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신흥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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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px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의 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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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일고등학교전주고등학교전주근영여자고등학교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
전주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전주상업정보고등학교전주성심여자고등학교
전주신흥고등학교전주영생고등학교전주제일고등학교전주한일고등학교
전주해성고등학교한국전통문화고등학교*호남제일고등학교(* 전국단위 모집 고등학교)
파일:X5QGZ3p.png
교명전주신흥고등학교
개교1900년
유형일반계 고등학교
성별남학교
운영형태사립
소재지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서원로 399(중화산동 1가 188)
홈페이지

1 개요

전주신흥고등학교(全州新興高等學校)는 전라북도 전주시에 있는 사립 일반계 고등학교이다.

2 개교

1900년 9월 9일에 미국의 남장로교 선교사 W.D.레이놀즈가 설립하였다. 최초의 학생은 김창국[1]으로 후에 목사로 사역하였다. 본래 학교명은 "예수학교"[2] 였으나 1908년 신흥학교로 개명했다. 1909년 사립 신흥학교로 인가 받았고, 제 1회 졸업생 5명 배출 했다.

3 연혁

  • 1900년 09월 09일 미국 남 장로회 선교사 W.D.레이놀즈에 의해 학교 시작
  • 1908년 09월 학교 이름을 "신흥학교"라고 함
  • 1919년 03월 13일 전주지역 3·1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함
  • 1930년 01월 25일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
  • 1933년 04월 01일 지정학교로 승격됨
  • 1937년 09월 22일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학교 문을 닫음
  • 1946년 11월 26일 학교를 다시 시작함
  • 1950년 04월 20일 중·고를 분리함
  • 1980년 05월 27일 5·18 민주화 운동에 참여

4 건학이념 및 교훈

건학이념: '하나님을 경외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사람을 기른다.

교훈: 지인용(智仁勇)
지(智) : 진리를 탐구하고
인(仁) : 사랑을 실천하고
용(勇) : 정의를 실현한다

육군사관학교의 교훈과 동일

5 교가

전주신흥고등학교 교가[3] (작사 김진상 / 외국곡(프러시아 행진곡) / 편곡 최남식)

1절. 완산 정기 모아드는 수려한 곳은(헤이!)
옛부터 문명한 희현당기지로다(헤이!)
백운간에 솟아있는 층층한집은(헤이!)
지인용을 배양하는 신흥학교다(헤이!)

2절. 풍우상설 반만고난 인내함으로
동량지재 굵은나무 양성하지니
복음진리 여러학문 공부하여서
반도문명 발전하세 우리학도들

3절. 태평양과 대서양의 무한한물은
심산유곡 개천들을 지내옴이니
우리들도 장래목적 성취하려면
백절불굴한 연후에 능히할지라

후렴. 만세 만세 만만세 신흥학교 만만세
지인용을 삼덕으로 신흥할지니(헤이!)
학도들아 용감력을 분발하여서(헤이!)
한 목소리 한 발자국 나아갑시다(헤이!)

독립군들이 부른 용진가와 후렴구 부분은 가사까지 매우 닮아 있는데 1910년대에 이미 신흥학교에서는 이 곡을 교가로 사용 했으므로 용진가보다 먼저 사용되었을 개연성이 있다. 어느쪽이 먼저 사용되었든 서로 영향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때 김대중대통령을 맞이한 북한 군악대가 이 곡을 연주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참조1

1절과 후렴구에 붙어있는 (헤이!)는 교내 행사 때 재학생들이 부를 때마다 2, 3학년들이 붙인다. 1학년들은 처음에는 뭔지 의아해 하면서도 나중에 가보면 자기들도 후배들한테 이 짓을 하게 된다.

6 교목과 교화

전주신흥고등학교의 교목은 은행나무다. 학교입구에서 교사(校舍)로 가는 길에 운동장을 따라 심어져 있다. 학교 구관(舊館)이 소실된 현재 학교 강당과 함께 학교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덕분에 가을만 되면 등굣길이 지뢰밭이 된다

전주신흥고등학교의 교화는 무궁화다. 학교 마크가 무궁화를 기반으로 디자인 되어있다.

