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중동전쟁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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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ab-Israeli War

이스라엘 독립전쟁이라고도 한다. 아랍권에서는 '대재앙'이라는 뜻의 '알 나크바'(النكبة)라고 부른다.

전쟁기간은 1948년 5월 14일 ~ 1949년 3월.

2 상세

제2차 세계대전 종결 뒤 영국은 팔레스타인에서 손을 떼게 된다. 무주공산이 된 팔레스타인 지역이 누구의 손에 들어갈지를 둘러싸고 아랍인과 유대인 간의 충돌이 지속되었고, UN팔레스타인 분할안도 격렬한 반대[1]에 부딪혀 좌초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번지게 된다.

3 전력

3.1 이스라엘

1947년 11월 하가나는 1929년 폭동 이후로 잘 조직된 유대인 부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1936년~1938년의 폭동 이후로, 2,000여 명의 직업 군인과 한달에 3~4일 정도 군사 훈련을 받는 만여 명의 지원자들이 이 엘리트 부대의 구성원이었다. 이 기동부대는 25살 이상의 지역 방위군과 연계되어 있었으며 전체적으로 35,000명 정도가 하가나의 구성원이었다. 이들은 훈련되어 있기는 했지만 정규적인 군사집단이 아닌 지하조직 형태였기 때문에 화기 입수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946년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인 다비드 벤구리온은 유대인 공동체가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 대항하여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결정하였고 서방 진영의 무기들로 무장하기 시작한다. 1947년 9월, 하가나는 1만 정의 소총과 702 정의 경기관총, 2,666정의 기관단총, 186정의 중기관총, 2인치 박격포 672문과 3인치 박격포 92문을 보유하기에 이른다. 47년 10월에서 48년 7월 사이, 무기 생산 능력을 갖추게 되었으며 이들은 3백만 발의 9mm 권총탄과 수류탄 15만 개, 기관단총 1만6천 정, 3인치 박격포 210개를 생산하였고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무기를 수입했다. 그러나 여전히 무기는 부족하였고 평균적으로 하가나의 대원 3명당 1개씩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정예부대도 3명당 무기 2자루 정도를 보유하는 것에 그쳤으며 아그나는 결국 전쟁 초기에 중기관총과 대포, 장갑차량이나 대전차, 대공 무기를 보유할 수 없었다.

3.2 아랍연맹

팔레스타인군은 국가적 무장단체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청년측의 무장 조직이 있었다. 약 11,000~12,000명 정도가 존재했으며 크게 후샤니 후타와 후샤니 나즈다 두 파벌로 분리되어 있었다. 전쟁발발 이후에 팔레스타인 국가 방위군이 새로 조직되었으며 12월 아브 알 퀘디르 후세이니는 시리아에서 훈련된 100여명의 아랍 성전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도착한뒤 몇몇 지원자들과 영국군 출신의 베테랑들과 합류한다. 하지만 팔레스타인군의 무장은 매우 안습했는데, 1942년 아그나의 첩보에 의하면 팔레스타인에는 약 5만여정의 화기가 있는 것으로 추산되었지만 굉장히 낡고 신뢰도가 낮았다고 한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자경단 조직들과 무관하게 개인적으로도 영국 식민당국에게 총기를 요청하고 어떻게든 돈을 마련하여 총을 사서 조달하기도 했다.

아랍연합은 다양한 아랍국가에서 지원한 6천여명의 자원자로 구성되어있는 아랍 해방군을 조직했고 파위 알 콰오지의 지휘 하에 사마리아와 북부 팔레스타인 지역에 파견했다.

트렌스 요르단은 위에서 서술했듯이 영국군의 훈련하에 정예부대를 보유했으며 8천명에서 만2천명의 부대가 4개의 보병 및 기계화연대로 조직되어있었으며 40문의 야포와 75대의 장갑차를 보유했었다. 이쯤되면 이런 열세에서도 전쟁에서 이긴 이스라엘이 신기할 정도다… 그 전에 이런 화력과 병력을 가지고도 진 아랍군은...

