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모

1 乳母, (wet) nurse, nanny[1]

다른 이의 아기모유를 먹이고 키워주는 여자. 순우리말로는 젖어미, 젖어멈이라 한다.

옛날에는 (영아돌연사증후군 및 기근, 전쟁, 낙후된 의학 수준 등의 이유로) 아기가 일찍 죽는 일이 많아서 자신의 젖먹이 아기가 죽으면 남은 젖을 파는 여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꼭 아이를 잃은 여자들만 유모를 하는 건 아니었다. 자신의 아이가 살아있는데도 남의 유모가 된다면 유모의 아이는 친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라지 못 한다. 암죽 등을 먹였다고 한다.

수요측은 수유하는 시간과 에너지를 다른 곳에 쏟을 수 있었기에 유모를 고용했다. 무엇보다 중요하게는, 젖이 빨리 말라야 다음번 임신이 가능하므로[2] 동서양을 막론하고 후계를 많이 확보해야 하는 왕/귀족들은 모두 유모를 고용했다. 예컨대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16명 자녀 출산은 유모가 없었으면 절대 이루지 못 했을 업적(…)이다.

유럽에서 유모를 고용하는 여자들은 대부분 귀족이었고, 그들은 사교 활동을 하느라 아기를 거의 돌보지 않는 경우가 많아 대부분의 귀족 아이들은 유모를 친부모보다 더 가깝게 느끼곤 했다고 한다. 하지만 18세기가 되면 유모제가 보편화되면서 영국프랑스의 대부분(90%)의 아이는 보모나 유모 손에서 길러졌고, 친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란 아이는 15명에 1명 꼴이었다고 한다.[3] 그래서 근대 계몽주의 지식인들, 대표적으로 장 자크 루소린네 같은 이들은 이런 유모의 범람을 개탄하고 "모성애"의 개념과 모유 수유를 매우 중시했으며, 심지어 "포유류"란 단어도 이런 수유 장려 차원에서 지어졌다고 한다.[4] 프로테스탄트에서도 "모성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으로 여겼다.

유모가 키운 아이들에게는 부모나 마찬가지인 존재여서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된 뒤에도 유모에게만큼은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 하는 이들이 많았다고 하며 유모의 지위는 고용인이나 하녀라기보다는 사실상 가족에 가까운 존재였다고도 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과 유모의 관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듯. 예를 들어 윈스턴 처칠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보다 유모가 돌아가셨다는 말에 더 충격을 받았다고.

뮤지컬 및 영화로 유명해진 '메리 포핀스'나 내니 맥피 시리즈도 이런 '부모보다 믿음직한 환상적인 해결사'로서의 유모를 보여준다. 이쪽은 '젖어머니'라는 전통적 의미보다는 베이비시터 내지는 가정교사라는 느낌이 더 강한 유모이지만.

동아시아에서도 아이가 맨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 유모의 중요성은 강조되었다. 특히 왕실에서는 유모를 고르는 과정도 꼼꼼했고, 수유 기간에 지켜야 할 것도 많았다. 또 현대에 기껏해야 1~2년 젖을 먹는 것과 달리 과거 왕실에서는 적어도 4살, 길게는 7살까지도 아이에게 젖을 먹였다(!). 이러니 유모의 존재감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왕의 유모는 봉보부인이라고 하여 종1품에 봉해졌으며,[5] 품계 외에도 왕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보니 특혜가 많았다. 왕비의 경우에도 왕비의 유모가 본방상궁이라 하여 입궁해 왕비의 심복이 되곤 했다. 연산군이 제일 사랑한 사람도 유모였다고 한다.

유모의 아이가 상전의 아이와 같은 성별이라면 친하게 지내며 자라게 된다. 남자아이는 젖형제로서 무술 훈련 및 공부를 같이 하며 전투에서 그의 옆을 지키는 시종이나 친위병이 되기도 하고, 여자아이라면 상전의 아이인 귀부인/아가씨의 몸종이 되어 모시게 된다. 젖자매는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상대가 되니 자매 이상의 존재라고한다. 게다가 친자매라면 보통 혼인으로 서로 다른 집안으로 시집가 흩어지게 마련인데 젖자매는 유모의 아이가 시녀 으로써 죽을 때까지 곁에서 모실수 있다. 사이가 나쁘고 싸울수도 있는 친자매에 비해 계급 차이 덕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젖자매는 믿음직스러운 존재였을 것이다. 몇몇 매체에선 특정 히로인에 따라오는 덤이 되기도 하는 듯. 덮밥

젖자매의 예로는 여자의 일생 의 잔과 로잘리의 관계를 들수있다.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이케다 츠네오키의 어머니 요우토쿠인(養徳院)이 노부나가의 유모였다. 그래서 이케다 츠네오키와 노부나가를 같은 젖을 먹고 자랐다는 의미로 유형제(乳兄弟)라고 부른다. 이케다 츠네오키는 노부나가가 살아있을 적에도 중신이었으며 노부나가 사후에도 가신 중 그 비중이 컸다.