7 역사

7.1 3·13 만세운동

"3.13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3일 전주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이다. 지역 인사들과 함께 신흥학교 학생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박태련, 김신극 등 전주지역 지도자들은 군산에서 1919년 3월 4-5일 만세운동이 감행됐다는 소식을 듣고 전주에서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신간회 총무 박태련의 집과 천도교 측에서 필요한 태극기를 인쇄 했으나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방에서 만세운동이 계속되자 일본경찰은 전주 지역에서도 만세 운동이 일어날까 염려해 신흥학교와 기전학교를 비롯한 전주시내 학교에 강제 방학조치를 취해버렸다. 이에 최종삼 등 신흥학교 학생 5명은 밤을 이용해 신흥학교 지하실에서 태극기 등 인쇄물을 만들었고, 13일 장터서 거사하기로 모의했다, 13일날 학생들은 채소가마니로 위장한 태극기를 장터로 실어 나르고 거사 직전 시장 입구인 완산동과 전주교 건너편에서 군중들에게 은밀히 배부하였다. 낮 12시20분께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학생 및 천도교도 등은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남문 밖 시장, 제2보통학교(현 완산초등학교)에서 모여 인쇄물을 뿌리며 시가지로 구보로 행진했다. 시위는 오후 11시까지 서너차례 계속되었고, 다음날 오후 3시에도 군중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고형진, 남궁현, 김병학, 김점쇠, 이기곤, 김경신 등 신흥학교 학생들을 시위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체포했고, 모두 실형 1년을 언도 받았다. 또한 이 외 신흥학교 학생 3명이 일제의 고문에 옥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위를 지도한 김인전 목사는 이후 중국 상해로 거처를 옮겨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현재 신흥학교 교문 옆에 만세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이 날의 만세운동을 기념해 매해 3월 만세운동 재현 행사를 하고 있다. 참조1 참조2

7.2 광주학생항일운동 참여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시작된지 3달 후인 1930년 1월 25일 신흥학교 학생들은 학생운동을 벌였다. 교우회 문예부장 박문수(후의 이름은 박철웅), 운동부장 이재영(후의 이름은 이철), 그리고 문예부의 문예계와 서무부의 사교계를 맡았던 함수만, 문예부 도서계와 서무부 기록계를 맡았던 원용덕 등이 중심이 되어 12월 2일 개교 기념 행사 후 거사할 예정이었으나 연기되었다. 이 후 12월 12일에 다시 거사하려 하였으나 학교 당국이 사태를 눈치 채고 조기 방학에 들어감으로 무산되었다. 개학(1월 25일) 이 후 재차 거사를 할 계획이었지만 학교에서는 개학 이후에도 학생들에게 등교하지 말라고 했다. 이에 간부들은 기숙사에 모여 있던 학생들을 규합하여 1월 25일 거사 하기로 결정하였다. 학생들은 빛이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해놓고 태극기와 전단을 붓으로 그려가며, 거사를 준비했다. 1월 25일 아침 8시 30분 간부들은 기숙사에 있던 학생들을 모아 태극기와 전단지를 나누어 주고 다가교 쪽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을 규합하여 80여명을 모았다. 9시 30분 결의문을 낭독하고 전단을 살포하면서 "자주독립만세! 학생만세! 동감(同感)[4]만세!" 등을 외치며 다가교를 건너 시내로 진출했다. 시위학생들은 중앙동으로 진출하였고, 출동한 일본경찰들은 총을 쏘며 학생들을 연행했다. 이 날 경찰에 연행된 학생 총수는 36명이었다. 검거된 학생에게 최고 29일, 최하 15일 구류처분을 즉결하여 동일 오후 4시경에 전주 형무소로 넘겨졌다. 주동자의 한사람인 함수만은 감옥을 나온 후 후유증으로 예수병원에 입원을 하였고, 1930년 5월 19일 예수병원에서 분사하고 말았다. 해방 후 함수만에게는 공적이 인정되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 표창)이 수여되었다.