이라크의 경우 12개 여단 21,000명의 군대를 보유했으며 영국제 전투기 100여대로 이루어진 공군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초기에 4개 보병여단을 파견했으나 최종적으로 만5천명에서 만8천명까지 증파했다. 5월 15일에는 이라크 공병대가 요르단 강에 가교를 건설하여 이스라엘 정착촌을 공격, 아주 조금의 성과를 거둔 바는 있다. 이후, 나블루스 예닌 툴칼람 삼각지대 내에서 이스라엘군의 발악으로 격심한 피해를 입었지만 위치를 고수한 바 있으며 이라크군은 예닌 지역을 사수하던 중 종전을 맞이했다. 그나마 좀 나은 케이스.

이집트는 약 4만여명의 병력을 전개할 수 있었는데 군사적으로 적정연령에 있는 인구 중 80%가 병역을 거부(…)했고 보급체계가 눈물겨워 국가 경계선 지역에만 병력을 배치했다. 초기에 병력 만명으로 구성된 원정군이 팔레스타인에 파견되었으며 영국제 25파운드 포 6문과 6파운드 대전차포 8문, 1정의 중기관총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집트 공군은 30기의 스핏파이어와 4기의 허리케인, C47 20기 등으로 폭격을 수행했다.

시리아는 3개 보병연대로 구성된 만2천여명의 병력과 전차대대를 파견하였다. 5월 15일부터 16일에 이들은 이스라엘의 제마크 마을을 공격하여 점령한 바 있으나 며칠뒤에 다가니아에서 패주한다. 전반적으로 시리아군은 방어로 돌아선 6월 10일 이후 소규모의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스라엘의 정착민 촌락에 소규모의 공격을 가했다.

레바논군은 규모가 작은 3천5백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천여명의 침공군은 북부 갈릴리를 지나 이스라엘군과 교전하였으며 결국 1949년 3월 23일 휴전협정에 사인해버렸다.

4 전황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텔아비브의 별 볼일없는 건물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함과 함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에 반발한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이집트, 요르단은 아랍 연합군을 결성하여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다. 여기에 사우디아라비아, 예멘은 자금과 자원병을 파견하였다. 또한 아랍 각지에서 지원자들로 구성된 GLA 아랍 해방군이 결성되어 파견되었으며, 팔레스타인의 무력충돌 기간동안 결성된 성전군도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참여했다.

이스라엘군의 전력은 그야말로 보잘 것 없어 세계 각지에서 수입한 잡다한 무기들을 되는대로 지급해서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그에 반해 영국의 지도를 받은 정예군을 보유했던 요르단, 강력한 공군력을 가진 이집트, 이라크, 프랑스제 기갑장비로 무장한 시리아의 전력은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긁어모을 수 있는 병력을 박박 긁어모아 방어에 주력하며 전선을 유지했다.

여기서 영국식 교육을 받았던 5 정규군에 맞서 싸운 이스라엘군의 전설이 시작된다. 지원도 보급도 모자란 판에 예루살렘텔아비브를 중심으로 사용 가능한 모든 전략을 펼치며 총 20여 일간의 치열한 공방전 속에서 이스라엘군은 끝내 두 도시를 지켜내는데 성공하였다. 이때 골다 메이어 총리의 명언도 나왔는데 "우리는 아랍을 상대로 한 최종병기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바로 지면 끝장이라는 절박감이다." 그 후 스웨덴의 중재로 협상이 시작되자 바로 미국에서 여러 무기를 구입해와 협상이 타결되기도 전에 아랍을 기습하였고, 그 결과는 후술한다.

가장 격렬한 전투는 예루살렘과 예루살렘-텔아비브 가도를 둘러싼 전선에서 벌어졌다. 5월 말부터 개시된 이스라엘의 공세로 인해 요르단군은 패주했고, 반격에 나섰던 이라크, 요르단군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또한 북부와 남부 전선 역시 농장에서 화염병을 만들고, 박물관에 전시되었던 대포까지 끌고 와 저항하는 이스라엘군에 막혀 진척을 보이지 못했다.

