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용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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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容德. 1908-1968. 대한민국군인.

1 생애

1908년 대한제국 한성부(서울)에서 태어났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1]를 졸업한 뒤에 강릉시에서 개원의를 하다가 1932년에 만주군에 입대하였다. 군의관으로 근무했으며 일제 패망 당시 최종 계급은 만주군 중교.[2] 만주군 인맥 가운데선 최선임자였다. 일본군 인맥에선 대령 출신인 이응준이 최선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엔 만주군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

1945년 해방되고 만주군이 해체되면서 한반도로 돌아왔다. 서울에 와서 1945년 12월에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가 부교장을 지냈다. 웃긴 게 부교장이었는데 학생이기도 했다.[3] 그후 조선경비대에 입대하였고 특별임관으로 소령 계급을 받았다. 남조선국방경비대 초대사령관을 지냈고 정치인들과 자주 교류했다. 여순사건 이후에 6,25 내내 헌병대 사령관으로 재직했는데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 당시에 주도적으로 협조했다. 1950년대에 이승만 정권에 적극 협조해 정치군인이라 불렸다. 헌병사령관을 지냈는데 헌병 권한으로 정권과 유착했다. 조병옥을 국가변란죄로 체포한 적도 있다.1960년4.19 혁명 당시에 중장이었는데 1954년 발생한 불온문서 투입사건과 김성주 살해사건[4]의 주모자로 징역 15년형을 받았다. 특사로 풀려났다.

만주군 복무 경력 때문에 친일인명사전에 수록예정자 명단에 올랐다.

2 여담

헌병감을 지냈는데 아들인 원창희(元昌熙, 1928-2001)도 헌병감을 지냈다. 원창희의 최종계급은 준장이었다. 아들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연세대학교를 나왔다.

40년대 말부터 콧수염을 길러서 콧수염이 트레이드마크였다. 해방 이후에 박정희 전 대통령과도 상당히 친분이 있었는데 박정희가 어느날 성씨가 다른 사람을 삼촌이라고 데려오자 "정희야, 너 상놈이구나."라며 취중에 농담을 던졌고 박정희는 그를 외삼촌이라며 둘러댔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사람이 남조선로동당 간부이자 수많은 군인을 남로당원으로 가입하도록 선동한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의 친구, 이재복이었다.

그래도 박정희와는 굉장히 친했고 박정희가 죽게 될 위기에서 건져준 사람이 원용덕이다. 박정희가 형인 박상희 때문에 연좌제로 잡혀들어가서 사형당할 위기에 몰렸을 때 박정희를 변호해주고 박정희에게는 박상희의 잔당들을 실토하도록 설득해서 박정희를 사형에서 백의종군으로 감형시키게 해 주었다. 그리고 박정희는 원용덕 덕분에 죽을 위기를 모면하고 육군본부에서 정보국 문관으로 백의종군을 했다.

원용덕 장군이 68년 2월 5일날 별세하였는데 사망 11일 전인 68년 1월 24일 저녁에 신당동에 있는 그의 2층 양옥집(건평 60평)이 화재로 전소된 적이 있다. 소방서 추산 당시로 1,500만원의 재산피해를 냈다. 화재 당시 원용덕 장군은 병환으로 인하여 병원에 입원중이었다. 어찌보면 일종의 복선이 아닐까 싶다.
  1. 당시에는 연희전문이랑은 다른 학교였다. 뒤에 합쳐져 연세대 의대가 되었다. 연대 의대가 지금도 다른 과들이랑 따로 노는 이유
  2. 만주군은 괴뢰국이었지만 중국식 계급인 교관급 장교 표현을 썼다.
  3. 김계원의 회고에 따르면 미군정에선 위관급 장교 출신 군경력자들은 몇 주씩 교육을 시켰지만 영관급 장교 출신의 군경력자들은 하루나 이틀 만에 임관시켰다고 한다.
  4. 반공주의자였던 대한청년단 출신 김성주가 조봉암의 대선참모가 되자 군부에서는 그를 대통령암살음모로 몰아 군법회의에 회부하였는데 증거불충분으로 징역 7년형이 내려지자 원용덕이 자기 집으로 데려와 살해한 후 암매장한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