7.3 신사참배 거부와 폐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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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교를 앞두고 학생들[5]이 학교 이니셜 S자를 만든 모습

1930년대 들어 일본이 군국주의 색채를 강하게 나타내면서 신사참배가 조선에도 강요됐는데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에 의해 세워진 신흥학교는 기독교의 유일신론에 위배되는 신사참배를 수용 할 수 없었고, 신흥학교의 설립 주체인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는 신사참배에 대해 1937년 2월 2일 총무인 풀톤목사를 파견하여 조사 보고하도록 했다. 한달여의 조사 끝에 1937년 2월 말경 전주에서 풀튼의 성명이 발표되었는데 "현재의 상태로는 학교사업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다"라는 간단한 성명 이었다. 풀튼 성명에 따라 남장로교 선교회가 경영하고 있는 10개의 중등학교는 1937년부터 신입생을 받지 않았고, 당국이 재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않는 한 나머지 학생들에 대한 교육은 계속해 나가기로 했다. 하지만 중일전쟁(1937년 7월 7일) 발발 후 매달 6일을 애국일로 정해 전국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9월 4일 전라도의 모든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사전협의회가 열렸다. 결국 9월 6일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학생들은 일본 경찰에 의해 다가공원에 있는 신사로 인솔되었다. 참배 구호 후 일본 순사와 관리만 참배를 하였고, 학생들은 참배를 하지 않고 꼿꼿이 서있었다. 재차 참배 구호가 내려졌지만 신흥학교 학생들은 퇴장하였고, 기전학교 학생들은 자리에 주저 앉아 울어버렸다. 신사참배는 무산되었고, 조선총독부는 학교를 폐교하려 했으나 이에 앞서 신흥학교는 자진 폐교 청원을 내고 9월 22일 학교 문을 닫았다. 폐교 후 전체 학생 246명 가운데 197명은 고창고보로 전학을 했고 나머지 49명은 전학을 위한 학비 150원이 없어 중도에 학업을 포기 할 수 밖에 없었다. 학생들 외에도 고창고보로 5명의 교사가 전근가야 했으며 신흥학교에서 사용하던 책상과 걸상의 일부도 고창고보로 옮겨졌다. 학교와 관련된 서류 일체는 도청 학부부에 보관되었고, 건물은 후에 일본인들의 저금 관리국수련소로 사용되었다.

7.4 6·25 학도병 참전

6.25가 발발하자 전주 신흥고 학생들도 학도병으로 징집[6]되었다. 학도병으로 징집된 학생들은 전주북중학교[7] 운동장에 모인 후 순천 등지에서 군사 훈련을 받고, 안강·기계전투,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 인민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낙동강 전투에서 인민군의 남하는 지연되었고, 국군은 반전의 계기를 마련 할 수 있었다. 60여년이 지난 2012년 6월 19일 육군은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호남 지역 최초로 전주신흥고등학교 강당에서 '6․25참전용사 명패 모교 증정 행사'를 가졌다. '6․25참전용사 명패'는 가로 90cm, 세로 120cm의 크기로 돼 있으며, 71명의 학도병의 이름이 새겨졌다. 6.25 당시 신흥고에 재학하다 학도병으로 징집 되었던 최승규 옹의 블로그에 당시 상황히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니 자세히 알고 싶다면 참고 해볼만 하다. 한국동란과 학도병

7.5 5·27 민주화운동

1980년 5월 27일 당시 전주신흥고등학교 현장 모습

"5·27 민주화운동은" 5.18 민주화운동 후 광주 외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고등학생들이 주도한 시위였다. 1980년 5월 27일. 전주신흥고 학생 1500여 명이“비상계엄 철폐” “유신잔당 척결” 등을 외치며 스크럼을 짜고 교문[8] 밖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학교 상공엔 헬기 두 대가 출동했고, 무장한 군인·경찰 500여 명이 출동했다. 교사들의 적극적인 만류로 학교 외부로의 진출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운동장을 돌다 강당에서 토론회를 가진 후 자진해산하였다. 사건 후 2명의 학생이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되었고, 7명의 학생이 무기정학, 17명의 학생이 유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참조1 참조2

