 몽골어
종교라마교, 샤머니즘 , 무신론
Uriankhai People

몽골어: Урианхай (Uriankhai)
영어: Uriankhai
러시아어: Урянхайцы
중국어: 乌梁海 Wūliánghǎi (옛: 兀良哈 Wùliánghā)
일본어: ウリャンカイ
한국어: 오랑캐 (옛: 오랑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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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한국인들은 오랑캐를 건주여진과 같은 종족으로 알고 있지만 뿌리부터가 다른 전혀 다른 종족이다. 바이두 백과에 따르면 고비 사막의 북방의 지방(주로 몽골을 가리킴)의 동부에 활거하는 몽골계 종족 이름이라고 한다.

바이두 백과 兀良哈(오랑카이족) 항목 <- 자세히 설명되어있으니 참고바람 중국어인것은 안비밀(...)
오랑캐는 오랑카이(兀良哈)에서 온 말이지만, 조선시대때는 몽골여진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오랑캐라고 불렀다. 당시 조선에서 중국에서 북방 이민족을 가리키던 '오랑캐(兀良哈)'라는 말을 그대로 옮겨적은 것이다. 즉, 두만강 유역에 거주하던 여진족은 본래 "오랑캐"가 아니라는 것. 요새는 좀 구분한다지만 현대 한국에서도 프랑스인, 독일인, 이탈리아인 등을 가리켜 뭉뚱그려 서양인이면 다 미국인, 더 비하해서 양키라고 부를 때도 많으니 그거랑 비슷한 것 아닐까 싶다. 어쨌든 실제 오랑카이족이 존재하지만 여진, 몽골 등 중국 한족을 제외한 이민족들을 전부 다 오랑캐로 지칭했었고, 북방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본인도 왜인이 더 많이 쓰이긴 했지만 섬나라 오랑캐라고 지칭하기도 했으니 한국어 단어로서는 그냥 '이민족 전반을 이르는 멸칭'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참고로 중국 한족(뭐 굳이 한족만 욕하는 건 아니지만)을 욕하는 되놈(떼놈)의 어원은 도이인데 도이가 바로 오랑카이족을 뜻하는 단어이다. 여담으로 중국 몽골족 성씨 중에 오랑카이(兀良哈)가 있다고 한다. 80년대 국민학교 교과서에 나온 6.25 전쟁소설에서도 중공군을 중공 오랑캐라고 부르며 한국군들이 멸시하듯이 부르는 묘사가 나오기도 했다.

2.2 오랑캐(오랑카이)의 역사

오랑카이족의 영토 변천사

2.3 몽골 제국 시대

"집사(集史)"에 의하면 우량카트 부족지에서는 우량카이를 북쪽의 숲에 사는 "수렵민 우량카이족"과 몽골화된 초원 지역에 진출한 "유목민 우량카이족"으로 양분하고 설명하고 있다.

우량카트 부족지에서는 원래"수렵민 우량카이족"는 염소야크의 종류도 모르고 목초지도(펠트)천막의 주거도 모르고 가죽 덮개를 살아왔지만 우연히 자신들의 거주지를 헤매다 양을 발견하고 마침내 그 양이나 소의 생육 장소를 물색 중에 삼림 지대에서 초원에 진출했다는 "유목민 우량카이족"의 근원 설화를 전했다. "집사(集史)" 에서는 삼림 지대에 거주하는 전자의 "수렵민 우량카이족"을 "숲의 우량카트라고 부른다. 또 이"숲의 우량카트"는 코리, 토마트, 키르기스스탄 등과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고 한다. 몽골 제국 시대에 활약한 열린 우량카이 부족 출신자로서는 이른바"사구"의 젤메, 수부타이 두 사람이 있다.

상술한 "수렵민 우량카이족"과 "유목민 우량카이족"의 2종류는 거의 현재에도 적합한 전자는 소욘(Soyon)이라고도 불린다"몽골 우량카이""알타이·우량카이"에, 후자는 "탄느·우량카이", 토우바명들의 생활 형태에 해당한다.

2.4 북원 시대

1368년 대도의 함락보다 청나라의 성립에 이르기까지 시대,"우량카이"로 칭하는 복수의 집단이 존재했다.

2.5 우량카이·투멘

"집사集史"에 의하면 칭기즈 칸과 그 후손들이 묻힌 헨티 산맥의 금전지를 수호하는 자는 우량카이부의 아미르였다는데, 이 역할은 대대로 계승되어 북원 시대에는 "주(칭기스 칸)의 황금의 관을 지키고, 또 큰 운명의 칸국인"로서 우량카이·투맨을 구성했다. 북원 시대의 "투멘 "은 전 기타(사마천), 오이라트 제국의 통일과 와해와 같은 혼란을 겪어 새로운 형성된 것으로 전 시대의 부족과 관계가 불분명한 게 많지만 적어도 우량카이 투 맨은 전대의 우량카이부와 직접 관계가 있다고 본다.

