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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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홍병기황싱

李甲成
(1889년10월 23일 ~ 1981년 3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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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생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단심을 지켰지만[1] 민족문제연구소의 치명적 오류로 인해 오욕으로 얼룩져버린 불운의 독립운동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 민족대표 33인의 마지막 생존자이기도 하다. 호는 연당(硏堂)이다.

2 생애

1889년 10월 23일 경상도 대구부 출신으로 1915년 세브란스의학전문을 졸업하고, 1919년 3.1운동때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학생시위운동 및 전단살포 등 중책을 맡아 수행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참고로 1990년대에 유행했던 이케하라 마모루라는 한국 생활을 오래 한 일본인의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 한국인 비판>이라는 책에서 언급된 바에 의하면 이갑성은 일본 경찰에게 손톱, 발톱을 모두 뽑히는 고문을 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 책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런데 이갑성 선생은 일본 사람들에게 손톱, 발톱 20개를 뽑히는 고문을 당한 분이다. 같은 일본 사람인 내가 생각해도 정말 너무하다는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중략) 당장 나부터도 내 아버지가 한국 사람에게 손톱 발톱 20개를 남김 없이 뽑혔다면 치가 떨릴 것이다."

물론 이갑성의 사위와 이케하라 마모루는 친분이 있던 관계라는 것을 포함하여(저자 스스로가 밝히고 있다) 해당 책의 내용이 상당한 식민사관의 잔재가 엿보이는 점, 우리만 나쁘냐는 식의 서술 등은 감안하여 생각할 부분도 있다.

1924년 세브란스 의약의 지배인이 되고, 1926년부터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 이사로도 활약하였으며, 1931년 경성공업(京城工業)의 지배인이 되었다. 1933년 신간회 사건으로 상하이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귀국, 1940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7개월간 복역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이후로는 창씨개명을 한 흑역사가 있다.

해방 이후로는 우익계열 정치인으로 활약하여 1945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회장, 1947년 과도입법의원을 지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대구시 병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민주국민당 백남채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52년 국민회 최고위원에 추대되었으며, 1953년 자유당의 최고위원·정무부장을 역임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해당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이우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3년 민주공화당 발기위원이 되었다. 1965년 광복회장에 취임, 독립유공자들의 복지증진을 위하여 진력하였고, 이준열사기념사업회 총재도 역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묘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이갑성의 사회장 영상

유족으로는 이용희국토통일원장관이 있다.

2.1 친일파 의혹제기와 반론

하지만 생애 설명처럼 독립운동에 헌신하고도 40여년간 친일파로 매도당하기도 했다. 1967년, 독립운동가이자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인 조경한이 대한일보 기고문에서 이갑성은 친일파라고 공격했다. 이갑성은 즉각 대한일보를 통해 반박 기고를 하면서 법정공방까지 갔다. 결과는 유야무야로 끝났지만 1981년 3월 이번엔 이갑성의 사후에 잡지인 월간자유[2] 에서 1930년대 창씨개명을 하여 밀정활동을 했다는 공격을 받았다. 실제로 당시 독립운동가들 중 일부는 이갑성의 친일 사실 여부와는 별도로 그를 확실히 변절자로 단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임헌영은 연구소에서 철저하게 조사하여 서훈을 취소해야한다고 강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이갑성의 유족측은 이런 친일파 공격에 대해 소송이라도 하려니 "A란 사람이 그랬다 A는 어디갔냐 B란 사람이 그랬다 B는 어디 갔냐 C란 사람이 그랬다 C는 어디 갔냐 C는 죽었다" 어쩌라고 등의 특정인이 없어 소송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2005년 SBS 삼일절 특집 뉴스추적에서 심층취재한 결과 오히려 이갑성은 일본에서 주시해야되는 요시찰인 인물인 것으로 밝혀져 그동안 친일파이라는 근거는 모두 논박되면서 친일파 누명에서 벗어났다. 분명한 것은 1930년대까지의 그의 행적은 우익 독립운동가로서 부족함이 없음이 확인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옥살이를 하고 창씨개명을 한 이후인 1940년대의 이갑성의 활동에 대해 이 어떠했는가에 대해서 과거부터 지금까지 계속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그가 변절했다고 확신을 하거나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던 것이 현재까지 그를 둘러싼 각종 의혹과 논란의 이유이다.

2009년에 최종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 이갑성이 빠진 것으로 보아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의혹을 철회한 것으로 보인다. 허나 공식적인 입장 표명없이 은근슬쩍 뺀 것은 비판의 여지가 충분하다.

3 참고 자료

뉴스추적 방송분

  1. 1940년대 이후의 행적은 창씨개명을 했으며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활동을 했다. 이 인물과 관련된 여러 논란은 1940년대 이후의 행적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던 것에서 기인한다. 단, 이 시기에 친일을 했다는 분명한 증거는 없다.
  2. 박창암에 의해서 창간되었으며 반공을 강조하고 재야사학을 부르짖은 우익 계역 잡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