7.6 신흥고 역사 다큐멘터리

8 졸업생

8.1 정치인

● 故김원전 4 대 국회의원, 전 고려제지 대표.
● 故김형민 초대 서울시장[9]
● 故박철웅 2, 4 대 국회의원. 전 조선대학교 총장.
정세균[10] 20대 국회 국회의장. 15, 16, 17, 18, 19, 20대 국회의원. 전 산업자원부 장관.
이용철 前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실 법무비서관. 성남산업진흥재단 대표이사

8.2 학자/교수

권이종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원장
차경섭 차병원 설립자. 차의과대학교 이사장
● 故탁명환 신흥종교 및 이단종교 연구가

8.3 방송인/언론인

● 故하경덕[11] 전 서울신문사 사장, "코리안타임"창간, 과도 입법의회 의원.
● 故김진규 대한민국 배우 피아골, 하녀등 출연
김환균 전 MBC PD. 현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
온대호 기업인, 스포츠 해설가자칭 F1, naska전문가

8.4 체육인

박지현 탁구 국가대표 코치. 전 국가대표 탁구 선수.
노출텔미(http://m.pann.nate.com/video/16572552)로 소녀시대 팬들을 분노(?)케 하였던 모 졸업생

9 전주신흥고등학교 체육부

9.1 전주신흥고등학교 씨름부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전국체전에서 입상하거나 프로씨름계에 진출한 선수가 다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전체적으로 민속씨름이 침체되어 안습인 상황...

10 기타

10.1 오래된 역사

한강 이남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고등학교라고 한다. 1900년 9월 9일에 개교 했으니 무려 19세기에 세워졌고, 오래된건 맞는데 한강 이남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주장에는 의문이 든다. 당장 같은 뿌리에서 나온 기전여자고등학교가 1900년 4월 24일에 개교 했기때문... 신흥고등학교보다 4개월 이상 빨리 개교했다.

10.2 학교명칭

공교롭게도 신흥고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고등학교가 대한민국에 세군데나 있다. 동두천신흥고, 청주신흥고, 전주신흥고이다. 때문에 인터넷에서 신흥고 관련 검색을 하면 세 학교의 검색 결과가 뒤범벅 되서 나오므로 잘 가려가며 봐야 한다. 동두천 신흥고는 5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고 청주 신흥고는 상대적으로 역사는 짧지만 지역에서 나름 끗발이 있는 학교기 때문에 데이터 양이 적지 않다. 결국 정확한 검색을 원한다면 전주신흥고라고 정확히 검색하는 것을 추천한다.
2004학년도 수능이 끝나고 전주신흥고 고3 학생들이 서울로 여행을갔는데 공교롭게도 청주신흥고도 같은 곳을 방문하는 일이 있었다. 문제는 전주신흥고나 청주신흥고 모두 풀네임을 쓰는 대신 신흥고라고 줄여서 표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이었다. 버스에 신흥고 몇 호차라고만 쓰여 있었던 것. 일부 학생들이 상대 학교 버스에 기웃거리는 일이 발생했다. 다행히 인솔 교사들이 이를 눈치채고 지도하여 다른학교 버스에 학생들이 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기막힌 우연이었다.
신흥고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것은 1900년에 개교한 전주신흥고이다. 동두천 신흥고가 1960년, 청주신흥고가 1978년에 개교 했으니 시기적으로 한갑자 이상 전주 신흥고가 먼저 생겼다고 할 수 있다. 굳이 신흥고 명칭을 고집한다면 전주신흥고가 우선권이 있다 볼 수도 있겠지만 신흥이라는 명칭 자체가 고유명사라기 보다는 '새로이 일어난다'라는 보통명사기 때문에 우선권을 주장하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 결국은 신흥고라는 명칭을 줄여서 쓰는 것은 세 학교 모두의 권리라고 봐야할 것이다.

