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주

정병주(鄭炳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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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 1989년
복무대한민국 육군
기간1950년 ~ 1980년
임관육사 9기
최종계급소장
최종보직특수전사령관
국가와 국민을 지켜야하는 군인들이 국가를 찬탈하려는 반란을 막고자 했던 비운의 참군인

1 소개

1927 ~ 1989
대한민국군인. 최종 계급은 소장.

2 일생

본관은 봉화. 삼봉 정도전의 방계후손이다. 1927년 경상북도 영주군에서 태어났다.

안동농림학교(현 한국생명과학고등학교) 졸업 후 1949년에 육군사관학교 9기로 입교해서(드라마 제5공화국에는 육사 6기로 잘못 나왔다) 6.25 전쟁 당시 1연대 소대장으로서 참전하였다. 1967년에 제1공수특전여단장이 되었고, 1974년 소장으로 진급, 대통령경호실 차장을 거쳐 그 이듬해에 특전사령관으로 임명된 후 1979년까지 죽 특전사령관을 지냈다. 그야말로 1970년대 대한민국 특전사의 대부격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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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공화국 드라마를 열심히 본 사람이라면 여단장및 참모 목록에서 낯익은 이름들이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2.12 사태와는 관련 없지만 11공수특전여단장인 최웅 준장은 광주학살에서 잔혹한 진압으로 악명을 떨치던 그 11공수특전여단의 지휘관 맞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잔인한 진압을 주도하는 최순기 준장의 모티브가 된 인물로 추정.

여기까지는 좋았지만...

2.1 부하들의 배신

비운의 특전사령관
1979년 12월 12일, 그 유명한 12.12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함께 서울 근방 부대 중 쿠데타에 반기를 든 딱 두명 뿐인 장성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로 정병주 자신에게는 그야말로 군인으로서 가장 상상하기 싫은 최악의 상황을 맞고 말았으니...

2.1.1 박희도의 배신

그가 자식처럼 돌봐주었고 진급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던 제1공수특전여단장 박희도 준장은 1여단장에 처음 부임한 시기에 무장공비가 1여단 지역을 마음껏 돌아다니다가 복귀에 성공한 사건이 발생해서 이 때문에 보직해임을 당하게 생겼는데, 이 때 정병주 본인이 자존심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직접 국방장관과 육군참모총장에게 무릎꿇고 빌어서 겨우 보직해임을 모면했었다.[1] 하지만 은혜를 갚기는커녕 그런 거 없다 12.12 당일 무단으로 여단 병력을 동원하여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는 핵심 역할을 한다. 정병주를 배신한 박희도는 전두환 정권하에서 진급을 거듭하여 6년 후인 1985년에는 26대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자 전두환의 군맥 제거 차원에서 바로 보직해임 후 현역 부적합 전역했다.

2.1.2 최세창의 배신

제3공수특전여단장 최세창 준장의 경우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부하인 박종규 중령을 시켜 직속 상관인 정병주 소장을 직접 체포하는 하극상을 저질렀다. 특전사령관이 근무하는 특전사령부(본부)는 3공수특전여단의 영내에 있었으며, 사령관이 있는 사령부 본부 건물엔 사령부 직속의 무장병력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 그 후 특전사령관이 된 박희도는 자기도 똑같이 당할까봐 두려워한 나머지 제707특수임무대대를 창설했다.[2] 그 역시 똑같이 승진을 거듭하여 합동참모의장과 국방부장관(제6공화국)을 지냈다.

2.1.3 장기오의 배신

제5공수특전여단장 장기오 준장의 경우 쿠데타에 가담하기는 하였으나 효창운동장에서 대기하다 끝났다. 그래서인지 드라마에서도 대사가 거의 없다. 그리고 나머지는 다 대장 전역인데 혼자서만 중장 전역이다.

2.1.4 반면 지조를 지킨 윤흥기 준장과 김오랑 소령

전술한 3명의 공수특전여단장 모두 정병주 소장을 배신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자식이 현재의 자리까지 올라가는 데 계속해서 은혜를 베풀어 준 아버지에게 총구를 들이댄 격이다. 공수특전여단장들 뿐 아니라 자신이 특별히 아끼던 육사 후배인 전두환과 노태우, 정호용 등 모두로부터 철저히 배신당했고, 그 아픔이 어땠을지는 상상하기도 어렵다. 전두환 등의 육사 11기는 육사를 4년제로 졸업한 1기였고 자기들보다 윗 기수인 10기까지는 수개월짜리 단기 간이교육만 받고 졸업했던 세대라는 이유로 은근히 무시하는 풍조가 만연했었다. 그들이 그렇게 오만할 수 있었던 데에는, 박정희라는 든든한 빽이 그들의 배후에 있었던 탓도 크다. 과도한 편애가 애들 버릇을 잘못 들인 케이스

유일하게 육본 측의 명령을 받고 출동했다가 회군했던 제9공수특전여단의 윤흥기 준장만이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반란군이 윤흥기 준장을 포섭하지 못한 이유는 그가 정규 육사가 아닌 갑종 출신인데다 참모장 역시 갑종 출신이라 연줄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의 우직한 성격도 한 몫 했다. 실제로 9공수특전여단의 출동은 반란군의 마음을 가장 졸이게 만든 요소였고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쿠데타의 실패와 아군 특전부대끼리의 유혈 충돌이 확실시되는 상황이었다. 윤흥기 준장은 12.12 사태 종료 이후 곧 경질된다[3].