이스라엘군은 재차 공세를 개시해 예루살렘텔아비브 주변 거점을 점령하며 팔레스타인 지역의 안전을 확보하고, 이집트에 대한 공세에 나서 가자 지구를 점령하며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결국 더 이상 반격할 능력을 상실한 아랍 연합은 차례차례 이스라엘과 종전협정을 맺고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도 아랍 연합군은 통합된 지휘체계를 갖추지 못하고 서로간의 불신으로 인해 전쟁을 효율적으로 진행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들은 얼마 전까지 영국 및 프랑스 식민지배를 받았으며 나아가 당시에는 왕가와 반왕파들의 갈등과 내전이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보통 아랍 연합군이 수적, 화력면에서 우세했던 것에만 집중하지만 사실 이들은 장비는 우수할지 몰라도 내부적으로 심각하게 분열(대표적인 예로 이국가 가 있다)하여 문제가 이스라엘보다 심각한 수준이었다.
실제로 이집트만 해도 파루크 왕가에 불만이 큰 장교들은 일부 작전을 무시하고 일부러 물러서는가 하면서 패배를 자초했는데 만일 이집트군이 승리하면 왕가에 대한 지지가 커질테고, 그러면 왕가를 뒤엎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결국 전쟁에 패배하면서 3년만에 파루크 국왕의 무함마드 알리 왕조는 가말 압델 나세르의 군사 쿠데타로 뒤집어졌다.

다른 나라들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귀족출신으로 우쭐거리는 장교와 강제징집된 사병들의 갈등도 커서 되려 유럽인 교관들이 "장비만 좋지, 이건 허수아비 군대"라고 비웃으며 회고할 정도였다. 그나마 정예군을 가진 요르단의 경우 지금까지도 베드윈족으로 구성되고 미국이나 영국 군사기관들과 교류하는 요르단 군대는 아랍권의 최정예 군대로 통한다. 다만 요르단은 근본적으로 소국인 데다 석유가 없어서 이 훌륭한 군인들에게 사우디쿠웨이트, UAE같은 장비빨을 세워줄 수는 없다는 점이 있어서 대세에 영향을 주기 힘들었다. 그래서 강군일지도 반면 이스라엘의 결사적인 저항은 표면적인 전력 이상의 위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전쟁의 승패와는 관계없이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구시가를 포함한 중요지역을 탈환하거나 추가로 점령하기 위해서, 아랍연맹측은 다시 한번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기 위해 전력을 집중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결국 제2차 중동전쟁으로 비화된다.

5 여담

여담으로 이스라엘 독립전쟁 기간 동안 이스라엘군은 세계대전 종전으로 암시장에 엄청나게 흘러나온 독일제 무기로 무장하고 싸웠고 이이제이, 아랍 연합군은 영국군이 남기고 간 대량의 영국제 무기로 싸우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했다. 특히 이스라엘이 쓴 독일제 무기는 상당 부분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생산한 물량이었고, 독립 초기 이스라엘을 중동의 반서방 거점(다른 중동국가가 다 친영미 계열이던 시절이니)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소련이 체코에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공급을 지시했기 때문에 프라하 공항에서 한동안 이스라엘행 무기 수송기만 이륙하던 때도 있었다.

이스라엘군이 보유했던 메서슈미트도 실은 독일제 오리지널이 아니라 체코제인 아비아 S199였고,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우지 기관단총도 그 원형은 체코제의 Vz52 기관단총이다. 심지어 이스라엘은 체코가 보유하고 있던 Kar98K 소총 생산시설을 통채로 구입해서 Kar-98K를 생산, 한동안 제식 소총으로 사용했다.

이 과정과 제1차 중동전쟁을 전후해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의 무고한 민간인에 대한 학살도 존재 했으며,전쟁으로 인하여 팔레스타인 난민 75-100만여 명이 탄생했다.

6 매체에서의 등장

마이클 셰이본의 대체역사소설 유대인 경찰연합에서는 이스라엘이 이 전쟁에서 지는 바람에 아랍국가에게 멸망당한다. 흠좀무.
  1. 기존에 팔레스타인 인들이 차지하던 토지는 전체의 85%였음에도 불구하고 UN의 분할안에 의하면 45% 미만으로 떨어졌고, 그나마도 서부 해안지역은 상당부가 이스라엘에 포함되었다. 반면 유대인들은 이 지역이 자신들만의 국가가 아니라는 것과 예루살렘 인근 지역이 팔레스타인 거주 구역에 둘러싸여있다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국제 공동구역에 포함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도 양측 모두가 불만을 품었으며, 특히 이스라엘은 그러거나 말거나 예루살렘을 자신들의 수도로 건설해나갔다.