10.3 졸업생 기수

신흥고등학교는 몇 회 졸업생인가 하고 물으면 3가지로 대답이 나눠진다. 첫번째는 개교 연도부터 계산하여 말하는 것이다. 1900년을 기준으로 2000년에 졸업했으면 100회 졸업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학교가 계산하기도 편하게 1900년에 세워진 관계로 이 방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제일 많다. 두번째는 복교 몇회라는 식으로 말하는건데 신사참배 문제로 학교가 폐교 되었었기 때문에 다시 개교한 1946년을 기준으로 졸업 연도를 말하는 것이다. 보통 첫번째 방식으로 졸업연도를 표기한 다음 옆에 괄호로 복교 졸업회수를 표기한다. 세번째로는 폐교이전 졸업 회수와 복교 이후 졸업 회수를 합하여 말하는 것인데 복잡해서 그런지 사용 되는 경우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엄밀히 말하면 3번째 방식이 가장 적합할 것이나 산출 기준이 복잡하다는게 문제다. 당장 폐교 이전 졸업 횟수를 계산하려 해도 학제가 변경되었었기 때문에 처음 졸업생을 배출한 1909년을 기준을 삼아야 하는지 아니면 고등과 학생이 처음 졸업한 1912년도를 기준을 삼아야하는지 문제가 된다. 더구나 3.1운동의 여파로 고등과에서는 2년동안 졸업생이 배출되지 못한 때도 있었다. 이러한 복잡한 사정 때문에 앞으로도 첫번째 방식으로 졸업 회수를 표기하는게 대세가 될 듯 하다.

10.4 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12] 와의 관계

기전여고 역시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로 사실상 그 뿌리가 같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전주신흥고와 기전여고는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일제 시대때만 하더라도 학교 앞으로 흐르는 전주천 건너에 있는 서문교회에 같이 예배를 드리러 가기도 했다. 심지어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폐교한 것도 똑같다. 해방 후에도 두 학교는 밀접해 있었던데다가 서로 교정을 연결해주는 계단이 있어서 왕래가 쉬웠다. 후에 계단은 사라졌지만 이웃한 학교로서 두 학교의 학생들이 등교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2000년 두 학교는 개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도전 골든벨에 참여했는데 각각 75명씩의 150명의 학생이 출연했었다.[13] 그러나 기전여고가 2005년 전주 서부 신시가지로 이사 감에 따라 100년 넘게 이웃해온 두 학교는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하지만 기독동아리 빛소리 중창단과 밥어롭은 기전여고 학생들과 같이 발표회를 하기도 하고 밥어롭 같은 경우는 아예 신흥고 강당에서 같이 모임을 한다. 현재 신흥고에서 가장 가까운 여고는 근영여고성심여고가 되었다.

10.5 지역사회 내 위상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지만 지역사회 내에서 위상은 메이저 보다는 마이너콩라인에 가깝다. 워낙 경쟁상대가 막강하다 보니 이런 이미지가 굳어진 것이다. 전주시 안에서 가장 막강한 네임밸류인 전주고에 오랫동안 가려져 있었다. 전주고가 전국적으로 유명한 명문고였기에 비평준화 시절에는 정말 안습이었는데, 전주고 진학에 실패한 학생들이 신흥고로 진학하는 경우가 많았다. 더구나 후발 주자인 상산고도 만만치 않은 기세로 명문고 반열에 올라섰기에 더욱 설 땅이 좁아졌다. 그러다가 고교 평준화 정책이 시행되자 학생들이 균등 분배 되기 시작하였고 전주고, 상산고보다 더 나은 입시 성적을 거두는 등 반전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들어 상산고가 자립형사립고등학교로 탈바꿈 하면서 이제는 넘사벽이 되었다. 공립학교인 전주고는 그대로 일반계 고등학교로 남을 수 밖에 없었으니 그나마 동등한 위치로 남아있는셈. 전라북도 전체로 봐도 만만치 않은 학교들이 많은데 익산의 남성고, 군산의 군산고 등이 있다.