이때 특전사령부 비서실에서 근무하던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이 홀로 사령관 곁을 지키다 그의 육사 2기수 선배이자 한 부대에서 함께 근무한 경험도 있으며 같은 군인아파트 위아랫집에 살던, 한마디로 친구와 다름없던 박종규 중령의 흉탄에 사살당하는 비운을 겪어야 했고#(훗날 김오랑 소령은 중령으로 추서됨), 정병주 소장 본인도 총상을 입은 채 연행되어 강제 예편당하고 말았다.

3 죽음에 대한 논란

그렇게 강제예편된 이후 그는 꾸준히 12.12 사태에 대한 부당성을 주장해 왔었다. 그러다가 1988년 11월 어느 날, 행방불명되었고 결국 실종 139일 만인 이듬해 3월 4일에 송추 인근 야산에서 목매달아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당국은 그가 자살한 것으로 사건을 종결지었으나, 정병주 소장과 친분이 깊었던 장태완 소장은 계속해서 그가 자살할 사람이 아니라는 주장을 해 왔다. 고인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가톨릭 교리에서 자살은 용서받지 못 할 큰 죄 중 하나이다. 살벌한 제5공화국 때에도 장태완 소장에게 '12ㆍ12의 진상규명에 조력하겠으며, 역사의 증인으로 살아남아야 하니 서로 몸 조심하자'고 말하는 등 # 자살을 택할 인물도, 정황도 아니었다는 것이 그 이유.

민주화 이후 군 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에서도 재조사가 이루어졌지만, 조사 결과 자살로 분류하기에는 의문점은 있지만 당시 증거물이 거의 없어서 사실상 뚜렷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고 발표했다.

故 김오랑 중령의 미망인 故 백영옥 여사가 남편의 죽음에 충격으로 쓰러져 실명하고 고생이 많을때 그나마 정병주는 손수 찾아가 위로하면서 남편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는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가 죽고난 다음에는 백영옥 여사가 뜻을 이어받겠다고 나섰지만 그녀마저도 1991년 6월 28일에 갑자기 추락사했다.백영옥 여사가 살아생전 한 여성지 인터뷰에서 그나마 정병주 장군께서 위로하던 게 위안이라고 슬픈 마음을 달랬는데 겨우 몇 년 뒤에 이런 일로 그가 죽었을지 알았을까.

4 국립서울현충원 안장

고인의 시신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고인의 무덤은 백비. 비석의 내용이 없이 그냥 이름만 적혀있다. 무명 용사들도 공적을 기리는 한 줄의 비문이 항상 적혀 있게 마련인 무덤에서 아무런 내용이 없는 것으로, 이는 유족들의 뜻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명령을 생명으로 여기는 군인들이 상관에게 총질을 하고도 버젓이 활보하는 세상에 고인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는 뜻. 그 장군에 그 가족이다.

5 미디어에서

제4공화국(MBC)에서는 성우 황일청씨가, 제5공화국(MBC)에서는 배우 민욱씨가 정병주 역을 맡았다.
  1. 진짜로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이세호 대장은 이 사태에 머리끝까지 빡쳐서 박희도를 문책하고 군복까지 벗겨버리라고 길길이 날뛰었다.
  2. 물론 쿠데타세력이 군을 완전히 장악한 상황이 굳어져서 더 이상의 하극상의 우려가 없어진 후에 707특임대는 본연의 대테러부대 임무에 전념하는 부대가 된다.
  3. 그 자리를 채운 게 신군부측 인사인 이진삼이었다. 이후 이진삼은 육군참모총장까지 승진하는 등 그야말로 승승장구했다. 이 이진삼은 천안함 침몰 당시 군번줄 발언 경례 불량 발언과 함께 짬밥을 내세워서 국방부장관과 현역 장성들에게 호통을 쳤던 작자다. 이 양반은 현역에서나 전역해서나 똥군기 세우기로 유명한 양반인데 2011년 지역구 행사 때 육군에 연락해 육군 헬기를 타고 나타난 양반이다. 전관예우라나 뭐라나. 더 기가 막힐 사건은 2011년 국방위원회 국감장에서 있었던 일인데 당시 참석했던 XXX 준장은 과거 이진삼의 부관이었던 사람이었다. 근데 이진삼은 하라는 국정질의는 안 하고 뜬금없이 그 사람에게 공격 준칙을 외우게 시켜 더듬거리자 이게 우리나라 육군의 현실이라고 비아냥거리며 국회의원 및 기자(라고 해봤자 몇 명 없었지만)들 앞에서 창피를 주었다. 주변의 몇몇 미필 국회의원들은 실소를 내뿜었지만 군필자들은... 하나회같은 군내 사적 조직에 가담했던 사람이 군기를 말할 자격이나 있나 정작 이진삼도 YTN 돌발영상을 통해 육군참모총장 시절 개판경례하던 장면이 공개되면서 욕만 처먹었다. 결국 다음 총선에서 육사 후배인 김근태에게 쳐발리고 국회의원 자리를 빼앗겼다. 꼴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