잡반에센 타이시가 전 몽골을 통일할 때에는 우량카이부의 두목에 차부단(탄)이란 사람이 있고 딸의 아르타 걸진을 타이슨 칸(톡토아 브하)의 비로서 있었다. 그러나 타이슨 칸은 이를 이연하다 사토가 타에 그치고 버렸다. 나중에 타이슨 칸이 잡 반 에센과의 싸움에 져서 차부 댄의 곳에 진입하는데, 이것을 원한에 생각한 차부 댄은 딸이 막는 것도 듣지 않고 타이슨 칸을 죽이고 말았다고 말한다.. 아르타 걸진이 낳은 타이슨 칸의 아들은 나중에 모런 칸이었다. 또 우량카이의 호톡토이 딸의 시키루를 바양, 몽케, 볼프 진왕에게 시집 보내단 것, 지부티 전 재들을 낳은 다얀 칸의 비의 한 사람이 우량카이부 출신일 것 등도 기록됐고, 우량카이부가 자주 한 비를 배출할 유력 부족 중 하나였던 것을 의미한다.

오랫동안 분열 상태에 있던 몽골은 다얀 칸의 등장으로 다시 통일되고 다얀 칸은 부하의 여러 집단을 여섯 투 멘(6만채)으로 재편성했다. 여기서 우량카이 투 라면은 차하르, 하루하와 함께 좌익의 3만채를 구성하는 우익의 오르도스와 대한 것으로 떠올랐다. 상술한 것처럼 다얀 칸은 그 어머니와 왕세자비가 우량카이부 출신의 인물로 우량카이과 칸 사이에는 강한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다얀 칸의 뒤를 이은 보디·아라크·칸은 특히 우량카이과 관계가 없이 우량카이부의 입장은 변화를 피하지 못하고 마침내 우량카이이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우량카이는 게겐 승상(지부티 바라트 승상)와 토쿠 타이·배·후의(토로이・노양)들에게 인솔되어 공격을 두드렸지만 마침내 보디·아라크 칸, 알탄, 칸들에게 토멸한다흠좀무(...)

멸망되었으나 우량카이부 신장은 남아 투 맨으로 분할되며 일설에는 토우메토의 모밍강부, 오르도스의 우라토부와 케우케토부는 우랑카이 정복에 의해서 증설된 부족으로 알려진다. 우량카이의 자리에는 게레셍지에의 후손인 밖 할하 제후가 진출하고 청조가 성립할 무렵에는 북 몽골의 대부분은 할하부의 영지가 된다.

2.6 타안위(朶顔衛) (兀良哈)

1389년 아쟈슈리에게 인솔되어 내일 아침에 항복한 집단은 명나라보다 타안 위·타이 영위·복 여위의 세 수위실로 편제되어 명나라 사람들보다 우량카이 삼위(올량합 삼위)라고 총칭되고 있었다. 그러나 삼위 전체를 "우량카이"라고 칭하는 것은 명나라 측의 오해에서 실제로 우량카이인으로 구성되는 것은 타안 위 뿐이었다. 타안 마모루장의 가계는 칭기즈 칸을 섬긴 네 하야오 네 이누인 우량카이부 지에루메를 시조로 하고 있어 몽골 제국 시대로 나뉜 우량카이부의 일파의 후예인 것으로 보인다.

타안 마모루는 삼위 중 유일하게 멸망을 모면하고 존속하면서 청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네이멍구 로쿠 메이의 하나, 죠스트 맹에 속스루 하라 진 깃발·토우메토 좌기는 실제로는 타안 마모루의 후신이다.

2.7 조선에서의 오랑캐(兀良哈))

조선에서는 북방에 거주하는 이민족의 일부를 명나라의 "우량카이" 같은 한자로 표기하고,"兀良哈(오랑카이)"라고 칭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몽골의 우량카이부와 무관한 여진의 한 분파에서 명나라에서는 야인이며 청조에서 동해 삼부이라고 불리었던 집단의 하나, 왈개부에 해당하는 집단이다. 거주지는 주로 두만강 유역에서 명나라에서는 털 린위로 불렸다. 임진왜란에서 가토 기요마사가 그 일부와 교전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2.8 탄누·우량카이

현대의 투바 공화국에 해당하는 지역도 또 烏梁海(우량카이)라고 불리며 청조 시대에는 탄느·우량카이에 조직되고 있었다. 烏梁海(우량카이)라는 명칭은 가루단 칸의 침공 이전에 이 지역이 할하부 우량카이·오 톡을 소유하는 샘 부산 이마의 일족의 관할하에 나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