이처럼 경쟁자들이 막강하기에 마이너틱한 이미지는 벗기 힘들지만 나름 알고보면 지역사회 내에서 지분이 있는 학교다. 가장 강력한 무기는 역시 나이. 세워진지 100년이나 되다보니 대한민국과 지역사회 요소요소에 신흥고 출신이 없는 곳이 없다. 장관, 차관, 국회의원, 서울시장, 여당대표, 시중은행장, 군장성, 대학총장, 기초단체장 등이 신흥고 출신이 전현직으로 거쳐간 자리들이다.

한가지 더 내세울게 있다면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같이해온 민족 학교라는 것이다. 일제시대 졸업생들 중에는 전주고가 일본인들이 많이 다니던 학교이던 반면 신흥고는 조선인들만 다니던 민족학교[14]라고 자부하는 분들도 있다.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동안 3.1운동, 광주학생운동, 신사참배거부, 6.25 학도병 참전, 5.18운동 참여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에는 항상 참여해왔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다른 학교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이러한 전통만은 따라 잡을 수 없을 것이라 나름 자부하는 듯 하다. 지역사회에서 나름 인정 받는 부분이다.

그렇다고는하지만 최근 몇년간은 입시 성적으로만 따져볼 때 전주 인문계에서 하위권에 정체되는 굴욕을 겪고있다.하위권이라고 교장, 교감과 나머지 선생들은 점심시간에 고3에게 공부하라고 하지만 학생들은 배째라며 나가서 축구를 한다.하지만 학년부장과 담임들의 결정때문에 CA시간인 수요일을 빼면...

10.6 희현당

신흥학교는 조선시대의 학당이었던 희현당 위에 세워졌다. 교가에도 희현당이 등장하며, 건물 중에도 희현당의 이름을 가진 신흥 건물이 있다. 희현당은 숙종 26년(1700)에 당시 관찰사로 재임한 김시걸(金時難)이 지방 유지인 오명기와 더불어 황학대(黃鶴臺) 기슭인 옛 사마재터에 학당을 창건했다. 김시걸은 희현당을 지어 놓고 이듬해에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병사하고만다. 창설당시의 규모를 보면 강당과 주방을 마련했고, 전답을 사들여 그 수입으로 경비를 쓰도록 하였으며, 책을 비치하여 학업을 돕고 당규(堂規)를 제정하여 규율을 세웠다. 봄·가을 반으로 나누어 전주에서 10명, 도내에서 20명의 학생을 뽑아 수강하도록 했다. 그 후 관찰사 이집(李集)이 중수(重修)하려고 하였으나 임기가 짧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그의 아들 이주진(李周鑛)이 영조 14년(1738)에 부임하여 먼저 규모보다 더 넓게 중수했으며, 새로 당규 40종목을 제정하고 당기(堂記)를 써서 학생들을 격려했다. 그 후 오랜 세월 동안 당쟁으로 선비들간의 의견이 엇갈리고 경영이 충실하지 못하여 퇴락한 상태에 있다가 이곳에 신흥학교가 세워지게 됐다. 현재 신흥학교에 남아 있는 희현당 사적비와 희현당 중수사적비는 땅 속에 묻혀 있던 것을 발굴해서 세운 것으로 희현당을 창설한 김시걸과 이를 중수한 이주진의 곡정을 내용으로 한 것이다. 신흥고등학교와 신흥중학교에서는 사생회, 백일장, 학교축제 등을 희현당의 이름을 따서 희현제로 명명하고 있다.