키무라 시게나리의 어머니도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유모였는데, 그 덕에 시게나리는 히데요리의 소꿉친구격으로 두터운 신뢰를 받았다. 후에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시게나리는 분투하다 전사하는데, 그의 아버지로 알려져있는 키무라 시게코레가 히데요리 때문에 죽은 것이나 다름 없음을 생각해보면 젖형제의 정이 얼마나 깊은지를 짐작할 수 있다.

에로게에서는 새벽녘보다 유리색인미아 클레멘티스피나 팜 아슈라이트와 젖자매로 나온다.

현대에는 모유를 대체하는 분유가 있고, 모유 수유를 할 때에도 미리 모유를 짜둘 수 있는 유축기 같은 현대문명의 산물들이 있어서 아기가 남의 젖을 먹고 자랄 일은 거의 없다. 그래서 현대의 유모란 보모, 즉, 베이비시터의 의미가 강하다. 부모가 다 바빠 애들을 키울 정신적인 여유가 없거나 애 키우는 걸 별로 안 좋아할 때 고용하기도 한다. 대부분 어느 정도 나이가 지긋한 중년 및 노년 여성이 많이 하는데, 일단 중노년일수록 육아의 경험이 젊은 세대보다 더 많으며, 그리고 애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주위에 늘 머무르는 것과 같은 어린 이성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이기에 눈이 맞아 바람을 피우게 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유모차와는 상관…있나?

2 후한 말의 군벌인 유언의 아들

劉瑁

유언의 삼남이자 유장의 형. 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숙옥(叔玉)일 가능성이 있다. 막내동생 유장의 자가 계옥(季玉)인데 백중숙계 항렬을 따라 형제의 자를 지었다면 가능성이 높다.

큰형 유범과 둘째형 유탄이 장안에서 헌제를 모시고 있었고 유장도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있어서 유언 곁에서 혼자 있었다고 한다.

유언이 오의의 누이를 유모의 아내로 삼아 결혼했으며, 아버지인 유언 밑에서 별부사마를 지냈다. 208년에 조조가 형주를 정벌해 사신을 보내 예를 표할 때 유모에게 평구장군을 더해주었다고 한다.

이후 정신병을 앓다가 일찍 죽었고 형들을 잃은 쇼크인 듯?[6] 그의 부인인 오의의 누이는 미망인이 되었다가 촉한이 건국되자 유비의 처로 목황후가 되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한중왕이 된 유비가 부인이 없는 것을 본 법정이 오의의 누이를 왕비로 삼을 것을 권할 때 잠시 언급된다.

삼국전투기에서는 3번 항목으로 등장했다(…).[7]

평구장군으로 임명되는 조서가 도착했을 때 조서를 봤는데, 얼굴이 모자이크였기 때문에 하나도 안 보인다고 했다. 결국 안 보인다고 난리치다가 정신병으로 사망.

3 有(유) 모자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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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유) 자이크의 준말. 즉, 노모의 반대말이다. 각종 성인 대상 포르노물에서 검열을 위한 모자이크가 있음을 의미하는 속어. 노모에 비하면 비율이 적지만 유모가 검색금지어인 공유사이트에서는 유재석이라고 쓰기도 한다.

4 르브바하프 왕국 재건설기의 등장인물

유모(르브바하프 왕국 재건설기) 참조.
  1. 영국 구어.
  2. 수유 호르몬은 배란을 억제하여 강한 피임 작용을 한다.
  3. 오죽하면 1769년 프랑스 정부는 유모의 보수 문제만을 전담하는 "유모국"을 만들었다(…).
  4. 다른 이유로는 사람을 "네발동물류"로 분류하는 것에 대한 반발을 줄이는 차원도 있었다고.
  5. 이것은 심지어 세자의 딸들보다도 높은 품계다. 단, 종1품은 성종 때의 일이며 세종대왕은 종2품에 봉한 게 최초.
  6. 유언이 죽었을 때 자신이 아닌 동생 유장이 뒤를 이은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이미 정신병을 앓고 있었지 않았을까 추측되기도 한다.
  7. 한 글자 차이나는 이 이름 때문에 오죽하면 '노씨 가문에서 태어났다면 성공할 가능성이 있었다'고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