10.7 미션스쿨

선교사가 세운 기독교 학교이다 보니 매일 강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연도마다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 1주일에 한번 강당에서 학년별로 예배를 드리고 한달에 한번은 전교생이 강당에서 예배를 드린다.
학교에는 교목이라고 불리우는 상주하는 목사가 있어서 강당에서의 예배를 주관한다. 그 외의 날들은 학급에서 반별로 예배를 드리는데 선교부장[15]이 학급 예배를 주관한다.[16]
과거에 전주시에서는 고등학교를 진학할 경우 4지망 까지만 학교를 쓰게 되어 있었는데, 4지망 안에 있는 학교에 진학을 못 할 경우 일명 뺑뺑이를 돌려 임의적으로 미달이 된 학교에 학생을 배정하였다. 문제는 종교재단이 세운 학교에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진학해야하는 학생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신흥고등학교에 진학한 비기독교도인 학생이 예배에 불참하겠다는 일이 있어서 문제가 되었다.
학교도 학생도 선택권이 없는 상황에서 피해자가 되버린셈.... 결국 현재는 전주시에 있는 모든 학교를 지망 순대로 모두 기입하도록 제도가 바뀌었다. 종교 재단이 설립한 학교가 싫다면 신흥고를 비롯한 종교재단 학교에 진학하지 않아도 되는 길이 열린셈이다.
한편 신입생은 '종교서약'이라는 문서를 작성해 제출해야 했는데 내용은 ‘학교의 기독교 교육 프로그램에 적극 참여·순종하겠습니다. 이를 위반하면 어떠한 처벌이라도 감수할 것을 서약합니다’라는 다소 종교에 대한 강제성이 느껴지는 내용이었다. 이 때문에 비 기독교인 학생들과 학부모 사이에서 불만이 끊이지 않았는데 결국 2011년 부터는 종교서약을 받지 않게 되었다.

10.8 찬송가&합창 경연대회

봄과 가을에 각각 찬송가와 합창 경연대회가 열린다. 매년 봄 가을만 되면 각 반들은 조회시간, 음악시간 등을 활용해 경연준비를 한다. 학년별로 각 반들끼리 경쟁을 하고, 최종적으로 각 학년 당 3위까지 입상을 한다. 그리고 1등한 반은 전교 예배 때 앵콜로 한번 더 불러야 한다. 학기 초에 반의 단합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행사이지만 가끔 경쟁이 과열될 때가 있다. 문제는 학생들보다 담임 선생님들의 경쟁이 더 심하다는 것..... 담임 선생님이 직접 합창에 참여하거나 편곡, 연주까지 하기도 한다. 입상시에는 상금이 주어지며 대 부분 학급비로 편입되어 회식 및 간식비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10.9 미스 신흥 선발대회

가장 아름답게 여장을 한 학생을 뽑는 대회이다. 이 행사가 중단 된 적도 있고, 계속 이어지는 때도 있었는데 보수적인[17] 색채가 강한 기독교 재단 학교에서 이런 행사가 행해진다는것 자체가 흠좀무하다. 대체로 키가 크거나 마른체형 또는 왜소한 체형의 학생이 반강제적으로출전을 한다. 가발이나 머리띠를 사용해 머리를 꾸미고, 물풍선과 브레지어를 활용해 가슴 라인을 살린다.아예 이 부분에 중점을 두어 풍만한 체형의 학생이 출전하기도 한다. 스커트와 스타킹과 하이일 등을 이용해 하반신을 꾸미고, 화장, 핸드백, 거울 등을 활용하여 치장을 한다. 간혹 핸드백에 사탕을 넣고 나와서 관중석에 사탕뿌리기 신공으로 인기 몰이를 하는 경우도 있다. 모교 출신의 선생님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이 학교 다닐 때도 이 행사가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서 깊은 행사인듯 하다. 참고로 미스터 신흥 선발 대회도 있었지만 미스 신흥만큼 인기가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10.10 강당, 본관포치

신흥고등학교 내에 강당과 본관포치는 교문에 들어서서 바라 볼 때 왼쪽 전방에 위치[18] 하고 있다. 본관은 1928년 12만원의 예산으로 지어졌고, 강당은 1936년 리차드슨의 기증으로 3만 3천원의 예산을 갖고 지어졌다. 하지만 본관은 1982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현관 포치만 남아 있다. 두 건축물은 근대 역사 건축물로서 가치를 인정받아 2005년 6월 18일 등록문화재 제172호로 지정 되었다.하지만 문화재로 지정된 터라 함부로 보수공사를 할 수 없다. 1936년 3월 7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완공된 강당의 모습이 실렸있다. 1936년 완성된 강당 모습

10.11 문재인 의원의 본교 방문

2016년 5월 9일 문재인 의원이 신흥고를 방문하였다. 문재인 의원이 이 학교를 방문한 이유는 5.18 광주항쟁 당시 광주 밖에서 벌어진 최초의 연대 시위인 5.27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것 때문에 오래전부터 방문을 희망한 학교였다고도 한다. 문재인 의원은 본교 5.27정에 올라가 학생들과 질의응답의 시간을 가지며 교감쌤의 요청으로연락처와 이 학교를 위한 메시지를 적으며 돌아갔다.
파일:신흥고 문재인.jpg

출처
  1. '가을의 기도'로 유명한 김현승 시인의 아버지이다.
  2. 1900년 개교 당시에는 신학문당(新學問堂)으로 불렀다.
  3. 독립군들이 군가로 불렀던 용진가(勇進歌)와 같은 곡이다. 후렴구의 가사도 매우 흡사하다.
  4. 광주학생들의 운동에 동감(同感)한다는 뜻 이다.
  5. 5학년 학생 전원이 만들었다고 한다.
  6. 자원 입대가 아닌 징집이었다. 소집령이 내려지고, 영장이 발부 되었다고 한다.
  7. 전주고등학교의 전신으로 당시 6년제 학제였다. 현재에도 전주고등학교 동문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총동창회에 북중학교 기수가 반영된다.
  8. 현재의 교문 위치와 달리 전주천 방향으로 교문이 위치했다.
  9. 미군정기 서울시장 이었다. 정부 수립 후 초대 서울시장은 2대 대통령인 윤보선이다.
  10. 무주 안성고와 전주공고를 다니다 신흥고에 들어왔다.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실업계열 학교 대신 인문계열 학교로 옮겨왔던 것이다. 전학 당시 전주신흥고등학교 교장을 찾아가서 “전주공고에서 1 등을 한번도 놓친 적이 없는 정세균이라고 합니다. 신흥고등학교를 다니고 싶은데 장학금을 안 주시면 학교에 다닐 형편이 못됩니다. 장학금을 주시고 전학을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당돌하게 말했고, 학교측에서 이를 수용해 입학하게 되었다.
  11.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하버드대학 정규과정을 졸업했다.
  12. 이하 기전여고로 부른다.
  13. 최후의 1인이 없이 신흥고와 기전여고 학생이 마지막까지 1명씩 남아있다 동반 탈락했다. 방영 당시 두 학교를 은근 라이벌 관계 처럼 엮어 편집 되었는데 사이좋게 끝내자고 동시 탈락한거 아니냐는 말도 있었지만 그냥 우연히 동반 탈락되었다고 한다.
  14. 실제로 학교 분위기가 그랬다고 한다. 당시 수업 시간에 ‘월남 망국사’나 ‘미국 독립사’ ‘폴란드 망국사’ 같은 반 제국주의적 내용이나 독립 운동사를 가르쳤고, 총독부 관리하고 대담에서 신흥학교 선생님이 조선어로만 말 하자 결국 관리가 일본어를 쓰라고 강요했는데 끝까지 조선어만 썼다고 한다.
  15. 과거에는 종교부장으로 불렸다.
  16. 담임선생님의 재량에 따라 교회다니는 반 학생 전체가 하루씩 돌아가며 예배를 주관하기도 한다.
  17. 신흥고가 기독교 학교이긴 해도 보수적인 색채보다는 진보적인 색깔이 은근 강하다.
  18. 본관 포치는 엄밀히 말하면 전주신흥중학교 뜰안에 위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